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코수도원 북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오래 전 이 식당에서는 30~40여 명의 수도자들이 감사의 기도를 올린 후 식사를 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화가들이 수도원 식당에 최후의 만찬 그림을 즐겨 그렸는데, 이것은 수도자들의 평범한 식사와 예수님 최후의 만찬이 연관되었음을 알려준다. 수도자들의 육체를 살리는 음식이 만물의 희생으로 만들어지듯이 영혼을 살리는 양식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그런데 밀라노 ‘최후의 만찬’ 벽화가 특별한 것은 예수님의 평범한 저녁식사를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빈치는 예수님 최후의 만찬 가운데에서도 가장 극적인 순간, 즉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하는 혼돈의 순간을 그렸다. 그래서 제자들은 몹시 놀라워하며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화면 가운데에 예수님이 앉아 있고 양쪽 옆에 6명의 제자들이 있다. 화가는 열 두 제자들을 흩어 놓지 않고 4개 그룹으로 묶어 놓아, 혼란 속에서도 질서 정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뛰어난 작품에서는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인 균형과 조화를 찾아볼 수 있다.
왜 수도원에서는 식당의 한쪽 벽면에 최후의 만찬 작품을 주문했을까? 아마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려 하는 수도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자만하거나 방심하게 되면 유다처럼 배신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다빈치 ‘최후의 만찬’ 맞은편 벽에는 도나토 몬토르파노(Donato Montorfano)의 ‘십자가 처형’도 있다. 예수님과 두 명의 강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며 아래에는 로마 군인들과 성모님을 비롯한 신심 깊은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묘사돼 있다. ‘십자가 처형’은 뛰어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만찬’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끌지는 못한다.
이탈리아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내부.서울대교구 박정우 신부 제공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프레스코로 제작하지 않고 템페라(Tempera)로 그려서 물감이 벽 속에 깊이 스며들지 않게 했다. 그가 벽화 제작에서 템페라를 사용한 것은 늘 새로운 시도를 하던 그의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이 완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518년부터 물감의 박리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726년에는 미켈란젤로 벨로티(Michelangelo Bellotti)가 작품 위에 크게 덧칠을 했으며, 이런 작업은 후에도 계속됐다. 특히 나폴레옹이 밀라노를 침공했을 때는 작품이 있던 식당이 군인들의 마구간으로 사용돼 건물과 작품이 크게 훼손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공중 폭격으로 성당 주변이 초토화되자 사람들이 ‘최후의 만찬’을 보호하기 위해 식당의 벽 주변을 모래주머니로 쌓아 보강했다. 덕분에 식당은 거의 다 파괴됐지만 기적적으로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 처형’이 있던 양쪽 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전쟁의 폭격 속에서도 ‘최후의 만찬’을 지키려고 모래주머니를 나르던 사람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작품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의 성당은 예술 작품 때문에 더욱 빛나고 작품은 성당 때문에 더욱 빛난다. 우리 주변의 성당이나 교회 기관에도 보석처럼 소중한 유물이나 미술품이 곳곳에 있다. 그것을 찾아 발견하고 온갖 정성을 다해 품어 줄 때 교회는 더욱 아름답고 풍요로워질 수 있다. 소중한 가족을 대하는 것처럼 우리 교회의 유물이나 미술품을 바라보고 품어 주는 자세가 더욱 필요하다.
정웅모 신부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 유물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