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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와 김구의 관계
김구와 장제스의 관계는 한중관계 뿐만 아니라 우리 독립운동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중요한 관계이다. 임시정부의 활동뿐 아니라 김구의 테러 활동도 장제스의 자금줄로 유지된다. 그리고 장제스는 종래의 조공책봉관계 복원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비롯한 발언권을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임시정부를 이용한다. 해방 이후 장제스는 모택동의 공산당에 패해 대만으로 쫓겨나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가 꿈꿨던 한반도에 대한 조공책봉관계의 복원은 물건너 가게 된다.
*해방 후 한반도의 길
1) 독립국 지위 확보
2) 일본 식민지 잔류
3) 미국의 식민지가 되거나 미국령 편입
4) 중국에 편입되어 티벳, 신장-위구르 처지로 전락. 중국이 내전 상황이 아니었다면 상당한 가능성을 가졌다.
5) 소련에 편입되어 ‘~스탄’ 국가의 하나가 되는 길. 이 길도 상당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은 승전국의 일원으로 내세울 명분과 권리가 있었다.
*대한제국의 길
대한제국은 독립국으로 존속할 힘이 없어 망해 누군가의 식민지가 되는 길은 정해져 있었다.
1) 일본 식민지가 되는 길
2) 러시아 식민지가 되는 길. ‘~스탄’의 길
3) 중국 속방으로 티벳과 위구르의 길을 가는 것
1. 장제스의 김구와 임정에 대한 자금 지원의 이유는 뭔가.
첫째는 한국인들에 의해 발생하는 여러 테러 행위들을 관리해 달라는 것었다. 장제스의 자금 지원은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윤봉길 의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시점이다. 윤봉길 의거 다음날이 중국과 일본 간의 휴전협정을 맺기로 한 날이었다. 윤봉길과 김구는 이를 깨기 위해 테러를 감행한 것이었다. 김구는 중국과 일본이 평화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우리 독립에 덕이 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 서로 싸워서 일본의 국력이 약해지면 우리에게 독립의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 사항이었다. 테러 당시 윤봉길이 중국인 옷을 입은 것도 테러 후 시신을 중국인으로 속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당시 많은 한국인이 중국에서 테러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장제스는 이러한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돌발 행동들이 정국의 변수로 작동하여 그의 통제 범위를 벗어 난다면 많은 어려움에 봉착할 것은 뻔한 것이었다. 이러한 돌발 변수를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김구에게 자금을 지원하여 김구가 저러한 테러행위들을 관리해주기를 바란 것이고, 직접 장제스의 통제권 안으로 들어와서 테러행위들이 통제가 된다면 정국의 돌발 변수를 줄이고 그의 계획에 따른 정국 운영이 가능해지는 것이었다.
둘째, 장제스와 김구의 만남에서 김구가 자금만 지원해 주면 일본을 테러로 몰아내겠다고 말하자 장제스는 테러로 뜻을 이루기는 불가능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군관을 양성하자는 제안을 한다. 당시 장제스는 만주 등지에서 일본과 싸우는데 많은 인적자원의 부족을 실감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인을 중국인 군관으로 양성하고 이들을 이용해 만주. 중국에 진출해 있는 한국인을 병력자원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셋째, 장기적으로 한국을 속국화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김구와 임정에 대한 지원을 통해 이들을 중국 세력 하에 두고 장기적으로는 독립 후 이들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다는 계산이었다. 해방 후 김구가 환국 할 때 장제스는 중국인 무전요원 3명을 함께 보낸다. 장제스는 무전요원을 왜 보냈을까. 하지만 이들은 미군에 의해 신분이 들통나 중국으로 추방당한다.
넷째는 김구가 가진 테러의 능력이었다. 장제스는 이를 이용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김구는 당시 3개 정도의 테러 단체를 관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5년 경 김구 특무대, 애국단, 학생훈련단 등이 있었다. 1938년 중일전쟁 발발 후 국민당 내부적으로는 장제스와 왕정이의 심각한 갈등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장제스는 국공합작을 추진하려 했으나 왕정이는 강력히 반대했다.
