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회 국민강좌] 조선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호사카유지 | 세종대학교수
근세한일관계
한국과 일본과는 오랜 역사의 흐름에서 1403년 교린관계를 맺고 조선통신사가 오가는 아주 가까운 나라였다. 그러나 15세기 중반부터 막부의 내란으로 일본전역은 100여 년간 전국시대의 전쟁으로 돌입하므로 써 조선에게 일본은 관심 밖이었다.
당시 손자병법을 중심사상으로 한 일본 사무라이들은 상대를 침략해서 얻은 땅을 주군에게 드리면 주군은 그 땅을 하사하는 계약관계였다. 하사받은 지역의 인민을 통치하는 것이 무사들의 큰 꿈이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역을 통일하면서 싸울 일이 없어졌고 빼앗을 땅이 없어지자 이웃나라 조선을 침공한 것이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두 나라간은 서먹해졌고 사무라이 정신으로는 일본을 통치할 수 없는 고민으로 성리학을 도입한 일본은 에도시대(1603-1867)에 접어들게 된다.
일본의 대 조선관 인식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川家康)는 대마도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자신은 조선에 한 사람도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며 조선과의 국교정상화를 추진했고 이에 조선에서는 왕릉을 도굴한 범인을 인도하면 국교를 수립할 의사를 전했다.
이때 대마도는 사형수를 범인으로 둔갑시켜 보내오자 조선은 이에야스가 조선을 대신하여 도쿠가와 가문을 타도한 영웅으로 보며 조일수교를 받아들였다. 일본과 교린관계를 맺은 조선은 일본에서 대장군이 즉위할 때마다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통신사는 귀중한 문화사절로 일본에서의 조선통신사 접대는 대단했다. 중국과 책봉관계를 맺지 않은 채, 조선과 교린관계를 맺은 일본으로서는 조선통신사야말로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일본의 조선통신사 자료에 의하면 이들을 탑승시킨 배는 가장 호화롭게 꾸몄고 일본학자나 서민들은 통신사가 통과할 때 열광하면서 자신들이 지은 시문을 평가해서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글 한자라도 얻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을 위해 조선에서는 그 일을 맡아하는 ‘제술관’을 동행시켰다.
이러한 조선통신사의 문화전파로 실제 조선의 주자학(성리학)은 에도막부의 정통사상이 되었다. 특히 일본유학자들은 정유재란 때 2년간 일본에 납치되었던 강항(姜沆)이 전한 이퇴계를 매우 숭배했으며 임진왜란 때 일본에 연행된 조선유학자와 그 자손들이 일본의 각번(=藩:일어로는 ‘한’으로 각 영주들의 통치범위)에서 인정받고 살면서 그들과 교류를 통해 일본 학자나 서민들은 모두 조선은 선진국이고 예교의 나라이며 높은 문화수준을 갖고 있는 나라로 인식했다.
특히 일본의 지식인 후지와라세이카(藤原惺窩:1561-1619)나 야마자키안자이(山崎闇濟:1618-1682)와 그 제자들은 조선유학자들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17세기 후반에도 조선을 선진국으로 존경하는 견해가 계속되나 일부에서 일본이 조선보다 우수한 나라로 보는 견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구마자와반산(熊澤番山:1619-1692)은 일본 시조신,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와 초대천황 인진무(神武)천황이 베푼 은혜를 근거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중국다음에 우수하다고 주장했고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1622-1685)는 조선과 중국은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었으나 일본천황의 혈통은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으므로 일본이 가장 안정되고 중심이 잘 잡힌 나라로, 일본이야말로 진정한 아시아의 중심인 ‘중국(中國)’이라며 중국, 조선보다도 더 우수하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에도시대중기에는 일본을 아시아의 중심으로 보는, 소위 ‘일본형 화이(華夷)관’이라고 불리는 세계관이 형성되어가다 후기인 18세기 후반이 되자 국학(國學)사상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대외적위기를 계기로 민족주의가 대두하기 시작했다.
일본 국학을 대성한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고사기(古事記)』,『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재를 모두 역사적 사실로 보고 삼한이 일본에 대한 조공국이었고 진구(神功)황후는 신의 계시를 받아 삼한을 토벌했다고 저술하므로 한반도 침략을 신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선침략이 신의 뜻이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정당화시켰다.
모토오리 노리나가 논리를 발전시킨 히라타아츠타네(平田篤胤:1766-1843)는 일본은 신국(神國)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체계화시켰다.
