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비 게엣 에스 디어? 이것은 우리가 늘 하는 인사이다. 우리는 그러한 인사를 그야말로 인사치례로 하는 것이지 심각하게 묻지도 심각하게 대답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독일어가 짧으니 웬만큼 아파도 “굿”이라고 하고 “알레스 인 오두눙”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시 진지하게 물으면 지나온 한 주간을 어떻게 지냈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아마 셋 중의 하나일 것이다. 좋았으면 "굿"이고 나빴으면 "슐레스트"이고 그저 그랬으면 "나야"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그런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짜여져 있다. 굿샤인도 있다. 하지만 슐레스트샤인도 있다. 그리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나야샤인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나온 주간에 그렇게 살았지만 앞으로도 그런 삶이 계속 될 것이다. 좋은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고 그저 밋밋하게 살아갈 수도 있다. 마치 날씨와 같이 청명한 날도 있고 바람불고 구름이 잔뜩 끼고 비 오는 날도 있고 강추위가 오는 날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날씨의 변화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되듯이 우리 삶의 일들로 그렇게 변덕스럽게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은 오직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다. 그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II. 가장 기본적이고 초보적인 감사는 어떠한 감사일까? 우리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는 감사일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감사이다. 주어진 것이 많고 좋은 일이 생기는데 감사하는 당연한 감사이다.
저는 참으로 감사할 것이 많은 사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할 것이 너무 많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촌놈이 독일까지 왔으니 얼마나 출세한 일인가! 고향이 점촌이다. 그리고 독일은 물론 말로만 듣던 스위스를 가보고 프랑스도 가보고 이태리도 가보았으니 말이다. 또한 이러한 촌사람이 대전도시사람인 아내를 만났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방실이 같은 두 딸을 얻고 이곳에서 두 딸은 최고의 교육을 받고 있지 않는가? 한국에 있는 애들 고모에게 설주 혜주를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등을 가르쳐주고 있는 선생님이 모두 박사들이고 최고의 공부를 하고 활동하는 분들이라고 말하면 “어머 어머”하고 무척 부러워한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말도 안 한다. 왜냐하면 시기할 것 같아서...
또한 늘 예배 때마다 멋지고 아름다운 형제자매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를 달리고 있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신앙을 함께 한다는 것은 행복한 것 아닌가! 언제나 찬양 속에서 함께 사니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그런데 만일 이런 것에만 감사한다면 저의 감사는 대단히 초보적인 것일 것이다. 감사할 제목이 있어서 감사하기 때문이다. 하기는 오늘날에는 감사할 일이 있어도 감사할지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도 많다. 은혜를 모르고 사는 사람도 많이 있다. 내가 당연히 그러한 대접을 받을 위치에 있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감사에 무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만하여 감사할 줄 모른다. 그러니 요즈음 같아서는 감사할 일에 감사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리라. 모든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감사의 교육을 시킨다. 무엇을 받게 되거나 대접을 받으면 꼭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게 한다. 이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감사가 감사할 내용이 있어야 감사하는 수준이라면 감사할 내용이 없으면 안 하겠다는 것일 수 있다. 아이와 같이 유치한 초보적인 감사여서는 안 된다. 감사가 이벤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약발이 떨어지면 감사 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감사에 지나치게 우리를 의존하면 감사하지 못할 경우도 생기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할 제목이 있어야 감사하는 이벤트성 감사는 또 그러한 감사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을 쳐야 한다. 감사를 위해 뭔가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벤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 건강을 주신 하나님을 뼈저리게 느끼고 싶은가? 저는 그것을 원치 않는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위암에 걸리든 대장암에 걸려봐라.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나아봐라. 그때 그러한 감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물질적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뼈저리게 느끼고 싶은가? 그러면 물질적인 곤궁에 처하라.
III. 우리의 감사는 감사제목이 있어 감사하는 이벤트 감사의 수준을 뛰어 넘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수준에서 머물러 있는가? 우리의 감사는 “굿”일 때만 하는 감사가 아니요 “나야”의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아무 일도 아닌 것에도 감사가 입에서 터져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정말 잘 잤다” 떨어진 낙엽을 보고도 아름다움을 느껴야 한다. 옆에 있는 형제자매의 존재만을 가지고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감사하기 위해 큰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별거 아닌 일에도 감사해야 한다. 큰일이 아닌 평범한 것에도 감사가 나와야 한다.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이벤트감사가 아니라, 감사의 생활화이다. 우리는 작은 일에 감사하자!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 조그마한 것들이 정말로 사소하고 작은 일인가? 저는 언제나 사소한 일이 진정 큰일로 믿는다.
