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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예식과 출애굽사건
(출11-12장)
1.도입
출애굽기 저자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사건과 관련해 하나님을 일컬어 특별히 ‘여호와’ 란 이름으로 명명(命名)합니다(출6:6-7). 아울러 본문에서 사용한 여호와란 이름은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맺은 신적 ‘언약’에 밀접히 관련된 이름임을 밝힙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가리켜 ‘여호와 하나님’이란 이름으로 명칭할 때는 선(先) 언약하시고 후(後) 성취하시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란 말씀입니다. 이로 인해 이제 바야흐로 족장들, 특히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창12장)의 맹세적 보증으로 주신 횃불언약(창15장)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성취될 시기가 이르렀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출애굽 사역을 담당할 자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에게 자신을 계시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출3:15)라 하라고 일러주십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불가분리의 언약적 관계를 맺고 계신 분이시며, 이로 인해 이들 조상들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동일한 언약의 하나님이 되심을 강력히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언약적 사실에 근거해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모세를 통해 알려 주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입장이 쉽게 애굽을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왕권 하에서 이스라엘은 노예신분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를 위해 국고성과 비돔과 라함셋을 건축하는 노역(勞役)현장에 노예와 다름없는 천한 신분으로 동원되고 있음을 기술합니다(출1:11). 이런 상황으로 인해 출애굽사역은 불가피하게 바로 왕과의 정면대결 양상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런 대치국면은 보다 근원적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창3:15) 속에 담겨진 양자간의 첨예한 사생결단의 대립과 충돌 및 대결구도를 실제적이고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후 모세를 통해 애굽 전역에 가해지고 있는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으로서 초자연적 이적기사는 이런 양자간 전투적 충돌을 실증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의 3강에서 애굽지역에만 제한적으로 가해진 아홉 가지 재앙에 대해 필요를 따라 선별적으로 살펴봤습니다. 그때 그때마다 바로 왕은 고도의 사단적인 간교함과 책략 및 공갈협박으로 모세의 제안을 거절하는 한편 그럴듯한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시종일관하게 남녀노소를 불문한 전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시내산까지의 삼일 길 여정(출3:18)을 고집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흘 길’이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애굽거주지인 고센 땅으로부터 하나님의 현현 장소이며 언약식이 체결 될 시내산까지 이를 수 있는 가능한 거리를 가리킵니다. 이런 사흘 길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애굽의 속박과 추격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날 수 있는 안전거리일 뿐 아니라, 영적으로는 죄악 된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과의 제반 관계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할 마땅한 성별(聖別)과 구별의 필연적 당위성을 암시합니다(창12:1, 롬12:1-2, 엡4:22-24, 마6:24). 어떤 방식으로도 이 사흘 길 여정은 타협이나 절충의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남녀노소와 수양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약의 대상자 모두를 포함합니다. 한 사람의 낙오자나 이탈자나 실종자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잃어버린 백성(남은 자)들 모두를 세상 가운데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남김 없이 찾으실 것입니다(눅19:10, 행1:8). 그 때야 세상 끝이 올 것입니다(마24:14). 이런 의미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당사자들이란 사실은, 어떤 열악한 경우와 환경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의 절대 보호와 인도와 다스림 하에 있다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구원의 종말론적 보장까지를 함의(含意)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란 사실이 주는 구속사적 의미가 이렇습니다.
이제 급기야 모세와 바로 왕과의 첨예한 대치국면은 최악의 절정을 향해 치닫습니다. 아홉 번까지의 재앙을 통해 만사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과 통치권이 명명백백하게 표적적으로 증거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초자연적 이적과 기사로서의 재앙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계시함으로 출애굽 사건을 가능케 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표적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재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앙으로서 이적기사가 표적삼고 있는 유일신으로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과 전능성 그리고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사실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미쳐 깨닫지 못하는 바로 왕은 순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결국 마지막 열 번째 재앙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열 번째 재앙의 실상과 그 비참함이 극에 달할 것임을 시사해 주십니다(출11:1-6). 이는 애굽의 장자들과 생축의 초태생들이 한 날 한 시에 죽임을 당하는 전대미문의 비극적 사건이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로 인해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애굽 전지역을 진동하게 될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이스라엘 지역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하심으로 구별돼, 심지어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을 정도의 고요와 평온과 적막감이 이스라엘 지역을 감싸게 될 것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상반된 가공할만한 살육사건의 배후에는 애굽의 장자들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이 안전하게 보존될 뿐 아니라, 출애굽의 구원의 자유가 적극 보장될 것임을 암시하는 하나님의 대속적 구속사역의 오묘함이 시사되기도 합니다. 이는 애굽의 장자살해 사건과 맞물려 잠시 후에 진행 될, 어린양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을 대속하는 유월절 예식을 통해 보다 구체적이고 표상적으로 제시됩니다. 그렇습니다. 유월절 사건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구원을 결정적으로 가능케 하는 대속(代贖)적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은 출애굽사건의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합니다. 애굽의 장자들의 죽음과 관련해 이스라엘의 장자들도 죽어야 될 것을 어린양으로 대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후 이스라엘의 맏아들과 생축의 초태생에 대한 대속과 헌납 규정(출13:11-16)은 애굽의 장자사망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온전한 소유가 된 기념비(紀念碑)적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제정된 율법적 규례입니다.
