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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소련/러시아에서 대조국전쟁이라 부르고 독일에서 동부 전선이라 부르는 독소전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걸까요?
특히 전쟁의 주체인 소련군에 대해서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걸까요?
솔직히 아직까지도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은 부정적입니다. 냉전 체제와 반공 군사 독재 체제를 통해 통해 형성된 우리의 대소관과 2차대전관, 특히 우리 국군이 서술하고 검열한 책들은 여러 모로 독소전쟁의 진실을 알기 힘들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1978년에 나온 이호원 저 <제2차세계대전: 대하실록소설>의 경우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의 독소 전쟁사를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국내 밀덕층의 2차대전사 개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타임라이프 2차세계대전사의 경우 총서 39권 중 30권만 국내에 들어왔는데 그 중에는 1943년에서 베를린 전투 직전까지 다룬 <Soviet Juggnaut> 편이 있었습니다. 냉전 체제, 특히 공산군의 침략이라는 명백한 기억과 그걸 감안하더라도 유난스럽게 레드 컴플렉스를 보이던 국내 군사 정권의 성향으로 탄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은근슬쩍 소련이 그때 망했어야 한다는 역사관을 피력한다는 느낌도 듭니다.
군사 정권이 붕괴되고 노태우 정부가 북방 정책을 천명하며 소련과 수교하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독소 전선관은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2001년에 육군 사관학교 전사학처에서 출간된 부도 세계전쟁사에도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의 독소전쟁사가 송두리째 날아가 있습니다. 호비스트에서 나온 알기 쉬운 제2차 세계대전사 또한 쿠르스크 전투 편 이후의 동부 전선을 몇 페이지 밖에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국내 저작에서는 육사 전사학처에서 주기적으로 업데이트 되고 있는 세계전쟁사에서 독소전 개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4년간의 독소전과 1년도 안되는 서부 전선의 비중을 동등하게 다루는 등 불균형이 심각하기 짝이 없습니다.
게다가 역사에 대한 시각 형성이 역사책보다는 영화나 만화 같은 창작물이 더 큰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독소전관은 더 좋지 않게 유지되게 되었습니다. 국내 밀덕계층 형성에는 일본 밀덕계층의 영향이 직간접적으로 있었고 이는 더 심각한 편협을 가져왔습니다. 일본의 대소관/대러관은 역사적, 정치적 이유로 여러 가지로 좋지 않았고 다소 광적으로 독일군에게 열광하는 일본 밀덕이 소련군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제공한다는 것은 힘든 것이었습니다. 일본 쪽 2차대전 관련 창작물과 자료들, 특히 우리에게 유명한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만화들은 항상 독일군과 독일 전차를 주인공으로 삼았고 소련군은 철저히 타자이자 멋지구리한 독일 전차와 간지 넘치는 제복을 입은 비트만 같은 전차 승무원들의 활약에 우라만 외치며 정면 돌격하다 날아가는 무능한 적으로만 나왔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관점이 단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 근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우리에게 전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미국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냉전 이전에 미국이 가진 독소전관 또한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고 그 비중을 자신들의 활약에 비해 의도적으로 비중 없는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무명 시절부터 문제 의식을 강력히 가지고 있었고 그 문제 의식을 유지하며 연구를 지속하다 현재 독소전사의 강력한 권위자로 떠오른 인물로는 단연 데이비드 글랜츠를 들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연재할 글랜츠의 논문 <동부 전선 작전에 대한 미국의 인식>은 왜곡된 독소전관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그 관점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길을 보여준다는 것에서 시사할 것이 한 두개가 아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럼 연재를 시작하겠습니다.
미국의 동부 전선 작전들에 대한 인식
데이비드 M. 글랜츠 대령
해외 군사 연구소
포트 레븐워스
*본 문서는 모스크바에서 1986년 10월 21~23일에 제2차 세계대전사 문제를 공동 연구하기 위한 미-소 학자들의 최초의 회의를 위해 준비된 것이다. 이후 이 논문은 1987년에 소련 역사과학 대학의 <역사의 물음> 지에 기고되었다.
서문
역사적 현실을 보는 관점에는 필연적으로 결함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틀을 만들거나 유지하려 하지만 다양한 요소들은 사실을 왜곡시키고 역사를 보는 부수적인 관점을 만든다. 이 과정은 필수불가결적이고 역사학자들의 전문성과 원칙에 도전한다. 가끔 이 도전은 총체적으로 극복되기도 한다.
역사적 객관성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잠재적인 요소는 편협함(parochialism)-좁은 관점에 대해 온건히 표현하는 단어-으로 사람이 역사를 고려하고 보는 시야를 좁게 만들고 역사를 보는 사람과 관계 없는 나라나 지역의 역사를 왜곡되게 보이게 한다. 편협함은 역사학자들의 요구에 따라 반응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요구는 그들의 정당함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그들의 과거에서 정보를 찾으려는 것이다. 문화적, 이념적 차이는 이 경향을 서로 극단에 서 있는 국민들의 관점 차이를 악화시킨다. 이 관점차는 둘 사이의 갈등을 설명해 주는 틀이 되고 시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 사이의 이해를 질식시킨다.
