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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청백리와 명문가에서 윤리경영을 배운다.
1.들어가며
현재 한국의 정치,경제계를 위시한 모든 분야에서 부정부패와 비리로 얼룩지고 있다. 작년에는 박연차리스트와 장자연리스트로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더니 급기야 전직 대통령마저 죽게 만들었다. 올해는 고위공직자를 뽑는 청문회에서 고위공직자의 도덕성이 문제되더니, 현재는 검찰스캔들과 태왕그룹, 한화그룹 , C &그룹의 비자금 및 정관계 로비 의혹으로 또 한번 온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부패방지 및 청렴한 조직풍토 조성을 위하여 각 조직의 직원이 준수하여야 할 윤리적 가치판단 및 행동의 기준을 명확히 하여 조직에 누가 되지 않고, 본인의 명예가 실추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오늘 강의의 주제도 역사에서 배우는 윤리경영의 예로 〈조선의 청백리에서 윤리경영을 배운다〉는 주제로 강의를 시작할까 합니다.
2. 청백리의 유래
청백리란 동아시아문화권에서 청렴결백의 약칭으로 깨끗한 공직자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청백리는 작고한 사람에게 붙이는 용어로 살아있는 자는 염근리(廉勤吏) 또는 염리(廉吏)라고 불렸다. 반면 부정부패한 관료는 탐관오리 또는 장리(贓吏)라고 불러 본인은 물론 자손들의 과거응시가 제한되었다.
청백리는 고대 중국 한나라 문제(文帝)12년(기원전 168년)에 염리를 선발한 이후 전한의 한무제 1년 (기원전 134년)에 청렴관리 선출이 있었고 후한(後漢, 25년~220년)때 양진(楊震)과 남북조시대 양(梁, 502 ~ 557년)의 서면(徐勉), 수대의 방언겸(房彦謙), 송대(960~1279)의 두건(杜愆), 포증(999~1062)이 있다. 특히 ‘양진(楊震)의 사지(四知)’라는 중국의 고사성어가 유명하다. 3.청백리의 유래와 실시
우리나라에서 청백리제의 제도화가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조선시대였다.
청백리는 총 44씨족에서 219명이 배출되었는데, 여러 기록들에서 본관별로 6명 이상을 배출한 집안은 전주이씨, 파평윤씨, 안동김씨, 연안이씨7, 남양홍씨, 진주강씨, 전의이씨 등 6씨족이며 그 다음 순위로 5명을 배출한 씨족은 신안동김씨, 문화류씨, 창녕성씨, 광주이씨, 한산이씨, 양천허씨 등이있다.
4. 조선시대 청백리 인물
1)태조-단종조의 청백리
1392년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 집권기에는 청백리록에 다섯 분의 이름이 올라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정몽주의 학통을 이어 영남학파의 초석을 다진 야은 길재(1353년(공민왕 2)∼1419년(세종 1)가 있고, 청송심씨의 기반을 조성한 심덕부(沈德符) 등도 청렴결백한 생활을 한 인물로 염명을 떨쳤다.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권력을 장악한 태종대(재위기간 : 1400.11-1418.8(17년 10개월)는 고성이씨를 명문가 반열에 올린 이원을 비롯하여 8명의 이름이 보인다. 우리 역사상 가장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시대로서, 사회 정의가 구현되었다고 평가되는 세종대는, 청백리가 많이 배출된 시기로도 유명하다. 이들 15명의 청백리가 있었기에 세종 같은 성군이 나올 수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은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유관(柳寬)이다. 이 세 사람은 우정도 돈독했을 뿐만 아니라 실천에서도 똑같은 지향을 보이면서 세종대의 태평성대를 이루어 냈다. 최만리, 백팽년 등의 이름도 올라 있다.
이 중 맹사성은 신창맹씨로서 고향인 온양과 한양을 오가면서 검은소를 타고 피리를 부는 모습으로 서민적이고 소탈한 정승으로 이름이 높았다. 인침연(印沈淵)의 일화, 무명선사와의 일화,공당문답(公堂問答), 비새는 초가살이 집 일화 등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유관도 정승임에도 비새는 초가살이로 청렴한 인물로 유명하다.
