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조선에 투항한 왜인들 이야기(항왜에 대한 연구) 원문보기 글쓴이: 마인부우님
한국 근세 총기사
- 우금치의 개틀링 기관포
이 글은 신미양요 때 미군들이 썼던 무기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나타났던 총포와 화기를 소개하는 시리즈물의 두 번째 글이다.
5월 18일 포스팅되었던 신미양요에 이은 것이고 이번 글은 개틀링 기관총,
다음은 안중근 의사의 브라우닝 권총과 청산리 전투에서의 38식 기병총과 모신-나강 소총을 소개한다.
1895년 11월 9일
정읍 황토 현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상경길에 오른 전봉준의 동학군은 10월 23일 금강을 넘어 이인, 판치에서
관군을 또다시 격파하고 그 전날 공주 우금치에서 도착하여 관군과 대치하다가 드디어 총공격을 단행했다.
이미 겨울은 지척에 있었다. 조선의 엄동은 대군을 움직이기에 너무 추웠다.
겨울이 오기 전에 빨리 한양을 점령해서 봉기의 결판을 내야 했다.
다음날 동학군의 전투 대오는 우금치 앞 남쪽 계곡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이에 대비한 관군-일본군 연합군측에선 고개 왼쪽 산에는 호리오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군, 건너편 견준봉에는 백낙완의 관군이, 그리고 우금치 고갯길에는 성하영이 지휘하는 관군이 배치 되어 있었다.
공격측인 동학군은 약 일 만의 군세, 방어측인 관군은 2,500여명, 그리고 관군을 지원하는 일본군이 200여명이었다.
동학군은 자루 입구 같은 야산 고비를 돌아 자루 같은 우금치의 계곡 속에 넓게 산개했다.
전개가 끝나자 부대는 천천히 전진하여 경사가 심하지 않은 계곡을 아래 쯤에서 정렬을 끝내고 기세를 올렸다.
거의 추수를 끝낸 계곡의 논밭에선 동학병들은 거칠 것 없이 기동할 수가 있었다.
이 곳이 공격 개시선이 되는 것인데 일단 공격전 사기를 올리는 전열 정비가 있었다.
한바탕 기세를 올리는 함성이 있은 뒤 동학 농민부대는 진격을 시작했다.
수없이 치켜든 깃발은 하늘을 가렸고 부대를 몰아치는 지휘관들의 고함 소리는 계곡 양 언덕을 뒤흔들었다.
동학군의 선두에는 신식 총기로 무장한 병력이 앞장을 서고 뒤이어 구식 화기인 화승총을 보유한 부대와 활 부대가 위치하였고 그 뒤를 창 부대가 따랐다.
전투는 관군 포병대의 포 방열로 동학군들이 쓰러지면서 가열되기 시작했다.
고개와 양쪽 산 아래까지 다가간 동학군의 신식 총 부대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다.
동학군이 보유한 신식 화기들은 관군들로부터 노획한 성능이 뛰어난 서양 총기들이 주력이었다.
고개 위의 관군도 일제 사격으로 대응하였다.
양쪽 산언덕에 붙은 관군들은 열을 이루어 능선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하고 후퇴하고, 장전하고 사격하고 후퇴하는 과정을 4-50번 정도 되풀이하며 동학군을 타격을 주었다.
(우금치 관군들은 근대 보병처럼 능선을 따라 참호를 파고 사격을 한 것이 아니라 과거 화승 총 시대의 전투 사격 대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몇 차례의 일제 사격이 교환되고 동학군 중 수 십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동학군 전위 부대의 대장의 호령이 떨어졌다.
“나가라-!”
최후 돌격이 시작된 것이다.
둥둥둥 울리는 북소리와 요란한 징소리 가을 하늘을 울리는 기세를 타고 동학군은 고갯마루를 향하여 우르르 밀려 올라갔다.
“시천주 조화정!(侍天主 造化定)” “ 시천주 조화정!”
자기들이 외우는 주문에 자가 최면이 된 동학군은 겁 없이 고갯마루와 양쪽 산자락으로 쇄도했다.
(자신은 총알이 피해 갈 정도로 절대 죽지 않는다는 일종의 자기 최면)
동학군의 돌격 행진은 논과 밭 사이의 오르기 좋은 곳으로 집중하게 해서 동학군들을 곳곳에 무리짓게 만들었다.
