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기고문은 제가 캐나다 해외통신원 리포트로 작성한 기고문입니다. 재외동포재단이 재외동포청으로 승격하면서 많은 업무인계가 원할하지 못해 해외통신원리포트가 한참동안 업로드 되지 못했습니다. 제 기고 시간을 지나치고 말았네요. 아쉬움이 남아 우리 문협의 공간에 기록용으로 올립니다.)
2023 열린문학회 및 제8호 밴쿠버문학 발간 기념회
아침 저녁으로 스산한 가을 바람이 부는 캐나다 9월의 토요일 오후, 사단법인 한국문협 밴쿠버지부(회장 임현숙)가 주최하는 2023년 열린문학회가 열렸다.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선후배 문인 회원들과 가족, 지인들이 50여 명 남짓 함께 했다.
<2023년 열린문학회 겸 제8호 <밴쿠버문학> 발간 기념회 순서지>
이 지역의 문인들이 적어 내려간 이민생활의 정수를 모은 문집인 <밴쿠버문학>은 올해 제 8호를 맞았다. 17인의 시인의 50편의 시와 14인의 수필가의 수필 27편을 실었다. 밴쿠버 문학 신춘문예상(늘샘 반병섭 문학상)을 수상한 곽선영 씨의 시를 비롯하여 입선 작품인 시 두 편과 단편 소설이 들어갔다. 캐나다 밴쿠버지부와 자매결연을 맺어 교류하고 있는 한국 무주문인협회의 3인의 시와 수필 두 편도 만날 수 있었다.
작가의 목소리를 통해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이 문학의 행사의 묘미다. 김석봉 시인이 먼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 속에 소재를 모은 시, 네 편 가운데 ‘여름의 깃발’을 낭독했다. 김계옥 시인의 ‘노송 반닫이’는 시인의 아버지가 손수 조선시대 가구인 반닫이를 복(福) 과 수(壽)를 새겨 만들어 본인에게 선물한 사연을 시로 풀었다. 한편, 캐나다의 자작나무 숲을 그린 유화 작품을 이번 <밴쿠버 문학>의 표지로 헌정했다. 백철현 시인은 특유의 낭만적인 분위기로 ‘꿈이었던가 보오’를 낭독했고, 줄리아 헤븐 김 수필가는 ‘늙어가는 내 모습을 보고 느껴가는 감정’이라는 제목의 수필을 낭독했다. 한국 TV프로그램을 보면서 이방인의 향수를 달래는 이곳 사는 사람들의 일상이 녹아있었다.
올해 봄 신춘문예 공모전을 통해 데뷔한 신인 윤미숙 시인은 ‘나무가 꽃에 묻다’라는 서정시속에 중년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의 담담한 독백을 표현했다. ‘시적 변용’이라는 시를 소재로 삼은 김해영 시인의 '시적 변용' 낭독의 마지막 행, “허, 농밀한 시의 체취에 취한다”는 마치 오늘 모임에 대한 추임새처럼 들렸고, 문현주 시인의 시조 ‘고향에서’ 가 있어 한국 정형시가 주는 은율의 즐거움을 더했다. 김보배아이의 ‘조각보’, 심현섭 수필가의 ‘그네만 보면 생각나는 여자아이, 민정희 수필가의 ‘날개 접은 새’를 읽어내려갔다. 충만한 감성으로 나즈막히 관찰한 일상 예찬을 담은 문장들이었다.
문학의 향연 뿐만아니라, 임윤빈 문인협회의 부회장이 ‘추심(秋心)’과 ‘뱃노래’ 두 곡의 한국의 아름다운 가곡을 독창했다. 안젤리나 박 소프라노와 김용래 테너의 축가가 더해져 장내는 예술의 기운으로 풍성했다. 문협가를 작곡하고, 가수이기도 한 김경래 시인의 작품 낭독과 축하 연주는 관객을 가을 속으로 깊게 끌고 들어갔다. 고운 한복으로 탈의하고 김보배아이 수필가가 나타나 ‘청산리 벽계수야’ 황진이의 시조 초장을 정가 창법으로 열창하여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마지막 순서로는 문협에서 노익장을 자랑하는 젊은 김춘희 수필가가 1,800년 대의 프랑스 대시인 보들레르(Chant d'automne de Baudelaire)의 시집 [악의 꽃]에 실린 '가을노래'를 유창한 불어로 낭송해서 객석의 감탄을 자아냈다. 이어 이인숙 시인은 캐나다 시인, 앤 미첼(Anne Michaels)의 시 '사랑이 당신을 사로잡기를'(May love seize you) 낭송하고, 한글 번역 시도 소개했다.