큰일은 정말 큰일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큰일이 무엇인가? 나의 모든 것을 투자한 사업이요, 직장이요, 합격이요, 이름을 날리고 세상에서 뜨는 것이다. 기도제목을 내라고 하면 다 나온다. 보통 그런 일들이다. 그것이 나의 관심사이고 지금 내게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나의 큰 기도제목들이다. 그러한 것들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절망이요, 슬픔이요, 좌절이며 도무지 감사가 나오지 않는다. 큰일 난 것이니까. 그러나 그것들은 큰 것이 아니다. 직장 안됐다고 금방 죽냐? 이름 못 날렸다고 감옥 가냐? 합격 안 되었다고 인생이 끝나는가? 직장 안된 사람, 유명하지 못한 사람 합격 안된 사람... 우리가 보통 큰일이라고 하는 일들이 안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은 큰 일이 아니다.
만일 누가 메트로폴리탄무대에 서야하는 결정이 있다면 그것은 대단히 중요할 것이다. 그것은 큰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 중에 누가 메트로폴리탄에 못서서 지금 좌절하고 인생이 꺼질 것처럼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러나 정말 큰 것이 어떠한 것인지 아는가? 정말 큰 것은 내가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갑자기 어느 날 일어났는데 눈이 떠지지 않아봐라. 그것이 큰일 아닌가! 우리는 눈을 뜨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갑자기 근육에 이상이 생겨봐라. 말을 하려는데 말이 안 나와 봐라. 숨을 쉰다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은 것은 죽은 것이다. 숨이 노래를 하는 사람이나 악기를 하는 사람에게도 얼마나 중요한가? 쉽게 생각한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우리의 아이들이 커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커 가는 것을 보면 너무나 신기하지 않는가? 아이가 때 되면 걷는 것이 사소한 일이 아니라, 큰일이다. 아이들이 때 되면 말도 잘하는 것이 큰일이다. 그것이 작은 일인가? 걸어야 할 아이가 걷지 못하면 그거야 말로 큰일이다. 말할 아이가 말하지 못한다면 그거야 말로 큰일이다. 숫자를 세어야 할 나이에 숫자를 세지 못하면 그거야 말로 큰일이다. 사실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사소하고 무엇이 큰일인지 정의가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사소한 것에서 더 진하게 느낀다. 솔로몬을 보라. 그는 돈이 많아 행복하다고 하지 않았다. 지혜가 많아 행복하다고 하지 않았다. 권력이 있어 행복하다고 하지 않았다. 그의 행복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 속에서 먹고 마시며 수고 중에 낙을 누리는 삶 자체를 행복으로 보았다. 우리는 행복을 쫓기 위해 위대한 것을 계획할 필요가 없다. 돈이 많아야 행복한 것이 아니다. 권력을 누려야 행복한 것은 아니다. 나의 명예가 높아져야 행복한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쟁취해야 행복을 잡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삶 속에서 행복이 느껴져야 되지 않겠는가! 행복은 저편 어디에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잡으려 해서는 안 되고 지금 나의 삶 속에서 찾아내어 즐기고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예)몇 년전에 머큐리 호텔 앞에 Lust auf Buffet? 라고 씌여 있었다. 요즈음은 그런 앙게보트가 없는 것 같은데... 금요일저녁마다 있는데 pro person에 17유로라던가? 저는 언제나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천만에 말씀이라고 외쳤다. Nein, habe ich kein Lust auf Buffet! 진짜 맛있게 먹어본 경험을 말하라면, 가족들이 김장하면서 함께 먹었던 그 김치가 최고이다. 아니 어쩌면 밤에 라면 하나를 계란 놓고 끊여먹었던 기억일 것이다.
예)아이들이 베를린에 가면 가장 좋아하고 감격해 하는 곳이 어디인줄 아는가? 박물관도 아니고 쇼핑몰도 아니다. 그들은 삼일 상사를 가장 좋아한다. 그들은 베를린을 갈 때면 삼일상사를 연호한다. 삼일상사 삼일상사... 왜냐하면 그들이 좋아하는 뿌셔뿌셔와 풍선검이 있고 치토스가 있기 때문이다.
평범함 속에 우리의 행복이 있으니 어찌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복은 큰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작은 일에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것을 먹으라. 그것을 즐기라. 이렇게 조그마한 일들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감사가 오래 갈 수 있다. 이벤트성 감사는 언제나 이벤트가 마련되어야 한다. 감사하기 위해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감사는 년 중 행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평범하고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조그마한 일에 감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감사가 차고 넘친다. 감사가 끊이질 않는다. 그러한 행복의 근원을 아는 사람은 그저 하루 하루가 기쁠 뿐이며 벙글벙글 웃을 수 밖에 없을 뿐이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왜 그리 형제는 기분이 좋습니까 혹은 왜 그리 자매는 기분이 좋지요라고 묻는다면 오늘 날씨가 좋아서요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왜 그리 기분이 좋지요?라고 물으면 별일이 없어서요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별일이 있으면 얼마나 신경 쓰이겠는가?
IV. 나아가 끝으로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감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감사이다. 더욱 성숙한 감사이다. 빛이 나는 감사가 된다. 어려움과 시련을 즐기라는 것이 아니다. 새디스트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자학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하라는 것이다.
