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늙은이들이 프렌차이즈화 된 카페를 보며 혀를 끌끌 차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때는 그래도 돌다방, 역전 앞 다방, 탑골 다방 등 나름 개성들 있는 다방에서 우리'만'의 추억을 쌓아갔는데 요즘 애들은 그런것도 '향유' 못하고 불쌍하다라는 것이다. 웃기는 소리이다. 요즘애들은 자기들만의, 자기 또래들만의 나름의 장소에서 나름의 추억을 쌓아가고 의미체를 건설해 나간다. 우리는 그들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만의 기준에 맞춰서 우리의 추억으로 그들의 추억을 쉽게 재단하려 한다.
커피의 취향문제도 그렇다. 오히려 한 회사 독점적인 병에 든 인스턴트 다방 커피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기껏해야 둘둘셋(223),하나하나둘(112), 등 설탕, 프리마 숫자 장난에 불과했다. 그 원료 자체는 인스턴트 가루커피로 전국 어디서든 동일한 시대였다. 취향이라고 해봐야 취향인척 하며 옵션 자체의 가능성 자체가 차단된 그것을 보지 못했다.
지금은 커피 시장이 발달하며 프렌차이즈 뿐만이 아니라, 원두의 종류, 원두 자체의 로스팅 방법,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원두 선별과 로스팅, 내리는 방법 조차 개개인이 관여하며 조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확장된 시대이다. 우리 시대야 어디가나 다방커피 한 종류에 기껏해야 쌍화차겠지만, 지금 젊은이들은 프렌차이즈화 된 곳에서도 나름의 커피 취향을 길러가고 만들어 가는 시대이다. 꼭 프렌차이즈화를 부정적으로만, 기승전 자본으로만 비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어렸을 적 뒷골목 어느 쥐좇만한 점빵 어느 구석 가판대위에서 본 졸라 오래된 치약상자 위에 뿌옇게 쌓인 먼지를 보며 우리가 그때 무엇을 느끼거나, 재미를 발견하거나, 상상했던 가치나, 올해 8살짜리 인희가 말끔하게 정돈된 GS 25 편의점 전시대 위에서 LED 조명에 의해 반사되는 깔끔한 치약상자를 보며 꿈꾸는 상상의 가치나, 재미 또는 느낌에는 기본적으로 우열이 없는 것이다.
먼지 수북히 쌓인 점빵들이 있던 우리 시대가 그리 행복했던 것도, 상상력을 키워주는 것도, 자유도를 증가시킨 것도 전혀 아니며,
인희가 접하는 GS25, 세븐 일레븐 등이 상상력을 억제하거나 그들의 자유도를 억압시키는 것도 전혀 아니다.
인희는 인희만의 재미를 새로운 세계에서 열심히 발견해 나가는 중이며, 그 속에서 자기만의 의미성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럼 그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사회 시스템, 구조가 문제인가? 편의점이 자본주의 문명의 끝판왕으로 프렌차이즈 된 본사 자본가 새퀴가 다 쳐 먹고, 주인장이 건물주한테 빨리고, 그 손해 보존하고자 또 자기보다 약자인 시급 알바생들 목에 빨대 꽂아 피 빠는 구조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때도 본사에 삥뜯기고 더군다나 물건 관리도 제대로 안되며 중간 유통사에 삥뜯기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맨날 깡소주 술 처먹고 여편내 졸 두드려 패던 그 점빵 주인장에 의해 착취당하고, 애새키들 밥해주고 찬물만 나오는 수돗물에 손시려워 하며 빨래하고 가정일 압사당하던 그 아주매미가 지금 편의점 알바보다 삶의 질이 훨씬 높았다고 그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다 시발 지금 등따신 우리의 애매한 낭만주의가 투사한 고대, 과거 우상적 회상, 숭상류의 뽕빨에 지나지 않는다. 개개인 인간의 상상력의 가치, 의미체의 발견 그것은 절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자본주의 시스템'라는 이름으로 평가절하 되거나 가치 비교되거나 한정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 아고라에서 썰 풀며 노예새퀴들 삥뜯는 시대나 지금 21세기 프렌차이즈 본사가 지점노예새퀴들 삥뜯는 시대나 어느게 더 기울어진 운동장일까? 그리스 아고라에서 주둥이로만 먹고 살던 새퀴들에게 피빨리던 노예새퀴들이 지금보다 안 기울어진 운동장에 살았다고 그대는 장담할 수 있는가?
에덴동산에서 쳐 기어나왔을 때부터 우리가 단군 이래 언제 단 한번이라도 안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산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는가? 다 시발 자본가에 착취당한 새퀴들의 꿈꾸는 이상향을 없었던 과거에 투영하고 세뇌하고 양념 MSG 이빠이 쳐서 장미빛 미래적 전망으로 제시하는 거지. 자본가나 유사 공산주의 민중 팔아먹어 중생들 홀린 색퀴들이나 그런점에서는 다 동급이라고 본다. 자본도구로 피빠는 거나 중생들 우매한 기대감 팔아 피 빠는 거나 양상적으로 보면 결국 동급 아니던가?
