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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마틴 지음 / 이순 옮김 / 가톨릭 출판사
1. 작가소개
- 제임스 마틴
예수회 신부이자 가톨릭 주간지인 [아메리카]의 부편집장이다. 와튼 경영 대학원 졸업 후 1988년 예수회에 들어가기 전까지 금융회사에서 6년간 일했다. 수련기 동안 자메이카의 킹스턴에서 병자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호스피스 봉사를 했고, 시카고에서는 거리 갱 단원들과 함께, 보스턴에서는 교도소 원목으로, 그리고 케냐의 나이로비에서는 2년 동안 동아프리카 난민들과 더불어 일했다. 그는 신학과정을 마친 뒤 1999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마틴 신부는 다양한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고 있으며, [참된 벗을 찾아서], [우리 시대의 유랑자:동아프리카 난민들과 함께하는 영혼의 여행]등의 저서가 있다.
- 이 순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0년 동안의 외국생활 후 2000-2004년 서울대교구 시노드 사무국에서 근무하였고, 2005년부터는 통합사목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2006-2008년 영한대역 월간 복음묵상집『말씀지기』의 번역과 편집을 담당하였다. 역서로는 호세 마린스/테올라이트 M. 트레비잔, 『작은 교회』, 통합사목연구소, 2005가 있다.
2. 내 마음에 다가온 글귀
머리말: 거룩한 사람들은 즐겁습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즐겁습니다. 왜냐고요? 거룩함은 우리를 모든 기쁨의 원천이신 하느님에게 이끌기 때문입니다. (p24)
☞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우리는 즐거워야 한다.
당신에게 주일은 즐거운 날입가요? 주일은 꼭 즐거운 날이 되어야만 합니다.(P32)
우리는 기쁨과 유머, 웃음이 신앙생활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다는 생각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것들이 바로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p36)
☞ 신앙생활은 기쁜 것이다. 그래서 복음이다.
1장: 웃음은 기도의 시작입니다
기쁨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 경험하게 될 기분입니다. 하느님을 뵙게 된다면 기뻐서 웃음이 저절로 나겠지요. 하느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인 기쁨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표징일 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경전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예수회 사제인 피에르 데이야흐 드 사르댕이 말했듯이 “기쁨은 하느님 현존의 가장 확실한 표징”입니다.(P47)
☞ 하느님은 기쁨이시다
악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뭘까 내기한다면 난 웃음에 걸겠어요. 기쁨, 유머, 웃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 선물인데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것들을 너무도 소홀히 합니다.(p49)
아기들은 엄마의 얼굴만 보고 순전히 그냥 좋아서 웃습니다. 웃음은 참으로 인간적인 행위입니다.(P52)
☞ 잃어버린 웃음을 찾자. 가톨릭 신자들은 잃어버린 웃음을 찾아야 한다.
웃음이 본래의 범주인 ‘즐거움’을 굳건히 고수하여 ‘비웃음으로’ 넘어가지 않은 한, 인간의 웃음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세상에 대해 저절로 샘솟는 기쁨의 표현입니다.(P57)
☞ 웃음은 선물이다. 웃지 않는다는 것은 선물을 선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늘 기뻐하십시오.“(필리 4,4)하고 독려합니다. 기쁨은 전통적인 ’성령의 열매‘, 즉 우리를 굳건하게 하기위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의 하나입니다.(P63)
☞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며, 하느님의 선물임을 잊지말자
종교적인 사람에게 기쁨이란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입니다. 기쁨은 잠깐의 느낌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확고한 결과입니다.(P65)
종교적인 기쁨은 언제나 관계에 대한 기쁨입니다. 이 기쁨에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은 바로 하느님입니다.(p65)
☞ 진정한 기쁨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다.
기술 혁신의 사회에서 즐거움을 누릴 기회는 많아졌지만 기쁨을 만들어내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다른 원천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영적인 데서 옵니다.(p66)
☞ 또한 기쁨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삶에서 충분히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가 기쁨에 넘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p70)
☞ 하느님을 만나면 삶이 기쁠 수밖에 없다
기쁨은 가장 고귀한 인간의 행동이다.(토마스 아퀴나스 성인) (p71)
우리는 왜 기쁨에 넘치는 사람들에게 저절로 끌리는 걸까요? 저는 그에 대한 한 가지 이유가 기쁨이 하느님 현존의 표징이며 하느님의 현존은 당연히 우리를 매료시키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p72)
☞ 하느님의 현존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우리들의 의무는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 때 이루어진다.
2장: 과연 예수님은 웃으셨을까요?
