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흰 쌀밥에 고기반찬을 최고의 식단으로 여겼다. 당시에는 쌀겨는 물론이고 씨눈까지 깨끗이 없앤 백미가 쌀 중의 으뜸이었다. 반면에 쌀의 씨눈을 도정하지 않은 현미는 먹기가 껄끄럽고 소화가 잘 안 된다는 이유로 천대를 받았다. 콩, 팥, 수수 같은 잡곡도 대접을 못 받기는 마찬가지. 이러한 잡곡은 비싼 백미로만 밥을 지을 형편이 못 되는 가정에서 쌀과 섞어 쓰던 대체식량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대세가 역전됐다. 현대인들은 순백의 쌀밥보다 누런 현미밥이나 잡곡밥을 선호한다. 쌀의 씨눈에 각기병을 예방하는 티아민(비타민 B1)이 다량 함유돼 있을 뿐 아니라 잡곡이 백미에 부족한 영양소를 보충해주는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농촌진흥청이 최근 1년여 동안 수행해 지난 2월 23일 발표한 ‘잡곡연구 프로젝트’는 혈당 상승 저해율이 잡곡의 가치를 한층 더 높여줄 가학적인 데이터를 담고 있다.
잡곡을 활용해 다양한 기능성 농식품을 개발할 목적으로 농촌진흥청이 구성한 공동연구 프로젝트팀에서 조, 기장, 수수, 팥, 식용피 등의 잡곡이 항당뇨, 항암, 항염증, 항산화 활성 등 건강 기능성이 높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혀낸 것이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그중에서도 수수와 기장의 기능성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판명됐다.
먼저 혈당 상승을 막는 항당뇨 활성효과는 조, 기장, 수수, 식용피 등 대부분의 잡곡에서 나타났다. 특히 수수와 기장의 경우 50퍼센트를 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수수와 기장은 항암효과도 뛰어났다. 수수와 기장의 추출물을 암세포에 처리한 결과, 암세포 사멸률이 각각 77.7퍼센트, 64.1퍼센트로 나타났다. 반면에 정상세포에 처리했을 때는 세포 독성이 거의 나타나지 않아 암세포에만 작용하는 특이 효과임이 확인됐다.
조․기장 등 황산화 활성 수치 토코페롤 보다 높아
세균이 유발하는 염증에 대해서는 조, 기장, 수수, 팥 등이 40~97퍼센트까지 억제효과가 있었다. 이 가운데서도 기장이 97.3퍼센트, 수수가 88.5퍼센트로 높은 항염증 활성을 보였고 세포 독성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양한 분석 방법으로 잡곡의 항산화 활성을 측정했더니 수수와 식용피의 경우 대표적인 항산화제로 알려진 토코페롤보다 월등한 효과를 나타냈다. 항산화 기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총 폴리페놀 함량은 수수가 흑미보다 2배가량 많았다. 수수에는 항산화물질을 포함한 19종의 폴리페놀 화합물도 들어 있었다. 이 밖에 식용피, 팥, 조, 기장의 경우도 항산화 활성이 있는 잡곡으로 평가됐다.
농촌진흥청 기능성작물부 이학동 부장은 “잡곡의 건강 기능 성분에 대한 활성 평가를 동물시험까지 확대해 안전성을 검토한 후 기능성 농식품과 품종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며 “기능성 농식품 산업은 앞으로 고부가가치 창출과 국민 건강 개선에 기여할 신성장산업”이라고 강조했다. <위클리‘공감’ 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