*藍衣社(남의사)
장제스가 관리한 테러 단체이다. 남색 옷을 입은 단체라는 의미이다. 남의사는 임정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다섯째, 장제스의 제주도와 인천항 임차 요구. 이승만과 장제스는 1949년 8월 진해에서 회담을 한다. 장제스는 중국공산당에 패해 대만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대만의 후방기지 필요에 의한 요구였다. 이승만은 이를 거부한다. 만약 당시 김구와 장제스였다면 어찌 됐을까. 장제스와 중국 정부의 도움으로 살아온 김구가 뿌리칠 수 있었을까.
2. 국민당 정부와 임정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수립 때부터 1945년 11월 임정 요인들이 해방된 한반도로 환국할 때까지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이 관계는 임정 활동을 위해 불가피한 것(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임정 생존의 필수조건이었다. 스스로 자립기반이 없다 보니 중국의 지원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 했고, 그래서 국민당 정부를 따라 고난의 행군을 함께 한 것이다.)이었으나, 미국, 소련, 영국 등 다른 전승국의 의심을 불러일으켜 국제적 승인이 무산되고 해방정국에서 임정 출신 인사들이 집중적 견재와 의심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임정은 재정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장제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국민당 정부가 일본의 공격을 피해 상하이에서 충칭으로 도망가는 사이 임정도 살기 위해 국민당 정부와 동행한다. 김구와 임정 요인들은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피신한 뒤 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쳐 1940년 충칭에 정착해 1945년 8월 광복 때까지 17년간 3천 km의 대장정을 벌이며 일제를 피해 다녔다 한다. 임시정부는 이 과정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했을까? 목숨 보존과 임정의 명패를 지키는 것이 최선의 독립운동일까? 여러 가지 방안이 있었을 텐데 이들은 필요 시 재정적 지원을 해주는 장제스와 무장력을 갖춘 국민당 정부 옆에 붙어 있기를 원했다. 이들이 국민당 정부를 쫓아다니며 뭘 했다는 기록도 제대로 없다.
3. 장제스는 김구에게 얼마를 지원했을까?
샤오위린 대사는 1949년 7월 주한대사로 부임해 6.25 전쟁 기간인 1951년 9월까지 2년여 재직한 뒤 귀임했다. 그는 유일하게 ‘대한민국 임정 고문’으로 활동한 경력도 있다. 샤오위린의 회고록(使韓回憶錄사한회억록)에서 “그동안 지원액을 따지면 수천만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그럼에도 항상 돈이 부족한 임정은 ‘쌀 배급량에 부족하다’, ‘물가 상승분 만큼 올려달라’고 수시로 사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제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김구에게 전별금으로 20만 달러(현재 가치 30억) 지불하게 되는데 이는 ‘보은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할 것이다. 김구, 김규식 등은 임정대표 자격이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입국해야 했으므로 김구는 이 돈을 가져오는데 실패했다. 김구는 뉴욕의 주미 중국대사관을 통해 서울로 송금해줄 것을 부탁했으나 이도 실패하고 중국은행에 보관된다.
1946년 초 20만 달러의 반입을 포기한 김구는 이승만에게 이 돈을 주기로 약속한다. 임정 시절 이승만과 재미교포 사회에서 받은 지원에 대한 보답의 성격이었다.
이승만은 이 돈을 받기 위해 1946년 2월 장제스 총통에게 전보를 보낸다. “20만 달러를 미국 안전신탁공사에 예치시킨 뒤 워싱톤의 임병직 대령에게 지불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전보를 접한 국민당 우티에쳉 사무장은 난감했지만 장제스에게 “이 돈은 이승만이 아닌 김구가 수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장제스에게 제출한다. 이승만은 임정 초대 대통령을 지냈으나 중국에서 활동하지 않아 별로 인연이 없었다. 해방 직후 주한 중국영사관 보고에도 당시 남한의 정치세력을 북한. 김구. 이승만 3개로 분류한 뒤 “김구가 가장 민간의 존경과 지지를 받지만 경제력이 없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샤오위린 대사는 김구를 ‘유비’에, 이승만을 ‘조조’에 비유할 만큼 신뢰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자금을 달라는 요청을 하고 1946년 말 미국 방문 후 돌아오는 길에 장제스를 만났을 때도 20만 달러 이야기를 꺼내지만 신통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47년 6월 김구는 주한 중국영사관에 부탁해 10만 달러를 임시정부 주화(중)대사관(임시정부에서 운영하는 기관)의 운영자금으로 지원토록 한다. 국내정치에서 이승만과 긴장 관계가 조성된 만큼 돈을 자기 몫으로 챙긴 것이다. 즉 줬다 뺏은 것이다. 이후 10만 달러는 김구의 아들 김신이 들여와 경교장 생활비와 ‘백범일지’ 출간비용 등에 충당했다.