우리 어렸을 때, 아버지 세대들은 공장장과 국가에 더 피빨렸고, 엄마들은 지금보다 가정노동과 아버지에게 더 피 빨리는 사회구조였을 수 있다. 현재와 비교된 과거는 언제나 특정 목적에 의해 낭만적으로 취사선택 될 뿐이다. 만약 1천년 전 살았던 중세 인간들이 우리를 보면 졸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허덕이는 우리를 비난할 가능성이 크다. 근데 지금 우리가 보면 그들이 더 기울어진 운동장일 수 있다. 과연 중세인이 더 기울어진 운동장에 사느냐? 지금의 우리냐? 그것을 함부로 판단하기는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B.C 500년 지금으로부터 2500년전에도 <시경>, <서경>에서 요즘 사회 졸라 타락했고 애새키들도 흘러서 타락했고, 국가 시스템 개판이고 옛날이 그나마 좋았다는 꼰대 할애비들 소리를 그때도 정확하게 문헌에 적혀있다.
그 구조 자체가 더 악화되고 있다는 것도 진정한 반성이 필요한 영역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는가? 잃은 것에만 너무 촛점을 맞추지 말고 교환가치로 무엇을 얻었는지도 진지한 관심과 가치평가가 필요하다.
기울어진 운동장? 이미 그때가 더 기울어진 운동장일 수 있다. 나는 내가 밀양 남천강 물에서 중 3까지 수영하던 그 시대를 절대 찬양화하거나 미화시키지 않는다. 졸라 지루했을 뿐이었다. 시골이란 애초부터 졸라 지루한 곳이다. 그 지루함이 자유도를 무한 증강시키지는 않는다. 그 지루함은 때로는 한없는 무력감을 촉발시킨다. 주위를 둘러봐야 물, 불, 공기, 흙 4원소 밖에 없고 기껏 있어봐야 목공예 가공품이 다이다. 졸라 인간의 가능성을 억제하고, 상상력을 비루하게 만드는 곳이다. 내가 밀양-부산 간 기찻간 차창 밖에서 처음 목격한 빽빽한 도심의 풍경,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철, 쇠, 스테인리스, 유리창, 장난감 등등의 재료적 다양성과 무한한 건물의 모양과 기능, 물건들에 깃들여진 인간의 상상력의 가능성에 찬탄을 이루지 못했다.
황순원의 <소나기> 소년이 왜 그 도시에서 온 여자아이를 보고 뻑 맛이 갔는지 아는가? 그 아이의 언어, 몸짓, 의복, 사유 모든게 그 소년의 우주에는 없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의상철학'이라고 아는가? 그 소녀의 생체적 신체만이 그를 매혹시킨게 아니었다. 그녀가 입고있던 새하얀 원피스, 그 원피스의 재질과 소재, 색감은 시골에서는 볼 수 없는 테크놀로지의 산물이었고 그녀를 둘러싼 아우라를 형성하는데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 서울 소녀를 보지 못했다면 그 소년은 영원히 냇가 가재만 잡다가 시내 순이를 만나 나무만 매다가 뒈졌겠지. 그게 더 행복한 삶인가? Nope! 그 소녀는 평생 도시에서 살다가 가재같이 등이 굽은 소년을 보고, 새로운 우주를 만나고 새로운 사랑을 싹틔우다 죽어버렸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 다른 우주였다. 테크놀로지 없는 인간은 졸라 무식할 뿐이고, 졸라 외소해질 뿐이고 졸라 한계를 스스로 특정 구역안에 가둬놓는 꼴이다. 온종일 먹잇감 사냥하다 먹다가 뒈져버린 아프리카 루시보다는 먹잇감, 빨래 시간 좀 더 아껴서 책, 영화, 사교활동 등등 인간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좀 더 즐기는게 행복한 삶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왠종일 자연에서 처먹는거 구하느라 진빼다 나무나 벼랑에서 낙상사로 뒈지는 삶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 테크놀로지는 분명 인간의 삶을 고야시켜주는 면이 있고 품격을 증가시켜주는 면이 있다.
시골에 기껏해야 인구 천명당 한명 있는 이쁜 여자애, 그 여자애 한명이 줄 수 있는 상상력의 가능성은 졸라 광대한 것 같지만 매우 협소하다. 뉴 페이스 조차 드문 그곳에서, 1년에 단 두번 명절 날 볼 수 있는 새하얀 얼굴들, 그 한계의 답답함 아는가? 고려시대 탑돌이 하다 눈맞아 수풀속에서 즐섹하는 그게 인간의 가능태이다. 아무도 모르게. 쥐불놀이고 뭐고 다 졸라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이벤트들이며 그 때를 맞아 술을 열라 처먹고 뭔짓을 하던 잠시 이탈이 허여되는 시대이다. 그만큼 인간의 상상력과 가능성은 무한한데, 인간을 너무 문돌이적 가능성, 문학의 가능성안으로만 금을 긋고 집어넣어려는 것이 '자연주의'를 찬미하는 졸라 한심하고 모험을 두려워하는 'Comfort zone'에만 머무려는 소위 문돌이 문학사들의 한계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같은 상상력은 동아시아 날고 긴다는 최고 탑 티어 지성인 문돌이들 5만명을 갈아넣어도 나올 수 없는 상상력이다. 왜냐? 성리학 프레임 자체의 한계이고 고루성이고 인간의 테크놀로지 과학성의 가능성을 억압하는 구조였고 타부화시키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천지인? 개뿔. 자연은 제대로 이용해야 한다. 물, 불, 공기, 바람의 천연 자연물속에 유유자적 하기에는 인간의 가능성은 너무나도 엄청나기 때문이다.
엘런 머스크는 스페이스 X 프로그램을 통해 인간을 곧 화성에 쏘아올린다. 우리는 미지의 땅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