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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국의 글쓰기
1장 누구나 시작은 막막하다
글 쓰는 일에 자신 있다고 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는 글쓰기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배운 적이 없는 데 어찌 잘 쓸 수 있겠는가.
글쓰기는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작가들의 작가’라 불리는 글쓰기 교수법의 대가 윌리엄진서가 그랬다. “글쓰기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이는 실제로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인간의 행위 중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글쓰기다
글쓰기는 또한 고도의 정신활동이다. 복합적 능력을 요구한다.
일부러라도 자신감을 북돋워줄 필요가 있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내 안에 있는 쓸거리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찾는 게 먼저다.
사람은 하루에 오만가지 생각을 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보고 듣고 느끼는 순간이 무수히 많고, 거기서 얻은 정보가 무의식에 저장된다. 무의식에 저장돼 있는 것을 길어 올려 쓰려면 스스로를 믿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내 안에 쓸거리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 쓸거리는 살아온 시간만큼 축적돼있다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과도하게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면 글이 안 써지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필요한 세 번째 이유는 언제든 내가 쓴 글을 남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면 절반은 진 것이고, 주눅이 들면 완패다.
(청탁병탄) 맑은 것과 탁한 것을 함께 삼킨다.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자신감은 누가 가져다주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나는 글 잘 쓰는 사람’이란 표식을 붙이자.
글쓰기 자신감을 높이는 방법은? 우선 내 글에 호의적인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이다.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또 다른 방법은 매일 글을 쓰는 것이다. 작가는 ‘오늘 아침에 글을 쓴 사람’이라고 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매일 일정 분량을 쓰는 것이 자신감을 높이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일정시간이 아니라 일정 분량을 매일 써보자. 하루 1시간씩 쓰지 말고, 하루 원고지 5매씩 쓰자고 다짐해보자. 시간은 일정하기 때문에 지루하다. 원고지 5매는 다르다.
글로써 목표를 이루겠다고 마음먹는 것도 자신감을 높일 수 있다. 글을 잘 써서 이룰 수 있는 꿈은 많다.
밀운불우라고 했다. 구름 안에 물을 잔뜩 머금고 있는데 비를 뿌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누가 아는가. 언젠가 소나기 같은 폭우가 쏟아지면 곧장 소설이 될 것이요, 또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보슬비처럼 시가 되어 내리는 날이 올는지.
글도 이렇게 써야 한다. 일단 써놓고 하나씩 고쳐나가야 한다. 명문장을 써놓겠다는 욕심으로 첫 문장부터 비장하게 달려들기보다는 허접하게라도 하나 써놓고, 그것을 고치는 것이 심적 부담이 덜하다.
글 쓸 때 욕심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자료에 관한 욕심이다. 아는 것을 표현하는 데도 욕심이 개입한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심도 장애물이다.
“가난의 고통을 없애는 방법은 두 가지다. 재산을 늘리거나 욕망을 줄이는 것. 전자는 우리 힘으로 해결되지 않지만 후자는 언제나 우리 마음가짐으로 가능하다”
-톨스토이
나는 글을 쓸 때 주제 하나에 집중한다. 하고자 하는 말을 어떻게 잘 전달할 것인지에 몰두한다. 감동? 재미? 논리? 이런 것은 그 다음 문제다. 오직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만 생각한다.
주제가 실종되는 경우도 욕심이 앞설 때다.
글은 한정식이 아니라 일품요리로 써야 한다. 백화점이 아니라 전문점이 돼야 한다. 주제 혹은 논지와 관련 없는 내용은 가차 없이 버린다. 그러면 단순해진다.
무엇보다 아는 체하고 싶은 욕심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글쓰기가 어려운 세 번째 이유는 말과 달리 글에는 시간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과 글의 결정적 차이는 시간의 문제다. 말은 곧장 하고, 글은 시간이 주어진다. 글을 쓸 때는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욕심을 부린다. 잘 쓰려고 한다
말은 욕심 낼 여지가 없다. 준비 없이 즉각적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수식이 붙을 틈이 없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으로 곧장 들어간다. 그러나 글은 다르다.
어떻게 욕심을 다스릴 수 있을까?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굳이 이번에 다 쏟아 부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과대포장하고 싶은 욕심이다.
글은 칭찬을 먹고 자란다.
