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1차 사찰순례 안내 ▣
▶ 장 소 : 경북 고운사, 유하사
▶ 출발일시 : 2011.1.15일(일) 오전 7시
▶ 출발장소 : 청주 신한은행본점앞
고운사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등운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이다. 681년(신문왕 1) 의상(義湘)이 창건할 당시에는 고운사(高雲寺)라 했는데 최치원이 여지(如智)·여사(如事) 두 승려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호를 따라 '孤雲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948년(정종 3) 운주(雲住)가 중창했으며 1018년(현종 9)에는 천우(天祐)가 대웅전·약사전·극락전·적묵당(寂默堂)·설선당 등을 중창했다. 그뒤에도 여러 승려에 의해 중창이 있었으며 1835년(헌종 1) 화재로 소실되자 만송(晩松)·호암(虎巖)·수열(守悅) 등이 함께 재건했다. 근대까지 재건과 중수가 계속되었는데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극락전·관음전·명부전·금강문·가운루·적묵당·우화루·동별실·서별실·금당·회운당·고운대암·고금당 등 25개가 있다. 가운루는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석불좌상은 보물 제246호로, 3층석탑은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해동 화엄종의 시조이신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천하명당에 위치한 이 사찰은 원래 高雲寺였다. 신라말 불교와 유교ㆍ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ㆍ여사 양대사와 함께 가운루(경북 유형문화재 제151호)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孤雲을 빌어서 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자 풍수지리사상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도선국사가 가람을 크게 일으켜 세웠으며 그 당시 사찰의 규모가 五法堂十房舍(5동의 법당과 10개의 요사채)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약사전의 부처님(보물 제246호)과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28호)은 도선국사께서 조성하신 것들이다.
특히 고운사는 해동제일지장도량이라 불리는 지장보살영험성지이다. 옛부터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고 하는데 지장보살님의 원만자비하신 풍모는 물론이거니와 명부십대왕의 상호와 복장도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위엄과 정교함을 자랑한다.
일제시대에는 조선불교 31총본산의 하나였고 지금은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로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에 산재한 60여 대소사찰들을 관장하고 있다. 사세가 번창했을 당시에는 366간의 건물에 200여 대중이 상주했던 대도량이 해방이후 쇄락하여 많은 사찰재산이 망실되고 지금은 이십여명 대중이 상주하는 교구본사로는 작은 규모의 사찰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10여년전부터 중창불사의 뜨거운 원력으로 주변을 정리하고 낡은 건물들을 수리 및 단청하여 지금은 위풍당당한 본산의 위상과 소박하고 절제된 수행지로서의 이미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정도 규모 이상의 고찰로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지 않는 고운사는 민가로부터 3km 정도 떨어져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을 자랑하며 일주문에 이르는 솔밭 사이 비포장길은 부처님께 진실된 마음으로 다소곳이 다가서는 불자들의 마음처럼 포근하고 정감넘치는 모양을 하고 있다.
청정하고 엄격한 수행가풍을 자랑하는 고금당선원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을 비롯한 고운사의 모든 대중들은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대승불교의 참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새벽의 찬공기를 가르며 부처님전에 발원을 멈추지 않는다.
신라시대의 학자 최치원은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이며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이다.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
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 고운사와 최치원
고운사 가운루.
고운사의 얼굴이라 불릴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누각이 가운루이다.아래로는 계류가 흐르고 뒤로는 산과 구름을 접하는 신선의 세계가 펼쳐진다.
고운사는 의상대사가 681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현재까지 경북 북부 지방의 중심 가람으로서 전통을 자랑하고, 가람 건축의 짜임새도 뛰어난 곳이다.
의상대사 창건설 말고도 신라말의 대학자인 최치원이 창건했다는 설도 전해져서 더욱 이채롭다. 전설인즉, 고운 최치원이 여지, 여사라는 두 스님과 이 곳에 와서 가허루(駕虛樓)와 우화루(羽化樓)라는 두 누각을 건립하였고, 이 때부터 최치원의 호를 좇아 고운사라고 불리웠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유학자이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의 풍류도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풍류도란 신라 화랑들과 같이 산천을 찾아 다니며, 심신을 단련하고 자연을 숭상하는 수행법이자 일종의 종교적 행위였다. 당대의 대 지성이요, 풍운아였던 최치원이 언제 죽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는 가야산에서 산신이 되었다는 설이 풍미했을 정도로 신선도나 도교의 성인에 가까웠다.
