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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4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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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사상 온전히 받들어 국정운영에 접목한 ‘경세가’
▲ 채체공의 초상(시복본) |
그리하여 우파는 순암 안정복으로 이어지고 좌파는 권철신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성호 자신이 제자를 양성할 때 우파니 좌파니 하는 구분 자체가 없었고, 안종복과 권철신 역시 그런 구분은 일체 없었다. 다만 서학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었을 뿐 이들의 실학정신은 차이가 없었다.
성호 이익에게 직접 학문을 배우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을 온전히 받들어 실제 행정에 접목한 경세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번암 채제공이다. 채제공이 있었기 때문에 성호의 사상과 정책이 실제 국정운영에 반영될 수 있었다.
채제공은 정조에게 측근 중에 측근이었고 어찌 보면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기둥같은 존재였다. 특히 정조의 정책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며 그의 개혁정책의 핵심 참모들이었던 이가환 정약용 등 남인의 관료들이 모두 채제공의 문하에 있던 인물들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 성호 이익을 기호남인 실학의 선구자이자 스승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호의 학통을 이어 현실의 정책에 반영한 체제공은 어떤 인물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체제공 성호가 어떻게 만났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남인은 숙종 갑술년(1694, 숙종 20) 이래로 폐고(廢錮)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문형은 권유(權愈) 이후로 없었고, 각신 출신의 대신은 채제공 이후로 없었다. 비록 한 조정에 있으면서도 좋은 벼슬자리는 노론ㆍ소론과 뚜렷이 층계가 있어 위아래가 현격히 달랐다.”
위 글은 한말 우국지사이자 역사가였던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에 나오는 글이다. 숙종 년간 이후부터 조선이 망하기 전까지 남인 중에는 채제공 외에는 정승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사실 이 말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숙종 년간 장희빈의 죽음 이후 남인은 조정에서 완전히 퇴출되었고 정승은커녕 과거 시험 합격하기도 힘들었다. 더구나 영조 년간 이인좌의 난에 영남 지역의 남인들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남인들의 과거 시험합격은 더더욱 어려워졌다.
이러한 현실이다보니 정승은 커녕 벼슬길에 오르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럼에도 정조시대 정승을 하였다니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인 것이다. 아무리 정조가 탕평책을 구사하였다 하더라도 특별한 능력이 없거나 정조의 개혁정치를 도우지 않았다면 절대 정승에 올라갈 수 없었을 것이다.
▲ 번암발신간찰 |
그래서 스스로 자신은 성호의 학통을 이은 인물이라고 규정하였다. 즉 퇴계 이황의 학맥을 한강 정구 선생이 이어받았고, 한강 정구의 학문은 미수 허목이, 미수 허목의 학문은 성호 이익이 이어받았고, 성호 이익의 학문은 자신이 이어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호 이익의 실학 사상을 현실에 적용시켜려고 채제공은 부던히 노력하였다. 그로 인하여 훗날 성호 선생이 돌아가시자 채제공이 그의 묘갈명을 쓰기도 하였다. 번암 채제공이 성호이 삶에 대한 간단 명료하게 정리하였다. 바로 ‘손상익하(損上益下)’라는 것이다. 손해는 윗 사람이 보고 이익은 아랫 사람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인 ‘노블리스 오블리제’ 즉 가진자들의 관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호는 지식으로서 철저히 관용의 정신과 실천을 하였고 그러한 모습을 채제공은 정확이 파악하고 따라 배우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 역시 죽는날까지 성호의 관용정신을 실천하는데 아낌이 없었다.
성호의 실학정신을 이은 그는 정조 즉위 이후 기존의 관료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채제공이 1778년(정조 2) 사은겸진주정사로 중국에 갈 때 박제가와 이덕무를 데리고 가서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북경의 거리를 보고 이용후생에 대한 적극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채제공은 종로의 시전에 간판을 걸어서 홍보를 하게 할 정도의 파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가게는 경상도 면포를 파는 집이요, 우리 가게 인삼은 강화도 것이요, 우리 가게 쌀은 여주 것이요’ 등 큰 글자로 간판을 만들면 장사가 훨씬 잘 된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 종로 상가체제를 개조할 생각을 가지는 등 근대적 사고를 한 것이다. 훗날 화성 건설 과정에서 상업 활성화에 대한 견해를 적극 피력하였던 것도 이러한 것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균역법의 폐단을 시정하고 포도청에서 억지 자백받는 것을 금지시키는 제안 등 백성들의 실제 삶에 대한 개혁안을 지속적으로 제시하였다.
영조가 사도세자가 죽은 이후 채제공을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여 세손인 정조에게 “유일한 나의 사심없는 신하요 너의 충신이다”라고 하며 “나도 잘못이 없고 세자도 잘못이 없었다. 오직 홍인한과 김상로가 죄인이다”라고 할 정도로 채제공을 신뢰하였고, 이 순간 이후 정조는 채제공과 함께 국정을 운영할 생각을 지니게 되었다.
▲ 번암집 목판본 |
2년 뒤인 1790년 1월에 좌의정으로 임명된 후 그해 7월에 노론의 영수인 김종수가 모친상을 당하자 독상(獨相)이 되었다. 위로 영의정도 공석이고 아래로 우의정도 공석이 된 것이다. 이는 조선 정치사에 극히 드문 일로 정조가 자신이 하고 싶은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운영이었다.
채제공이 성호의 실학정신을 이어 모든 사람들이 장사를 할 수 있는 신해통공을 추진하였다. 이는 조선 개국 이해 최고의 경제 평등정책 이었다. 신해란 바로 1791년을 이름이요, 통공이란 모든 공업이 통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공업이란 오늘날의 공업이 아닌 바로 상업 즉 장사를 이름이다. 1791년 이전까지 한양에서는 일반 백성들의 난전을 금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시전상인들만이 장사를 할 수 있었는데 이를 채제공의 건의에 의하여 무너뜨린 것이다. 채제공의 개혁입법이 백성들의 삶에 너무도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정조는 독상으로 있던 채제공을 1793년 1월 화성유수로 내려 보냈다. 이는 좌천이 아니라 정조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오랜 관료 경험을 바탕으로 신도시를 육성하는 기반을 조성하고 이듬해부터 있을 성곽 축조의 설계와 물품 준비 그리고 인력 준비를 그에게 맡긴 것이다.
5개월간 열심히 화성유수로서의 직책을 완수한 후 영의정으로 승진 발령을 받았다. 삼정승 중의 하나가 아닌 지정한 수상(首相)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이어 1794년 1월 정조는 화성 축성을 충실히 하기 위해 채제공을 화성성역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화성 축성을 총감독하였다.
정조와 채제공, 채제공과 화성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이었던 것이다. 그가 1799년 세상을 떠나자 정조는 기력을 잃고 이듬해 하늘에 있는 사도세자의 곁으로 가고 말았다. 채제공과의 질긴 인연이 살아서만이 아니라 죽어서도 이어지리라 생각된다.
정조가 채제공을 평가한 대목을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특별한 사이인지 알 수 있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백성을 걱정하는 한 생각뿐이었는데, 이제 채제공이 별세했다는 비보를 들으니, 진실로 그 사람이 어찌 여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내가 이 대신에 대해서는 실로 남은 알 수 없고 혼자만이 아는 깊은 계합이 있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그 품부받은 인격이 우뚝하게 기력(氣力)이 있어, 무슨 일을 만나면 주저없이 바로 담당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김산(홍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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