KBS다큐멘터리 (공부하는 인간)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서양과 동양의 학생을 대상으로 공부에 대한 생각 차이를 비교한 실험이다. 서양 학생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때 더 열심히 한다. 동양 학생은 자신이 남보다 부진하다고 생각할 때 더 노력한다. 서양인은 더 잘하기 위해 힘쓰는 데 반해, 동양인은 못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두 가지 점은 분명하다. 서양 학생보다 동양 학생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더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렵다는 것,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렇다
글에는 네 가지 반응이 따른다. 지적, 위로, 격려, 칭찬이다. 지적은 이렇게 고치라고 한다. 위로는 그 정도면 괜찮다고 한다. 격려는 다음에 잘하라고 한다. 칭찬은 잘했다고 한다. 글쓰기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역시 칭찬이다
뇌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신속히 반응한다. 그게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잘 쓴 글보다는 못 쓴 글, 칭찬할 거리보다는 지적할 게 먼저 눈에 띈다.
습관이 의지를 이긴다
나는 요즘 글 쓸 때마다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안경을 쓴다. 안경 쓰는 일이 글쓰기 전 의식이 됐다. 일종의 루틴이다. 루틴은 특정한 작업을 실행하기 위한 일련의 명령 혹은 규칙적으로 하는 일의 통상적인 순서와 방법을 뜻한다.
이런 루틴은 운동선수들이 자주 활용한다. 수영선수 박태환은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기 전 음악을 듣는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는 퍼팅하기 전에 웅크리고 앉아 공의 속도와 커브를 계산한다. 루틴은 운동선수만 쓰는 건 아니다
어떻게 해야 글 쓰는 습관을 들일 수 있냐고 물으면 나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하나는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이다. 일정한 장소, 시간에 반복적으로 글쓰기를 시도해야 하고, 시도하기 전에 의식을 치러야 한다.
무의식이 습관을 만든다. 습관은 강력한 유혹이다. 의지는 습관에 항복한다. 의지는 의식의 사물이다. 의식은 잠깐 마음먹은 일이지만, 무의식은 자기 나이만큼 세월이 커켜이 쌓인 것이다. 그만큼 무의식은 강력하다. 무의식은 항상 의식을 이긴다.
우리의 무의식에 글 쓰고 싶은 마음을 장착해야 한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하기 쉬운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무의식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쉬운 일을 하면 무의식이 발호할 틈이 없다. 글쓰기와 관련된, 자신에게 맞는 쉬운 일을 먼저 찾는다. 그리고 되풀이 한다
쉬운 일과 반복이 만나면 습관이 만들어진다. 반복과 함께 목표, 주제, 장소, 시간도 정해놓은 것이 바람직하다. 나는 하루3줄 이상 쓰는 게 목표다.
매일 쓰면 어렵지 않다. 가끔 쓰는 게 어렵다.
소설가 김훈은 ‘필일오’로 유명하다. 하늘이 두 쪽 나도 ‘하루 필히 원고지5매는 쓴다’는 규율을 스스로 정해놓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하루 5시간쓰기를 생활화하고 있다. 우리도 이렇게 습관을 들이면 김훈이나 하루키만큼 못 쓸까
글 잘 쓰는 비결을 말하라면 나는 ‘3습’을 꼽는다. 학습, 연습, 습관이다.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습관이다. 단순 무식하게 반복하고 지속하는 것이다. 글쓰기 트랙 위에 자신을 올려놓고 글쓰기를 일상의 일부로, 습관으로 만드는 것이다
불가에 돈오점수란 말이 있다. 돈오는 햇빛이 비치는 것처럼 번득 일어나는 깨달음이다. 점수는 거울을 닦아 서서히 밝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불현듯 찾아오는 깨달음, 즉 ‘돈오’에 이르기까지는 ‘점수’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2장 남과 다른 글은 어디서 나오는가
창의성은 글 쓰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핵심역량이다. 어떻게 창의성을 키울까? 첫 번째가 ‘융합’이다. ‘이연현상’이란 게 있다. 서로 관련 없는 두 가지 사실이나 아이디어를 하나의 아이디어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창의적 생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바야흐로 융합의 시대다.
두 번째는 ‘숙고’다. 톨스토이는 지혜를 얻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명상과 모방과 경험이다. 이 가운데 명상이 가장 고상한 방법이라고 했다. 숙고를 말하는 것이다. 숙고는 통상 ‘사유’라고 말하는 생각의 형태다.
세 번째는 ‘감성’이다. 지성보다는 감성이 창의력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네 번째는 ‘연결’이다. 연결을 통해 새로운 것을 연상해내는 능력이 창의력이다.
다섯 번째는 ‘직관’이다. 한때 ‘척 보면 압니다’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직관은 생각해보지 않고 즉각적이고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다.
창의적 글감을 찾을려면 흔한 방법은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환경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일상에서는 다른 생각을 할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이 창의적인 이유다
‘어른은 낯선 것을 익숙하게 만들고, 아이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본다’는 말이 있다. 학자는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해주고, 예술가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해준다. 글 쓸 때는 어른의 익숙함과 학자의 노력, 그리고 아이의 낯섦과 예술가의 시선을 겸비해야 한다.