사육신으로 유명한 박팽년은 집현전학자로서 문종과 단종시대를 청산하고, 계유정란(1453년)에 의해 권력을 찬탈한 세조대(재위기간 : 1455.윤6-1468.9(13년 3개월)에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김문기 등과 단종복위운동을 준비했으나 발각되어 처형당했는데, 뒤에 아버지와 동생, 아들까지 사형 당했으나, 사육신 중 하위지와 함께 유일하게 친후손이 존재한다. 그의 며느리이며 장남 박순(朴珣)의 아내 이씨는 사육신에 연좌되어 노비가 되었는데, 며느리 이씨와 한 여종의 기지로 그의 아들은 무사하였다 한다. 뒤에 그 아이는 박비라는 이름으로 숨어지내다가 성종때 자수하여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현재 달성군 묘골에 박씨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단종복위운동을 고변한 김질(金瓆)이 세조(世祖)의 명(命)을 받고 술을 가지고 가서 태종(太宗)의 하여가(何如歌)로 넌지시 마음을 떠 보려 하니 옥 중에 있던 박팽년은 굽힘이 없는 지조(志操)를 시(詩)로서 나타냈다. 그 시가 유명한〈 가마귀 눈 비 맞아〉이다.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그칠 줄이 이시랴
2)세조대-명종대 청백리
세조시대부터 권력을 장악하여 100년 이상을 유지한 정치집단을 훈구파라 부르는데, 한명회,권람,신숙주,정인지 등의 권신들과 후손들 약250명 이상의 공신집단들이 선조가 즉위(1567년)하기 까지 온갖 부정부패로 조선사회를 물들게 했다. 이러한 공신들과 그 후손들인 훈구파에 대항한 세력들이 세조이후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훈구파와 대립각을 세운다. 바로 점필재 김종직을 위시한 사림파집단이 그들이다. 김종직은 고려말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경북 선산에 낙향하여 후학들을 지도한 길재의 학통을 이은 김숙자의 아들로 이후 성종대에 김종직의 수제자들인 김굉필, 김일손, 정여창 등이 새로운 신진관료로 훈구파에 대항하나 연산군대에 무오,갑자사화로 인하여 참화를 당한다. 이후 1506년 중종반정이후에 권력을 장악한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의 새로운 권력집단들이 부정부패로 조선사회를 얼룩지게 하는데, 이런분위기를 일신하고자 조광조, 김정, 김식 등의 신진 사림들이 등용되어 개혁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나,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하여 참화를 당하고 사림정치의 이상은 다음으로 미루어 졌다. 이 과정에서 청백리로 선정된 인물은 성종대에 20명, 중종대에 34명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성종대는 허종,허침 형제, 이현보, 구치관, 성현 등의 명사들이 유명하고 중종대에는 경주양동마을 출신인 손중돈과 손중돈의 생질이자 영남학파의 주리론의 토대를 마련한 회재 이언적, 김정, 박상(朴祥:1474-1530), 김계행 등이 청백리로 유명하다. 구치관은 능성구씨로 영의정으로 첨렴결백한 인물로 신숙주를 이어 영의정에 오른 인물인데 세조의 화해 일화는 유명하다.
인종,명종대는 윤임으로 대표되는 대윤과 명종의 모친 문정왕후와 윤원형으로 대표되는 소윤으로 정치가 대립되는데, 결국 을사사화로 대윤과 많은 사림들이 화를 당하고, 청백리 이언적도 양재역벽서사건으로 강계에 유배 가서 죽는다. 양동의 무첨당과 옥산서원이 이언적을 모시는 종가댁과 서원이다. 명종대의 청백리로 주세붕과 퇴계 이황이 유명하다.
3)선조대(1567-1608)-광해(1608-1623)-인조대(1623-1649)
훈구정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림정치를 연 임금이 선조(재위기간 : 1567.7-1608.2(40년7개월)로 이 시기는 우리 역사상 무수한 인재들이 활약하던 시대이다.
정치적으로는 이준경, 박순, 서애 류성룡, 아해 이산해, 한음 이덕형, 백사 이항복, 율곡 이이,정인홍, 심희수, 오리 이원익 군인으로는 권율, 이순신, 의병장 곽재우, 김덕령, 정문부, 조헌 문인으로 송강 정철, 월사 이정구, 허균,김장생 승려로는 서산, 사명당, 영규,처영 등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배출되고 선비들이 본격적으로 정치를 주도하던 시기이다. 소위 동서붕당정치가 막을 연 시기로 청백리도 많이 배출되었다.