아버클 신부는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넣는 사람,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 아들에게 빵대신 돌을 주는 아버지처럼 예수님이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표현하신 많은 비유들을 들으면서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마도 무척 재미있게 웃었을 거라고 말합니다.(p80)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일부러 지어내고 그분의 청중들은 금세 알아들었을법한 많은 유머를 우리가 놓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p81)
☞ 예수님은 또한 완전한 인간이셨다. 우리는 복음 안에 숨어있는 많은 유머를 놓치고 있다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요한 13,9) 큰소리치는 베드로를 보고 기가 막힌 듯 속으로 웃으시면서 “거참, 내말은 그게 아닌데 …… ” 라고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나요? (p87)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시편 98,4) 우리의 기도는 이런 즐거움을 나타낼 수 있고 또 나타내어야 합니다. 시편 저자는 노래합니다. “기뻐하며 주님을 섬기라.”(시편 100,2) 기쁨이 넘치는 웃음이 한 줄기 빛처럼 이스라엘인들이 입을 모아 부르는 노래 전체에 흐릅니다.(p98)
☞ 그리스도인은 기쁨으로 살아야하는 사람들이다. 웃음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구약에서 기쁨은 감사를 종교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p98)
기쁨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그들은 여러 경우에 자신들의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기뻐하고 노래하였으며 때에 따라서 웃음도 터뜨렸습니다.(p99)
☞ 기쁨은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에도 즐거운 순간이 자주 나옵니다. 가장 유명한 비유 중 하나인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방탕한 아들이 집으로 돌아와 용서를 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자애로운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기쁨의 잔치’를 준비하는 한편, 그 기쁨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큰아들을 타이릅니다.(p103)
예수님이 농담을 하거나 웃으신 이야기들이 적다고 해서 그런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음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웃으셨을 게 분명합니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그분을 막대기같이 딱딱한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p104)
☞ 지극히 인간적인 예수님이기에 예수님도 분명히 웃었을 것이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삶을 즐길 줄 아셨고, 심지어 장난스럽기까지 하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많은 비유 이야기에서뿐만 아니라 예수님 시대의 남자, 여자, 아이들과 교류하는 그분의 모습에서 단편적이나마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애트리지 교수는 “예수님의 비유는 깜짝 놀랄 정도로 위트가 있고 듣는 이들의 허를 찌른다.”라고 말했습니다.(p113)
예수님의 비유들은 정말이지 코미디감입니다. 기대는 좌절되고, 가난한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르고, 부자는 바보임이 드러납니다. 또한 많은 비유들은 과장법을 사용해서 더 재미있습니다.(p114)
그런데 그 시대의 청중들이 이 이야기를 들을 때는 몹시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한 탈렌트’가 15년치 노동자 임금과 맞먹는 액수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하인 한 명에게 그토록 엄청난 돈을 흔쾌히 건넸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무척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점을 강조하기 위해 약간의 재미있는 과장을 하신 것입니다.(p114-115)
☞ 복음서는 역설적이며, 효과적인 전달을 위하여 많은 부분이 과장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읽지 않으면 많은 부분을 놓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말한다.”(마태 11,19) 다시 말해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지나치게 활기차고 유쾌하다고 해서 비난을 받았습니다. (p115)
☞ 먹고 마시며 세상을 즐기셨던 지극히 인간적인 예수님
저는 예수님을 떠올릴 때, 그분이 단지 아픈 사람을 낫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폭풍우를 잠재우고, 복음을 전파하시는 분으로만 생각되지 않습니다. 제가 상상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호의와 연민이 넘치고, 삶에 대한 열정에 불타며, 어떤 논쟁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신이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모습으로 자유롭게 살며, 멋지고 풍부한 유머가 가득하신 분입니다. 또한 활기가 넘치고, 장난을 좋아하며, 잘 웃으시는 분입니다.(p119)
예수님은 의심할 여지없이 한 인간이십니다.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분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먹고 자고 화내고 조바심내고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시는 모습을 제자들은 보았습니다. 더욱이 육체적으로 괴로워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럽게 돌아가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분명히 인간이었습니다.(p120-121)
☞ 하느님이시면서 인간이신 예수님
그리스도인들이 정말로 예수님을 ‘완전한 인간’이라고 믿는다면 그분이 유머 감각을 지녔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유머는 ‘완전한 인간’을 이루는 요소니까요.(p122-123)
우리가 예수님이 인간이심을 받아들인다면 그분에 대해 모든 인간적인 속성을,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물론 웃는 것까지도 인정해야 합니다.(p123)
☞ 예수님은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함께 한 완전한 인간이셨다
제 생각에 예수님은 현명하고 재치 있으며 재미도 있는 분이셨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분이 지어내신 비유에서, 로마 권력자들에게 던지는 생생한 농담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하시는 신랄한 응수에서, 심지어 즉석 발언에서까지 그분의 유머는 두드러집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종종 굉장히 둔감한 제자들을 유머 감각도 없이 꾹꾹 참아 내기만 하는 그분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렵습니다. 신적인 면에서는 세상의 부조리한 모습을 보고 빙그레 미소 짓지않는 그분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렵습니다.(p125)
그 시절 자캐오가 입은 것은 아마도 가운 같은 헐렁한 옷이거나,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이 입던, 소매가 없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웃옷인 튜닉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성경 학자가 말했듯이, 아래에 있는 군중들에게는 자캐오의 아랫도리가 훤히 보였을 것입니다. 위엄을 잃은 세관장 이야기가 두 배로 더 재미있어지지 않나요?(p126)
☞ 노팬티의 자캐오를 상상해 보자.
기쁨에 관한 연구
대부분의 찬양 시편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기쁨입니다. 사실 기쁨은 시편의 많은 부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시편의 첫 단어가 바로 ‘행복하여라!’입니다.(p133)
기쁨, 행복, 즐거움을 찾아내기 위해 시편을 샅샅이 뒤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리는 마음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니까요.(p133)
“사막의 풀밭에도 방울져 흐르고 언덕들은 기쁨으로 띠 두릅니다.”(시편 65,13)
언덕들은 왜 기쁨으로 띠를 두를까요? 땅이 하느님이 내려 주신 은총으로 행복의 외투를 입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p134)
시편에 이보다 더 기쁨에 넘치는 구절이 있을까요? 땅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경이로움이 주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p134)
3장: 기쁨은 하느님은 선물입니다
대부분의 성인들은 다른 이들이 가까이하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유머 감각이 있는 이들과 어울리고 싶어 합니다. 많은 성인들이 기쁨, 유머, 웃음을 생애 내내 간직했습니다. 이는 따분함, 침울함, 까칠함으로 대변되는 성인의 전형적인 모습이 반드시 옳지 않음을 말해 줍니다. (p143)
☞ 우리는 내심 엄숙함이 신앙적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울한 수녀는 좋은 수녀가 아닙니다. 나는 불행해하는 수녀 한 명을 한 무리의 악령보다 더 꺼립니다. 우리가 지닌 유머 기질을 숨기고 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 각자는 유머 기질을 발휘하여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합시다.” 이처럼 기도 생활의 탁월한 스승이며 가톨릭 교회가 교회 박사로 선포한 예수의 데레사 성녀도 유머 감각을 권장했습니다.(p144-145)
☞ 기쁜 소식을 사는 우리는 기쁘게 살아야 한다
베르나데트 성녀는 죽음을 맞기 얼마 전 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하트 모양으로 수를 놓았습니다. 어느 날 성녀가 동료 수녀에게 농담을 했습니다. “누군가 수녀님에게 제가 따뜻한 마음(heart)이 없다고 말하거든 제가 매일 만든 것이 바로 하트(heart)였다고 말해 주세요!”(p147)
☞ 매일 따뜻한 마음을 만들었다는 베르나데트 성녀의 소박한 유머
유머는 성스러움의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인들은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졌고, 삶의 부조리를 보고(또한 스스로를 향해)주저 없이 웃었으며, 언제나 하느님에게 믿음을 두었습니다.(p147)
교회에 널리 퍼져있는 성인들의 침울한 이미지는 우리가 성인들을 이해하는 방식과 성스러움을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나아가 이는 하느님을 이해하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p149)
3세기에 라루렌시오 성인은 석탄에 달구어진 석쇠 위에 올려 구워서 죽이는 형벌을 받고 순교했는데, 형 집행관들에게 “이쪽은 다 구워졌으니 뒤집어서 다른 쪽도 구워주시오.”하고 소리쳤다고 합니다.(p150)
4세기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장난스럽게 기도했습니다. “ 주님, 저를 정결하게 해 주소서.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그리 해 주소서.”(p150)
한번은 젊은 사제가 혼인 미사후에 새로 탄생한 부부에게는 어떤 기도를 해 주는 것이 가장 적절할지 네리 성인에게 물었습니다. 성인은 잠깐 생각한 후에 대답했습니다.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하시오.”(p159)
요안나는 남편과 사별한 후에도 재혼하지 않고 철저한 수도 생활을 하겠다고 결심한 후에도 여전히 어깨와 가슴을 드러낸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들이 처음 만난 날 밤,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은 그녀의 옷을 힐끔 보고는 재담을 던졌습니다. “부인, 손님을 받을 생각이 없는 가게는 간판을 내려야 합니다.”(p161)
한 기자가 요한 23세에게 순진한 질문을 던졌을 때 그분의 가장 유명한 농담이 나왔습니다. “교황 성하, 바티칸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는 지요?”