이 20만 달러의 해프닝 이후에도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중국국민당 사이에 47년 말 임시정부 주화 대표단에서 국민당과 김구의 연락을 맡고 있던 민석린은 ‘중한동제실업공사 조직요강 초안’을 작성, 국민당 사무장 우티에청을 통해 장제스에게 올린다.
“중국 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은 각 당의 경제건설 기초를 위해 중한동제실업공사를 조직한다. 업무범위는 무역. 운수. 어업. 부동산. 공장. 은행. 농장 등으로 정한다. 지금은 우선 1백억 원을 중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이 절반씩 출자하고 장래 업무발전 상황에 맞춰 증자한다”는 내용이었다.
해방 후 대일무역이 끊어진 상황에서 유일한 것이 대만. 홍콩. 마카오 등지와 이뤄졌던 화교무역이었다. 이 같은 한.중간 경제활동을 관장함으로써 양당의 정치자금으로 쓰고자 했던 것이다.
국내에서 정치자금 조달이 어려운 김구와 장기간의 대일전과 국공내전으로 자금이 소진된 장제스, 양측이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오랜 세월 국민당과 임정의 연결고리였던 우티에청은 바람직하다고 판단해 장제스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48년 급격한 국제질서의 변화로 실행되지 못한다.
사료발굴자 동국대 강사 김영신 박사는 “중국은 수십년간 행사해 왔던 영향력을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김구를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키우고자 했다”면서 “양국의 극적 정국 변화 때문에 실패했지만 한반도에서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려는 중국 측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게 이번 문건의 의미”라고 평가했다.
4. 장제스 지원과 그 대가 - 광복군 문제
1940년 창설된 임정 산하 한국광복군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가 1941년 광복군의 활동을 국민당이 통제한다는 내용을 담은 ‘한국광복군의 9개 행동준승’을 따르도록 요구했고 임정은 광복군의 군대 유지와 비용 확보를 위해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조건은 이청천 총사령관과 임정 인사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김구는 임시정부 인정과 9개행동준승 취소를 요청하는 서한을 장제스에게 보낸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임정은 그 해 11월 19일 국무회의에서 광복군9개행동강령을 통과시키고 공포했다. 이 행동강령은 일본이 패전을 앞둔 1945년 4월 폐지되어 한국광복군은 임시정부 소속이 되었으나, 이것 또한 종전 이후 한반도에서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친중정부 수립을 희망하는 장제스의 계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광복군 양성 과정을 경험한 장준하는 이렇게 평했다.
“가능하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본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일본군에 들어간다면 꼭 일본군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본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중경폭격을 자원하여 이 임시정부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왜냐구요? 선생들은 왜놈들에게 받은 서러움을 다 잊었단 말입니까? 어떻게 임시정부가 네 당, 내 당하고 겨누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곳을 찾아 온 것은 조국을 위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러 온 것이지 결코 여러분의 이용물이 되고자 온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이것으로 저의 말을 맺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경 임시정부로 달려왔으나 임시정부의 처참한 현실과 광복군의 현실을 본 독립운동가 장준하는 저서 ‘돌베개’(1971년)에 그대로 기록했다.
장준하는 1944년 초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7월에 탈출하고 중경 임시정부에 도착했는데 불과 2주 만에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 일본 항공대에 자원하여 임시정부를 폭파시켜버리겠다고 말한 것이다. 당시 장준하는 임정과 광복군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광복군은 600여 명 수준이었다. 장준하는 당시 임시정부는 물론이고 광복군 1, 2, 3 지대를 모두 경험하고 그 경험을 직접 기록한 사람이기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장준하는 학도병지원으로 일본군의 수준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일본군과 광복군의 모습은 어땠을까.