청백리도 30여명 배출되었는데, 이준경, 박순, 류성룡,이항복,이이,심희수,이원익,심수경(沈守慶, 1516년 ~ 1599년), 이광정, 김장생 등이 정승으로서 청백리에 녹선된 시기이다. 심수경(沈守慶, 1516년 ~ 1599년)은 문과에 장원급제로 팔도 관찰사를 모두역임하고 좌의정에 오른인물로 송도에서 처음으로 송덕비를 세울만큼 첨렴결백한 인물로 유명하다. 75세와 81세에 득남을 하여 조선역사상 최고령의 득남기록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오리 이원익은 성품이 소박하고 단조로워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그의 집은 두어칸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하였다 한다. 백사 이항복은 경주이씨출신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인물로 인구에 회자되는 분이다.
그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몇 개의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오성의 담력 :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몰살한 집에 시체 감장을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체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다는 것이다.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 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속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았다는 것이다.② 오성에게 똥을 먹인 한음 부인 : 오성이 한음 부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한음에게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한음 부인은 오성을 초청해서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이고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③ 오성의 선보기 : 오성은 신붓감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몽둥이로 자기를 쫓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 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④ 한음의 참을성 : 오성은 우연히 도깨비를 만나 장차 정승까지 하리란 예언을 듣는다. 그리고 한음에게 변소에서 자기는 불알을 당기는 도깨비를 만나 예언을 들었다고 하며 변소에 가서 앉아 있어 보라고 한 뒤 노끈으로 한음의 불알을 매어 당겼다.한음이 아픔을 참고 견디자 정승까지 하겠다고 말한 뒤 한음에게 변소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같이 말하였다. 이에 한음은 비로소 오성에게 속은 줄 알았다는 것이다. ⑤ 오성과 대장장이 : 오성은 어려서 대장간에 놀러 다니면서 대장장이가 만들어 놓은 정(釘)을 하나씩 궁둥이에 끼어다가 모아 놓았다. 정이 하나씩 없어지자 대장장이는 오성의 장난인 줄 알고 불에 달군 정을 맨 위에 놓아 오성의 볼기짝을 데이게 하였다. 뒷날 대장장이가 곤궁하게 되자 오성은 모아 놓았던 정을 도로 주어 곤궁을 면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⑥ 권율과 오성 : 오성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집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율 집에서 차지하자, 오성은 권율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이 주먹이 누구 주먹이오?” 하고 물었다. 권율이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느냐.”라고 말하자 감을 가로챈 일을 추궁하였다는 것이다. 훗날 오성은 권율의 사위가 된다.이 밖에도 오성과 부인이 서로 골탕 먹이는 이야기 등이 많이 있다. 〈오성과 한음설화〉는 어린이들의 기지와 해학을 통하여 인간의 약점과 인간의 본성을 신선하게 조명한 우리의 귀중한 해학 문학으로서 가치를 가진다
류성룡과의 일화, 정충신장군과의 일화 등 무수히 많은 일화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경주 이씨는 조선조에 8명의 정승과 3명의 대제학, 178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씨들의 활약은 조선중엽 이후 특히 두드러졌는데. 백사의 후손들 중 이태좌가 영조 때 좌의정을 했고, 이광좌는 소윤 4대신의 한사람으로 숙종과 영조 때 영의정을 세 번 대제학을 세 번이나 지냈으며, 이태좌의 아들 이종성이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근세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의 이상설과 아니키스트 이회영,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이항복의 11대손)이 있고,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후 제헌국회의원과 법무장관을 지낸 이인도, 신민당 총재였던 이민우, 국방장관을 지낸 이상훈, 이희성 국방부장관, 이종찬 장군, 이종찬 전국정원장, 건설부장관을 한 이한림, 통일원장관 이용희, 법무부장관 이종원,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등 지금도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경주 이씨 후손들이 많습니다. 자수성가형의 이항복은 백사파를 형성하여 직계가 4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 내리 8대 판서를 배출했다. 일제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참여형 명가이다.
심희수와 일타랑의 이야기꽃다운 혼은 어느 곳에 서성이느뇨 금강의 가을비 붉은 명정을 적시니 아름다운 임이 흘리는 눈물이런가.
청백리 이시백(李時白)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돈시(敦時),호는 조암(釣巖)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반정공신 연평부원군 이귀(李貴)의아들로 선조14년(1581)에 태어났다. 이시백은 그의 부친처럼 화려한 관직생활을 하였다. 유생의 신분으로 아버지와 같이 인조반정으로 공을 세워 2등 공신으로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지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괄의 난을 격파한 공으로 수원방어사가 되어 탁월한 업무능력을 인정받았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수어사가 되어 인조를 보호하기도 하였다. 병조참판, 공조판서, 한성판윤,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좌의정, 영의정에 이르렀지만 집안은 청빈한 선비의 집 같았다고 전해진다.