교황님은 잠시 뜸을 들이며 생각하다가 대답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절반가량이지요.”(p161)
☞ 절반은 놀고(!) 먹는다는 이야기다.
“교황님, 바티칸이 오후에는 문을 닫고 사람들도 그때는 일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 아니에요!” 요한 23세는 말했습니다.
“사무실이 오후에 문을 닫는 건 맞지만, 사람들은 오전에 일하지 않습니다.”
☞ 교황님은 사람들이 농땡이를 치는 것을 알고 계셨구먼.
요한23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로마 거리를 걷고 있을 때, 한 여자가 그분의 곁을 지나가다가 친구에게 이렇게 소곤댔습니다. “어머나, 되게 뚱뚱하시네!”
그 말을 들은 교황님은 돌아서서 응수했습니다. “부인, 콘클라베가 미인 대회가 아니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해해 주세요.”(p162-163)
1940년대에 요한 23세 교황님이 아직 대주교로서 파리의 교황대사를 지내던 시절에 한 우아한 만찬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맞은 편에는 드레스 목선이 깊게 파여서 가슴이 상당히 많이 드러나는 여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그분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습니다. “주교님, 이 무슨 남부끄러운 일이랍니까! 사람들이 다 저 여자를 쳐다보고 있는 게 당황스러우시죠?”
그러자 당시 대주교였던 요한23세가 말했습니다. “아니오, 사람들은 전부 다 나를 쳐다보고 있어요. ‘내가’ 저 여자를 보는지 안 보는지 보려고 말입니다.”(p163)
☞ 혹 내기를 한 사람은 없었는 지 모르겠다. ^^*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 안젤로라는 이름의 소년을 만났는데, 그때 그분은 소년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내 이름도 원래 그거였어!” 그러고는 소년과 비밀이라도 주고받는 듯이 낮게 말했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내 이름을 바꿔 버렸어!”(p167)
'어진 요한 교황‘는 열린 마음, 관대함, 온유함, 유머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습니다. 제 친구는 그분이 선종했을 당시 로마에서 택시를 탔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유대인인 택시 운전사는 눈물을 글썽이며 제 친구에게 ’그분은 우리에게도 교황님이셨다‘며 애도했다고 합니다.(p167)
☞ 읽다가 갑자기 울컥했다
4장: 정말 행복해지고 싶나요?
1. 유머는 복음화의 도구다
기쁨, 유머, 웃음은 하느님을 향한 그 사람의 믿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본적으로 지니게 되는 모습은 우리가 부활을 믿고,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힘을 믿으며, 증오를 이기는 사람의 힘을 믿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줍니다.(p176)
14세기 신비가인 노르위치의 율리아노 복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 잘될 거예요. 다 잘될 거예요. 모든 게 다 잘될 거예요.” 대체로 믿는 이들에게 유머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보여 주는데,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잘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기쁨은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p177)
☞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즐거움은 사람들을 하느님에게 이끕니다. 데레사 성녀의 말을 빌리자면, 무엇하러 그 기쁨을 숨깁니까? (p177)
기쁨은 사람들을 하느님에게 인도합니다.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누가 들어오고 싶어 하겠습니까? (p178)
☞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기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2. 유머는 겸손의 도구다
우리는 오만해진 자아를 납작하게 만드는 방편으로 자신을 빗대어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습니다.(p86)
우리는 누구나 자만심에 차 있으며, 유머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본적인 인간성, 자신들의 영적 가난을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훌륭한 방편입니다.(p180)
G.K 체스터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천사는 자신을 가벼이 여기기 때문에 하늘을 날 수 있다.”(P180)
"하느님은 내가 교황이 되리라는 것을 영원으로부터 알고 계셨지요. 게다가 나를 교황으로 삼기까지 8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도 나를 왜 이렇게 못생기게 만드셨을까요?“(요한 23세, P185)
뛰어난 가톨릭 신학자인 카를 라너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추지 않는 사람, 자기에게서 자유로운 사람‘이 웃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P186)
☞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을 비운 사람이다. 즉 겸손한 사람이다.
3. 유머는 현실을 깨닫게 한다
잠언에서는 핵심을 할 때 종종 유머를 사용합니다. “지나 가다가 자기와 상관없는 싸움에 흥분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아당기는 자와 같다.”(잠언 26,17) 이 짤막한 격언에서 재미있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나요?(p187-188)
예수회 사제인 윌리엄 A. 베리는 “유머 감각이 없는 사람은 인생의 상당 부분을 놓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그런 사람은 고양이 한 마리가 다른 고양이를 타고 노는 것, 아이들과 어른들 사이에서 오가는 장난스러운 유머, 심지어 성경의 일부분까지도 놓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전혀 웃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p192)
☞ 유머 없이 시종일관 진지한 사람은 성실할지는 몰라도 인간미는 꽝이다
4. 유머는 권력에 대해 진실을 말한다
재치 있는 말은 잘난 체하는 사람, 거만한 사람, 권세 있는 사람에게 도전하는 유서 깊은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목적에 효과적으로 유머를 사용하셨습니다. 재치 있는 비유와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농담으로 그 시대의 종교적 권위가 지닌 오만함을 폭로하고 완화시켰던 것입니다. (p193)
☞ 복음서의 예수님은 유머가 있는 따뜻한 분이셨다. 그걸 지금까지 잊었다.
