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타래 속에 감춰진 ‘배려’의 또 다른 얼굴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던 그 시절에는 외삼촌 댁에 사시는 외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양발에 무명 실타래를 걸어 놓고 실을 감고 계시는 모습을 보는 건 흔한 일이었다. 때때로 나는 할머니의 양발에 걸렸던 실타래를 나의 두 손에 걸어 놓고 할머니를 돕기도 했고, 그것이 무료해질 때쯤이면 실타래를 할머니의 두 손에 걸어 놓고 내가 실을 감아 나가기도 했다. 할머니와 내가 서로 호흡을 맞춰 양손과 어깨를 들썩이며 움직여 실을 감아 나갈 때는 엉키는 일 없이 두툼했던 실타래는 빠른 속도로 잘 풀려나갔다. 물론 호기심이 한창 물오른 나도 할머니처럼 나의 두 발에 실타래를 걸어 놓고 실을 감아 봤지만, 여덟 살 어린 소녀가 하기엔 생각처럼 쉽지 않아 방바닥에 내팽개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바닥에 너 부러진 실뭉치가 제멋대로 뭉치고 엉켜 외할머니의 당황한 탄식을 들어야 했지만, 할머닌 내게 야단 한번 안치고 엉겨 붙어버린 실을 조심스럽게 풀어나가신다.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실뭉치가 실패에 감기는 것이 내 눈엔 할머니의 신기한 마술처럼 보였다.
난 가끔 우리네의 삶이 뭐라 단정 지어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선들로 엉켜있는 실타래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엉킨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모양새조차도 이해관계 속에 사는 우리네 모습과 비슷하다. 처음부터 풀어낼 엄두도 내지 못해 제풀에 지쳐 싹둑 잘라내거나, 끄트머리 가닥을 조심스럽게 빼내고 집어넣어 가며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풀어나가는 것 또한 닮았다.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얽히고 뭉친 수많은 사람의 관계 안에는 배려라는 아름다운 행실도 섞여 있다. 그것은 희로애락의 작은 매개체가 되어 우리들의 관계를 향상하고 삶의 질 또한 풍요로워지는 데 한몫한다. 그러나 내게 스치고 지나간 무수히 많은 배려 중에는 ‘내가 남을 위해 베푼 배려’와 ‘남이 나를 위해 베푼 베려’ 즉, 입장이 다른 두 종류의 배려가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은 적이 있다. 비슷한 듯하지만, 전혀 달라 나는 그것을 배려의 숨겨진 또 다른 얼굴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십 오륙 년 전 즈음인가?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를 따라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졸업한 지 삼십여 년 만에 만난 친구들의 얼굴에서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어제 만났던 친구인 양 이름이며 각 반 담임 선생님 성함과 특징까지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나와 내가 그 자리에서 초등학생이 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는 스물너덧 명이 가운데 길게 놓인 탁자 양옆으로 앉아 서로의 기억을 꺼내 놓으며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한창 이야기의 꽃송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얼핏 이야기의 흐름이 사십 대의 현실로 돌아오고 있던 차에 나와는 같은 학급에서 수업한 적이 없는, 낯선 여자 동창이 뒤늦게 합류해서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같은 반을 한 적이 없다 보니 처음엔 어색했지만,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공감대만으로도 이내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화장실을 다녀올 때마다 진한 담배 냄새가 강하게 났는데, 대다수의 친구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불혹도 훌쩍 넘긴 아줌마가 화장실에서 담배 물고 있는 모습이 딱 하기도 하고 썩 좋아 보이지도 않아, 자주 자리를 뜨는 친구에게 나가지 말고 앉아서 편히 하라고 부드럽게 권했다. 내 딴에는 그 친구에 대한 배려였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그날 그 시간 이후로 나는 이유도 모르는 채 몇 해가 지나가는 동안, 모임에서 마주치는 그 친구로부터 적대감 어린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만 칠 년 전에 나는 친정어머님의 병환으로 병구완하기 위해 한국에서 칠 개월여 머무른 적이 있다. 집 근처 교회에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니 자연스럽게 엄마 연배와 비슷한 권사님 친구들이 곁에 생겼다. 함께 구역 예배도 드리며 종종 식사도 나누다 보니 마치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세월이 시간을 엄청나게 빨리 먹어대는 통에 어느새 설이 찾아왔다. 그 당시는 뇌출혈로 쓰러졌던 어머니께서 뇌수술 받은 지 6개월이 지나가는 시점으로 회복 중이셨던 때였다. 딱히 명절이라고 별다를 게 없는 엄마와 나는 섣달그믐날 밤에 TV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야식도 먹고, 동이 틀 무렵에야 우리 모녀는 침대로 향했다. 그런데 요란한 벨 소리가 깊은 잠에 빠져들어 가는 나를 막아 세웠다. 겨우 시간 반 지난 일곱 시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어 탄식이 새어 나왔다. 가까이 사시는 권사님 한 분이 떡국 같이 먹자고 건너오라는 전화였다.