청백리 사계 김장생(1548(명종 3) 서울~1631(인조 9)은 송익필에게서 배운 예론을 깊이 연구하여 당시 나라의 전례(典禮)나 모든 행상에 의문이 있으면 그에게 자문할 정도로 예학에 정통했다. 또한 학문을 아들 집에게 이어받게 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하게 했다. 그의 문인으로는 아들 집과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이시직(李時稷)·최명길(崔鳴吉)·이덕수(李德洙)·최명룡(崔命龍) 등이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기호학파(畿湖學派)가 크게 성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쌍벽을 이루었다. 연산 돈암서원(豚巖書院)을 비롯하여 안성 도기서원(道基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상례비요 喪禮備要〉·〈가례집람 家禮輯覽〉이 있다.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 家는 연안이씨, 전주이씨 우리나라 대표적 가문(문과 265명, 정승5명, 대제학 7명, 왕비 1명, 공신 9명, 청백리 5명 배출)으로, 사계 김장생(문묘배향)자손은 대대로 석학거유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에 알아주는 집안으로 꼽는다. 광김은 이조에서 7명의 대제학을 배출했는데 모두 김장생 한 사람의 자손이다. 김장생의 증손이자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와 아들 진규, 손자(영의정) 양택이 연이어 대제학에 올라 명문가를 더욱 빛나게 했다. 현대 인물로는 김우중 대우그룹회장, 김수환추기경 등 수없는 유명인사가 사회 각계각층에 포진해 있다.
청음 김상헌은 안동김씨 명문을 일으킨 훌륭한 선비이자 벼슬아치로 정승의 지위까지 오른 당대의 위인이었습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에 피신했던 인조가 청나라 임금에게 항복하겠다고 항복서를 바치려하자, 청음은 그 항복서를 찢으며 나라의 정기를 살리자고 외쳤던 분입니다.
끝내는 화의에 반대한 척화파로 몰려 중국으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던 것은 역사에 너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세월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라는 시조를 읊으며 청나라로 끌려가던 김상헌의 기개는 대단했습니다.
역시 그런 선비는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청백했습니다. 『목민심서』에는 그에 대한 칭찬이 자주 등장합니다. “김상헌이 벼슬살이에 청백했다. 어느 벼슬아치가 자기 부인이 뇌물을 받아 비방을 듣고 있음을 걱정하자, 김상헌은 ‘부인의 요구를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면 비방이 그칠 것이다’고 일러주었다.
그 벼슬아치가 크게 깨닫고 그 말대로 하였다. 그 부인이 항상 김상헌을 욕하기를, ‘저 늙은이가 자기만 청백리가 되었으면 그만이지 왜 남까지 본받게 해서 나를 이렇게 고생하게 하는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金淸陰尙憲 居官淸白 有一官人 憂其婦女受賂有謗 公曰婦人所請 一不施行 則謗息矣 官人大悟 一如其言 婦人常罵金公曰 彼老漢 自爲淸白吏足矣 何令人效之 使我喫苦如此)
청백리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 준 이유로 욕을 먹는 김상헌, 그 욕은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욕인가요.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 ‘베갯머리 송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이 고관인 경우 부인에게 뇌물을 주면 가장 약효가 크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부인에게 뇌물을 바쳐도 남편이 부인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뇌물의 효험은 없어지고 부인에게 뇌물 바치는 일도 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김상헌 같은 청백리에 그의 가르침을 실행한 벼슬아치, 오늘은 그런 분들이 그리워지는 세상이 아닌가요.