이제 본 4강에서는 열 번째 장자사망 재앙 경고(출11장)와 이와 관련된 유월절 예식 및 출애굽 사건(출12장) 그리고 애굽의 장자사망에 근거한 초태생 규례(출13장) 등의 내용을 중심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문제 : 이스라엘의 유월절 예식과 출애굽 사건 속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를 계시의 점진성의 원리에 입각해 모형과 실체와의 관계 속에서 묵상해 보십시오(고전5:7, 요1:29, 히9:22, 롬3:24, 4:25).
2.전개
모세를 통해 발하시는 하나님의 아홉 가지 재앙은 이스라엘은 물론 애굽 전지역과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자적 절대 주권과 전능성 및 구원자로서의 인내와 관용과 사랑을 한껏 드러내시기에 족한 계시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바로 왕은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재앙의 강도가 심화될수록 굳은 마음이 더욱 강퍅(剛愎)해져 갑니다. 그러나 결국 바로의 항복과 출애굽 승인을 받아내는 것을 통해 그의 강퍅함은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과 전능성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효과로 작용할 뿐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은 온갖 것을 그 쓰임새에 따라 적당하게 지으신 이유로 인해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잠16:4, 롬9:17-18). 그렇습니다. 바로 왕의 강퍅함은 하나님의 열 번째 장자살해 재앙사건을 가능케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바로를 멸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심판과 구원의 이중적 성격을 띠고 발생하게 됩니다. 이제 그 전말(顚末)을 살펴봅니다.
(1)장자재앙의 예고(豫告)
바로의 강퍅함은 급기야 하나님의 마지막 카드의 사용을 촉구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사실은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바야흐로 성취의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남은 마지막 재앙이 애굽 전역을 송두리째 뒤덮는 것을 통해 바로는 마침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허락할 것임을 예고해 주십니다(출11:1).
아울러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단순히 노예신분으로서 도망과 피신이 아닌 전투에서의 승자의 신분으로 출애굽 할 것임을 강력히 암시해 주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올 때 애굽인들로부터 금, 은 등의 패물을 취할 것을 명령하시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이런 패물들은 오랜 세월을 종살이로 일관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재산적 손해와 고난에 대한 보상적 성격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 승리한 자가 마땅히 취할 전리품의 성격 또한 포함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장자사망 재앙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들을 일시에 죽음의 재앙으로 몰아 가실 때, 위로 바로의 장자로부터 시작해서 천한 계집종의 장자에 이르기까지 애굽의 전 백성들의 장자는 물론, 심지어 생축의 초태생에 이르기까지 남김 없이 살해할 것임에 대한 끔찍한 예고(豫告)입니다. 이로 인해 역사이래 전무후무한 큰 곡성(哭聲)이 애굽전역을 슬픔의 도가니에 빠지게 할 것임을 부연 설명하십니다(출11:6).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때가 마감될 때, 뒤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뿐입니다. 은혜의 정도가 무한한 만큼에 비례해서 이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가해지는 심판의 정도 또한 일말의 용서와 긍휼조차도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무서운 지옥의 형벌만이 저들을 기다릴 것입니다. 오늘만이, 아니 지금 이 순간만이 은혜 받을 만한 때이며 구원의 날이라고 성경은 제한적으로 설명합니다(고후6:2).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내일’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시간이며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시간과 날은 사람의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용(善用)하라고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일 뿐입니다. 우리가 세월을 아끼는 지혜로운 자로 처신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엡5:15).
