*** 황진이의 시조 ***
산(山)은 옛 산(山)이로되 물은 옛물 아니로다
주야(晝夜)로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人傑)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동짓(冬至)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오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청산(靑山)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는 님의 정(情)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變)할손가
녹수(綠水)도 청산(靑山)을 못잊어 우러 예어 가는고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어저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情)은 나도 몰라 하노라.
서경덕 徐敬德 (1489-1546)
조선 중기의 유학자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
본관 당성(唐城). 자 가구(可久). 호 화담(花潭)·복재(復齋). 시호 문강(文康).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의 아들. 화담은 그가 송도의 화담에 거주했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여 부른 것이다. 송도(松都:지금의 개성) 화정리(禾井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양반에 속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무반 계통의 하급관리를 지냈을 뿐, 남의 땅을 부쳐먹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18세에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 장에 이르러 "학문을 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여, 독서보다 격물이 우선임을 깨달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 이치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1519년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에 으뜸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화담에 서재를 지어 연구를 계속했다. 1522년 다시 속리산·지리산 등 명승지를 구경하고, 기행시 몇 편을 남겼다. 그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사화로 참화를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1531년 어머니의 명으로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1540년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고, 1544년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면서 성리학 연구에 전력했다.
조식(曺植)·성운(成運) 등 당대의 처사(處士) 들과 지리산 ·속리산 등을 유람하면서 교유하였으며, 학문경향은 궁리(窮理)와 격치(格致)를 중시하였으며, 선유의 학설을 널리 흡수하고 자신의 견해는 간략히 개진하였다. 또한 주돈이(周敦燎)·소옹(邵雍)·장재(張載) 등 북송(北宋) 성리학자의 학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단편 논저로는 <원리설(原理說)>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 네 편이 있는데, 이들 논저에는 ‘이(理)’보다는 ‘기(氣)’를 중시하는 주기철학의 입장이 정리되어 있다. <태허설>에서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태허 또는 선천(先天)이라 하고 태허에서 생성 발전된 만상(萬象)을 후천(後天)이라 하였으며, <귀신사생론>에서는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된다는 사생일여(死生一如)를 주장하여 기의 불멸성을 강조하고, 불교의 인간 생명이 적멸한다는 논리를 배격하였다. 대표적 문인으로는 허엽(許曄)·박순(朴淳)·민순(閔純)·박지화(朴枝華)·서기(徐起)·한백겸(韓百謙)·이지함(李之函) 등이 있으며, 그의 학문은 남북분당기에 북인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개성을 대표한 송도3절(松都三絶)로 지칭되기도 하며,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는 시조작품으로도 전해질 만큼 유명하다. 노장사상으로 대표되는 도가사상(道家思想)에도 관심을 보여 도가의 행적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그의 도가적인 성향이 소개되었다. 그의 학풍은 조선 전기의 사상계의 흐름이 주자성리학 일색만이 아니었던 분위기를 보여주며, 그의 문인들 중에서 양명학자나 노장사상에 경도된 인물이 나타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편, 북한에서는 그의 주기철학을 유물론의 원류로 평가하여 그의 철학을 높이 평가한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과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으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