7.류동학의 동양학이야기-대구매일신문 2009년 4월18일자 기사
오늘날 한국사회는 '탐재괴인'(貪財壞印)에 빠진 사회 지도층 인사들로 혼란을 겪고 있다. '탐재괴인'은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 용어로 재물과 여자에 빠져 명예와 지위가 무너지는 상황을 일컸는다. 자고로 재물과 명예는 양립할 수 없는 것. 돈 많은 부자(재성이 강한 자)는 글이 풍부하지 못하고, 글이 많은 학자(인성이 강한 자)는 돈이 풍족하지 못한 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학자나 문인이 재물을 탐하면 명예가 손괴되는 법. 인수용신(印綬用神)으로 이루어진 관료나 정치인은 재운이 오면 재물(수뢰)죄를 범하기 쉬운 것이다. 명리학에는 재성(財星)과 관련해 탐재괴인과 재인불애(財印不碍), 군겁쟁재(群劫爭財), 재다신약(財多身弱), 인수용재(印綬用財), 식신생재(食神生財) 등의 술어들이 있는데, '박연차 리스트'와 '장자연 리스트'도 결국 돈과 여자와 관련해 벌어지고 있는 사건으로 특히 '탐재괴인'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 탐재괴인이란 문자 그대로 재물을 탐하다가 인성이 붕괴되는 현상. 인성은 명예와 사회적 지위·교육·종교성이요, 재는 재물과 여자이다. 따라서 재가 왕하면 문성이 몰하고, 문성이 왕함은 재가 없는 까닭이다.
● 박연차 리스트와 장자연 리스트 관련 인물들도 탐재괴인의 논리에 빠진 안타까운 사람들이다. 순간적인 재성을 탐하다가 영원한 명예와 자존심을 버린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재를 탐하다가 명예를 상징하는 인성을 붕괴시키는 것이 탐재괴인이다.
● 명예와 지위를 상징하는 인수(印綬)는 여자와 돈을 상징하는 재성(財星)을 기피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현인들은 여자와 돈을 상징하는 재성을 주의하고 경계했던 것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촉한의 재상 제갈량이 죽었을 당시 재산이 뽕나무 800그루에 불과했다.
● 조선의 명재상인 세종조의 유관이나 맹사성, 선조 때의 류성룡 같은 인물도 막강한 권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탐재괴인(貪財壞印)하지 않는 마음자세로 일관했기에 청사에 이름을 빛내는 위인이 된 것이다.
● 참으로 우울한 현실은 가장 명예롭고 영원히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탐재괴인의 유혹에 빠졌던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의 전철을 또 다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주변의 인물들이 밟고 있다는 사실이다.
● 음력으로 1946년 8월 6일생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주명조(四柱命造)는 무토일간(戊土日干)에 편인성(偏印星)이 강한 신강사주에 인수용재(印綬用財)의 기운을 타고 나서 탐재괴인과 반대되는 재성운이 오면 크게 발복하는 사주이다.
● 이런 사주는 탐재괴인과 반대로 인성운(印星運)이나 겁재운(劫財運)이 오면 크게 낭패를 당하게 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올 기축년(己丑年)이 바로 무토일간의 입장에서는 겁재운에 해당돼 아내와 돈 문제가 생기고, 형제동료와 주변의 동료들이 나를 배반하는 형상이다.
● 특히 올 음력 4월 기사월과 음력 7월 임신월 및 내년 1월 무인월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는 잔인한 달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우리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다시는 전직 대통령과 친인척들의 불행한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혜명동양학연구원 원장
약력소개
● 2006년 부산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조선후기 불교사전공)
● 2008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수료(조선후기 사상사전공)
● 2003년 퍼펙트임용고시연구원 전공역사(동양사, 한국사 )강사
● 2004년-2006년 안동정보대학 공무원양성과 교수
● 현 대구 영남일보 사주명리학 고전반 강사
● 현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외래교수
● 현재 혜명동양학 연구원 원장
● 언론소개 및 . 방송강의
● 2004년-2005년 영남방송 혜명류동학의 재미있는 역학이야기 24부작 진행
● 현재 영남방송 혜명 류동학의 재미있는 조선시대이야기 42부작 진행
● 대구 큐릭스 대경방송(서구), 큐릭스 대구방송, 강원도 영동방송 재미있는 역학이야기와 조선시대이야기 진행
● 2008년 9월 T B C 대구방송 리얼인터뷰 통 (사주명리학개론 20분 방송인터뷰)
● 1999년부터 부산대, 인제대, 경북대, 안동대, 경기대 정치대학원, 대구한의대, 창원대, 안동 도립도서관, 삼성생명, 의성지청, 국학진흥원, 청송교도소, 안동여성대학 ,안동신우대학, 대구세관, 대원불교대학, 동해 향교, 청송양수발전소, 안동로타리 클럽, 한나라당 안동지부, 경상북도개발공사 등에서 동양학(유학사,불교사,명리학,풍수지리,한국사) 주제로 특강을 130여회 실시
● 13. 2009-2010년 대구매일신문 류동학의 동양학이야기 14개월 연재
● 14. 다음카페-혜명동양학연구원, 연락처 053-745-8425, 010-2666-8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