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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7. 8. 19.(토)
여름 한낮의 뙤약볕이 뜨거운 날 저기까지 걸어가는 길이 너무 뜨거워 잔디밭길 따라
그늘이 있는 곳으로 걷고 싶었던 주말의 한나절에 현충사를 찾았다.
정문을 들어서자 외국인 가족들이 먼저 보였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무척 힘들어 하는
부모들의 모습이었지만 아이들만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현충사의 여름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먼저 찾은 곳..
더군다나 온양역엔 5일장이 서는 장날이었다
현충사를 탐방하고 온양의 풍물시장을 방문하니 여행의 보람과 함께
추억도 남기고 슈퍼에서 그냥 물건을 집어들고 나서는것보다는 정이 흠씬 묻어나는
여행의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1706년(숙종 32년) 충청도 유생들이 숙종 임금께 상소하여 조정에서 이를 허락해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1707년 숙종임금께서 현충사(顯忠祠)란 액자를 하사하였다.
1868년(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현충사는 철폐되었으며,
1906년 을사늑약에 분노한 유림들이 현충사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일체치하에서 이충무공 묘소가 경매로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지경에 처하자 우리 민족 지사들이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사의 협력으로 민족성금을 모아 1932년 현충사를 중건하였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67년 본래의 1932년에 중건한 옛 사당 위편에 새로운 현충사를
준공하였고 이순신 장군 탄신일인 4월 28일을 기념하여 매년 정부주관으로 제전을 올리고 있다.
2011년 전시관과 교육관을 갖춘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전시관에는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에 관한 각종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교육관에서는 이순신 장군 정신과 위업선양을 위한 강의와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온양온천역에 도착,,
온양역 주변에는 5일장이 열리고 있다.
온양온천역에서 900, 910, 920번 버스를 이용하여 종점인 현충사 정류장에 하차한다
버스에 내려 현충사를 들어가는 도로..
입구에 들어서자 울창한 나무들이 서 있다
현충사 입구..
현충사는 2012년부터 무료개방되었으며 월요일은 휴관이다
시간을 잘 맞추어 가면 안내직원의 해설과 함께 멋진 투어를 경험할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허에 대해 잘 설명되어져 있다
현충사 정문을 지나 광장으로 들어서면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이 있다
광장 좌측에 현대식 건물이 이순신 기념관이다
교육관, 전시관, 사무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은
2005년 현충사종합정비 기본계획에 따라 2006년 기본설계, 2007년 실시설계를 거쳐 2008년에 착공하여
2011년 4월 28일 준공·개관하였다.
기념관은 충무공관련 유물과 임진왜란 당시 해전 사료를 수집하고, 이를 전시·교육하기 위한 역사 테마관이다.
연면적 3,104㎡(939평)에 지하 1층, 지상 1층의 철근콘크리트 구조이다.
기념관은 건축가 이종호씨가 설계한 작품으로 잔디를 입힌 언덕 모양의 두 건물(사무동과 교육관) 속에
흙벽을 입힌 전시동이 안겨있는 형상이다.
현충사 준경내 지역에 들어오면서 기존의 경관을 거슬리지 않게, 자연 지세를 최대한 살린 건물이다.
조선의 화포..
조선과 일본의 무기 전술...
표정들이 생동감이 있다
조선배 - 앞머리가 뭉툭하고 바닥이 비교적 평평한 것(평저선)이 특징 -배가 튼튼하고 전진속도는 느리나 회전속도는 빠르다고 함.
일본배 - 앞머리가 뾰족하고 바닥이 깊은 것(심저선)이 특징 - 전진 속도가 빠른 대신 회전속도가 느리다고 함.
넓은 바다에선 일본배가 유리하나, 섬이 많은 다도해 지방같은 내해에서는 조선배가 유리함.
거북선..
거북선은 무려 150여명이 탑승했다고 하니 그 규모의 웅장함이 느껴진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
임진왜란 당시의 내용들을 세세히 알 수 있는 자료들..
유물관에 전시된 주요 유물로는 『난중일기(亂中日記)』·서간첩(書簡帖)·임진장초(壬辰狀草),
장검(長劒)·옥로(玉鷺)·요대(腰帶)·도배(桃盃), 명조팔사품[明朝八賜品 : 都督印·令牌·鬼刀·斬刀·督戰旗·紅小令旗·藍小令旗·曲喇叺]·
교지(敎旨)·각종 무기·거북선 모형·유적 사진·해전도(海戰圖)·거북선도[龜船圖]·십경도병풍(十景圖屛風) 등이 있다.
그런데 이 유물관에 전시된 것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경상남도 통영시의 충렬사(忠烈祠)에 전시되어 있다.
임진왜란 주요 해전..(한산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
임진왜란 중의 활약..