분명 우리의 상황과 형편이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있다. 주님! 시험에 떨어졌는데 무슨 감사를 하나요? 주님 일이 꼬이고 계획이 다 뒤틀렸는데 무슨 감사를 하나요? 주님 경제사정이 나빠졌는데 무슨 감사를 하나요? 주님 몸이 아픈데 무슨 감사를 하나요? 주님 답이 보이지 않는데 무슨 감사를 하나요? 주님 열받는 일만 생기는데 무슨 감사를 하란 말입니까?
그렇다! 이러한 일들은 사실, 감사할 만한 일이 아니다. 기쁜 일이 아니다. 즐거운 일이 물론 아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은 그런 일을 좋아하란 말이 아니라, 그러한 일들 속에 있어도 감사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예)왜 하박국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었는가? 여호와를 인해서이다.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서이다. 비록 슬픔과 고통과 의문과 불평을 할 수 밖에 없는 시기 속에서도 하박국은 여호와로 인해서 즐거워하고 감사할 수 있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있을 때에도 그들은 감사했고 기뻐했다. 왜 그랬는가? 그들은 감옥에 있는 것은 고통이고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착고 되어 있었으니 자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가운데에서도 주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었고 찬양할 수 있었다. 이미 기쁨이 그들 안에 충만했기에 그들은 시련 속에서도 슬퍼하거나 억울해 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다.
독일의 겨울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 눈이 오는 겨울을 생각하고 아름다운 라이프찌히를 즐길 준비를 하라. 이 멋진 겨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결코 독일의 겨울은 우울하고 두통이 생기게 하고 기압이 낮아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아주 어려운 시기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안식의 계절을 생각하라. 커피샾에서 눈이 오는 길을 바라보면서 마시는 카푸치노를 생각해보라. 게반트하우스에서 오케스트라를 듣고 나오는 밤 11시 하늘에는 펑펑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고 조명을 받은 눈은 연이어 내리고 있었다. 옆에는 아내가 있고... 저는 6년전에 보았던 그 겨울을 기대한다.
감사는 외부의 환경에 달려 있어서는 안 되고 감사는 내부에 이미 존재해야 한다. 감사할 조건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서 감사하는 사람은 날씨에 따라서 마음이 변화하는 사람과 같다. 맑으면 기분이 좋고 흐리면 마음까지 흐리고... 하지만 주님은 감사를 우리 마음에 심어 주었다. 감사할 제목이 있으면 감사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일에 있어 무엇이 있든지 간에 일단 감사하라고 하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마음에 감사의 그릇으로 준비한 자는 감사할 수 있다. 범사는 좋은 일도 있고 그저 밋밋한 일도 있고 심지어 원치 않게 고통과 시련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에 상관없이 감사하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감사거리와 불평거리는 우리의 해석이요 판단이다. 우리는 미련하고 우둔하여 감사할 거리를 불평으로 삼는 경우도 허다하다. 우리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 받아질 수 있다. 사실, 감사와 불평은 백지장 차이이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감사와 불평은 언제나 같이 다닌다. 불평을 감사로 만드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가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감사할 것이 있어서라기 보다 감사가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환경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안에 어떠한 마음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주님이 계신 마음이다. 주님께서는 이 마음을 요구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뜻이시다.
예) 아이들 옷이 다 작아져서 입을게 없어졌다면 그건 아이가 컸다는 말이고
옷이 꽉 껴서 입기가 어렵다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고
깍아야 할 잔디, 닦아야 할 유리창,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나에게 집에 있다는 것이고
정부에 대한 불평 불만의 소리가 많이 들리면 그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예비군 통지서가 나오면 아직도 젊다는 뜻이고
주차할 곳이 없어 저녁에 고민이 된다는 것은 타고 다닐 자가용이 있다는 것이고
낙후잘룽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았고 환하게 살았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림질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이고
온 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이메일이 너무 많이 쏟아진다면 그건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고
졸업시험이 있다는 것은 입학시험을 잘 치루었고 그동안 공부를 잘했다는 것이고
모임을 하고 나서 치워야 할 게 너무 많다면 그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고
나에게 불만을 토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래도 그가 내게 친구로 가까이 있음이 아닐까요?
목사님이 자꾸 무엇을 맡기면 그래도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십일조가 너무 많아 아깝게 생각된다면 수입이 많다는 말이고
우리는 감사할 것에 대해 얼마나 불평거리로 삼고 있는가? 그 불평의 이면을 보라. 참으로 불평할 사람은 그 불평을 말할 새도 없고 경황도 겨를도 없는 사람이다. 불평이 있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그 이면의 감사를 보라.
V. 다음 주는 추수감사주일이다. 지난 한해를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한주간이 되기를 바란다. 좋은 일도 있었고 어려운 일도 있었고 여전히 뭐가 뭔지 아직 모르는 그러한 일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감사를 품고 살라. 그것이 주님이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뜻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