김학규의 3지대에서 1944년 8월 광복군의 훈련을 받을 때의 기록을 보면 “오후 5시, 교내 광장에서 하기식이 거행되었다. 우리도 참석하였다. 우리는 태극기를 생각했지만 내려지는 것은 청천백일의 중국기였다.” “이튿날부터 우리는 중국 군복으로 갈아입고 그들과 함께 행동하게 되었다. 애초부터 기대를 가질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 실시하는 그 교육이란 것이 시간의 낭비라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하루의 일과가 중국 국기 게양식과 국기 하강식에 참여하는 것 외에 한두시간의 도수교련과 김학규 주임의 한국독립운동사 강의를 청강함이 고작이었고....” “그런가하면 막사 옆에 있는 중국 군인들은 사격연습도 하고 박격포도 쏘고 집총을 하고 제법 군인다운 훈련을 하는데 우리에게는 목총 한 자루 없는 형편이여서 맥이 풀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당시 광복군 양성의 실체이다.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요 탈출의 굳은 각오와 자존심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해이하고 안일한 생활의 반복이 계속되었다.” “조국이 없는 군대에는 목총 한 자루도 없었다. 집총 훈련을 고사하고 이곳에선 총을 한번 만져보지도 못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장준하가 받은 군사훈련은 일반 사병 훈련이 아니라 중국군관학교 임천분교의 한국광복군 훈련반 교육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장교가 되는 과정이다. 교육기간은 3개월이었다.
“우리는 졸업식장에서 중국군 육군 준위에 일제 임명되었다. 졸업이라니, 더구나 중국 정규군 준위에 계급을 달자니 속으로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광복군의 실정이었다. 장제스의 중국군은 광복군을 제대로 교육하지도 않았으며 당연히 실제 전선에 투입하지도 않았다. 장준하는 학도지원병에 징집되어 일본군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다. 그가 보았던 일본군과 광복군의 실체를 접하면서 그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임명 후 장준하는 광복군 제1지대가 있는 노하구로 가는데 1지대장이 김원봉이었다. 장준하는 그때 만난 김원봉을 이렇게 기록했다. “김약산(김원봉)이 군무부장 겸 제1지대장으로 있으면서 우리의 도착을 미리 알고 우리들 50여 명의 청년동지들을 자기 세력 확장을 위해 흡수하고 노하구에 그냥 머물러 있도록 하려는 공작의 서곡이었다.” 김구와 김원봉은 끝없는 갈등 관계를 형성하는데 장준하도 여러 기록에서 김원봉을 안 좋게 평가한다. 김원봉을 자기만의 독자세력을 구축하며 끝없이 김구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무리들에게도 그러한 시도를 했다고 써놓은 것이다.
5. 임시정부 승인 유보
1944년 7월 15일 국민당 정부 외교부장 쑹쯔원은 장제스에게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임정승인의 잠정 유보를 제안했다. 첫째 이유는 임정이 조선 내부 인민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지에 대해 미국과 영국이 여전히 의구심을 품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선의 독립인정과 임정 승인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임정을 중국 자본으로 유지되는 중국의 하부기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또 1943년 카이로 회담에 참가하지 않았던 소련이 장제스가 주창한 한국의 독립에 관련해 어떤 의사 표시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 영국, 중국이 임정을 승인하면 소련의 오해를 받기 쉽다는 점도 지적했다. 특히 미국과 영국이 이 점을 고려할 것이 분명하므로, 중국이 독단으로 임정을 승인해야 한다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쑹 부장의 조언을 받아들여 임정 승인을 유보했다.