반대로,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려면 어린아이나 여행자의 시선이 필요하다. 예컨대 내가 한국에 처음 온 사람이라면 교회, 커피숍이 즐비한 것에 놀랄 것이다. 지구에 처음 온 외계인처럼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창의적인 글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때론‘휴식’도 창의적인 글감을 만든다.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것이다. 바쁨은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작가들은 그래서 권태를 즐긴다.
‘유쾌함’도 중요하다. 엄숙하지 않아야 한다. 진지하기보다는 유쾌할 때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다.
창의는 ‘양’에서 나오기도 한다. 양질전화의 법칙이 적용된다. 양의 증가가 질의 변화를 가져온다. 반응이 없다가 계단식으로 상승한다. 세상일이 대부분 이런 궤적을 밟는다. 조급증과 답답함을 이겨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마치 대나무가 ‘퀀텀리프’하듯
창의적인 글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필연적 결과물이다. 결과물은 투입이 있어야 나온다.
글 쓰는 ‘공간’도 창의성에 영향을 미친다. 창의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방은 지저분한 경우가 많다. 언제나 본 아이슈타인의 책상 사진도 그랬다.
글쓰기에는 관심, 관찰, 관계라는 ‘3관’이 필요하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면 관점이다. 관심이 관찰하게 하고 관점을 만든다. 있는 세상도 ‘관찰’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사물이나 사람을 잘 관찰하는 사람은 시와 소설을 쓴다. 기자는 사건을 잘 관찰하는 사람이다.
때로는 관심을 끊고 관찰을 멈추고 관계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다. 세상일에 관심을 끊고 나만의 세계에 파묻혀 살 필요도 있다. 관찰하는 대상은 이미 있는 것이고, 남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 나만의 것을 만들기 위해선 관찰을 멈추고 나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나만의 관점을 만들어야 한다
소재가 없어 못 쓴다고 경험이 없다고 핑계 댈 일이 아니다. 보지 못한 나를 탓해야 한다
‘컬러 배스 효과(color bath effect)’ 한 가지 색깔에 집중하면 그 색 물건만 눈에 띄는 현상이다. 무언가를 의식하면 그것만 눈에 보이게 마련이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세계가 있다. 수천, 수만 가지 세계가 있다. 직업의 세계도 있고, 취미의 세계도 있고, 정치·경제·문화의 세계도 있다. 모든 세계에는 저마다 우주가 있다. 밖에서 보면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 그 안에 들어가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엄청난 사실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있다.
일생을 살면서 우리는 세계를 몇 가지나 경험하고 떠나는가. 아니,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할까. 얼마나 많은 미지의 세계를 남겨두고 떠나는가. 글감이 없다는 소리는 응석에 불과하다. 관심만 가지면 된다. 관심의 지경만 넓히면 된다
남들 말에 현혹되지 말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들여다본 지점까지만 내 세상이다. 그 밖은 없는 세상이다. 없는 세상에 관한 내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것만 실재하는 세계이고, 글쓰기 대상이 된다. 관찰한 만큼 보이고, 보인 만큼 쓸 수 있다.
관찰에도 단계가 있다. 1단계는 눈에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글로 옭겨 보는 것이다. 이른바 묘사다.
2단계를 느낌을 말하는 단계다. 감상을 쓰는 것이다.
3단계는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단계다. 나름의 시각과 관점, 해석, 그리고 해법을 쓴다.
4단계는 내 주관과 기준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비판하는 단계다.
5단계는 나를 보는 것이다. 양심과 정의감은 여기서 나온다
마지막은 없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 그 너머를 보는 것이다. 시나 소설 같은 문학에 필요한 눈이다. 글을 쓰는 데는 네 개의 눈이 필요하다. 육안은 사물을 본다. 지안은 생각을 본다. 심안은 느낌을 본다. 영안은 너머를 본다
평소 쓰기 위한 네 가지 도구
-독서, 토론, 학습, 메모
평소에 자신의 생각을 생성, 채집, 축적해두어야 한다. 써둔 글에는 이자도 붙는다. 써둔 글이 늘어나면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평소에 꾸준히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을 만들어내는 ‘도구’가 필요하다. 첫째가 독서다. 책을 한 권 읽었는데 자기 생각이 새롭게 만들어진 게 없으면 헛 일이다. 남의 생각을 알기 위해 하는 독서는 부질없다. 남의 생각을 알고 싶으면 검색만으로도 충분하다. 독서하는 이유는 자기 생각을 만들기 위해서다. 남의 생각을 빌려 자기 생각을 만드는 게 독서다
둘째, 토론 역시 생각을 만드는 필수도구다.