“ 시천주 조화정! ” “시천주 조화정! “
그때까지 소총 사격으로 대응하던 관군은 동학군의 대 부대가 몇 개의 덩어리가 되어 압박해 들어오자 양쪽 산 능선과 고개에서
짚과 나뭇가지로 위장해 두었던 수레의 위장을 일제히 걷어내고 그 실체를 드러내었다.
동학군도 그것을 보았다.
“대포다! 방포를 조심해라”
그러나 그 것들은 대포의 격렬한 포성이 아닌 연속적인 폭음을 토해냈다.
“투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대포와 같이 바퀴가 달린 수레에 설치된 6연장 개틀링포였다.
동시에 목화송이 같은 작은 연기가 연달아 하늘로 올라가며 요란한 발사음이 산간을 빗방울 소리처럼 휘둘러 퍼졌다.
오늘날의 기관총과 같이 무연 화약을 사용하지 않고 유연 화약을 사용하던 이 기관총은 오늘날 기관총이 내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아니라 둔탁하고 부드러운 폭발음을 계속 토해냈다.
선두에서 거대한 인간 파도의 앞머리를 담당했던 수 백명의 동학군 장정들은 비명을 지르며 휴지조각처럼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 회전포[回轉包]구나!”
19세기 중후반 미국 남북전쟁 중 등장한 기관총의 첫 세대 격인 기관총이 19세기가 거의 다 저물어 가는 이 극동아시아의 산 능선에서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첨언 하지만 수레에 싣고 다니던 기관총은 1차 세계대전 전까지 포와 같은 종류로 분류되어 기관포라고 불렸다.
사실 동학군의 지휘관들에게 회전포라 불렸던 이 신무기는 그들에겐 낯선 무기가 아니었다.
1차 봉기 때 전라도 장성 황룡촌에서 이 신무기로 무장한 관군을 격멸하고 이 신무기도 노획했던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관군들의 신무기는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동학군 간부들은 고갯길에서 또다시 마주친 개틀링 기관총에 대해서 별다른 공포심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기관총이라는 미래의 전쟁역사를 바꿀 만한 무기를 충분히 숙지하고서도 그 신무기가 가진 가공할 위력을 간파하지 못한 동학군의 지휘부는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하는데도 계속 부하들을 독려하며 고개 능선으로 몰고 나갔다.
그러나 이 무지막지한 화기는 밀집대형의 동학군에게 섬뜩할 정도의 위력을 발휘했다.
돌격하던 동학군 밀집대형의 전위 공세를 꺾자 기관총의 사격은 후속하는 총부대에게 대구경 총탄을 퍼부어 댔고 더해서 더 후방의 활, 창 부대에게까지 탄막을 덮어 씌웠다.
때로는 먼 후방에서 말을 타고 지휘하는 동학군 지휘부 간부들에게까지 원거리 사격을 서슴지 않았다
관군의 기관총과 동학군들이 토해낸 유연화약의 연기는 이 우금치의 고개와 능선을 마치 하얀 연막탄으로 덮어버리듯 자욱하게 만들어 버렸고, 이 지척을 구별하기 힘든 유연화약의 흰 연기 속에서 토해낸 개틀링 기관총의 수 없는 묵직한 납탄들은 두려움 없이 다가오던 동학병 수 천명을 쓰러뜨려 하나의 거대한 묘지로 만들어 버렸다.
동학군의 처절한 비명이 이 가을의 계곡을 뒤덮고 사상자가 수 천명에 가깝게 발생하자 기세 좋게 시작되었던 공격은 돈좌(頓挫)되었다.
동학군들의 질서 없는 패퇴가 시작되었다.
기세가 오른 관군들은 능선에서 뛰어 내려와 고개 아래로 패주하는 동학군들에게 계속 총격을 가하며 아직 숨을 쉬고 있는 부상자들을 총검으로 찔러 숨통을 끊어 놓았다.
기관총 덕분에 사기가 오른 관군의 전투력은 지금까지 동학군들이 대적해 왔던 오합지졸의 잡병들이 아니었다.