주교님은 수술이 끝나자 다른 환자들을 만나러 입원실마다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큰 수술을 받고 회복 중에 있는 친구 어머니 방에도 들러 말했습니다. “자매님, 자매님 마음이 지금 어떠신지 제가 아주 잘 압니다. 저 역시 자매님과 똑같은 상태지요.”
그러자 친구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정말요? 주교님도 자궁 절제술을 받으셨어요?”
몇 달 전에 그 친구를 만나 그때의 이야기를 하자,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자넨 제일 중요한 사실을 몰랐군! 그 일로 우리 어머니와 주교님은 친구가 되셨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주교님께 장례 미사 집전을 부탁드렸지. 그때 주교님도 그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그 일로 주교님은 자기 자신을 그리 대단하지 않게 생각하는 법을 배웠던 것입니다.(P193)
☞ 주교님도, 그 친구의 어머니도 멋진 분이다.
5. 유머는 용기를 보여 준다
토머스 모어 성인은 참수형을 당하러 단두대 계단을 올라가면서 사형 집형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올라가는 것 좀 도와주게. 내려올 때는 혼자 할 테니.”(P194)
순교자들에게 있어 박해자들의 손에 죽는 것은 그들이 하늘나라에 가까이 갔다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는 것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죽음 앞에 용감할 뿐만 아니라 때로 기지와 재치가 넘치는 것도 가능한 것입니다.(P194)
☞ 죽음 앞에서도 여유가 있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6. 유머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어지게 한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보통의 다른 관계들과 마찬가지로 수시로 유머를 동원해도 되는 관계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장난스럽게 지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도 우리와 즐겁게 지내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십시오.(p196)
☞ 내가 하느님과 장난을 칠 수 있다면, 진정 아기와 아빠의 관계가 아닐까?
5세기 ‘미드라쉬’를 보면, 하느님이 마치 신부를 시중드는 사람처럼 에덴동산에서 하와의 머리를 땋아 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애로운 하느님의 이미지를 얼마나 멋지고 정감있게 그리고 있는지요! (p197)
어느 날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자신이 세운 수도원 중 한 곳을 방문하러 가는 길에 그만 나귀에서 떨어져 진흙땅으로 굴렀습니다. 다리를 다친 데레사 성녀가 말했습니다.
“주님, 어쩜 이렇게 가장 나쁜 때를 골라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신 거죠?”
성녀가 기도 중에 들은 응답은 이랬습니다.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친구를 대하는 방식이란다.”
그러자 성녀가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렇게 친구가 적으신 거군요!”
☞ 이 구절을 전에 다른 책에서 대략 이렇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비는 억수로 오고 개울바닥에 굴러 떨어진 성녀는 엉망이 된 자신의 몰골을 보며 이렇게 투털거렸다. “주님, 제 꼬라지가 이게 뭡니까? 제 꼬라지가.”
그전까지 하느님은 저를 창조하신 분, 저를 돌보시는 분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저의 삶에 관심을 갖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정도는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저 때문에 ‘즐거워하시는’분이라니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안 될 게 뭐 있나요? 부모라면 응당 자기 자녀에게서 즐거움을 얻지 않나요?(p198)
당신은 어떤 멋진 일, 웃긴 일,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 놀라워할 때, 그것은 하느님이 당신에게 장난을 치시는 표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 나에게 장난치시는 개구쟁이 하느님....이건, 말도 안 돼? 안돼, 돼, 돼.
당신에게 즐거운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하느님 사랑의 표징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을 좋아하신다는 표시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p202-203)
하느님은 당신이 유머 감각을 발휘하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분으로, 인생의 재미있는 순간들을 통해 당신을 깜짝 놀라게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인생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때에 즐거워하시는 하느님의 표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p205)
7. 유머는 환대의 표시다
후손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보상을 받는 이유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손님들에게 베푼 환대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핵심적인 미덕입니다. 하느님은 환대하는 마음을 격려하고 보답해 주십니다.(p209)
몇몇 성경학자들은 소돔과 고모라가 지은 진짜 죄는 그리고 하느님이 그곳 사람들을 벌하신 이유는, 그들이 방탕했거나 음란하게 행동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p209-210)
신약에 보면 예수님을 자기 집에 맞아들이는 행동은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표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만일 어떤 마을에서 제자들을 환영하지 않으면 그 마을을 떠나면서 그들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p210)
예수님은 늘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품고 환영하고 초대하고 끌어들이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타인’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환영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말을 건네고 그들을 고쳐주는 것은 물론 소외된 이들과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심으로써 하느님의 환대를 실천하셨습니다.(p210)
중세 때 베네딕토 성인은 자신의 수도회를 위해 쓴 규칙서를 통해 ‘손님이 오시는 것은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이다’라는 금언을 전합니다. 베네딕도 수도회 회원들은 모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환영해야 합니다.(p211)
☞ 이웃을 환대한다는 것은 주님을 환대하는 것이다. 나는 여태껏 잘 안되었다.
유머는 환대를 보여주는 특별한 방법입니다. 사람들이 집처럼 편안함을 느끼게 하기에 가장 쉬운 방법은 그들을 웃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웃음이 터져 나올 때 그 모임은 성공한 셈이고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을 당신도 알 것입니다. 유머는 사람들이 여유로움과 평안함을 느끼게 하고 경계심을 늦추게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웃는 것은 그들과 함께하는 것을 당신이 즐거워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p211)
주변을 들러보니 피정 온 신부와 수사 등 몇 명의 다른 남자들은 어찌된 일인지 모두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남자였습니다. 그래서 주춤거리며 일어나 제 입에서 말이 나오길 기다리는 오십 명의 아프리카 수녀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제 입에서 불쑥 이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제가 여기 있는 유일한 남자 같은데요.”