또 하나는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는 임시정부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비록 일본에 빼앗겼지만, 한반도는 자신들의 속국이었다는 것이다. 옛 속국의 일부 사람들이 와서 어려움을 호소하니 들어 주는 것이었다. 중국의 목표는 미국. 영국과 손잡고 한반도 내 소련의 영향력을 줄이자는 것과 종국적으로는 과거처럼 한반도를 중국의 절대적 지배 아래 두는 것이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한반도 정책은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로 물들어 있었다. 결국 전쟁이 끝나면 한국을 오랑캐로 규정하던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중국이 임정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소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임정을 인정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중국이 임정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니라 한국독립당의 임시정부, 즉 일개 정당의 임시정부로 호칭한 것에도 이런 의도가 드러난다.
*임시정부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의 기록과 미 보고서를 통해 임시정부의 실체를 파헤쳐 보자.
임시정부의 핵심인 조소앙은 미국 방문을 위한 여권을 신청하고 주중 미국 대사에게 임시정부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수많은 보고 문서를 작성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 26’을 참고하면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이 1941년 12월 11일자로 미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미 대사가 동봉해서 보고하는 내용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보고서의 제목이 「자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의 편지」로 되어 있다. 이것이 당시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인식이었다.
미국은 조소앙의 편지 내용이 이상해서 장제스의 중국과 접촉해 진의를 파악하고 본국에 보고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 26. 대한민국 임시정부 1942년 2월 10일 미 국무부 장관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중국 외교부와의 접촉을 통해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된 가치 있거나 흥미있는 어떤 결과도 얻지 못했습니다. 중국 관리들은 자신들이 한국인들의 조직에 관해 조사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지만, 그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지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고, 중국 국민당 정부에 의한 승인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암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소앙은 정작 곧 “중화민국이 우리를 정식정부로 승인할 것이고 그건 시간 문제다”라고 미국에 말했다. 심지어 조소앙은 미 대사와 면담을 가지고 ‘우리의 독립운동과 여러 정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의 간략한 역사를 보내드립니다’ 하고 문건을 미국 측에 전달한다. 여기서 조소앙은 미국을 상대로 엄청난 사기를 친다. 1942년 당시 조소앙은 미국에 보낸 임시정부 소개 문서에서 현재 임시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군대는 무려 2만 명이라고 말하고 미국이 도와주면 금세 10만 명의 군대가 될 거라고 사기를 친 것이다. 1944년 시점에서도 임시정부 내부 문서에서 광복군은 1에서 3지대 합쳐서 620명 정도였다.
임시정부 자료집 26. 임정 주석 김구의 동향에 대한 정보라는 1943년 미 국무부 자료를 보면, 김구는 알려진 대로 한국에서 그리고 중경의 단체들에서 받았던 지지의 많은 부분을 잃었는데 이는 1941년 11월 그가 독립운동에 대해 중국 정부가 부과한 조건들을 받아들였다고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광복군을 중국군에 편입시키겠다고 약속한 9개 행동준승 조항 때문에 김구가 임시정부 내에서 얼마나 비난을 받았는지를 미국이 파악한 문건이다. 또한 임시정부 내에서 김구가 중국으로부터 받은 돈을 개인적으로 편취한 부분도 미국은 파악하고 있었다.
임시정부 자료집 26. 1943년 한국독립운동 미국 문건을 보면, 임시정부 내 김구파인 한국독립당 위원들이 중국의 지원금을 착복한 것을 다른 세력이 폭로하고 밝혀내어 김구의 입지가 흔들린 사건까지 보고되어 있다.
김구의 행동준승 수용과 중국 지원금의 착복 문제로 임시정부는 내분 상태였다는 것이다.