셋째, 학습이다. 내준 문제를 풀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생각이 만들어지고 진정한 학습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문제분석은 잘하는데 문제 제기와 문제 해결 능력은 약하다. 주어진 문제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역량은 읽기와 듣기를 많이 하면 키워진다. 그러나 문제 제기에는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고, 문제 해결 능력에는 창의적 사고가 필요하다. 이는 말하기와 글쓰기로 길러진다
끝으로, 메모다. 독서, 토론, 학습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메모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메모하지 않은 것은 모두 잊히게 마련이다.
평소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글쓰기 근육을 키우라. 그리고 써야 할 글이 있을 때 단련돼 있는 근육을 사용한다. 나무에 빗대 얘기하면, 평소 글을 쓰는 것은 뿌리를 내리는 일이고, 써야 하는 글을 쓰는 것은 꽃과 열매를 맺는 것이다.
호기심이 인류역사의 진보를 가져왔다. 연애할 때는 상대의 모든 것이 궁금하다. 그래서 결혼한다. 결혼하기 때문에 번식이 가능했고 인류가 절멸하지 않을 수 있었다. 모든 발명품은 호기심이 낳은 결과물이다
질문은 글쓰기의 출발점이다. 의문을 갖고, 문제의식을 갖고, 호기심을 갖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건 직장에서건 질문하기를 꺼린다. 왜 질문을 안 할까. 대부분이 주위 사람 눈치를 본다. 나대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질문하는 공부가 아닌 정답 맞히는 공부를 했다. 이래서는 자기 생각을 갖기도, 글을 쓰는 것도 쉽지 않다
글쓰기가 어려운 것은 질문하는 훈련이 안 돼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대답하는 데에 익숙하다. ‘이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답하는 것은 ‘지식’이다. 반면 글쓰기는 스스로에게 ‘이것은 무엇이냐’라고 묻고 답하는 것이다. 글을 쓰려면 문제를 푸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문제를 푸는 사람은 읽는다. 문제를 내는 사람은 묻고 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궁금증을 타고 난다. 아이가 말을 시작하면서부터 만 세 살까지 무슨 단어를 가장 많이 쓰는지 조사해봤더니, 첫째가 ‘엄마’이고 두 번째가 ‘왜’였다. 우리 모두 어릴 적에는 질문이 많았다. 크면서 질문이 사라졌다. 이와 함께 호기심도 사라졌다.
글쓰기 전에 스스로에게 세 가지를 물어야 한다,
‘무엇에 관해 쓰지?’ ‘왜 쓰지?’ ‘어떻게 쓰지?’
‘어떻게 하면 잘 쓸까?’를 묻는 사람과 ‘어떻게 하면 잘 읽힐까?’를 질문하는 사람은 다르다.
질문은 내 안의 글감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이다.
“이른 아침 산책의 기대로 마음이 설레어 잠에서 떨쳐 일어나지 않는다면, 첫 파랑새의 지저귐이 전율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눈치채라. 당신의 봄과 아침은 이미 지나가버렸음을”
-헨리 데이비드 소로
글이 잘 써지는 때가 있다. ‘진짜’감정을 느꼈을 때다. 문제는 이런 감정이 수시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가짜 느낌을 진짜처럼 써야 한다
나는 감성으로 글을 쓰는 게 이성으로 쓰는 것보다 쉽다. 완성도 면에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대표적인 경우가 밤에 쓰는 연애편지와 어머니께 쓰는 글이다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이성은 열정의 노예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감정이 먼저다.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 내 느낌이 어떤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살펴야 한다. 그런 다음 이성이 등장해도 늦지 않다
글을 쓰려면 자신의 마음, 자기가 느끼는 감정을 알아야 한다. 정서가 풍부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진짜 좋은 글은 감정을 억제하고 쓴 글이다. 그리하여 독자에게 필자보다 더한 감정을 느낄 기회를 주는 글이다
재미는 글의 첫 번째 요건이다. 재미있는 글을 쓰려면 우선 글 쓰는 사람이 즐거워야 한다. 글과 함께 노는 것이다.
재미있는 제재를 머릿속에 많이 넣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다
글쓰기에 필요한 생각은 6가지다. 지식, 해석, 경험, 느낌, 상상, 통찰이다.
인간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는 그저 신을 믿었다. 철학하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중세에 다시 신에게 그 자리를 내줬다가 르네상스 때 찾아왔다. 생각의 역사는 생각보자 짧다
생각은 두 종류다. 처음 든 생각(직감)과 다듬어진 생각이다. 글을 잘 쓰려면 둘 다 필요하다.
뭐니뭐니 해도 생각을 만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다. 책 읽기가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남의 생각을 바탕으로 내 생각을 만들어야 한다
난 먼저 텍스트를 읽는다. 그리고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를 파악해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배경, 의도, 목적, 취지, 원리 같은 것이다. 바로 이 공간이 영감을 주고 내 생각을 만들어준다.