충무공 장검 보물 제326호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선조와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문서에서 충무공을 평하면서..
지하 전시관의 모습..
다양한 나라에서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평가해 놓은 자료들이 있다
정조 어제 신도비 탁본..
4D 체험 영상실..
영화관에 들려 동영상을 찍는다
이순신 기념관을 구경하고 나오니 ..
현충사로 가는 첫번째 관문인 충무문이 나온다
현충사 탐방 기념 사진을 남긴다
감나무와 모과나무가 많았다
조금 걸어 올라가니 우측으로 정자가 보인다
이곳은 정려라는 곳인데 충신과 효자, 열녀에게 나라에서 직접 편액을 내렸다는 정려는
예로부터 마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워졌다고 한다.
현충사 정려에는 충무공 이순신과 조카 이완(李莞), 4대손 이홍무(李弘茂), 5대손 이봉상(李鳳祥)을 비롯한 충신,
8대손 효지 이제빈(李悌彬)까지 다섯분의 편액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정려 옆에는 커다란 느티나무와 연못 주변의 베롱나무에는 백일홍이 붉게 피어 있는 모습에
아름다운 여름 풍경을 담아 본다. 나무가 너무 높아 아쉽기도 하지만 여기저기 피어있는 백일홍에 잠시 매료되어 간다.
아산여행추천 현충사 경내를 천천히 걸으며 정원을 둘러보면 수목원 같은 느낌이 들곤한다.
군데군데 아름다운 백일홍이 피어있는 풍경과 잘 정비된 정원의 잔디가 눈을 시원하게 하고 있어서
무더위가 지나고 나면 산책하기에도 더 좋을 것 같았다.
종합안내도..
홍살문..
홍살문은 사당 경내를 표시하는 정문으로 1932년 중건 때의 자리에 있다.
좌측 방향엔 구 현충사가 있으나 통과한다..
아산 현충사 본당으로 오르는 계단..두번째 관문인 충의문이 보인다
본당으로 향하는 길은 마음이 정숙해진다.
현충사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현충사는 1706년 숙종 임금 때 건립되어 이순신 장군을 향한 추모의 향불이 끊이지 않았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어 그 자취가 사라져 버리고 유허비만 남게 되었다,
그후 일제 강점기때 ‘충무공묘소 위토 경매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국민이 거국적으로 모은 성금으로
1932년 현충사를 중건(重建)하게 되었다.
이후 1967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 지시로 순한국식 콘크리트 구조로 된 현재의 현충사로 세워졌고,
기존의 건물은 서편 참배로 옆으로 이전하여 ‘구 현충사’라 부른다.
현충사에 모셔져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은 월전 장우성 화백의 1953년도 작품으로 1973년에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영정을 그릴 때 친분이 있었던 유성룡(柳成龍)이 쓴 징비록(懲毖錄)이라는 책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용모에 관한 기록을 참고하였다.
내용은 “舜臣爲人 寡言笑 容貌雅飭 如修謹之士 而中有膽氣 忘身殉國 乃其素所蓄積也”
(순신의 사람된 품이 말과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이는 본래부터 수양해 온 소치라 하겠다) 이다.
건물 안쪽 벽에는 이순신 장군의 일생 중에 특기할 만한 사건 10가지를 묘사한 십경도(十景圖)라는 그림이 있다.
서울대 미대 정창섭, 문학진 교수의 작품이고 1970년 한국기자협회에서 기증하였다.
현충사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을 기념하여 매년 4월 28일 정부주관으로 제전을 올리고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을 한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
현충사에서 바라보는 풍경..
무궁화와 배롱나무..
백일동안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배롱나무..그래서 목백일홍이라고도 부른다
배롱나무..
베롱나무의 수피는 모과나무처럼 얼룩무늬가 있고 매끄러워서 일본 사람들은 원숭이가 미끄러지는 나무라고도 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관청의 뜰에 많이 심었는데, 이것은 나무가 주는 느낌이 안정감이 있기 때문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서당이나 절간에서 많이 볼 수 있었고. 요즘에는 가로수로도 많이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이 충무공이 살던 옛집 앞뜰에는 봄에는 홍매화가, 무더운 여름 8월에는
붉게 핀 백일홍으로 고택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충무정..
물맛이 시원하고 좋았다
충무정 안내문..
이순신 장군의 생가..
옛집..
이순신 장군이 무제에 급제하기 이전에 살았던 집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어릴때 살았던 고택의 모습이다.
옆으로 돌아오니 우물과 장독대가 있다
활터..
활터는 옛집 옆에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 곳으로 이순신이 활을 쏘며 무예를 닦던 곳이다.
활터옆 푸른 잔디위로 붉은 홍매화가 눈길을 사로 잡는다.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 쉼터..