방 저편에서 한 아프리카 수녀가 소리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십니다.”(루카 1,47) 이 외침을 듣고 모든 사람이 웃었습니다.(p212-213)
8. 유머는 병을 치유한다
당신이 아프거나 괴롭거나 병마와 싸우고 있을 때 당신을 웃게 하는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은 아주 큰 은총입니다.(p218)
어느날 그녀는 요양원에 있는 남편을 방문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그녀의 남편은 말했습니다. “내 마누라지.”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기억해서 기뻤습니다.
그때 남편이 간호실을 가리키며 말했지요. “저기 넷이나 더 있어!” …… 이 노부인 신자는 슬픔 중에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줄 압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나에게도 역시 도움이 됩니다.(p220)
9. 유머는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촉진한다
1960년대 초반 가톨릭 교회에 대변혁을 가져온 주교들의 대대적인 회합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직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요한23세 교황님은 그 준비를 위한 자료들을 모두 모아 놓고 신학자들의 비판과 신학적 과제들을 훑어본 결과, 그 내용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황님은 그것을 쓴 사람들과 논쟁을 하거나 자신의 신학적 반대 의사를 주장하는 대신에, 그저 자를 하나 집어 들고서 쌓아 놓은 자료의 높이를 잰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세요, 여기 30cm의 비판이 있어요!” (p222)
유머는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심지어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도 도움이 됩니다. 결혼과 육아를 전공한 심리학자 존 가트맨은 7년 이상 된 부부에게서 이혼을 예측할 수 있는 변함없는 단서는 웃음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결혼은 오직 우리가 함께 웃는 동안에만 유효합니다.”(p224)
☞ 부부가 대화가 사라지고 웃음이 사라진다면 결혼 생활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특히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부부가 서로의 약점이나 습관을 살짝 놀리면서 재미있게 장난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웃음을 나누는 것은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p224)
☞ 웃는 것도 사랑이다. 자주 함께 웃자.
유머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공동체의 구성원 간에 농담이 가져오는 친밀한 관계다. 또한 우리는 농담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에게 품고 있는 애정을 표시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농담을 하는 것은 사실상 그들에게 신경을 쓰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농담을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초대함으로써 공동체는 확장되고 다른 사람들의 존재에 마음을 열게 된다.(p226)
농담은 우리의 삶과 우리의 공동체를 하느님 앞에 열어 준다.(p227)
10. 유머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준다
그녀는 매우 낙담해서 말하기를, 기도를 하면서 상상력을 발휘해 보려고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걸 보면 자신은 상상력이 결핍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상상력이 없나 봐요.” 다른 사람들은 그런 기도를 곧장 하는 것 같은데, 자신은 아니라는 것이었지요.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좀 위험했지만 해 볼 만한 가치는 있었습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혹시 상상으로 섹스에 대해 생각한 적은 없었나요?”
그 부인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마치 영혼 밑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처럼 웃고 또 웃었습니다. “네, 그런 적 있어요!” 마침내 그녀는 말했습니다.
“아, 그렇다면 부인께서는 상상력을 ‘가지고’계신 것 같은데요!”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는 함께 웃었습니다. .…… 그녀의 웃음은 일종의 긴장 이완, 새로 찾은 자유의 징조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현존의 표징이었습니다.(p229)
11. 유머는 재미있다
기쁨은 또한 천국의 맛보기이며, 그리스도인에게는 중요한 영적 목표입니다. (p232)
그린포인트 교회의 앤 칸스필드 목사는 “복음의 전체 메시지는 기쁨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구하신다는 소식에 기쁨으로 가득 차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또 말합니다. “이것은 슬픔과 고통의 도그마가 아니고 자유이며 기쁨이다. 그리고 사라가 한 것처럼 웃음으로 응답해야 한다. 하느님이 나 같은 사람을 용서하셨다면 적어도 내가 할 일은 기쁨과 감사로 응답하는 일이다.(p232)
첫 번째 기적으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도 인생에서 얼마간의 유쾌함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p232)
12. 유머는 가끔 실용적이다
버니라고 하는 아버지의 사촌은 약속에 늦었기 때문에 제한 속도를 훨씬 넘겨서 거의 시속 130km로 달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뉴저지 쪽으로 건너가기가 무섭게 백미러를 통해 빨간 불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버니는 한숨을 쉬고 차를 갓길에 세웠습니다. 경찰이 차로 다가와서 버니에게 창문을 내리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하루 종일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경찰은 반가운 듯 말했습니다.
“아,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한 이렇게 빨리 달려왔잖아요!”
그 경찰은 배꼽이 빠지게 웃었고 비니에게 딱지를 발부하지 않았습니다.(p23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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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유머, 웃음은 모든 사람에게 영성 생활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하느님에게서 온 선물이고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을 즐기도록 도와줍니다. 카를 라너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좋은 웃음은 사랑의 표징이다.”, “웃음은 하느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지니고 계신 사랑을 살짝 보여주는 것, 도는 그 사랑을 처음으로 가르쳐 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p234)
5장: 기쁨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요?
하느님은 우리가 가장 자기 자신다워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명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p240)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갈망하시는 것이 전하는 메아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저 깊은 곳의 열망을 더 많이 따를 때, 우리는 더욱더 기뻐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p240)
천성적으로 타고난 일을 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 기쁨을 찾습니다.(p241)
☞ 나에게 천성적으로 타고난 일은 무엇일까?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창조되었는지 알게 될 때, 그것은 우리를 기쁨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우리를 확장시킨다고 했습니다.(p243)
우리가 했으면, 또는 됐으면 하고 하느님이 바라시는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성취가 어떤 때는 비교적 쉽게 금방 찾아오지만, 또 어떤 때는 힘든 과정을 거쳐 천천히 찾아옵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기쁨으로 이어집니다.(p244)
☞ 나에게는 ‘말씀의 봉사’가 그것이다.