텍스트 이해 → 콘텍스트 파악 → 자기화 과정을 거쳐 내 생각이 탄생한다.
요즘 강의에 가면 ‘3기’를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기본이다. 두 번째는 기둥이다. 세 번째는 기술이다.
글쓰기는 ‘기본’이란 기틀 위에 ‘기둥’을 세운 후 ‘기술’을 써서 지붕을 얹고, 내부 인테리어를 하는 것이다.
마음이 사람을 향하면 공감, 사물을 향하면 호기심, 사건을 향하면 문제의식, 미래를 향하면 통찰, 나를 향하면 성찰이 된다. 이 모두가 글감이 나오는 통로다. 이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공감이 된다. ‘사람’이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공감능력을 타고 태어난다. 신이 인간의 뇌에 장착해놓은 거울신경세포, 즉 공감장치가 작동. 맹자는 이를 ‘측은지심’이라 칭하면서 인간의 본심이라고 했다
우리는 모방하면서 말과 글을 배웠다. 자기 글이 독창적이라고 확신하는 그 누구도 모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모방에 돌팔매질할 수 있는 사람은 태초의 창조자 말고는 없다고 단언한다. 어차피 좋은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다 해버렸다. 좋은 음악은 베토벤이 다 만들어버렸다. 그나마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겨놓은 것을 니체가 다 써먹었다. 하늘 아래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클리셰(판에 박힌 듯 한 문구 또한 진부한 표현)가 글의 무덤이라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진부한 표현을 삼가라면서, 역설적이게도 글쟁이들은 자기만의 클리셰를 갖고 있다.
우리도 자기만의 클리셰를 갖자. 모든 글은 이미 있는 글의 변형이다.
모방에도 두 갈래가 있다. 형식을 빌려쓸 수도 있고, 내용을 베낄 수도 있다.
미메시스는 그리스어로 모방이라는 뜻이다. 플라톤은 신이 창조한 이상적인 형태, 즉 ‘이데아’를 모방한 것이 예술이라고 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집’이라는 이데아가 있고, 집을 지은 목수는 그것을 모방한 것이며, 집을 그린 화가는 그것을 다시 한 번 모방한 것이다. 화가나 작가는 허구를 좇는 존재라며 예술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인간은 모방하는 능력이 있으며 모방에서 기쁨을 느낀다. 이 점에서 인간은 동물과 구별되며, 모든 지식은 모방으로 습득된다”
3장 쓸수록 산으로 가지 않으려면
글은 단어의 나열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적절한 단어를 내 머리에서 뽑아내는 과정이다. 단어가 모여 문장을 이루고, 문장이 모여 문단을 만들고, 문단이 모여 글이 한 편 완성된다. 그러므로 글을 잘 쓰려면 단어를 잘 써야 한다.
어휘력이란?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능력이다. 나아가 나의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고, 사물이나 현상을 묘사할 때 떠올릴 수 있는 단어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이다.
글쓰기도 기초가 탄탄해야 한다. 그런 기초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문장력, 즉 문장을 잘 쓰는 능력이다.
좋은 문장을 쓰는 방법은 첫째, 단문으로 쓰는 것이다. 둘째, 문장 성분 간 호응은 필수다. 셋째, 수식어는 절제한다. 넷째, 주어에 신경 쓴다. 다섯째, 피동문은 가급적 피한다. 여섯째, 수사법에 관심을 갖는다. 일곱째, 어미를 다양하게 써보자. 여덟째, 가급적 동사형 문장을 쓴다. 끝으로, 문장을 쓰고 나면 소리 내 읽어보자
문장력을 기르는데 독서보다 더 빠른 방법이 있다. 즉 베껴 쓰는 것이다. 신경숙 작가는 필사는 많이 한 대표적인 작가다. 문장력을 키우기 위해 그랬다고 한다.
책이나 영화 대사 가운데 멋있는 말을 뽑아 자기만의 사전을 만들어보라.
암기는 더욱 강력하다. 대형서점에 가면 필사하기 좋은 책을 모아놓은 코너가 있다. 그곳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골라 읽어보라. 읽다가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문장을 암송해보자
조선시대 선비들은 글을 암송했다. 과거시험 작문을 그 힘으로 썼다. 이를 독서백편의자현이라고 한다. 백 번 읽었으니 외울 수 있고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공이 있다. 전 국민에게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한 것이다. 씁쓸하지만 우리 국민의 문장력을 향상하는 데에는 적잖게 공헌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몰입하는 6가지 사례
첫째, 간절할 때다. 간절함이 몰입으로 이끈다.