이날 첫 공격은 예상치 못한 신무기로 인하여 상승 동학군의 대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11월 9일의 첫 전투에서 동학군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전봉준은 이렇게 회고 했다.
“ 첫 전투가 끝나고 남은 인원을 점검해보니 일 만명의 장정 중에 남은 사람이 겨우 3,500명이었고
두 번째 전투가 끝나고 보니 남은 사람이 단 500명뿐이었습니다.“
동학군은 그러나 첫 날 대패를 하고도 단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달 11일까지 6회에 걸쳐 정면 공격을 되풀이 했지만 모두 첫 날과 같이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남은 것은 동학군의 와해였다.
무엇보다도 개틀링 기관포의 엄청난 위력을 실감한 동학군의 전투 의지가 급격히 약화되어서 진격을 명령 받더라도
조금의 사상자라도 생기면 눈사태처럼 우르르 무너져 패주하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탈주병까지 집단으로 속출했었고 이를 간파한 관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동학군의 주력은 이 우금치에서 눈이 녹아 사라지듯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 뒤 동학군 잔존 부대는 논산 황화대에서 추격해오는 관군들과 일본군에게 다시 한 번의 대패를 당하고 패퇴를 계속, 23일에는 근거지 전주까지 내주었다.
11월 25일 전라도 태인 전투에서 동학군은 완전 소멸되었다.
전봉준의 순창의 피노리에 김경천의 집에 피난처를 구하려다 그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서 처형당했다.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깃발도 높게 거병했던 이들 백성들의 혁명이 이렇게 맥없이 좌절 된 것은 역시 동학군이 철저히 훈련받은 정규군이 아니라 급조된 난군 수준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더구나 2차 봉기를 한 동학군은 군사훈련을 충분히 실시할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국방을 위하여 도입한 신무기라면 당연히 국가를 위협하는 외적을 향하여 사용되어야 할 텐데 한민족이 국방역사에서 최초로 도입한 이 신무기는 폭정에 시달리다가 봉기했던 자국의 동포에게 사용된 것은 심히 유감스럽다고 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다.
동학군이 대망의 상경 길에서 궤멸 당했던 것은 무지의 소산이 컸다.
동학군은 이미 한 해전 전남 장성 황룡촌에서 관군들을 기습해서 회전포라 부르는 개틀링 기관총을 노획한 바 있었다.
기관총이 사용된 현대적인 전투를 경험했던 지휘관이었다면 자신의 군대가 당면할 위험성을 감지하고 이에 대비한
교육 훈련를 하고 대처를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학군은 믿기 어려울 만큼 현대전에 무지했었다.
환상의 미신이 냉철한 현실감각을 마비시킨 전투 행태로 현대적 무기를 상대 했던 것이다.
동학군의 오합지졸 같은 전투력을 나타내는 한 사례를 여기서 소개한다.
백범 김구 선생이 한때 동학에 입도하여 해주에서 봉기한 동학군의 지휘관의 직책을 맡았던 것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94년 김창수라 불리던 김구선생은 놀랍게도 열아홉 살의 나이에 일 만명이 넘는 동학군의 지휘관이 되어 해주성을 습격했다.
벌써 십대때부터 주위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범상치 않은 그릇이 있었던 것 같다.
김구 부대는 요란한 함성과 구호를 외치며 해주성의 외곽에 도착해서 일본군이 있는 성문을 공격했다.
해주 성문 누각에 5~6명의 일본군이 올라와 기세를 올리는 동학농민군에게 총격을 가하고 몇 명이 쓰러지자 뒤따르던
동학군들은 무기를 집어 던지고 자기 생명을 구하기 위해 무질서하게 도주하고 말았다.
이런 소수의 인간들에게 이렇게 다수의 대군이 어이 없이 패퇴한 것은 역사에서 찾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동학군의 실수도 실수였지만 이 우금치의 지형 역시 관군의 신무기인 개틀링 기관총이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 이 우금치 고개를 직접 찾아가 보았다.
내가 본 우금치 고개는 거치된 기관총이 발군의 능력을 발휘할 만한 모든 요소를 골고루 갖춘 지형이었다.
우선 보면 우금치의 남쪽 사면은 적당히 넓다.