임시정부 내부의 문서와 미국 대사관에서 본국으로 보고된 문건을 보면 사실 대한민국 독립운동 세력은 미국에게 그다지 중요한 정보라거나 세력이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미국은 놀랍도록 정확하게 임시정부 내부 문서와 거의 같은 정도로 임시정부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승만과 임정이 태평양 전쟁이 벌어진 후 임시정부의 승인을 끊임없이 미국에 요구했다는 건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 대한 미국의 생각은 어땠을까. 이것도 고스 대사가 1944년 조소앙에게 “정부 승인에 대하여 대사는 한국인들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망명 중인 정부가 아니며 오히려 한국 독립운동이므로 승인은 연합국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혹은 독립운동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현재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임시정부는 정부가 아니고 한국 독립운동 단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를 승인하는 것은 연합국이나 심지어는 한국인에게도 당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단 일본을 패망시키거나 독립을 먼저 이루는 게 문제이지 지금 정부로 승인해 달라고 닥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이전 1943년 임시정부 자료집. 한국문제 몇가지 측면을 보면, “한국 독립을 위해 매진하는 여러 한국 단체 간의 최근의 불안은 가장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연합국이 한국인들을 아이를 다루는 어머니처럼 혹은 학생을 다루는 교사처럼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연합국에 의해 통합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적절한 시기가 왔을 때 힘 있는 한국 정부가 이식될 수 있습니다. 김구가 주석으로 있는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독립을 위해 매진하는 모든 한국 정파를 대표하지 못합니다.” 즉 김구는 정식정부도 아닌 임시정부 안에서도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하고 돈을 착복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는데, 임시정부와 김구가 한국 독립운동 단체를 어떻게 대표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면 미국은 해방 후의 상황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해방 후 김구와 임정은 오직 임정 법통론만을 밀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렸고 사실 민중이 임정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해방 후 미군정 여론조사에서 전체 지지는 여운형이 1위, 이승만 2위, 김구 3위였다. 대통령이 되어야 할 인물 순위에서도 1위가 이승만이고 김구는 2위였다.
1945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 미국의 인식 문서의 한국의 장래 문서이다. “중국 국민당 통치 지역에서는 중경에 본부를 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이 있다. 이 조직은 다소 임시적으로 중국 당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데 이는 중국인들이 명백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이 지역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대망을 성취하는데 있어 통합된 것과는 거리가 멀며 한국인들 중에서도 매우 명백한 하급계층을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성원들과 한국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눌 기회가 있었고 그들은 가치 있는 움직임을 위한 조직을 효율적으로 총괄할 능력이 없으며 단순히 일본이 최종적으로 폐망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야망을 추진하고 개인적 재산을 불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중국 당국의 비용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의 솔직한 평이다. 임시정부가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단체고 그 중국인들이 생각할 때도 한국인들의 염원이 통합된 단체라고 보기에는 거리가 멀며 전체 한국인이 아닌 일부 명백한 하급계층을 대표하고 있고 우리도 임시정부 구성원들과 여러번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들은 별 능력이 없으며, 그냥 일본이 최종적으로 폐망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야망을 추진하고 개인적 재산을 불릴 기회를 노리며 중국의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한 것이다.
6. 장제스의 餞別金(전별금)