둘째, 위기감조성이다. 몰입을 일으키려면 공포감이 필요하다. 인간은 위기감을 느끼거나 두려운 순간에 집중한다. 초인적인 능력을 끌어올린다.
셋째, 마감시한을 정해놓는 것도 방법이다.
넷째, 관심분야를 갖는다
사람은 관심 갖는 분야가 있고, 그것에 몰입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연애편지를 쓰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없다.
다섯째, 글과 노는 것이다
여섯째, 프로페셔널을 지향한다
글의 재료는 두 군데서 나온다. 상기와 상상이다. 과거 경험, 어디선가 보고 듣고 읽은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 이른바 상기다. 상기는 과거의 것이다. 반면 경험하지 않은 것, 바라는 미래, 벌어질 수 있는 일을 추측하거나 계획하거나 예상하는 것은 상상이다.
상상은 미래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글은 기억과 상상으로 쓰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일은 기억하고, 미래의 일은 상상하면서 말이다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기억이 중요했다. 말하는 사람은 기억에 의존해 말하고, 듣는 사람에게도 기억에 남게 말해야 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문자로 남겨두면 사람들의 기억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이유로 문자를 사용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그 정도로 기억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모든 순간은 지나간다. 기억으로 남을 뿐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내 것이 아니다. 기억만이 내 것이다. 기억의 축적이 내 인생이다. 기억이 없으면 나는 없다. 기억이 나의 정체성이다. 기억은 의식에도 있고 무의식에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무의식에 있는 기억이다. 의식 속 기억은 그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양이 무한하다. 무의식 속 기억이 백사장이라면, 의식 속 기억은 한줌 모래알에 불과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이다. 기억은 또한 죽은 것도 살려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은 무덤이 아니라 내 기억 속에 묻혔으니 내가 죽지 않는 한 그들도 죽지 않고 살아간다고. 인생에서 남는 것은 기억뿐이다. 글로 쓴 추억만 남는다
과거 소련의 정치인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 글쓰기도 그렇다. 미국 수필가 E.B 화이트 말대로, 인류가 아니라 한 인간에 관해 써야 한다. 그래야 마음을 움직인다
1955년 심리학자 조셉 러프트와 하리잉햄은 사람의 마음에는 네 가지 창이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의 이름을 딴 ‘조하리의 창’이다. 나도 알고 상대방도 아는 ‘열린 창’, 나는 알지만 상대방이 모르는 ‘미지의창’, 나는 모르는데 상대방은 아는 ‘장님의 창’, 나도 상대방도 모두 모르는 ‘암흑의 창’이 그것이다. ‘열린 창’과 ‘암흑의 창’은 글쓰기에서 관심 밖이다. 나도 알고 독자도 아는 내용은 흥미로운 얘기일 수 없다. 나도 모르고 독자도 모르는 내용은 모르기 때문에 쓸 수 없다
글쓰기에서 주목해야 할 영역은 ‘미지의 창’이다. 나는 알고 있지만 독자가 모르는 부분이다.
교육심리학에서 ‘체계적 둔감법’이란 게 있다. 불안, 긴장, 공포를 단계적으로 줄여나가는 기법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불안이나 공포를 덜 일으키는 자극에서 시작하여 점차 더 강한 자극에 자신을 반복 노출하는 것이다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는 20만 년 전에 출현했다. 그리고 7만 년 전부터 생각하기 시작했고, 불과 6천 년 전부터 문자를 사용했다. 글을 쓰지 않은 19만 4천년동안 글쓰기를 담당하는 뇌 부위는 따로 없었다. 보고 듣는 것을 관장하는 부위가 원래부터 뇌에 있었다. 반면 글쓰기는 다른 일을 해오던 뇌 부위를 빌려서 쓰고 있다. 한마디로 셋방살이하고 있는 것이다. 눈치 보이고 언제 쫓겨 날지 불안하다. 그래서 보고 듣는 것보다 쓰기가 어렵다
희망은 있다. 글쓰기 좋은 뇌를 만드는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쓰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읽지도 않는다. 잘 읽는 사람이 쓰거나, 읽지 않는 사람이 잘 쓰는 경우는 없다. 다시 말해 읽는 사람은 더 잘 읽고 쓰는 사람은 더 잘 쓴다
이에 따라 세상은 둘로 나뉜다. 읽는 사람과 안 읽는 사람, 혹은 쓰는 사람과 안 쓰는 사람.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읽는 사람은 읽는 사람끼리 어울리면서 서로 자극을 더 주고 받는다. 쓰는 사람도 쓰는 사람끼리 모여 잘 쓰려고 노력한다. 안 읽고 안 쓰는 사람은 그들끼리 모인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신약성경 마25:29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4장 실제로 글은 어떻게 쓰는가
단순히 ‘예쁘다’고만 하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코가 어떻게 생겼고, 눈이 어떻게 생겼고, 입이 어떻게 생겼다고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그러면 독자는 머릿속으로 떠올린다. 그러고 나서 ‘아, 정말 예쁘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추상적으로 쓰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거대 담론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주변 얘기에 움직인다. 이론 말고 실제, 의도 말고 실행, 원칙 말고 실천 내용을 써야 하는 이유다. 거창한 것이나 관념적인 것보다 구체적이고 생생한 것,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쓰자
청각은 인간의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예민한 감각이다. 죽기 직전, 모든 신체기관이 정지 상태에 이를 때까지 청각만은 살아서 소리를 듣는다.