커다란 은행나무가 무더운 여름에는 쉼터를 만들어 주고 있다.
우측으로 충무공 후손들의 무덤이 보인다
이면공 묘소가 보인다
장군의 셋째 아드님인 이면공의 묘소이다.
어질고 효성 깊은 성품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아드님인데..
이면공 묘소..
이면공 묘소로 올라간다
충무공 셋째아들 이면의 무덤..
충무공이 극진히 사랑했던 셋째아들 이면은 어려서부터 인물이 출중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명량해전 이후 아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을때 왜적들이 마을에 쳐 들어와 분탕질을 하자
나아가 왜적을 무찔려다 약관 21세로 장렬히 전사하였다.
후에 1796년(정조20년) 조정에서 이조참의를 증직하였다.
현충사를 찾으면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무는 곳이 이면공묘소부터 연못까지의 길이다.
특별한 전시물이나 장소는 없어도 우거진 나무숲과 잔디밭이 참 아름다운 길이 그곳에 있다
버섯..
단풍 들고 낙엽 떨어지는 가을이 아니어도
신록이 깊은 요즘에 찾아도 참 아름다운 길이다.
두개의 과녁이 놓인 잔디밭과 깊은 숲속에 들어 온듯한 느낌을 준다.
필드에 온 것처럼 잔디가 넘 아름답다..
현충사하면 떠오르는 잉어들의 천국.연못이다.
수양버들 길게 늘어진 연못가의 풍경이 눈에 쏙 들어 온다.
맘에 드는 풍경 하나 간직한다.
연못..
이 연못속에는 5,000여종의 생물체가 시식중 이라고 한다
잉어가 엄청 많았다
돌다리쪽의 산책로...
넘 아름다운 능소화나무..
장군의 후계가문에서 배출된 효자와 충신들을 기리는 정려로 되돌아 왔다
모과나무와 능소화나무를 함께 심어 놓았다
이제 현충사 경내를 떠날 시간이다. 다시 한번 발걸음 닿았던 길을 돌아 본다.
고목나무가 멋스러워 보인다. 이제 다시 햇살 속으로 나간다.
한여름의 열기어린 햇살은 아닌지라 한가로이 산책 삼아 현충사 일대를 걸어볼 만한 날이었다.
너무나 유명한 현충사...
오늘처럼 거북이 걸음으로 찬찬하게 배우며 걸으며 둘러 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현충사를 빠져 나오니 식당과 휴게실이 있는 곳에 이순신 장군의 글귀가 세겨진 비석이 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이순신 장군의 멋진 명언..
'살려고 하면 죽을것이요 죽으려 하면 살것이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는 충신의 각오를 토로한 말로 가장 잘 알려진 명언이다
쉼터공간..
하루의 피곤함으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온양온천 장날의 모습...
오늘은 온양온천의 장날이다. 5일장이다. 온양온천의 장날은 뒷 번호가 4일 9일이 되는 날이다
4일, 9일, 14일, 19일, 24일, 29일이 되는 날이다
어느 고장이나 그렇듯이 장날에는 볼거리, 먹을거리가 풍성해 진다.
그래서 장터구경을 해본다
난 가끔 사람들이 그리울때나 웬지 삶의 회의를 느낄때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을
다니는걸 좋아한다. 왠지 사람냄새가 나고 살아가는 활력소가 되기도 하는 시장의 시끄러움이 그저 좋아서이다.
온양역에도 5일장이 서는데 4일과 9일 이렇게 장이 선다고 한다.
장날만 되면 어디서오는지 온양역 주위는 장이 서고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하며 북적댄다.
온양역에은 5일장만 되면 활기차고, 사람들의 얼굴엔 다들 생기있어보이고, 여기 저기 흥정하며,
물건을 파는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들리며 여기저기 웃음과 가벼운 걸음걸이엔 물건들을 사들고 오가는 모습에
사뭇 흥미롭기까지 한다. 풍물장에는 나물들과 상큼한 딸기, 먹거리가 풍부하다.
갖가지 싱싱함으로 무장하고 직접재배하고 키운야채와 꽃과 나무를 파는 곳과, 새들과 동물....
정말이지 없는게 없다. 그래서인지 장날은 볼거리가 많아서 너도 나도 기다려지는것 같다.
첫댓글 예전 회사 감사실 근무시절에..
경상도, 전라도 지역의 지점 감사를 끝내고 귀경할때는 꼭 들리는곳..
오랜만에 탕방한 '현충사'이었다..충무공 이순신장군..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존망에 처했을때
바다를 제패하여 전란의 역사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륙한 명장..온갖 모함과 박해의 역경속에서도
그의 우국지성과 고결 염직한 인격은 우리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오늘에 우리가 처한 환경을 바라보면서..문득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