최치원과 밀접한 인연을 간직한 고운사는 도교적 이미지로 가득한 절이다. 뒷산의 명칭도 뭉게구름을 뜻하는 등운산이고, 최치원이 세웠다는 가허루나 우화루 역시 도교의 신선들이 타고 다니는 비행체들을 뜻한다. 물론 도교 또는 풍류도의 도사가 불교 사찰을 창건했다는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단지, 이 땅의 산세가 신선이 노닐만한 선경이라는 점,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지 신라말에 최치원과 관계가 되었기에 형성된 창건 연기가 아닐까.
가허루는 현재 가운루(駕雲樓)로 바뀌었고, 우화루는 우화루(雨華樓)로 이름이 바뀌었다.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화를 가진 고운사 孤雲寺는 孤雲 최치원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최치원 뿐 아니라 도선국사까지 관련 설화를 가지니신라말 고려초를 통털어 대덕이 죄다 관련되었다.(원효대사만 빼고^^)
가을에는 고운사를 참배해본 적이 없어 단풍과 함께 소슬한 운치를 느껴볼 참으로 아내랑 먼길을 달렸다. 하지만 아뿔싸! 북쪽의 가을은 이미 남으로 떠나버린지 오래고, 느티나무 단풍마저 노란색이 죄다 흩어지고 갈색 마른이파리만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계절이 흩어져 텅 빈 길을 밟아가는데 무채색 가을이 땅에 베어있음을 문득 느끼게 된다. 아! 수 억년 화석을 이 찰나에 보여주누나....... 그러하니!
천겁(주:아주 오랜 세월)을 거슬러도 옛날이 아니며, 만세(주:역시 오랜 세월)를 뻗쳐도 항상 지금! 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유하사
주소는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 79번지
전화번호는 : 054 857 0076 입니다.
유하사는 와룡면 가구 마을 내 넓은 분지에 자리한 사찰이다. 주위로는 야트막한 언덕이 유하사를 감싸고 있으며 마을과 농지가 유하사와 이웃하고 있다.
유하사는 와룡산의 초입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옛날에는 용의 승천을 돕기 위해 우물을 3군데 팠다고 해 일명 삼정산(三井山)이라고도 불리었다는 안동 와룡산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거석문화(巨石文化)가 발달하여 구전자원(口傳資源)이 관광자원화된 곳이다. 선사시대 문화가 기반이 되어 역사시대 전통문화가 꽃필 수 있도록 저력(底力)이 된 산의 형세가 천하를 호령하고 돌아온 용이 편히 누운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음이온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소나무 침엽수림으로 형성되어 있어 등산객들은 음이온의 효능을 몸소 체험하면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산의 형세가 천하를 평정하고 돌아온 용이 편히 누운 자세를 취하고 있어 조선조 중기 문신학자 백담 구봉령 선생에 의하여 처음으로 용산(龍山)이라 칭하고 까투리봉 일대를 와룡산이라 부르게 됐다.
유하사는 어느 보살이 절을 세워서 유지관리하다가 조계종으로 이관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옛날에는 이 사찰에 용화전만 있었는데 지금은 불사가 많이 이루어져서 대웅전 등등의 전각들이 많이 생겼다.용화전에는 미륵님, 부처님, 산신님등 모셔져 있다.한 전각에 이렇게 모시기도 어려운데 많이 모셔져 있다.그리고 이 사찰은 비구니스님만 기거를 하는 사찰이다.이 사찰은 와룡산에 있는 곳이며 평지에 있어서 주차를 하고 바로 들어가서 접근성이 좋다.와룡산은 용이 누워있는 형상이다.그래서 용을 승천시키기 위해서 유하사를 불사했다고 한다. 놀 유(遊), 여름하(夏), 여름에 용이 승천하기 좋다고 유하사라고 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고운사의 말사로 유하사로 오시려면 먼저 고속도로 기준으로,
서안동IC를 빠져나와 안동시내로 들어가 도산 방면 35번 국도로 와룡면 방면으로 계속 직진한후, 와룡면 면사무소를 지나 와룡농협 앞에서 예안 방면으로 우회전해 919번 국도를 이용해 약 2km 정도 직진한다.
그러면 왼쪽에 ‘살앞’ 버스정류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우회전하면 바로 유하사에 오실수 있습니다.
첫댓글 2012년 행복한 소식 고맙습니다. 꼭 동참토록 하것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