제럴드 오콜린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우리를 기쁨으로 놀라게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삶에서도 그렇고 앞으로 다가올 삶에서도 그렇다. 자애로운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무한한 기쁨에 대해 예수님은 할 말씀이 많으신 것이다.”(p262)
☞ 우리가 맞이할 천국은 ‘기쁨’이 넘치는 곳이다. 그러면 이 지상에서 기쁨을 연습하며 살아야한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가까이 갈수록 깊은 즐거움을 더 많이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가슴 깊숙한 갈망을 좆아 자신의 소명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의 형제자매인 가장 작은이들을 돌보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p262-263)
기쁨은 우리의 소명을 따르는 데서 나올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고 서로 사랑하는 데서도 나옵니다. 그러므로 기쁨은 이기적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이타적으로 발견하는 것입니다.(p263)
6장: 웃는 교회를 만듭시다
정신적인 중압감에 눌린 젊은 수사 하나가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머지 젊은 수사들도 따라 웃었다. 수사중 한 명이 크게 놀라서 그들에게 웃음을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요르단(복자, 도미니코회 제2대 총장)은 기도를 끝내고 강복을 주었다. 그러고 나서 웃음을 멈추게 한 수사를 가리키며 물었다. “누가 자네더러 수련장이 되라고 했나?” 그리고 젊은 수사들을 향해 말했다. “계속 웃게나! 여태까지 자네들을 옭아매던 사탄의 마수에서 벗어났으니 실컷 웃어도 좋네.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웃어 버리게나!”(p286)
반짝이는 유머는 우리가 긴장을 풀기 원하신다는 하느님의 표시입니다. 하느님은 죽도록 심각한 진지함에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런 순간에 유머를 처방하시는지도 모릅니다.
(p252)
거듭거듭 자신이 ‘농부’의 아들로 자란 것을 언급한 요한23세 교황이나, 강인한 의지를 지녔지만 스스로를 ‘하느님의 몽당연필’이라고 칭한 마더 데레사 복녀, 편지 말미에 종종 ‘그리스도 안의 가난한 이’라고 서명하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산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 같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3,11참조). 그리스도교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 말씀을 날마다 되새겨야 합니다.(p301)
도미니코 수도회 총장을 역임한 티모시 래드클리프는 미사에서 성체를 영하는 베네딕도회의 한 노수도승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성체를 분배하던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하고 말하자, 그는 “네, 저도 알아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성체 앞에 섰을 때조차 거만해지기 쉽습니다.(p305)
내가 어떤 상황에 과잉 대응했음을 알았을 때, 누구를 판단하려는 생각이나 분노하는 마음에 갇혀있는 자신을 알았을 때, 나를 공격하는 형제에게 한 방 먹이고 싶을 때, 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식하고 나 자신을 보고 웃거나 적어도 미소 지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려고 노력한다.(p307-308)
종교라는 제도 자체는 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자기 자신을 보며 웃을 줄 알 때에 비로소 유익이 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라는 초대이고 그럼으로써 공동체 전체가 건강해집니다. 지도자들은 겸손함을 통해 다른 이들도 겸손함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p309)
요한23세 교황님이 교황직에 있던 시절, 한번은 공식적인 연설을 하는 도중에 마이크가 꺼져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마이크를 고치자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한 말이 안 들렸다고 해서 걱정할 것 없어요. 못 들은 거 없습니다. 어쨌든 그리 중요한 말도 하지 않았어요.”(p309)
웃음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치료법이다. 그러니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릴 때 천상의 음악 소리와 함께 천상의 웃음소리도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게 섞여 들려오는 것에 감사하자.(말콤 머거리지, p310)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지나친 농담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며 그 농담은 상대에게 상처를 남깁니다. 찰스 햄브리 스토우 목사는 그런 경우를 직설적으로 꼬집습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나오는 유머는 악덕이나 죄악이 될 수 있다.”(p317)
☞ 농담의 위험성. 자신을 대상으로 한 농담을 해야지,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농담은 하지 말아야 한다
유머는 바르게 사용하면 건설적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파괴적이 됩니다. 장난스러운 유머는 친밀한 공동체 의식의 일부로서 이를 통해 사람들이 하느님의 기쁨을 경험하지만, 빈정거림은 비애를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을 배척하게 합니다. 적당한 선을 그을 줄 아는 것은 애정을 나누는 상호 관계에서 필수 조건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즉, 한쪽에서 재미있자고 한 말이 상대에게는 멸시하는 투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p318)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 합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야고3,7-10)
예수님도 이런 종류의 유머에 대해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라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바보’는 아람어로 ‘(머리가)빈 놈’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악의적인 말을 하다가는 당신이 지옥으로 가게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p321)
☞ 예수님은 입으로 짓는 죄에 대하여 경고하신다
좋은 유머는 진실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진리를 드러냅니다. 좋은 유머는 유익합니다. 그것은 서로를 더 이해하게 하고, 어려움을 덜어주며, 자신을 낮추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좋은 유머는 상냥합니다. 상대에게 해를 끼치거나 파괴적이지 않습니다. 이 세 개의 문은 재미있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 때마다 명심해야 하는 수칙입니다.(p323)
☞ 유머는 진실하고, 유익하며, 상냥해야 한다
7장: 사는 게 재미없고 괴로운가요?
1. 즐겁게 살면 언제나 행복한가요?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우러나오는 슬픔은 당신이 정서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만일 때때로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은 좀 덜 인간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예수회 사제이며 임상 심리학자인 윌리암 A.베리의 말은 여운을 남깁니다. “당신이 어떤 일에,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나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슬프지 않다면 그것은 정상이 아니다. 슬픔은 삶의 일부다.”(p332)
예수님의 울음은 그분의 연민과 인간애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요한11,36)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슬퍼하셨다면 분명 우리도 슬퍼할 수 있습니다.(P332-333)
☞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울 수 있는 인간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저는 기복 신앙을 믿지 않습니다. 기복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현세에서 성공과 행복이 따르리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잘못되었습니다. 확실한 예를 하나 들어보면, 열두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그들 중 많은 이가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누가 과연 베드로 사도가 신앙이 부족해서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고 생각하나요? 이 시대의 위대한 종교인인 마틴 루서 킹 목사는 많은 고난을 겪고 투옥되기도 했고, 결국 암살당했습니다. 그의 신앙이 부족했나요? 마더 데레사 복녀는 말년에 때때로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심지어 기도 중에 ‘영혼의 어둔 밤’이라고 하는 캄캄한 암흑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분이 신앙심이 없었나요? 고통은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모든 사람의 몫입니다. 여기에는 독실한 신앙인을 비롯한 믿는 이들도, 즐거운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이들도 모두 포함됩니다.(P333-334)
당신의 길에 고난이 들어설 때 흥분하지 마십시오. 고난을 향해 웃음 지으며, 당신이 하느님의 품 안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
신앙인들은 살면서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극의 한가운데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즐거움은 하느님에게 둔 믿음과 확신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P339)
마더 데레사 복녀가 “여러분이 누군가를 보며 웃을 때마다 그것은 사랑의 실천이고, 그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며,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분이 염두에 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어둠 속에서도 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누는 힘은 인생의 암흑기에 있을 때조차 깊은 곳에 숨어있는 기쁨을 느끼는 감각에서 나옵니다.(P341)
☞ 웃는 것도 사랑의 실천이다.