샤오위린 중화민국 대사 회고록에 따르면 장제스는 김구가 임정 소재지인 충칭을 떠나 귀국하게 되자 1945년 11월 1일 송별연을 열어 임정 요인들을 환송하면서 우테청 국민당 비저장에게 전별금(20만 달러. 현재 가치 30억 원)을 주도록 지시했다. 장제스는 이를 통해 김구에게 우의를 표시하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유지를 꾀하고자 했다. 장제스가 궁핍한 상황에서도 김구를 지원한 의도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장제스는 “비록 우리 정부가 가난하기는 하지만 어찌 한국에 후하지 않을 수 있으랴”라고 했다 한다. 샤오뤼린은 회고록 사한회억록에서 국민당 정부가 20여년 간 재정지원을 했음을 상기시킨 뒤 “그동안 100만 달러 또는 1천만 달러까지도 주었던 것과 비교하면 20만 달러는 큰 돈이 아니다. 하지만 전후 한국 정치의 혼란 상황 속에서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을 하던지 필요한 돈이다”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이 전별금의 의미를 우정, 공동운명체, 해양세력과의 완충지대 활용 등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정은 박사는 “전별금을 가까운 친구 사이에 주고받는 것으로 본다면 다분히 감상적인 판단”이라며 “강대국들의 속성 등 그 이면을 들여다보고 다차원적으로 분석해 돠야 한다”고 했다. 이 박사는 거액의 전별금 제공을 중국이 2차 대전 후 한국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애쓴 결과로 설명한다. 그는 중국 정부가 일본 패망 후에도 대일본 대결 구도에서 한국을 중국의 영향력 아래 흡수해 완충지대로 활용하려 했을 것으로 분석한다. 한반도에 들어설 정권이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일본에 접근하는 것은 중국 입장에서 큰 위협이 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반면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전별금 제공에 대해 임정 측이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서 이뤄졌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다. 임정이 중국에서 27년간 활동하면서 중국 정부에 보낸 사한 중 3문의 2 이상이 자금을 지원해달라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27년을 빈대로 살았다 해도 떠나면서 이별 자금이나 좀 달라는 요구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7. 윤봉길과 장제스와 김구
김구는 임시정부 출범 초기에 경무국장에 임명되었고 1922년 이후 내무총장에 올랐으며 1926년 말 국무령이 되었다. 이후 20년 가까이 임정의 최고 실권자였다. 김구가 임시정부의 중심인물로 부상한 것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이후였다. 장제스는 일기에 신문 보도를 통해 이 사건을 접했으며 윤봉길과 안창호를 주모자로 거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 김구와는 잘 알지 못하는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김구는 1932년 5월 10일자 중국의 주요 일간지에 자신이 배후임을 밝히고 있다. 장제스가 윤봉길 의거를 두고 중국 백만대군도 못하는 것을 조선인 1명이 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근거 없는 거짓이다.
8. 장제스와 김구의 만남
1932년 7월 초에 국민당 조직부 요원 샤오징의 휘하였던 공페이청이 장제스에 보낸 보고서에는 “김구가 자신에게 무기소총을 지원해 준다면 동북지역에서 한인독립군을 조직하여 중국 의용대와 협력, 공동항일 전선을 전개할 수 있다고 하니 지원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들어있다.
김구와 장제스가 직접 만난 것은 윤봉길 의거 1년 후 1933년 봄이었다.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에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 교장 관사에서였다. 이는 장제스 쪽에는 기록이 없고 백범일지에만 기록된 내용이다. 이 만남은 장제스의 요청일 가능성이 높다. 장제스가 1932년 1월에서 4월에 걸친 제1차 상하이 사변을 겪은 다음 일본과의 전면전을 예상하고 장기적인 항전 전략을 세우고 있었고 그 주요 내용 가운데 중국 내 한인독립운동 세력의 동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로 볼 때 장제스의 제안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장제스와의 첫 만남에서 김구는, 장제스가 자신에게 100만 위엔을 지원하면 2년 내에 일본, 만주, 조선 지역에서 대폭동을 일으켜 일본의 대륙 침략을 막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서도 김구의 허무맹랑함이 잘 드러난다. 저렇게 해서 일본의 침략을 막아낼 수도 없을뿐더러 그에 따른 희생은 누가 감당할 것인가. 김구 선동에 넘어간 당사자의 탓으로 돌릴 것인가. 저 계획 안에는 김구 자신의 희생이 들어가 있을 리 없고, 남의 희생을 밟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겠다는 술수 아닌가. 김구의 제안에 장제스는 (윤봉길 의거와 같은)‘특무공작’으로 일본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고 하면서 보다 장기적인 전략으로 무인의 양성, 곧 한인 군관의 양성을 권했다. 이 결과로 1934년 2월, 뤄양에 있던 중국 중앙군관학교 뤄양 분교 안에 한인특설반이 설치된다. 장제스는 한인특설반과 김원봉을 중심으로 난징 근교에 만들어졌던 조선정치군사간부혁명학교를 통해 양성된 군관을 활용해 만주와 중국에 진출한 한인을 군 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이처럼 김구와 김원봉을 중심으로 하는 한인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장제스의 지원은 ‘지원’의 내면에 중국 측의 이해관계를 앞세운 ‘동원’과 ‘통제’라는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윤봉길 의거 이후 1940년 충칭에 도착하기 전까지 임시정부에게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지원은 생존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었다.