당신은 말하기가 쉬운가, 글쓰기가 쉬운가. 나는 쓰기가 쉽다. 글 뒤에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은 즉답해야 한다.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순발력이 필요하다. 그에 반해 쓰기는 시간이 주어진다. 생각할 시간이 있다.
나는 자서전 쓰기 강의에 가면 얘기한다. 쓰고 싶은 내용에 관해 누군가에게 말해보라고. 10시간 말할 수 있으면 책이 된다고 얘기한다.
나는 글을 두 단계로 나눠쓴다. 1단계로 쓰고, 2단계로 고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쓰면서 고친다. 그래서 글쓰기가 힘들어진다. 쓰면 고치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일단은 쓰고 나서 고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자.
나는 세 가지를 고친다. 먼저, 빠진 것이 없는지 본다. 다음으로, 뺄 것이 없는지 본다. 마지막으로, 순서를 바꿀 것은 없는지 살펴본다.
글에 정답은 없지만 오답은 있다. 오답을 적게 쓰면 잘 쓰는 것이다. 오답을 줄이는 과정이 퇴고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오답노트가 머릿속에 있다. 거기에 맞춰 글을 고친다.
글쓰기 능력은 글 고치기 능력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잘 쓴 글은 없다. 잘 고쳐 쓴 글만 있다. 글쓰기는 고치기 승부다. 글쓰기 능력은 고치기로 향상된다. 퇴고는 가장 좋은 글쓰기 공부다. 인생도 퇴고의 연속이다. 일단 쓴 원고처럼 훌쩍 저지르고, 평생 퇴고하며 살아간다
내 얘기만 책에 써야 하는 것도 아니다. 책 쓰기 대상이 되는 내용은 세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내 얘기다. 두 번째는 남의 얘기다. 세 번째는 내가 마음에 품고 있는 걸 쓰는 것이다. 자신의 상상, 희망, 꿈을 쓴다.
팔리지 않을까봐 책을 못 쓴다는 분께 드리는 답변은 한마디다.
“일단 쓰고 말하자”
사람에게는 니즈(needs, 결핍, 필요조건)와 원츠(wants, 욕구, 충분조건) 라이크스(likes, 선호, 필요충분조건)가 있다. 배가 고파 먹을 거리를 찾는 것은 니즈다. 원츠는 먹고 싶은 것이다. 라이크르는 좋아하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니즈로 썼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은 원츠로 쓴다. 언젠가 내가 소설을 쓴다면 그건 라이크스다
5장 사소하지만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글쓰기 환경
글 쓰는 사람은 태생이 ‘관종’이다
글을 쓰는 이유는 나의 글로써 무엇인가를 움직이고 변화시키고 이루고 이바지하기 위해서다. 적어도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투명 인간으로 살기 싫어서다
글쓰기 강의에 가면 자기표현과 의사소통 가운데 어디에 방점을 찍어 써야 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글은 두 가지 모두를 충족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 드러내기와 남과 소통하기.
나는 두 단계로 분리해서 쓰는 게 답이 아닐까 싶다. 1단계에선 자기 생각을 가감없이 관종이 되어서 쓴다. 다시 말해 자기 생각을 드러낸다. 2단계로 독자의 눈치를 보며 독자에게 빙의해서 독자의 눈으로 고친다
독자는 세 가지를 원한다. 재미와 효용과 감동이다.
내게는 글과 관련한 세 공간이 있다. 먼저, 머릿속 빈 공간이다. 두 번째 공간은 마음속에 있다. 판단하고 결정하는 공간이다. 세 번째 공간은 자연 속에 있다. 네 번째 공간은 내 글의 독자 안에 있다.
(어머니 은혜)를 부를 때는 진심만 있으면 된다. 글도 진정성만 있으면 절반은 성공이다.
글을 잘 쓰려면 잘 살아야 한다.
글도 잘 쓰고 공부도 잘하려면 성실해야 한다. 공부든 글이든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한다. 자리에 앉아 있어야 써지는 게 글이고, 깨우쳐지는 게 공부다.