역사적인 계산이 깔린 사료들의 문제는 편협한 관점이 등장하는 데 공헌했다. 역사학자들은 그들에게 존재하는 사료를 사용했고 그 사료가 제한되고 그들의 관점을 좁히는 것이라도 사용했다. 뛰어난 학자들은 이 한계를 알아챔으로서 과거를 재구성한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편협함이나 좁은 시야는 편견(bias)으로 계획적이거나 계획적이지 않은 것일수도 있다. 계획적이지 않은 편견은 편협한 관점과 똑같은 압력을 낳는다.
의도적인 편견은 정계, 종교계, 재계와 같은 외부 기관의 영향의 산물이거나 역사학자들 스스로의 이념적, 정치적 믿음으로 만들어진다. 편견, 특히 계획적인 형태의 편견은 더 복잡하고 더 치명적이기까지 한 편견은 단순한 편협함의 관점보다 더 위험하다. 편협함은 학자들이 더 폭넓은 사료를 접할 수 있음에서 극복할 수 있지만 편견은 학자들이 사료를 취사선택하고 자신들이 미리 받아들인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 사료를 배재함으로서 생겨났다. 외도하지 않은 편견은 역사를 왜곡하더라도 자연스럽고 자주 발견하기 어렵다.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편견은 부자연스럽게 역사를 왜곡하고 독자들이 잘 발견할 수 있다.1
소수의 20세기 사건들만이 편협함과 편견에서 벗어났다. 금세기에 가장 중요한 기간에 심대한 편견이 나타난 현상은 제2차 세계대전의 동부 전선, 독소 전쟁이다. 엇갈리는 관점, 편협함, 그리고 철저한 편견은 모든 부분에서 전쟁사를 흐트려놨고 몰이해와 적개심을 오랫동안 지속되게 했다. 사실 우리가 독소 전쟁에 대해 사실에 기반한 이해의 틀을 만들었어도, 아직 객관적인 틀을 잡는데는 멀리 떨어져 있다. 객관성의 부재는 몰이해의 유산으로 전쟁의 군사적, 정치적 현상을 이해하게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전에 기본으로 깔린 이해로 나온 관점과 정책이 튼튼한 기반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제2차 세계대전의 국부적인 현상인 동부 전선에 대한 경험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특히 본고는 제2차 세계대전을 보는 미국의 관점과 미국이 동부 전선의 소련군을 어떻게 바라봤는지에 대해 다룰 것이다. 본고는 더 나아가 현재 미국이 독소 전쟁을 보는 관점이 어떤 자료를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전달해 줄 것이다. 특히 미국이 독소전쟁을 어떤 책을 통해 읽고 가르쳤는가가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본고는 존재하는 사료들을 사용해 이전의 관점이 정확했는가를 검증할 것이다. 그리하여 요약하며, 본고는 서방의 동부 전선사 서술에 대한 비평이자 동부 전선에 대한 관점과 이해를 넓힐 미국인들과 다른 서구 사람들에 대한 비평이다.
전쟁기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관
전쟁을 보는 미국의 관점은 미국을 둘러싼 전쟁 환경의 변화와 미 정부의 장기적인 유럽 정책 역사를 반영한다.2 포위된 서구 민주주의를 돕자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1939년에 전쟁이 발발한 후 중립을 지키자는 의견이 더 강하여 유럽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합중국이 1940년에 있던 프랑스의 몰락과 영불 연합국의 됭게르크 탈출, 공중전에 휩싸인 영국 본토를 보자 미 정부는 영국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며 전쟁에 합류했다. 독일이 1941년 6월에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했을 때 전쟁의 확대를 슬퍼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몇몇 사람들은 독일의 관심사가 영국 정복에서 멀어져 독일의 전쟁 기계가 지금까지 어떤 정복자도 무너트리기 어려워한 러시아로 향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독일은 영국과 소련의 공조로 2개의 전선에서 싸우게 됐다. 반면 독일의 소렴 침공 결정은 미국의 중립주의자들이 미국의 전쟁 간섭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중립주의자들은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미국의 부담이 크게 줄었으며 독일의 소련 침공은 빨리 사그라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부 전선은 소비에트 연방을 향한 독일의 진격을 가리키는 진격 화살표 이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동부 전선에 대한 자료는 빈약했고 이는 전후에도 계속된다.
일본의 기습적인 진주만 공습은 미국이 전쟁 초기에 품었던 소극적인 태도를 적극적인 전쟁 참여로 돌아서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진주만 공습은 미국의 미온적인 전쟁 참여를 서구 민주주의를 구원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베를린-도쿄 추축을 몰아내는 성전 참여로 바꾸게 했다. 전쟁 초기 미 정부의 원칙은 나치 독일의 패배를 지원하는 것이었지만 일본의 기습 공격은 미국의 관심을 태평양으로 돌리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고 세계대전은 이후 미국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미국 정부의 종합적인 초점은 독일을 첫째로 무너트리고 태평양에서 일본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는 것이었고 미국의 공적, 사적 출판물들은 이 두 주제에 초점을 맞췄다. 그 결과로 미국의 군사 전략은 유럽 대륙에 직접 군사력을 투사해 독일을 무너트리고 그 동안 미국의 엄청난 적개심을 국가적으로 최초로 자극한 장소인 태평양에서 일본을 압도한다는 결과로 나왔다. 이 전략은 최소한 유럽에 '제2 전선'을 만드는 만만찮은 임무는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이탈리아에서 계속된 작전으로, 1942년 8월 디에프 상륙작전 이래로 프랑스에 정면으로 상륙할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었다. 군사 계획 입안자들과 공식 정책은 토브룩, 엘 알라메인, 오랑, 카세린, 팔레르모, 살레르노, 그리고 안지오에서 꼼짝 못했다.