무엇보다 특별한 시간은 열린 시 낭송 시간이었다. 문학이 주는 흥에 매료한 관객들이 일어나 참여하였는데, 송요상 시인이 애송 시를 원고 없이 읊어 감동을 주었고, GBS 글로벌 복음방송의 글로리아 송이 자원하여 <밴쿠버 문학> 속에 실린 로터스 정 시인의 시를 아름답게 낭독하였다.
한국문협 밴쿠버지부는 약 20여 년 전, 캐나다 밴쿠버 지역의 큰 인도자였던 늘샘 반병섭 목사가 주춧돌을 놓은 캐나다 크리스챤 문인협회로 시작했다. 2004년 밴쿠버 문인협회로 테두리가 확장되었다. 2005년부터 <바다건너 글동네>라는 문집을 통해 지역의 아마추어 문인들이 이민의 삶을 시와 수필로 승화시키는 문집 발간을 시작했다. 2014년 부터 사단법인 한국 문인협회의 캐나다 밴쿠버지부로 한국 문인협회 인준을 받았고, 매주 문인들이 시와 수필, 소설, 동화 등을 지역 신문에 기고하고 있다. 매년 “열린 문학회”를 통해 작품 발표를 하고 있다. 작품 문집은 현재 제8호로 2021년부터는 <밴쿠버문학>라는 상징적인 이름으로 진화했다.
<밴쿠버문학>에서는 원로 문학인을 한 분씩 조명하는 기고가 실리는데, 이번에는 김영주 시인에 대한 기고를 김보배아이가 썼다. 기고문의 일부를 발췌하여 나눈다.
김영주 시인은 현재 노환으로 양로원에서 지내며 외부활동을 어려웠는데 이날 열린 문학회에 참석하고 당신의 시를 낭송하여 문우들의 갈채를 받았다.
밴쿠버에는 시인이 산다
김영주
이 땅에서
실향민으로 30년, 그렇게 세월이 갔다
참으로 갈 곳이 없을 때도 있었다
무일푼처럼 허전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나는
흙 바람 부는 조국을 바라보며
시를 써댔다
시인이여, 시인이여 그대
무엇을 증명하려고 시를 쓰는가
수채화를 그리듯
인생을 풀어 넣다가
산다는 것은 혁명임을 깨닫는다
2018년, 새해
나 이제
60을 넘어 훨훨 더 넘어
세상에 나가있는
모든 내가
돌아오는 시간이다
후레이져 강변 시인의 마을로 가자, 가서
가장 먼데까지 가보는 강물로 흐르다가
시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시인의 마음이 만져지는
그런 들풀 같은 시를 쓰리라
줄기차게 줄기차게, 이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리라
“<밴쿠버에는 시인이 산다>, 김영주 시인의 시를 읽었습니다. 밴쿠버에 살고 있는 시인이 한 두 명은 아닐텐데 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게 외칠 수 있을까요. 몇 년 전 한국에서 화제였던 음악 프로그램이었던 “나는 가수다”를 연상하게 하는 제목이 아니겠습니까. <밴쿠버에는 시인이 산다> 시 속에 화자는 외롭고, 가난하고,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자신이 한 것은 시를 쓰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지난 60년의 타향살이 인생을 “혁명”처럼 살아 낸 스스로를 인식하는 정체성이 딸도, 아내도, 여인도 아닌, 바로 ‘시인’이었습니다.
시가 무엇이길래, 타향살이를 하는 한 이민자에게 허전할 때마다 나타났습니까? 시는 무엇이길래, 조국이 그리울 때마다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에게 혁명을 이룩할 힘을 주었습니까? 모름지기 ‘밴쿠버’라는 장소는 실향민들이 살아가는 곳이고, ‘시인’은 바로 너, 나, 우리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김영주 시인의 연세, 예순 즈음에 쓰신 이 시는 어쩌면 시인이 꼽는 대표시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밴쿠버에는 시인이 산다> 에서 시인의 시를 향한 더욱더 강렬한 시작(詩作) 의지를 봅니다. 치열하게 시인은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증명하려고 시를 쓰는가” 하고 말입니다.
