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28 주간 화요일 - 속을 깨끗이 씻는 방법
요즘 살을 빼 보려고 노력중입니다. 요즘은 매일 조금씩이라도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전엔 ‘굶으면 지가 안 빠지고 배기겠어?’라는 생각으로 자주 굶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 한 끼만 먹고 살아보았습니다. 살이 조금은 빠지는 것 같았고 배고픈 것도 잘 참았는데 예상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피부에 자꾸 이상한 것들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약을 발라도 그 곳이 사라지면 다른 곳에 또 나고 그곳이 사라지면 다른 곳에 또 발생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원인은 영양부족인 것 같았습니다. 배고픔을 참을 수 있어도 몸은 속일 수 없나봅니다. 그래서 다시 제 끼니를 열심히 먹되 조금씩 덜 먹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피부가 조금씩 안정을 찾았습니다.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듯이 말과 행동을 보면 그 안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쇼프로에서 본 것인데 길 가르쳐 줄 때 쓰는 말들을 잘 들으면 그 사람의 직업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길 가르쳐 주는 사람이 의사라면, “예, 저 앞에 약국 보이시죠? 거기를 돌면 성모 병원이 있는데 그 병원에서 길을 건너면 동물 병원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돌면 성형외과가 보이는데 그 앞에 찾으시는 건물이 있습니다.”
조직 폭력배는, “저 앞에 경찰서 보이시죠? 거길 지나치면 공터가 나오는데 그 곳은 싸움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에요. 거기서 왼쪽으로 돌면 고딩 애들이 담배 자주 피고 삥 뜯는 골목이 있는데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속에 있는 대로 보고 속에 있는 대로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속에 영양이 부족하면 피부 같은 곳에 안 좋은 것이 생겨나듯이 영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이 더러우면 겉을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더러운 면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속을 정화해야 겉까지 깨끗해집니다.
유다인들의 전통 중에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손, 발을 씻는 전통이 있었고 식사하기 전에도 손을 씻는 전통이 있고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식당 앞에 항상 손을 씻는 곳이 있습니다. 이는 먼지가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건강을 위해 선조들이 생각해 낸 지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전통을 따르지 않고 손을 씻지 않은 채 식사를 합니다. 이에 율법을 열심히 따르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맞받아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겉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아무리 손을 씻고 그릇을 깨끗이 씻어도 그들의 속이 더러우니 삶이 깨끗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속을 깨끗이 닦는 방법으로 ‘자선’, 즉 사랑의 실천을 한 방법으로 제시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사랑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고 또 우리가 그것을 받아서 밖으로 표현해 내는 것입니다. 마치 물이 파이프를 통해서 밖으로 나오듯 사랑도 우리를 통하여 밖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이미 그 안이 사랑으로 가득 찬 것이고 미움이나 악을 표출 할 때는 우리 마음에 안 좋은 것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 사랑으로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들이 신부님의 안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안수를 통해서 사람들 안에 있는 안 좋은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는 말씀을 하시며 그래서 안수를 받을 때는 먼저 받는 것이 좋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마귀가 안수 할 때 나왔다가 사제의 안수를 통해 또 다른 사람에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수도꼭지에 억지로라도 구정물을 집어넣을 수 있겠습니까? 계속 쏟아져 나오는 은총은 안 좋은 것으로 더럽혀 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나중에 안수를 받는 분이 더 깨끗한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수를 하는 중에 사제의 안 좋은 것들이 있었다면 그 이전의 안수를 통해 다 씻겨나갔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장 내시경을 하기 위해 오전 내내 약과 함께 많은 양의 물을 마셔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안에 있는 변이 나왔지만 나중에는 마셨던 물이 그대로 깨끗하게 나왔습니다. 사랑은 베풀면 베풀수록 자신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 속은 저절로 정화되고 깨끗해집니다.
“속에 담긴 것”
제가 요즘 방에 러닝머신을 갖다 놓고 거의 매일 40분씩 뜁니다. 그러다보니 매일 젖은 빨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러닝 하나, 팬티 하나씩 넣고 매일 세탁기 돌릴 수도 없는 일이라, 젖은 것들을 빨래 통에 넣었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빨래를 합니다. 그러나 러닝과 팬티를 함께 빨면 러닝의 흰색깔이 사라지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은 팬티와 양말을, 한 번은 러닝만 돌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일에 2주일이 지난 러닝을 빨려고 꺼냈더니 여기저기 곰팡이가 쓸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세탁기에 넣고 삶는 빨래로 돌렸는데도 그 자국이 그대로 남았습니다. 겉옷들은 수녀님이 빨아주시는데 함께 넣어놓았던 겉옷들에서도 빨았는데도 땀 냄새가 나서 한 번 더 빨려고 남겨놓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창피도 이런 창피가 없습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이 겉만 깨끗이 하며 속은 탐욕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고 예수님이 꾸짖으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이것은 사실 아주 단순한 진리입니다. 속에 더러운 것이 있으면 다른 무엇이 들어가도 함께 더러워집니다. 그릇을 닦으려고 하더라도 우선은 그 안에 음식찌꺼기를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어쩌면 우리 안에 있는 안 좋은 것들은 버리지도 않으면서 겉모습만을 깨끗하게 하며 사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은 깨끗한 곳이고 땅은 더러운 곳입니다. 하느님은 하늘과 같이 깨끗한 사람의 마음에만 사십니다.
구약에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판’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모실 상자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상자는 어쩔 수 없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단단해서 잘 썩지 않고 벌레 먹지 않는 아카시아나무로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만족이 되지 않아서 그 상자의 겉과 속을 금으로 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십계명판을 넣었습니다.
따라서 계약의 궤가 성모님의 모델이 된 것입니다. 성모 호칭기도에 보면, “계약의 궤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란 말이 반드시 나옵니다. 그 이유는 성모님만이 계약의 궤처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모실 유일한 깨끗한 그릇이셨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내 안에 아주 조그만 더러움만 있어도 그 안에 함께 들어온 것에 그 더러움이 옮겨집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하느님이 사신다고 하는 것도 우리 안에 교만과 음란과 탐욕이 있다면 그 안에 함께 계신 하느님이야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감히 짐작이 갑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시기 위해 먼저 우리 안부터 깨끗이 비워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물 받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진주를 돼지우리에 집어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계약의 궤는 지금으로 말하면 감실도 되지만, 가장 완전한 제대였습니다. 그 안에 성자께서 계시고 성령을 통하여 성부께서 그 위에 구름모양으로 나타나시어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지금도 제대 위로 하느님이 내려오시고 그 하느님이 성령의 힘으로 살과 피의 형태로 우리 안에 오십니다.
즉, 그 하느님을 모셔야하는 우리 마음도 원죄 없이 깨끗하고 겸손한 성모님의 모습과 같아지지 않으면 오늘도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를 더러운 곳으로 넣어버리는 꼴이 됩니다.
우리 안에 교만이 있다면, 조금 더 겸손하려고 노력하고, 육체적이라면 조금 더 정결해지며, 탐욕이 있다면 조금 더 나누며 삽시다. 이것이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하는 길입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 내 안에 사는 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