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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성찬례 16(하느님의 어린양)/이사53:2-10,요한1:29-34/천주의어린양D곡,239,461
하느님의 어린양
이제 성찬의 기도가 끝나면 사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높이 들어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거양합니다. 그리고 사제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거룩한 성체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하나 되어 온갖 영예와 영광을 영원토록 받으시나이다.”
공동체가 이 노래를 바침으로 예수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심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나에게 주신 말씀을 이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참으로 깨달았으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요한17:8)
그렇습니다. 공동체는 하느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과 영예를 받으시는 분이심을 확신했습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때문에 성공회 신학자들은 공동체와 함께 이 진리를 고백하는 이 시간이야 말로 전례 중예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아멘”할 때 비로소 거룩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주님을 찬양한 후 공동체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바칩니다. 우리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바침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축성기도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성체를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마저 우리를 위해 거룩한 제물로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할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17:19)
이제 공동체는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찬양하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내 자신도 주님을 위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내 자신을 바쳐야 합니다. 때문에 하느님의 찬양하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 영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제물이 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제는 내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겠다는 공동체의 고백이 바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자신을 바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맡겨주신 양떼들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바침으로 우리는 주님께 우리에게 맡겨주신 양떼들을 돌보는 일을 잘 감당해 나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는 기도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통 하느님과 하나가 되리라는 다짐이 담긴 기도가 바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바치는 이유는 우리의 삶속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내 자신을 바쳐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다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앵무새처럼 의미 없이 되새기는 기도가 아니라 내 자신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바치겠다는 다짐을 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끝나면 사제는 비로소 모든 공동체들이 보는 앞에서 성체를 들어 쪼갭니다.
“우리는 이 빵을 떼어 주님의 성체를 나눕니다.”
쪼개지는 순간 이제 이 빵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서 우리에게 주신 나의 양식이 됩니다. 이 순간부터 성체는 나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체를 영함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고, 성체를 영한 모든 공동체와 하나가 됩니다. 이 하나 됨은 강동교회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교회들과 하나가 되는 순간입니다.
때문에 온 회중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룹니다.”
이것은 이렇게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빵을 나누며 하나가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이 선언이 끝나면 사제는 모든 공동체를 대신 해서 또 다른 빵을 쪼갭니다. 그리고 그 쪼갠 조각을 포도주 속에 넣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을 대신 해서 사제가 대신 하는 행위입니다.
“나를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신 것처럼 이제는 내 살과 피를 주님을 위해, 그리고 나에게 맡겨주신 양떼를 위해 바치겠습니다.”라고 고백을 담은 행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내 생명을 바치고, 내 삶을 바친다고 해도 우리를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영광만이 드러나야 합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바울로의 고백처럼 “저는 빚쟁이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때 공동체는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라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확신에 찬 노래입니다. 우리에게 주실 축복, 우리가 누릴 아버지의 영광이 무엇인지 확신하는 노래입니다. 여러분은 이 때 포도주를 연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향기로 맛, 향기로운 냄새, 그리고 그 신비로운 빛깔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우리에게 내리시는 축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체를 통해 우리에게 주실 은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이 신비를 경험합니다.
우선 단맛입니다.
마리아는 아기를 통해 우리가 누릴 축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4:18)
윤복희가 부른 여러분이란 노래를 들어보셨습니까? 사실 이 노래에 담긴 깊은 사연을 잘 모를 것입니다. 저는 이 노래에 대한 사연을 보고 정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왔습니다.
이 노래는 오빠 윤향기가 작사 작곡한 노래입니다. 그 당시 윤복희는 이혼과 인기 추락으로 인해 파탄을 맞이했습니다. 이 충격으로 폐인이 되어버린 동생을 바라보면서 윤향기는 기도합니다. 하느님, 제 동생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런데 이사야 41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 내가 도와준다. 정의의 오른 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이사41:10)
그는 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사를 써내려갑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께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그리고 피아노 앞에서 곡을 붙이고 흥얼거립니다. 그런데 방안에서 폐인이 되어 누워있던 윤복희씨가 듣고 방에서 나온 겁니다. 오빠는 놀랐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리고 동생은 오빠의 피아노 반주에 노래를 시작합니다.
윤향기는 말합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팬들이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했습니다. 괴로울 때 위로해주고, 험한 길을 함께 가 주실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하느님이라고 표현할 수 없어 “여러분”이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윤복희와 윤향기 남매의 쓴물, 인생의 쓴물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시는 어린양이셨던 것입니다.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복되어라, 딱하고 가난한 사람 알아주는 이여, 불행한 날에 야훼께서 그를 구해주시리라.”(시편41:1)
그분은 내 인생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실 어린양이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향기입니다.
이 향기를 맡아본 사람은 압니다. 꽃향기처럼 감미롭습니다. 이 향기는 벌과 나비를 불러들인 향기요, 열매를 맺게 하는 향기입니다. 그리고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향기입니다. 이처럼 어린양은 우리의 모습을 향기롭게 해줍니다. 우리의 삶을 향기롭게 해줍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향기로운 사람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을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창세12:2-3)
하느님은 우리의 삶을 나만의 축복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고, 덕을 주는 삶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도 이 덕을 입게 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향기입니까?
시편19편은 어린양을 통해 퍼진 향기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야훼의 법은 이지러짐이 없어 사람에게 생기를 돌려주고
야훼의 법도는 변함이 없어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준다.
야훼의 분부는 그릇됨이 없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야훼의 계명은 맑아서 사람의 눈을 밝혀준다.
야훼의 말씀은 순수하여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고
야훼의 법령은 참되어 옳지 않은 것이 없다.
금보다, 순금덩이보다 더 좋고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욱 달다.”
그 다음으로 그 보혈의 빛깔을 봅니다.
이 보혈로 씻기지 않을 죄가 없고, 이 보혈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힘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출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풍성한 은총으로 우리에게 온갖 지혜와 총명을 넘치도록 주셔서 당신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에페1:7-8)
여러분은 이 성체를 영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누릴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지 알아야 합니다.
바울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 알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여러분에게 알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어린양”에 대한 찬양은 성령으로 하나 된 공동체 모두가 성체를 통해 우리가 누릴 축복이 무엇인지, 우리가 받을 은총에 대한 확신이자, 감사와 영광의 찬양입니다.
사제는 주님이 쪼개지시고, 그리고 내 자신이 쪼개진 성체를 들고 마지막 주님의 계명은 선언합니다. 예전에는 성반에 담아서 들었지만 요즘은 쪼개신 성체를 모든 사람들 앞에 보임으로 그 고백을 더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여기 계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우리는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았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에 보답하고자 내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칠 것을 고백합니다. 정말 복된 일입니다. 때문에 공동체는 주님의 쪼개지심으로 우리가 누리게 될 축복과 내가 쪼개짐으로 하느님께 드릴 영광을 기억하며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을 내 안에 모시기를 감당치 못하오니,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우리는 주님, 이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요한6:53) 그리고 이 빵과 살을 먹고 마심으로 주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살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아버지의 힘으로 사신 것처럼 우리도 이 빵과 살을 먹고 마심으로 주님의 힘으로 살 것임을 확신하며 이제 성체를 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 많은 나는 감이 히 성체를 영할 자격이 없지만,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 성체를 영할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이제 성체를 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 몸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