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우리 고향은 기장군 철마면 송정리로 철마면에 속하지만 면소재를 들리려면 예전에는 하루를 허비해야
했다 47번두구동에서 송도까지 왕래하는 47번 버스를타고 동래 대동병원 앞에서 하루에 2번 왕래하는
철마행 버스를 타면 안락로터리 명장동 석대를 거쳐 주민등록증 1통 떼어오는데 거쳐야하는 불편한 길
이었다.
0.그런데, 기장군 철마면과 금정구 두구동은 조리천을 사이에 두고있어 두구동 사무소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이고 공덕초등학교도 있어 행정구역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공덕초등학교 6년의 과정을 졸업하
였고 돌아서 하루걸리는 철마쪽보다 두구동에 더많은 친구들과 지인들이 많고 애착이 또한 많다
0.그래서 부산대학교 대학원과정 학생들이 조사한 두구동에 자료를 발췌 하였다.
0.임석마을 앞의 들을 개간할 때 신라시대의 석관묘에서 다량의 토기가 출토된 점으로 보아 원삼국시대
부터 이곳에는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0.원래 동래군 북면에 속했던 이 동은 신라 이전에는 장산국에 속하였고 신라가 이 지방을 점유하여
거칠산국이라 하다가 경덕왕 17년 ( 758년)에는 양주에 속하되 동래군이라 개명했다.
0.고려 현종9년 ( 1018년)에는 동래군을 울주의 속현으로 만들었다.
0.조선조 태조 6년 ( 1397년)에는 동래진으로 개칭되었고, 세종5년 ( 1423년)에는 다시 동래현이라
칭하였고, 명종2년 ( 1547년)에 동래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성이 왜적에게
쉽게 무너짐에 선조25년 ( 1592년) 다시 동래현으로 격이 낮추어졌다가 선조32년 ( 1599년)에 천장
(天將)을 접대하는 일로써 다시 동래도호부로 승격되었다.
0.영조 16년(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東萊府誌) 각면 각리 원근정도 (遠近程道)조에 보면
두구리 (豆口里. 杜邱里는 1899년에 편찬된 동래부읍지 때까지는 혼용되었다)는 북면에 속한 마을로
관문으로부터 30리 거리에 있다고 하였다.
0.1914년의 부군 (府郡) 폐합 때는 이 동이 그대로 동래군 북면에 속해 있었으나 1963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비로소 부산시 동래구로 편입되고 북면출장소의 관할에 놓였고,
0.1966년 리제 (里制 )의 폐지에 따라 두구동 ( 杜邱洞)이라 칭하게 되었다.
0.1975년 북면출장소의 폐지에 따라 동래구의 직할 동이 되었고 1988년 1월 1일에 동래구에서 금정구가
분구되자 금정구의 관할동이 되었다.
0.동북쪽으로는 기장군 철마면, 서쪽으로는 수영천을 건너 노포동과 접해 있다.
1.임석 마을
마을 사람들은 기촌(起村 ) 연대를 약 500여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삼국
시대인 거칠산국시대부터 이 곳에 사람들은 마을을 형성하고 삶을 영위 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임란 이후 남평문씨 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1967년경만 하여도 마을의 53가구중 12가구가 살았는데
그 뒤로 김해 김씨, 광산 김씨, 죽산 박씨가 마을 가구의 30%를 차지하고, 그 외에 경주 이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남평 문씨가 150여년 전에 당산제를 없앴기 때문에 당산제는 없다.
2.수내 마을
수내 마을도 기촌 연대를 500여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고 마을 이름을( 수반= 숲안) 수반 이라 한다.
성씨별 주민 구성은 죽산 박씨, 밀양 박씨 등 박씨가 30%를 차지하고, 그외에 김해 김씨, 경주 김씨,
영천 이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어 뚜렷한 중심 성씨가 없는 각성바지 마을이다.
마을 안에는 조계종 소속의 수도암과 재단법인 대한천리교 삼일 포교소가 있으나 신도수는 거의 없다.
당산제를 해마다 정월 보름에 지내고 있다.
3.대두 마을
대두 마을도 기촌 연대를 500여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고, 처음 유씨 (劉氏)가 이주해 와서 마을을 이루
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서쪽에 수영천이 흐르고 있어 한물 (大水)에서 대두 (大豆)라고 현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하나 오히려 한 마을 (大村) 또는 한말 (大斗)=大豆) 이라는 데서 유래한 지명인 것 같다.
두구동의 옛지명이 '豆口里'라 한 것도 아울러 생각해 볼 일이다.
유씨와 죽산 박씨들이 많이 거주하고 그나머지 각성들로 각성바지 마을이다
당산제는 1968년 이후부터 지내지 않는다. 소멸원인은 어떤 기독교인이 없앴다고도하고, 재원 마련이
어려워 없앴다는 말도 있다.
4.중리 마을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임란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이 마을은 두구동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 중리'라 하는데 마을에는 은혜유치원, 공덕초등학교, 두구동 우편취급소, 금정농협 두구지소, 새마을
금고, 동래정신과병원 등 두구동의 주요기관은 이 마을에 다 있다.
성씨별 주민구성은 죽산 박씨를 포함한 박씨가 약 20%를 차지하고, 그 나머지는 각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몇년 전만해도 당근과 쪽파를 계절에 따라 90% 까지도 생산했고 지금은 화훼나 관상수 생산이 더 많다
5.죽전 마을
기촌 연대는 약500여년 전후로 추정하고 당씨 입향 성씨는 유씨 (劉氏)와 조씨 (趙氏)라 하지만 지금은
유씨는 없다.
