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박영근작품상에 박한 시인의 「뒤집힌 꽃잎-바다의 노래」을 선정했습니다.
뒤집힌 꽃잎
-바다의 노래
박한
별이 떠 있나요 기다리는 곳에
밤새 이슬들이 무겁진 않나요
난 떠나온 곳에 바람만 외웠어요
파도를 아무리 뒤적여봐도 소용없어요
여긴 들어오지 마세요
어둠과 날숨들이 엉킨 이곳은
뒤집힌 꽃잎
종이 치질 않네요 아직 밤인가요
늦지 않았다면 이제 사과할게요
별을 바라보며 사랑을 꿈꿨고
누군가 그리울 땐 꽃을 꺾었죠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나는 분명 봄이었는데
겨울나무들처럼 온몸을 잃어버린
뒤집힌 꽃잎
난 이제 알았어요
별이 이토록 어둡다는 것을
그리고 내 영혼이 이렇게 무겁다는 것을
어머니, 울지 말아요
난 이제 그만 어두워질게요
다만 내 이름은 꽃잎이라 기억해줘요
깊은 바닷속, 종소리 들리지 않겠지만
이 수업도 어쨌든 끝이 나겠죠
(기침이 나지 않는 저녁, 삶창, 2023)
■ 제 10회 박영근작품상 심사평
인양할 수 없는 슬픔의 깊이를 헤아리는 시선
‘10년’이라는 말을 입안에서 가만히 굴려본다. 지난 10년이라는 세월은 어떤 시간의 흐름 속을 헤엄쳐 왔을까? 공교롭게도 박영근작품상이 제정된 지 10년째이고, 세월호 참사를 겪은 뒤 망연한 슬픔과 분노를 되새기며 흘러온 시간도 10년이 지났다. 그런 시간의 두께를 무엇으로 잴 수 있을까? 박영근이라는 이름과 작품상이라는 형식은 남았으되, 박영근의 육신은 육탈의 과정을 겪은 지 이미 오래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 역시 마찬가지인 데다 시신조차 건져 올리지 못한 미수습자들을 떠올리면 10년이라는 시간은 심해의 아득함을 닮았다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예심에서 본심으로 올라온 작품이 30편가량이었다. 그렇게 모인 각 시편은 각각의 장점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딱 한 작품만 가려 뽑는 일은 심사의 엄정함을 요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우열 같은 말로 접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라는 것 자체가 그런 기준을 적용시키기 까다로운 장르라는 사실과 함께 무엇보다 박영근작품상이 갖는 고유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이 각각의 작품을 놓고 토론을 시작하기 전에 그런 점에 대한 확인부터 해 두고자 했다. 박영근이라는 사람이 가난과 외로움, 절망에 맞서가며 남긴 고투의 흔적들인 시편과 그 바탕이 된 시 정신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게 심사위원들이 어렵지 않게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렇게 해서 서너 편의 시로 압축시켜 집중적인 논의를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박영근작품상이 아니라도 그동안 충분히 조명받았거나 격려받았다고 여겨진 시인들의 작품은 옆으로 밀어놓기로 했다. 박영근 시인 역시 그래야 한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것으로 믿는다. 최종 두 명의 시가 남았을 때 선뜻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기 힘들었음을 고백한다. 논의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일반 독자는 물론 시단에서도 아직은 덜 알려진, 그러나 빼어난 성취를 이루었다고 판단되는 작품에 제10회 박영근작품상의 영예를 안겨 주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수상작이 박한 시인의 「뒤집힌 꽃잎-바다의 노래」이다. 지난해에 출간한 첫 시집 『기침이 나지 않는 저녁』(삶창)에는 외롭고 쓸쓸한 존재들을 바라보는 다정한 눈길과 그들의 삶을 어루만지는 섬세한 감정들이 가득하다. 과하지 않은 이미지와 적실한 시어의 결합이 차분한 시적 전개와 어우러지며 독자들을 감응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 장점이 수상작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있거니와, ‘뒤집힌 꽃잎’이라는 상징을 통해 압도적 비극을 상기시키는 그날의 진도 앞바다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꽃잎’이 주는 작고 여린 이미지와 ‘뒤집힌’이라는 조난의 이미지가 상호 침투하며 만들어 낸 비극의 정황은 동시대인들을 아프게 한다. 이 작품과 함께 쌍을 이루는 「빈 배-육지의 노래」가 희생 학생의 어머니를 화자로 내세웠다면 「뒤집힌 꽃잎-바다의 노래」는 희생 학생을 화자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 슬픔에 잠겨 있는 어머니를 위무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더욱 가슴 아리게 한다. 당사자가 아니면 체득하거나 결코 인양할 수 없는 슬픔의 깊이가 있음을 알려주는 시편에 박영근작품상이라는 이름을 얹어 주기로 한 까닭이다. 올해가 세월호 참사 10주기라는 점에서 더 각별한 선택이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박한 시인에게 드리는 이 상이 앞으로 내딛게 될 발걸음에 작은 격려가 되기를 바라며, 기쁜 마음으로 축하 인사를 전한다.
선정 이유 요약:
‘꽃잎’이 주는 작고 여린 이미지와 ‘뒤집힌’이라는 조난의 이미지가 상호 침투하며 만들어 낸 비극의 정황을 통해 세월호 참사가 지닌 슬픔의 깊이를 들여다보도록 하고 있다.
본심 심사위원: 박일환(시인), 이설야(시인), 오창은(문학평론가)
■ 제10회 박영근작품상 수상소감- 박한
시를 쓰며 단물 빠진 문자들을 씹다 잠든 적이 있습니다. 냉장고에선 어떤 것도 잘 썩지 않으니 아직 쓰지 못한 핏기 어린 언어들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추워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마를 열고 불을 껐습니다. 발이 차가워졌습니다. 강이 어는 밤이 주석처럼 길게 이어졌습니다
천학비재한 시절, 박영근 선생님의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를 읽었습니다. 처음 보는 말들이 내 방 바닥에서 깨어났습니다. 그건 뜨거우면서도 싱싱했습니다. 선생님의 글이 ‘생활’과 비슷했기 때문으로 기억합니다.
작은 서점 낭독회를 준비하던 중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박영근 선생님의 책은 아주 오랫동안 제 옆구리를 데워주던 시집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수상 소식에 감격했고 그 상의 이름에 더욱 감동했습니다. 박영근 선생님의 시를 좋아하고 또 사숙했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작고하셨지만 그분의 정신이 제 글에서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과 사양지심이 동시에 떠올랐습니다.
오랜만에 책장에 꽂아 두었던 시집을 다시 꺼내 눈뜨고 싶어졌습니다.
부족한 제 시를 선정해 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단 말씀을 드립니다. 이 상을 등불 삼아 앞으로 이어질 문필의 고적함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더욱 분투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박한 시인 약력
1985년 출생 성균관대학교 영상학, 신문방송학 전공
2018년 지용신인문학상 ‘순한 골목’ 당선
2019 경기문화재단 유망작가 선정
2023 시집 『기침이 나지 않는 저녁』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