아서 쇼펜하우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재능은 아무도 못맞추는 과녁을 명중시키는 것이지만, 천재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과녁을 명중시키는 것이다.”
문인을 조명하는 자리에 문인 새내기인 제가 적고 있어서 부끄럽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시인은 일반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만지는 사람이 시인입니다. 김영주 시인은 한 때는 딸로서 살았고, 아내로서 살았고, 어머니로서 살았습니다. 이 사실은 인생 60년을 살아낸 어떤 누구에게도 해당하는 것이겠지요. 그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혹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내다보면서 건네는 질문에 “세상에 나가있는 모든 내가 돌아오는 시간”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더이상 그 어떤 누군가의 ‘누구’가 아니라 ‘시인’으로 살겠다고. 시인의 마을에 머물면서 “줄기차게 줄기차게” 시만을 쓰겠노라 다짐합니다.
김영주 시인은 캐나다 밴쿠버 지역의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한국인 문학가 중 한 분으로 1963년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하고, 1976년, 한국에서 여류 문인회 주최의 전국 주부 백일장 장원, 1985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셨습니다. 1988년 캐나다로 이민하셨습니다. 미래시, 문촌 동인 등 다양한 문학인 그룹에서 활동을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1994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캐나다 협의회 통일문예 공모 시부문에 최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1977년 비영리 문학단체로 발족된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의 밴쿠버 지역에서의 열정적인 활동을 인정받아 2004년 제13회 해외 한국문학상 영예의 주인공으로 선정되었습니다. 한국문인협회가 토론토에서 개최한 제14회 해외 한국 문학 심포지엄의 자리에서 해외 문학상 시상식을 겸했습니다. 해외에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전파한 시적 업적을 이룩한 문학가로 인정받은 결과였습니다. 김영주 시인의 시집 <사랑이 무어라 알리기 전에>는 뛰어난 음악성과 낙천성으로 큰 환호를 받았습니다. 대표 저서로는 반병섭, 유병옥, 김영주 3인 시인의 작품을 모은 3인의 시집 [바다 건너 시 동네]가 있으며, 산문집 [사랑, 그 일모의 하늘에는]이 있습니다.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가다가 시 말미에 적은 ‘시작 노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김영주 시인의 모든 시를 제가 소개할 수도 없고,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할테지만 시작 노트에 적힌 ‘시를 쓰는 마음’을 보면서 이 글을 읽는 독자의 마음에 시작(詩作)이 시작(始作)되면 좋겠습니다.”
산다는 것은 늘 누군가를 만남이고, 늘 누군가를 떠남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를 서성이는 일은 아름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저 들판에서 자고 일어나는 꽃들에게도 마음이 있고, 가야할 길이 있고, 만나야 할 친구가 있을까. 나는 때로는 내가 사람인 것을 버리고 들꽃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비바람에 휘둘리다가 한줌 흙에 묻히기는 사람이나 들꽃이나 마찬가지인데 자주 십계명에 걸려 넘어져 아파하면서 구태여 인간임을 주장하는게 죄스러워서다.
한 생애를 살면서 많은 사람을 품었던 내 가슴도 점차 비어감을 느낀다.
그러나 자식을 만든 어미이기도 하고, 시를 만드는 시인이기도 해서, 나는 가난하다거나 외롭다는 일이 별로 없었음을 다행해 한다
. 유혹이어도 좋고, 타락이어도 좋을 것들에 빠져본 적 없이 여기까지 걸어 왔음을 감사해 한다.
이민 이후 나는 한동안 참 많이도 울면서 살아왔다.
이제 나는 그 사면초가의 방에서 참을 줄도 알고 기다릴 줄도 알고 벗어날 줄도 알게 되었다.
그것도 기쁜 일이다.
우리는 늘 길 위에 서 있다.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희망처럼 바라보면서 나는 여전히 이 길 위에 서서 또 다르게 만나질 사람들과 아름다운 시간들을 기다리기로 한다.
-김영주 시인의 시작 노트 중에서-
한 이민자의 여정에 문학은 에너지였고, 길이였고, 희망이었다.
<임현숙 회장 외 한국문협 밴쿠버지부를 이끄는 임원진들이 인사하고 있다. 모든 사진 출처: 한국문협 밴쿠버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