이것은 정면 돌파에 필요한 대병력 집중이 가능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계곡 양쪽 사면이 급하고 계곡이 좁았다면 대병력의 투입이 없었을 것이고 대량의 인명 손실을 맛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오르막 고갯길의 경사가 그닥 심하지가 않았다.
이것 역시 대병력이 집중해서 돌격을 감행 하게하는 환경을 만들었다고 보아야 했다.
게다가 얕은 경사는 사격의 명중도를 높여준다.
경사가 급하면 총탄이 목표물의 위로 지나가는 확률을 높인다.
위의 요소들은 기관총의 집중 사격으로 대량의 살육이 가능케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전에서 기관총 사수를 해본 사람이라면 이 우금치 고개야 말로 아주 이상적인 기관총 사격의 적지임은 인정할 것이다.
계곡의 양쪽 사면이 다 기관총의 사거리 안에 있었다.
그리고 경사가 완만하여 대(隊)와 오(伍)의 전방과 후방이 전부 사수(射手)의 시야에 들어온다.
폭이 좁은 정밀한 횡사가 가능하고 깊은 종사도 가능한 곳이 이 우금치 고개였으니 우금치 고개 남쪽 사면에 붙은 동학군은
어느 기관총의 사격에서도 안전하지가 못했을 것이다.
이 자루와 같은 사지에 동학군은 앞뒤를 모르고 스스로 뛰어 들어 난타를 당하고 쓰라린 패배를 당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비록 소수의 근대식 소총을 장비했지만 무장의 대부분이 한참 구식이 되버린 화승총이나 활, 칼, 창 등의 원시 무기를 장비한 구식 전투부대였다.
우금치의 동학군 참패을 그 원인으로 일본군의 참전으로 보는 시각들이 많다.
허나 일본군이 아무리 훈련을 잘 받은 신식군대라고 해도 단지 2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들의 전투력은 그들이 가진 무라타 소총을 통해서 발휘 되었을 텐데 일본군이 아무리 사격을 잘했다 해도
수학적으로 보아서 200정의 소총이 단 한 번의 접전에 7,000명의 사상자를 내게 할 수는 없다.
그 원인은 집중 화력을 퍼부은 개틀링 기관총에서 찾아야 한다.
이 정도의 대량 살상은 자동화기가 아니면 만들어 낼 수가 없다.
위의 동학군 살상 전과는 적어도 4-6정의 개틀링 기관총이 동원되었을 때만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일본 학자들은 일본군의 우금치 전투 참전 자체를 부정한다. 일본군 예비 부대로서 우금치 후방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뿐이었다는 것이다. 그 뒤 동학 잔존 부대 소탕 작전에만 참여 했다고 주장한다. )
20세기 초 수 천년의 역사를 두고 면면히 내려온 기병대의 존재에 소멸의 결정타를 안겨준 기관총은 이미 19세기 말, 이 동아시아의 작은 언덕에서 부패한 정부에 항거해서 일어났던 민중의 의지를 여지없이 말살하여 향후 보병 전투에서 기관총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미리 예고했던 것이다.
이날 우금치의 고개에서 동학군에게 패배의 쓰라림을 안겨준 개틀링 기관총은 미국의 의학박사 리차드 조단 개틀링이
‘미국 남북 전쟁의 참화를 목격하고 이를 빨리 끝내는 방법을 찾다가 발명했다’ 라는 그럴듯한 대의명분과 함께
1862년 남북전쟁의중간에 세상에 처음 선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격의 연속 발사라는 인류의 오랜 숙원과 노력의 연장상에서 나타난 여러 노력의 한 시리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수 백년동안 여러 나라의 수없는 사람들이 노력했지만 성공적인 연발식 총기는 19세기에 들어와 연달아 선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이 이 점에서 유럽보다 빠른 선수를 쳤다.
사무엘 콜트가 강을 오고가는 증기선의 수차(水車)를 보고 콜트 식 연발 권총을 발명해서 큰 성공을 했고 그 뒤에 남북전쟁에서는
스펜서 카빈이라는 짧고 가벼운 연발 장총이 선보였다. (이 소총은 신미양요 편에 자세히 설명 되어있다)
그런 연발무기들이 먼저 나오고 개틀링 기관포가 출현했던 것이다.