2. 제가 불행한데 어떻게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요?
삶의 중심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기쁨과 위안과 평안을 찾는 데 꼭 필요합니다. 기쁨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는 손쉬운 방법 하나는 속담에도 있듯이 ‘감사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를 기르는 방법 중에는 이냐시오 대 로욜라 성인이 대중화시킨 ‘양심 성찰’이라고 하는 기도 방법이 있습니다.(P342)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들을 모으기 시작해라. …… 소중한 추억의 목록을 만드는 것은 도움이 되는 일이다. 목록에 더할 재미있는 경험들이 있는 지 계속 살펴보아라. 특히 놀라운 농담이나 이야기들을 포함시켜라.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유머를 찾아보아라.(P345)
☞ 당장 실천하자. 행복어 사전을 만들자.
3. 저는 원래 재미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주변에서 재미있는 사람들을 찾아보십시오
유머를 즐기기 위해 자신이 꼭 농담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유머를 즐기는 거야! 자기가 웃긴 사람이 될 필요는 없지. 주위의 유머러스한 사람들이 웃기는 걸 즐기면 된다 말이야.”(P350-351)
두 번째로, 인생에서 당신만의 즐거운 순간들을 즐겨 보십시오
당신에게 일어난 재미난 사건들을 즐기고 감상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당신의 웃음보를 간질이는 것이 있나요? 그것들을 즐기세요! 인터넷에서 우스꽝스러운 동영상을 보고 웃은 적이 있나요? 다시 한 번 보세요! 유머라는 선물을 감상하기 위해 무대에서 웃기는 코미디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P352)
4. 즐겁지 않은 환경에서 살거나 일한다면 어떻게 하죠?
첫째로, 당신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가에 따라 자신에 대한 규정이 달라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기쁨없이 사는 사람은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까지 빨아먹는 기쁨 흡협귀처럼 보입니다.(P363)
둘째로, 고마운 것들을 찾아보십시오
믿는 이들의 기쁨을 다시 되살리는 지름길은 감사하는 마음을 굳건히 하는 것입니다.(P363)
셋째로, 당신의 삶에 대해 누군가와 함께 웃는 법을 배우십시오
힘든 시절에도 건전한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것은 두 배의 은총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을 위하는 것도 되고 다른 이들을 위하는 것도 되기 때문입니다. 역경 가운데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위안이 됩니다.(P365-366)
은총의 주님과 성인들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좋은 삶이 곧 편안한 삶인 것은 아닙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말년에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교황은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고통과 노쇠는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 인생에서, 특히 노년이 되면 누구나 겪는 일입니다. 그것들을 완전한 인간존재의 일부로 여겨야 합니다.(P367)
나는 아흔 살이 되어서도 현실적일 수 있었습니다. 내 몸이 점점 더 마비되고 말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성경 속의 마비 환자나 말하지 못하는 이들과 공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과 정성스러운 돌보심에 감사드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삶의 희망에 감사드립니다. 만일 주님께서 나를 일정 기간 병약한 삶으로 부르신다면 그분의 권능이 그 병약함 안에서 완전하게 될 수 있음을 저는 잘 압니다.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에이버리 추기경, P367)
☞ 진정한 공감은 내가 그들과 같게 되었을 때 이루어진다!
넷째로, 누룩이 되십시오
예수님의 비유 중에는 하느님 나라를 밀가루 반죽에 집어넣은 약간의 누룩에 비유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룩은 아주 조금만 있어도 반죽을 부풀게 할 수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 상황이라면, 당신이 그곳에서 기쁨의 누룩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 다른 사람들도 당신이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겁입니다.
☞ 내가 기쁨의 누룩, 기쁨의 바이러스가 되어야 한다
8장: 유머가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1. 유머는 영적 가난으로 이끕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는 남자든 여자든, 늙었든 젊었든,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성직자든 평신도든, 결혼을 했든 안 했든 혹은 수도서원을 했든 안 했든, 교황에서 성당 화장실 청소부까지 동등한 존엄성을 갖습니다.(P377)
☞ 궁극적으로 나는 ‘하느님 앞에 선 단독자’이다. 이것이 실존이다.
19세기 프랑스의 가르멜회 수녀였든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인간성을 정원에 비유하면서 한 말도 이와 비슷한 맥락입니다. “장미의 화려함이나 백합의 순결함 때문에 작은 오랑캐꽃의 향기나 들국화의 순박한 매력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각각의 꽃들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정원을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P377)
자기 비하적인 유머는 겸손해지기 위한 한 가지 방법입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웃기,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기, 모든 상황을 자기한테 맞추지 않기, 인생이 자기의 필요에 맞추어지도록 요구하지 않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설령 잊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자신에게 웃어주기 같은 일들부터 시작한다면 좋을 것입니다.(P379)
☞ 하느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란 자각에서 나의 겸손이 시작된다.
겸손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갈까요? 겸손은 우리가 안타깝게도 소홀히 하고 있는 영적 덕목, 즉 영적 가난으로 이끕니다.(P382)
현대의 가톨릭 신학자인 요한 밥티스트 매츠는 영적 가난이란 겸손의 다른 말이자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영적 가난이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에게 의지하지 않으려고 하고,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할 것입니다.(P383)
일단 영적 가난을 받아들이게 되면, 당신은 자신이 맡은 일에 더욱 최선을 다하면서 나머지는 하느님에게 맡겨 드리게 됩니다. 게다가 즐겁게, 굳은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겸손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겸손으로 가는 문은 당신 자신을 지나치게 잘난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능력입니다.(P385)
“우리에게 그렇게 기쁨이 없는 큰 이유는 우리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토마스 머튼, p386)
☞ 하느님 앞에서 나는 전혀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웃어라. 이 웃음은 당신이 인간이라는 인식이며, 이 인식 자체가 하느님에 대한 인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 웃음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웃음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 주기 때문이다.(카를 라너, p386)
☞ 티없이 ‘까르르’ 웃는 아이의 모습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모습이다.