마을 뒷편에 대나무가 많아 대밭 (竹田)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성씨별 구성은 진양 강씨가 약30%를 차지하고 그 나머지는 각성들로 구성된 각성바지 마을이다.
0.마을의 문중조직으로는 영모제 (永慕祭: 1977년에 준공. 두구동 87번지 소재)를 가지고 진양 강씨들만이
조직하고 있다. 진양 강씨의 이 마을 이거 (移居)는 은렬공 ( 殷烈公) 14세손인 위민 (渭敏) 때 였으니
약 390여년 전의 일이다
6.조리마을
기장군 철마면에 접해 있고 조리내 (趙里川)를 경계로 그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500여년 전에 유씨, 조씨, 강씨, 이씨들이 들어와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을의 동남쪽 공덕산의 아래쪽에 조정언 (調井堰 )아 1887년 ( 고종 24년)에 축조되었고, ( 1937년 간행인
東萊郡誌 提堰條에 調井堰: 在北 杜邱里 孔德山下라 기록되어 있슴) 또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동래
현조에 조정부곡 (調井部曲)이 기록되어 있었던 점과 현 조리마을 古老들이 전하기를 "옛날 이 마을의 농
지는 모두 범어사 사찰 농지로, 이를 소작했다"라고 말한 바에 따르면, 이 마을은 옛날 조정부곡이 있던
터가 아닌가 추정된다.
전주 이씨와 경주 이씨를 포함한 이씨가 약20%를 차지하고 그 나머지는 각성들로 구성, 약70%가 불교를
믿고, 주로 범어사를 왕래하는 사람이 많다
당산제를 통장이 주관하고 7개반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제를 지낸다
두구동에 대한 자료 제보자
0.임석 마을 : 박 소남, 심 말점, 한 성백, 김 재규
0.수내 마을 : 김 영수. 이 야모, 정 연우, 권 순연
0.대두 마을 : 서 옥순
0.중리 마을 : 갈 점봉, 강 윤주
0.죽전 마을 : 왕 영점, 김 정순, 우 분수
0.조리 마을 : 전 을순, 이 기수, 김 삼룡, 도 광수
*. 이 자료는 1993년 부산대학교 부설 한국문화연구소에서 석사과정 학생들을 동원하여 두구동의 기층문화
에 대한 조사 자료임.
첫댓글 선사는 복받고있다 초등학교때 그 곳에서 농사지었으면 땅부자 아니가
아직 그 곳에 땅이 많이 있다며 적절하게 잘쓰니 조상이 도워주지
선사모교 공덕초등학교에서 지킴이해야 되는데 아마 지금쯤 전교생이 100명도 안되지
위에 열거한 친구들이 초등동기들과 묻지마 관광갔다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야기해라
두구동은 경륜장을 포함한 체육공원이 생기므로 주위 땅값이 엄청 올라 4차선 도로변은
평당 500만원을 호가하고 유입인구가 늘어나므로 공덕초등학교도 3층으로 증축되었습니다
현재 재학생도 생각이상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입학할 때 동급생이 120명이었고 졸업할 때 96명이었습니다.
옛날 생각이 나네 공덕 초등학교에서 공도차고 놀러도 다녔는데
그곳에 갈려면 하루는 외박하고 가는곳 이었네 이제는 선사님
초등 여동기들 아련하네 세월이40년 지나는데 그리고 그곳에서자란
선사님의 두구동 공부내용 대단하심니다
이야기 하라! 이야기 하라! 안 물을께 이야기하라!
정말 순수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 초등학교 여자동기중에 정영0, 양선0,강무0,박해0,강0남,이있는데
요즘 격월제로 모임을 하면 고교시절, 창암이, 순식이, 문일이,( 또 몇명 더있고),하고 그때 있었던
이야기를 한번씩 합니다, 캥기는게 있으면 여자가 말을 꺼내지는 않을것고, 나름 추억거리가 많은
모양입니다, 양선0는 서울에 살고 딸냄이를 육사출신 장교한테 출가시켜 국비유학 미국행하여
뉴욕으로 들락러리고, 강무0는 남편이 부산시청 공무원인데 아마 작년 정년퇴직 한걸로 알고 아들
2명 모두 결혼시켰고, 정영0는 정말 편하게 살고있고, 박해0는 두구동 사람과 결혼 서울에서 살고 모두
잘나가는 50대 후반 입니다.
우리 2회 후배중에 양영0, 양정0 도 내가 가끔씩 만나면 오빠 동기들이 그때 참 순한 사람들
이었다고 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박샘은요,
우리 동기들 뿐만 아니고, 우리 후배들 하고도 만났던 모양입니다.
아니, 그냥 순한 사람이 아니고 참 順 하기도 하면서 善한 사람이지요. 알랑가 몰라~~~
선사님 적은 이름보니 새롭네 친구들은 교복입은 모습 후배들은 어린애로만
느껴저는데 동생들도 50중반이 지나네 만나면 안부나 잘 전해주소
야!,알겠심더,
시내에서 성장한 사람들보다 촌에서 자란 우리는 형제자매나 다름 없어서 만나면
온갖 이야기를 나누는 허물없는 사이입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