히라타아츠타네의 사상을 흡수하여 ‘신국일본의 세계제패’라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구축한 사람이 사토노부히로(佐藤信淵:1769-1850)이다. 그는 일본은 세계에서 맨 먼저 땅이 생긴 나라로서 ‘세계만국의 근본’이므로 전 세계를 모두 일본의 군현(郡縣)으로 만들어 만국의 군장들을 모두 일본의 신복(臣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세계제패 방법은 ‘약하고 점령하기 쉬운 나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은 방책’이라며 만주를 발판으로 몽고, 조선, 중국, 남방제도 등을 공략하라고 역설했다. 또한 조선은 오키(隱岐)섬과 울릉도, 대마도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동쪽과 남쪽 두 방향에서 공략하면 ‘삼켜버리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도 했다.
막부말의 병학자 요시다쇼인(吉田松陰)도 조선에 대한 침략을 주창했다. 막부말의 일본 지식인들은 조선을 일본의 해외웅비, 대륙침공의 발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에 대한 멸시관은 역사적사실로는 근거가 없는『고지키』와『니혼쇼키』의 신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데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주류가 인닌 비주류의 주장일 뿐이었다.
에도시대 일본의 조선관은 초기의 조선에 대한 존경으로부터 그에 대한 반발로 멸시관이 생겼으며, 막부말에 이르러 고대로부터의 ‘일본속국, 조선’이라는 이미지를 확대 생산해갔다.
이후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일으키고 성리학의 틀을 이용하여 국부인 천황에 대한 충을 강조하고 국학과 신도사상을 강조하여 천황을 신격화하고 침략국가로 돌변했던 것이다.
조선인의 대 일본인식
조선시대 조선인의 대외인식 기본 틀은 주자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화이(華夷)관으로 정치적으로는 명나라의 제후국이지만 문화면에서는 명과 대등하다고 생각했다. 그 시기의 화이관은 경직된 화이관이 아니라 문화상대주의적인 경향으로 유교문화를 갖추지 않은 일본과 여진도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를 인정했다.(예:신숙주(申叔舟)의<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
그러나 16세기 조선주자학(=조선 성리학)이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에 의해 심화되며 명나라는 중화,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로 인식되며 일본을 이적(夷狄)으로 보고 문화상대주의를 버리는, 조선의 대외관이 바뀌었다.(퇴계이황(李滉)과 그의 제자 김성일(金誠一)이 대표)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조선침략으로 조선인의 대일본인식은 변화되었다. 그저 막연한 이적, 왜구라는 일본에 대한 이미지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직접체험으로 온 국민의 일본인식은 짐승 같은 무리였다. 특히 강항은 일본인은 ‘침략자’, ‘학살자’, 잔인한‘짐승’이라고 했다.
임진왜란 때 군인이었던 이수광(1563-1628)은 일본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일본인=‘왜노’,‘이류(=異類: 짐승과 같은 부류)’라고 하면서도 『지봉류설(芝峰類說)』에서 일본기술과 무기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칭찬했다.
17세기의 지식인과 민중의 대일본 공통인식은 히데요시의 침략으로 인해 일본인은 ‘잔인’하고 ‘목숨을 가볍게 생각하여 살인을 좋아한다(輕生好殺)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며 ‘왜노’가 일반화 되었다. 그리고 선조를 비롯해 직접 체험한 국민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 만대에 걸쳐 복수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만세원(萬世怨)’, ‘구세복수설(九世復讐說)’이 전개되었다.
17세기 후반, 통신사를 통해 정보가 입수되어 일본에 관한 연구가 진전되었으나 당시 지식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일본의 정치나 군사적 동향이었고 일본 사회나 문화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일본에 대한 이적(夷狄)관이 더욱 심화되며 일본문화는 원래 야만적이란 인식이 팽배했고 조선의 주자학이 일본으로 전해져서 일본을 교화했다고 평가하며 일본에게 정치, 도리, 문물을 전수했다는 문화전수의식이 체계화되었다.(홍여하<洪汝河:1621-1678>와 허목(許穆:1595-1682)이 일본 이적관을 체계화)
18세기에 들어서며 소중화 주의에 입각해 일본을 인식했던 조선은 통신사로 일본사회의 변화를 직접 목격하고 돌아온 관리들과 이익(李瀷), 안정복(安鼎福), 원중거(元重擧), 정약용(丁若鏞)등 실학자들이 일본을 연구하며 대일정책에 있어 현실적인 입장건의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약용(1762-1836)은 일본에 대한 이적관을 부정하며 소중화주의적 관념에서 탈피하여 일본의 사회, 문화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일본이 중국, 서양과 교류하여 기술수준이 조선을 능가한다고 보았고 청에서 적극적으로 서적을 구입하며 과거제도가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학문연구가 가능하다고 평가하면서 학문이 매우 발달한 일본은 우수한 무기로 조선을 다시 침략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로써 근세역사를 배경으로 본 사무라이와 선비라는 차이의, 한일 간의 역사인식을 살펴보았다.
출처 : 국학원 http://www.kookhakw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