2. 유머는 우리가 주도자가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어느 정도의 유쾌함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대하고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 자신을 보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비판적이 되지는 않습니다. (p390)
계획이 빗나가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것이 당신을 몹시 불편하게 하거나 당신의 자아를 뒤흔든다면 화를 낼 게 아니라 웃을 수는 없나요?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우고, 아무리 일을 세심하게 준비할 지라도 어그러질 때가 있는 법입니다.(p390-391)
우리가 주도자가 아님을 받아들이면 겸손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기쁨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열심히 일하고 나머지는 하느님에게 맡기면 됩니다.(p395)
☞ 나는 도구일뿐인데, 너무나 자주 섭섭해한다.
요한 23세 교황은 교회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밤에 자다가 깨어날 때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서 다시 잠을 청했다고 합니다. “지오반니야, 뭐가 그리 걱정이냐? 교회를 책임지는 게 누군데? 너냐 아니면 성령이냐? 성령이지 않느냐? 그러니 다시 잠이나 자거라. 지오반니야!”(p395)
3. 유머는 당신 삶에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표시입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도 기뻐하셨습니다. 그분은 첫 번째 기적으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잔치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게 하셨습니다. 기쁨은 예수님의 삶과 사명에서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따라서 그분을 따르는 우리들도 그러해야 합니다.(p400)
☞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복음을 들은 우리는 당연히 기뻐해야 한다
신약이나 구약 모두가 기대를 배반하는 황당함, 게다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변덕쟁이 하느님을 그릴 뿐만 아니라 장난하기 좋아하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가득합니다. 예수회 사제인 리처드 클리포드는 창세기에서 소돔을 구하기 위해 하느님과 협상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가리켜, “여기에는 유머가 있다. 양가죽을 놓고 값을 흥정하는 두 명의 농부와 같다.”라고 말합니다.(p402)
즐겁게 사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며, 진정한 예언자가 되는 길은 당신이 비판하는 사람이나 당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 있다.(p411)
행복보다 더 커다란 기쁨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 때문에, 역경과 고난의 순간에도 즐거움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이 힘겹거나 슬프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고난은 슬프고 힘겹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에서도 그렇고, 우리의 인생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을 때 우리는 큰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p412)
하느님은 우리가 솔직하게 슬픔을 느끼고 기도를 통해 그것을 당신과 나누기를 바라십니다. 가슴이 무너지는 비극 가운데서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그 기쁨으로 인해 힘들고, 때로는 견딜 수 없이 느껴지는 순간을 해쳐 나갈 수 있습니다.(p413)
9장: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일상에서 하느님이 장난치시는 순간들을 놓치거나 무시하거나 거부하지 마십시오. 물론 기도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p428)
제자들은 예수님과 어울려 다닌 때 분명 웃고 즐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 중에 웃고 즐기지 못합니까?(p434)
기도에서 기쁨, 유머, 웃음을 빠드리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p435)
1. 하느님과 함게 기뻐하세요
하느님에게 탄원하고 청하는 것 말고도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도 즐겁게 함께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기도하면 하느님이 당신과 함께 기쁘게 앉아 계신다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혹은 하느님이 당신 인생의 어려운 부분만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즐겁고 기쁘고 재미있는 부분도 함께 나누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p437)
당신이 홀로 기도하며 하느님과 시간을 보낼 때, 낮 동안 일어났던 재미있는 일이나 당신 스스로를 조롱하게 만들었던 일을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과 기쁘게 함께할 수 있는 한 방법입니다.(p438)
2. 당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떠올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하느님과 나누세요
감사는 건전한 영성 생활로 이끄는 열쇠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잘 안다는 뜻도 되지만, 이러한 은혜의 원천이 하느님이심을 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냐시오 성인에게는 ‘은혜를 모르는 곳’이 ‘가장 추악한 죄’였으며, ‘모든 죄와 불행의 근원이자 시작이며 원인’이었습니다.(p440)
하느님에게 감사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면 당신과 하느님의 관계는 더욱 깊어집니다. 그렇게 하면 기쁨이 샘솟게 하는 원천이 무엇인지 당신이 더욱 의식적으로 인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p440)
‘우리가 감사를 드리는 것은 혼자서는 어떤 일을 할 수 없고, 그 일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며 그것은 바로 하느님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p446)
맺은말: 천국을 준비합시다
이 세상에서 기쁨, 유머, 웃음을 누리는 것이 영원한 행복을 준비하는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지상에서 작은 천국을 미리 즐기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그렇다면 이런 덕목으로 사는 것은 지금 여기서 충만한 영성 생활을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다가올 미래를 위한 준비이기도 합니다.(p458)
그러니 즐겁게 사십시오. 당신의 유머 감각을 활용하십시오. 당신이 사는 동안 내내 당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당신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며, 당신을 통해 기쁨을 찾으시는 하느님과 함께 웃으십시오!(p458)
☞ 오늘부터라도 하느님 안에서 신나게 살자.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자.
3. 이 책을 읽고 앞으로 내 삶에서 실천할 것
- 매일 저녁 양심성찰 하기
① 오늘 하루 감사했던 일을 마음속에 떠 올리자
② 하루를 돌아보면서 하느님이 어디에 계셨고, 어디에서 하느님을 못보고 지냈는지 성찰
③ 하느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죄를 지은 부분이 어디인지 깨닫도록 은총을 청하자
④ 저지른 죄에 대해 용서 청하기
⑤ 이제부터 하느님을 좀 더 잘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은총청하기
- 행복어 사전 만들기
① 나를 웃기게 한 사건
② 나를 행복하게 한 사건
③ 나를 즐겁게 한 사건
④ 내게 감사해야할 일 기록하기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유머에 그리 많이 생각할 것이 담겨 있네요.
제게 부족한 유머를 키워가야겠어요^^
"웃음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미소를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 자녀답게 기쁘고 즐겁게 살아야 겠네요^^*
"기쁨은 하느님 현존의 가장 확실한 표징"이란 구절을 접하며 앞으로 더욱 기쁘게 살아야겠구나 다짐해 봅니다.
유쾌하게, 활기차게 생활하며 미소를 잃지 않도록 노력하렵니다.
좋은 책 소개와 함께 좋은 글 감사드려요. ^*^
감사 감사 감사드립니다.^___________^
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