9. 카이로 회담과 김구와 장제스
1943년 11월 31일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전후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주요한 합의가 4대 열강들(소련은 12월 초에 테헤란에서 내용 추인) 사이에 이루어졌다. 카이로 회담에 참석한 장제스는 루스벨트와의 단독 회담에서 전후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했는데 루스벨트와 처칠의 주장에 밀려 ‘적당한 시기를 거쳐’라는 전제 조건이 달린 채 한국의 독립이 선언문에 들어가게 되었다. 김구도 1943년 7월 장제스를 만나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 문제가 두어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여기서 카이로 회담에 대한 장제스 준비과정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김구의 부탁에 의해서 장제스가 움직였다는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장제스는 철저한 중국의 이해관계 위에서 한국 문제를 다루었고 전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보라는 중국 측의 목표 아래 ‘즉각적인 독립’을 제시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제 한 몸 건사할 능력이 없는, 내가 주는 지원금으로 살아가고 있는 임정이나 김구의 부탁으로 국가의 방향을 정한다는 것은 난센스도 한 참 난센스이다.
10. 일본 패망과 장제스와 김구
일본 패전 후 8월 18일 시안에서 충칭으로 돌아온 국민당 비서장 우티에청을 면담하고 조속한 환국을 위한 협조를 중국 측에 요청했다. 이 면담에서 우티에청은 김구에게 미군과 중국군이 남한에, 소련이 북한에 진주할 예정이고 이들 점령국에 의한 신탁통치나 군정이 실시된 다음 독립정부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군의 한반도 진주는 중국 측의 일방적 희망사항이었으며, 이보다 앞서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점령 계획이 협의,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임시정부의 조속한 환국 요청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중심으로 친중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전후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보라는 중국 측의 희망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꿈일 수 밖에 없었다. 중국 측은 미국과의 협조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조속한 환국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노력하는 한편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책으로 미화 20만 달러 전별금과 별도로 중국돈 1억 위엔을 특별지원금으로 지급하였다. 환국을 비롯한 지루한 협상 끝에 임시정부 명의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귀국이라는 조선으로 요인들의 귀국이 허가된 것은 10월 하순이었다. 김구를 비롯한 요인 일진 15명이미군 측이 마련한 수송기를 타고 김포에 도착한 것이 11월 23일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해방정국 속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세력은 정치적 주도권을 가질 수 없었고 중국의 친중정부 수립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1. 환국 이후 장제스와 김구
1946년 4월 이후 국민당군과 공산당군 사이의 전면적인 내전(국공내전)이 발발하여 1947년 말을 전환점으로 장제스는 공산군에게 우세를 내주고 퇴각을 거듭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김구에 대한 지원이나 한반도에 친중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장제스의 노력은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다. 장제스는 김구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협조하고 부통령직을 수락할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김구는 남북연석회의에 다녀온 후 5.10 총선거를 방해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김구는 장제스에게 곧 김일성에 의해 공산화가 될 텐데 부통령직을 하면 무엇하느냐는 뜻을 유어만 공사를 통해 전달했다.
12. 장제스의 한국 인식
장제스의 20년 가까운 임정과 김구에 대한 지원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는 전후 전개될 국제질서 속에서 중국의 한반도 지배권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와 연결된다. 장제스는 김구와 임정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다. 종전을 앞둔 4월에 광복군에 대한 소유권을 임정에 넘겨주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중국 측에서는 종전을 앞두고 동맹군의 한국 진공 시에 중국군도 참여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었고 재정적 원조와 민간투자의 확대 등을 포함한 한국에 대한 지원책을 검토한 것도 영향력 확대를 위해서였다. 아울러 국민당 정부 측에서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 이전에 거치도록 규정한 적당한 시기에 대한 방안으로 외교와 국방을 중국인이 담당하는 고문정치를 검토하는 등 적극적인 개입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은 김구와 임정이 한반도에서 정국을 장악한다는 것을 전제로 실현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요컨대 그동안 해온 김구와 임정에 대한 지원이 전후 강대국으로 부상할 중국이 구상하는 아시아 국제질서의 일부로서 중국의 주변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목표로 한 것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약소국에 대한 호혜적 지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이러한 한국 인식이나 대한반도 정책은 앞 세대 중국 정치지도자라 할 수 있는 쑨원, 위안스카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으며, 멀게는 책봉조공관계를 기본 축으로 하는 명. 청 시대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나 정책이 맥락이 닿아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