“죄송합니다. 엄마랑 제가 새벽에 잠을 자기 시작해서, 가기가 좀 그런데요. 어머닌 지금 주무셔요.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우리의 상황을 설명했음에도 십분 간격으로 두 번 더 전화가 와서, “내 맘이 편치가 않아서 그래. 수저 두 개만 얹으면 되니까 어서 빨리 건너와요. 우리 아들 내외도 지금 막 왔어.” 은근히 역정을 내시는 권사님. 그런데도 코를 골며 주무시는 엄마를 깨울 수는 없었고, 나 또한 이제 막 꿈나라 여행길에 들어섰던지라 눈도 떠지지 않았다. 정말 부담을 듬뿍 안고 무거운 마음으로 거절해야만 했다. 그 시간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떡국이 아니라 쏟아지는 달콤한 꿀잠이었기 때문이다. 세 차례의 전화에 세 번의 거절을 하고 나니 뭔지 모를 답답함이 나를 짓누르고, 짜증 섞인 불쾌함이 무너져 내리던 눈꺼풀을 말아 올려 버린다. 그런데 애써 잠을 다시 청하려 할 때, 불현듯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들… 내가 즐겨 배려라 생각하며 베풀던? 나의 친절이 오히려 상대방은 난처하고, 때론 당혹스럽고, 곤혹스러울 수도 있겠구나…. 이웃 권사님의 친절한 배려로 그동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오래된 기억 속의 배려 하나가 떠올랐다.
십수 년 전의 마흔 살 넘어 만났던 초등학교 동창의 마음을 아니 나를, 나의 배려를 돌아보게 된 거다. 창문 하나 없는 여자 화장실에서 친구가 담배를 피우고 난 뒤에 들어서면, 내 몸에도 냄새가 배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청결하지 않은 화장실에서 담배를 태우는 여자친구의 모습이 안쓰러워 권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 몸에 배는 불쾌한 냄새가 싫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나는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그녀에 대한 착한 배려라고 착각하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는지…. 설령 우리 모두 다 안다고 한들 버젓이 드러내놓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비로소 지나치게 적대시하던 친구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나의 오만스러운 배려로 상처받았을 친구의 마음에 미안함이 얹어진 뒤늦은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권사님 또한, 세 차례나 갈 수 없음을 설명했음에도 모녀가 명절에 둘이 있는 게 안쓰러워 아침 한 끼라도 베풀고자 하는 따뜻한 배려였지만, 정작 거절해야만 하는 나는, 어르신에 대해 미안함과 부담감까지 짊어져야 했다. 하지만 떡국 한 그릇 같이 먹고 보내면 본인은 마음이 편하고 좋을지 모르지만, 어느 누가 한 시간여 자다 말고 남의 집에 명절 아침부터 부스스한 얼굴로 가고 싶겠는가? 그것은 상대방의 마음이나 상황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자기 마음만 편한 배려일 뿐이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배려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조심을 한다. 배려에도 수많은 수식어가 붙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
정말 상대방을 위한 일인가? 상대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상 내 맘이 편해지고자 하는 배려가 생각보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의외로 많이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배려 안에 숨어있는 착각으로 인해 가벼운 마찰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잘못된 배려는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아 자칫 자기만족과 교만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배려는 좋은 것이다. 누군가에게 베푼 작은 배려가 위로와 격려가 되고 용기도 얻어 기쁨이 될 수 있다면, 굳이 배려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올바른 배려는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따뜻한 마음을 지녀야 하고, 그 사람의 상황과 입장이 되어 보는 자세도 지녀야 한다. 이처럼 진심으로 상대방을 아끼고 생각하는 배려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 꼭 필요한 윤활유임이 틀림없다.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아야 실타래가 잘 풀려나가고, 감기는 것이 원활하게 되듯이 우리네 인생도 좋은 배려와 사랑으로 이어가고 풀어나갔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엉킨 실타래를 묵묵히 풀어나가시던 외할머니의 마술처럼……
-2017년 봄맞이 대청소 중에 굴러다니는 토리를 치우다가…
*토리 : 실을 둥글게 감은 뭉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