사람은 언제 행복할까? 먹고 싶은 것을 맘껏 먹을 때? 갖고 싶은 것을 가졌을 때? 이성과 사귈 때? 물론 이런 때도 기분이 좋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구분할게 있다. 쾌락과 행복의 차이다. 둘을 자주 헷갈린다.
쾌락은 유쾌하고 즐거운 감정이다. 본능과 관련이 있다. 우리 뇌의 저 안쪽에 있는 뇌간이 관여하는 ‘느낌’이다. 뇌간은 파충류의 뇌라고도 하는데, 인간이 최초로 갖고 있던 뇌다. 그것에서부터 뇌가 진화해왔다. 인간은 파충류의 뇌를 아직도 갖고 있으며, 이것이 식욕과 성욕 등을 관장한다. 쾌락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동일하게 느낀다. 그러나 지속성이 없다. 순간적이다. 그때만 즐겁다. 잠깐 행복할 뿐이다.
지천명, 하늘의 명을 안다는 쉰 살이 넘어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이런 때다. 모르던 것을 알고 깨달았을 때, 한 가지 일에 깊이 빠졌을 때, 내가 유능하다고 느낄 때, 무언가 성취할 때, 인정받을 때, 누군가와 관계가 좋을 때, 마음이 고요할 때, 만족하고 감사할 때, 남을 돕거나 남과 협력할 때, 가치 있는 일을 추구할 때, 정의로운 편에 서있다고 느낄 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라 느낄 때다
첫 번째, 자존감을 느낄 때다. ‘내가 그래도 이만큼은 되는구나’하고 존재감을 느낄 때 뿌듯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없는 사람처럼, 투명인간으로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말과 글이 없던 때도 동굴에 벽화를 그려 자신을 표현하고자 했다
우리 몸은 먹은 것을 잘 배출해야 탈이 없다. 정신도 마찬가지다. 읽고 들은 것을 말하고 써서 출력해야 정신적 신진대사가 원활하게 작동한다.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가 활발하게 선순환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읽기, 듣기에 그친다. 말하기, 쓰기로 확장되지 않는다.
두 번째, 인정받을 때다. 스스로 만족하는 수준을 넘어 누군가가 나를 알아줬을 때 행복하다. 누구나 인정받기 위해 산다.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투쟁한다고 했다. 자기 안에는 두 사람의 내가 존재하는데, 나 스스로 이렇다고 생각하는 ‘나’가 있고, 남들이 생각하는 ‘나’가 있다. 사람은 남이 생각하는 ‘나’와 나 스스로 생각하는 ‘나’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력한다. 남들이 보는 ‘나’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
호네트는 인정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첫 번째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서 얻는 인정이다. 두 번째, 평등한 대접과 같이 사회에서 받는 인정이다. 세 번째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공적 인정이다. 이를 통해 자긍심을 느낀다
세 번째, 성취할 때다.
네 번째, 탐닉할 때다. 탐닉은 그 자체가 희열이다. 몰두하려면 관심분야가 있어야 한다. 그 관심분야가 남의 반응을 유발하고 무엇보다 나의 미래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다섯 번째, 축적했을 때다. 사람은 축적이 일어나야 욕심을 내고 더 열심히 하려고 한다. 싸라기 눈은 쌓이지 않는다. 함박눈이 와야한다. 집중적으로 와야 한다. 그러면 쌓인다. 눈이 쌓이면 눈싸움을 할까, 눈사람을 만들까 궁리한다. 그럴 때 행복하다
여섯 번째, 호기심이 충만할 때다. 누군가 그랬다. “지식의 영토가 넓어지면 그 넓어진 영토를 따라 해안선이 길어지고, 길어진 해안선을 따라 모든 게 궁금해진다”
일곱 번째, 알고 깨우쳤을 때다. 또한 우리는 무언가 알려주는 사람에게 호감이 간다. ‘저 사람이 나를 대접해주는구나’이런 마음이 들 때 행복하게 일한다.
여덟 번째, 성장할 때다. 아리스토렐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한 말이다. 인간은 탁월함을 추구할 때 행복하다. 탁월함에는 지적 탁월함과 성격적 탁월함이 있다. 지적 탁월함, 즉 지혜와 통찰 같은 것은 배움에서 생기고, 성격적 탁월함, 즉 관용과 절제 같은 덕스러운 품성은 습관에서 얻어진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
아홉 번째, 관계가 좋을 때다. 관계는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경쟁할 때는 왠지 불안하고 초조하다. 남과 협력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신영복 선생님은 (담론)에서 관계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고 했다. 관계를 만드는 것 역시 말과 글이다. 말 한마디, 글 한 줄이 관계를 좋게도 나쁘게도 한다
열 번째, 꿈이 있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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