대중적 욕구와 진행 중인 작전이 활발하지 못한 것은 미국의 태평양 전쟁을 1942년 여름부터 일본을 파괴하기 위한 공세로 나서게 했다. 과달카날, 미드웨이, 뉴기니, 그리고 미 정부가 지금까지 지배하는 것으로 알려진 많은 섬들에서 그랬다.
한 부대가 작전을 하면, 그 부대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아버지, 남편, 아들이 싸우고 죽을 수도 있는 전장에 있다는 것은 가족주의를 일으켰다. 인간은 자주 지정학적 고려를 축소시키고 정부나 국민이 한을 행세할 수 있는 지역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이런 관심의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부산물은 그 관찰자나 그 사건을 겪은 사람들의 관점에 의한 것만이 중요하다고 간주되고 나머지는 어둠에 휩싸인다.
그리하여, 미국의 전쟁을 보는 관점은 미군이 유럽과 태평양에서 겪은 경험으로 굳어졌다. 노르망디, 팔레즈, 메츠, 아헨과 이오지마, 필리핀, 오키나와는 가장 유명한 전장이 되었다. 미군의 군사적 효과가 늘어나고 추축국이 무너질 때 미국 국민들의 군사 작전에 대한 기억은 커졌다. 전쟁의 기억이 커지는 전 과정을 걸쳐서 미군 군사 작전의 세계적인 환경의 진실은 구름과 베일에 싸였고 기억의 휘장은 국민들이 전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결핍시켰다.
그러나 동부 전선은 불공정하게도 어둠 속에 싸여 있는 주제였다. 미국이 동부 전선의 전반적인 진행을 알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미국인들은 동부 전선에서의 대전투들이 서방 연합의 전략 성공을 보장한다는 것을 알았다.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그리고 쿠르스크는 친숙한 이름이 되었고 미국인들은 소련군의 승리에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이것이 아마 이 시절의 미국인들이 동부 전선을 이해하는 것의 전부였을 것이다. 확실히 동부 전선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작전을 미군이 이해하기에는 미군의 군사 경험이 적었고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과거의 경험도 없었다. 지금까지 미국인들은(그리고 다른 서방 국가들도) 스탈린그라드와 엘 알라메인을 동급의 전투로 여기고 쿠르스크와 안지오도 마찬가지로 여긴다. 비슷한 시기의 승리라는 결과는 두 작전의 크기와 범위에 대한 비교를 잊어버리게 했다. 제2 전선이 서방 연합국들 사이에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자 이 상황에 대해 어째서 1944년에 프랑스에 연합군이 전선을 형성하는 결정이 어려웠나에 대한 이성적이고 이해할 만할 설명이 미국 국민들에게 전달되었다.3
전쟁의 마지막 시기 동안 미국 국민들의 관심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과 프랑스로의 진격이었다. 비슷하게 독일의 벌지 반격과 1945년 초의 연합군의 독일 입성도 관심사가 되었다. 소련군이 벨라루스, 루마니아, 동프로이센, 폴란드, 그리고 헝가리에서의 대규모 진격과 성공도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 전에 소련군 작전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서부 전선과 태평양 전선의 성공적인 작전에 가려졌고 지금까지 그러고 있다. 요점은, 미국의 관심사는 그들과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작전이었다. 유럽 대륙 깊숙한 곳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지리적, 심리적으로 너무 먼 것이었다. 비슷한 경향이 소련의 대일전 참전 의의 또한 가려 버렸다.4
그리하여 동부 전선은 미국인들의 감사를 받았지만 절대 미국 국민들에게 제대로 이해 받지 못했다. 동부 전선은 최초로 독일 제국의 관심을 영국에서 동쪽을 향해 분산시켰다. 이후 붉은 군대는 독일군과의 투쟁으로 연합군이 유럽에 상륙하는 것을 도왔다. 궁극적으로 붉은 군대는 독일 제국을 향해 최후의 승리를 위한 공격을 개시했다. 미국인들은 소련의 역할에 감사했고 이는 사실 순수하고 따뜻한 감정의 결괴였다. 미국인들은 자신들과 같이 전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이런 감정에도 불구하고, 동부 전선에서 펼친 소련군의 작전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미지의 것으로 남았으며 그 중요성에 대한 깨달음도 없었다. 이 결과로 동부 전선을 둘러싼 일련의 '신화'를 지속시켰다.
원문:http://fmso.leavenworth.army.mil/documents/e-front.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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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