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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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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대 박맹언(지질학) 교수가 지난 22일 부산 중구 동광동 40계단 뒤편 축대에서 부산역전 대화재의 흔적을 조사하고 있다. 김동하 기자 kimdh@kookje.co.kr |
- 84세 임종태 씨 비석 증언
- 동광·영주·보수동 일대엔 그을린 축대 흔적 남아
- "장군의 뜨거운 인류애, 관광자원 적극 활용을"
59년 전. 1953년 11월 27일 오후 8시30분 발화한 부산역전 대화재는 6·25전쟁 폐허를 딛고 재건을 일구려는 부산 시민의 희망을 삼켜버렸다. 부산 중구 영주동 산비탈 판자촌에서 시작된 불로 29명의 사상자와 3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배고픔과 추위에 떨던 이들에게 파란눈의 구세주 리차드 위트컴(Richard S. Whitcomb·1894~1982) 유엔군 부산군수사령관(준장·본지 지난 6월 19일 자 1, 3면 등 보도)이 먹을 것을 나눠주고, 천막촌을 지어줬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위트컴 장군의 미망인 한묘숙(87) 여사는 지난달 24일 제67회 유엔의 날 기념식에서 허남식 부산시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감사패에는 '1053~54년 유엔군 부산군수사령관으로 재직하며 부산의 재건과 발전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기려 부산 시민의 마음을 모아 감사의 뜻을 전한다'고 적혀 있다.
감사패 전달을 계기로 부산역전 대화재와 위트컴 장군이 국경을 뛰어넘어 부산시민에게 베푼 휴머니즘을 부산의 기억자산과 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위트컴 장군의 선행에 도움을 받은 부산 시민이 부산역전 대화재 발생 1주년을 맞아 1954년 11월 그를 기리며 세운 공덕비는 그동안 사진만 있을 뿐 비석 존재 여부와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최근 공덕비 위치를 아는 사람이 나타났다. 임종태(84) 문성인쇄사(중구 중앙동 4가) 대표는 "현재 부산도시철도 중앙동역 14번 출구 인근 외환은행과 정석빌딩 사이, 당시 전차역 전차선 안쪽 역전파출소 인근에 위트컴 장군 공덕비가 있었다"고 비석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했다.
부산역전 대화재 때 불탔던 40계단을 비롯한 동광동, 영주동, 보수동 일대에는 아직 화재에 그을린 축대 등 그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본지 취재팀은 지난 22일 위트컴 추모사업회 관계자, 박맹언(지질학) 부경대 교수와 함께 40계단 뒤쪽 축대 등 부산역전 대화재 흔적을 둘러봤다. 박 교수는 "화재 열기에 돌이 달궈진 뒤 비바람에 식으면서 깨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화재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을 추가로 조사하고 발굴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부산역전 대화재의 최초 발화지로 지목되는 영주동 535 인근에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이 미군의 공습을 피하려고 파놓은 지하 벙커 형태의 방공호와 4m 높이의 환기통이 아직 남아있었다. 이영근(82) 전 동광동장은 "메리놀병원 위쪽에 방공호가 3곳 있었는데, 이곳에는 해방 후 귀환동포와 6·25 전쟁 이후 피란민 수십 세대가 살았다"고 전했다.
강석환 위트컴 추모사업회 부회장은 "내년 부산역전 대화재 60주년을 맞아 위트컴 장군의 아름다운 인류애에 관한 기억과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보전하고, 기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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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 이전(맨 위쪽)과 이후 중앙로 모습.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제공
■ 1950년대 화재 도시 악명
- 불에 취약한 부산은 '불산'
- 가마솥 '釜'→부자 '富' 개명 요구
- 용두산공원 뒤편에 예방비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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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공원 화재예방비. 국제신문DB |
1950년대 6·25전쟁 이후 부산은 화재의 도시로 악명을 떨쳤다. 8도의 피란민이 부산의 산마다 꼭대기까지 판자촌을 형성하면서 화재에 속수무책이었다. 부산에 몰려든 피란민 수는 부산에 살던 인구와 맞먹었다. 1949년 47만 명이던 부산 인구는 1951년 84만 명에 달했고, 1955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했다.
이 같은 구조적 이유로 당시 불이 나면 대형 화재로 번질 수밖에 없었다. 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도 영주동에서 발화한 화재는 바람을 타고 동광동, 중앙동, 대청로 일대로 번졌다. 이영근(82) 전 중구 동광동장은 "당시 비가 새지 않도록 미군의 기름종이로 만든 판자집 지붕은 강풍에 날려 둥둥 떠다니며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 화재에 취약한 부산은 '불산'으로 불렸다. 일각에서는 부산의 '釜'자가 가마솥이라는 뜻으로, 불이 잘나므로 부자 '富'자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대형 화재가 잇따르자 불안한 부산 시민은 경남지사, 부산시장에게 몰려가 대책을 세워달라고 항의했다. "비가 안 오면 기우제라도 지내는데 도대체 뭐하느냐"고.
급기야 부산 지역 기관장들이 모여 1955년 정월 대보름에 맞춰 용두산공원 부산타워 뒤편 야산에 화재예방비를 세웠다. 주경업 향토사학자는 "화재예방비는 가운데 불 화(火)자 주변에 물 수(水)자 4개가 동서남북으로 에워싸고 있는 형태"라며 "당시 기관장들이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걸 만들었을까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용두산공원 부산타워 두모C&C는 용두산공원 화재예방비를 본뜬 관관기념품 3종(휴대전화고리, 열쇠고리, 자석)을 개발해 이곳을 찾는 관광객에게 스토리텔링을 들려주고 판매해 호평을 받고 있다. 강석환 두모 C&C 대표는 "6·25전쟁과 이에 따른 잦은 화재는 아픈 기억이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훌륭한 관광상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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