개틀링 기관포는 자동 발사 공용화기로서는 실제적 기능을 가진 세계 최초의 발명품이었다.
이 신무기는 전장의 오랜 숙원이었던 화력의 대량 타격의 꿈을 이루게 만든 혁신적인 성능을 가진 것이기도 했다.
극동에서 개틀링 기관포의 등장은 상당히 빨랐다.
일본에서 개틀링 기관포가 선을 보인 것은 동학혁명 시기의 조선보다 삼십년이나 훨씬 앞선 1868년이었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 톰 크루즈가 주연한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이 영화를 본 분들이 많으리라고 본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톰 크루즈와 가쓰모도가 지휘하는 기병대를 타격해서 순식간에 전멸시킨 개틀링 기관포가 등장한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무진 전쟁이라고 불리는 일본의 내전에서 개틀링 기관포가 사용되었다.
개틀링 기관포가 세상에 나온지 불과 수 년 만에 아직 세계의 변방이었던 극동의 한 나라의 내전에까지 선을 보인 것이니
무기 상인들의 극성은 예나 지금이나 유별났다고 할 만하겠다.
당신 일본은 삼백년이나 계속된 도쿠가와 막부가 쇠잔해지고 긴 역사동안 내밀히 이 막부에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쓰마와
조슈의 두 번이 주축이 되어 그간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서 허수아비 취급을 당하던 천황을 받들고 왕정복고의 반기를 들었다.
일본은 관군이라 칭하는 이 천황 옹호파와 막부를 지지하는 좌막파가 붙어서 일대 내전에 휩싸였다.
그때 막부 편에 섰던 나가오카 번의 중신 가와이 쓰꾸노스케[河井 繼之助 =1827-1868]는 에도에 있던 번의 소유 고가 미술품들을
팔아 이 개틀링 기관총 2문을 사 들였다
그는 이 기관총들을 나가오카 성 공방전에서 쇄도하는 조오슈 군을 상대로 사용하여 큰 성과를 보았다
성을 공격했던 조오슈 군의 대장은 나중에 일본의 육군 대신까지 된 야마가다 아리도모[山縣 有朋]라는 능력 있는 지휘관이었는데 이 가와이가 직접 나서서 핸들을 돌리며 사격을 해댄 신무기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고 한다.
이 가와이 쓰쿠노쓰게는 막부 말에 출현한 출중한 인재중의 하나였다.
그의 전기가 몇 년 전 한국에도 소개되었다.
[51대 49라는제목이었다.]
가와이는 개틀링 기관포가 활약한 전투가 있은 뒤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인 파상풍으로 곧 죽고 말았다.
이 유명한 개틀링 기관포가 어떻게 해서 한국에 들어 왔는지는 내가 아는 한 아직 불투명하다.
그러나 20여 문이 도입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890년대에 조선에도 러시아와 미국, 이태리제등 다양한 서양식 화기가 많이 도입 되었었다.
짐작컨대 샹하이나 요코하마에서 활발하게 영업하던 서양의 무기상들이 중계해서 들어오지 않았나하는 추측이 든다.
전장의 주력 화기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같이 보이던 개틀링 기관포는 20년 뒤에 나온 현대적인 맥심 기관총의 출현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맥심 기관총은 청산리 전투에서도 대활약을 했다.)
우금치의 동학군 참변을 부른 개틀링 기관포는 현재 독립 기념관에 한 문이 전시되어 있고 서울 용산 전쟁 기념관에도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그리고 대부분 구식무기로 무장하고 훈련도 제대로 안 된 농민군들에게 막강한 위력의 개틀링 기관포를 사용한 것은 사실상 학살과 다름없어 보인다.
정부가 국민이 낸 세금으로 구입한 신무기로 살기 힘들어 봉기한 자신의 국민들을 이렇게 몰살시킨 것은 참 가슴 아픈 역사인 것 같다.
이러한 역사적 아픔을 잊지 말고 나라를 개혁하려 했던 농민군들의 용맹함을 기려야 할 것이다.
<체포되어 압송 중인 전봉준>
<1876형 개틀링 건>
<우금치의 동학혁명 위령탑>
남북전쟁 피터스 버그 전투 재현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