반면 애굽지역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주지역에서는 사람들은 물론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고요와 평온만이 감돌 것임을 예고해 주십니다(출11:7). 이는 애굽과 이스라엘을 근본적으로 구별해 놓으심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심’과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 됨’을 공개적으로 만천하에 증시(證示)하시는 선언(宣言)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택적 차별성의 합법성과 정당성은 이스라엘의 남다른 신앙적 선행과 공적에 대한 보상과 대가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만사와 만물을 창세 전 당신의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에 의해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한 ‘언약적 관계’가 이를 가능케 했을 뿐입니다(신7:7-8).
오늘 날 성도들 또한 동일한 원리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편입된 자들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에 근거해 제정해 주신 ‘새 언약’(눅22:19-20, 렘31:31-34) 안에서 신구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명실공히 하나님의 천상적 언약백성의 신분으로 인(印)침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무한한 가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실로 인해,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백성 된 신분의 소유자로서 시내산에 이르러 하나님과 엄숙히 언약식을 체결함으로 이런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증하기에 이릅니다(출19, 24장). 그리고 율법을 하사(下賜)받습니다. 이는 율법에 적극 순종함으로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언약백성 된 신분으로서 이방인과 성별 된 정체성을 확고히 현시해야 함을 가리킵니다. 이로 인해 열국을 하나님의 통치에로 인도하는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적극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는 성격상 동시에 수혜자(受惠者)에게 강력한 ‘자율적’ 책임과 의무를 요구합니다. 은혜가 철저히 은혜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성도의 제반 신앙적 열심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先) 은혜로 말미암는 후(後) 자율적 순종의 원리와 원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은혜의 선물로서 구원의 진정한 의미는 퇴색할 것이며 은혜는 더 이상 은혜로서의 본래적 성격을 상실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수반되는 믿음 또한 순종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롬16:26, 1:5, 약2:17, 26). 이는 믿음과 순종이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로서 동질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다시 말해 참된 믿음은 그 안에 이미 내재된 은혜의 성격으로 인해 당연히 자율적 순종을 동반하고, 반대로 자율적 순종은 참된 믿음에 근거해 자연히 동기유발 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와 관련해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무익한 종의 비유의 말씀을 인용함으로 성도의 선행과 열심이 하나님께 보상과 상급을 주장하기 위한 방편이 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자 당연한 의무수행의 일환으로 표출돼야 할 것임을 일깨워 줍니다. 눅17:7-10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총을 입은 성도들은 자신이 받은 달란트의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서 최선으로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행함에 대해 어떤 칭찬과 보상의 마음을 기대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진면목(眞面目)을 바르게 이해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무한함에 비해 우리의 수고와 열심은 너무도 보잘 것이 없는 것이기에 말입니다. 다시 말해 평생을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충성한다 할지라도 그 은혜의 일부나마 갚기는커녕 우리의 부족함만을 더 확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익한 종의 고백과도 같이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기에 말입니다.
물론 성경 곳곳에 대가성의 상급과 관련된 내용들이 기록돼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히11:6, 26, 고전3:8, 12-15, 마25:20-23, 계2:10, 22:10-12, 딤후4:7-8, 벧전5:4). 이들 중 어느 경우는 상급을 담보해 우리의 신앙적(목회적) 열심과 충성을 적극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있게 앞 뒤 문맥과 구속사 진행의 총체적 관점에서 접근해 보면 상급의 내용은 거의가 구원, 영생, 의, 언약의 궁극적 성취,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소유함 등 구속사의 종말론적 성취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게다가 설령 일부 상급의 내용이 지상적 관점에서 대가와 보상의 개념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명분과 목적 삼아 신앙적 열심을 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올바른 마음가짐과 합당한 믿음의 태도를 가졌다고는 보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정상적으로 접촉된 자들에게서는 그 은혜의 내용이 본질적으로 함의(含意)하고 있는 바 본인의 영적 상태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영벌에서 영생으로 옮겨진 사실로 인해 평생 그 은혜와 사랑의 빚을 갚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 너무도 잘 알 수 있기에 말입니다(고후5:13-14).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거듭난 이후의 모든 삶의 내용과 성격과 방향성이 오로지 그 크신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에 집중돼야 한다는 성경의 지적(엡1:6, 12, 14, 고전10:31, 전12:13)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음을 감심(感心)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사실상 은혜와 행함의 상관관계가 본질적으로 이렇게 상호의존적이고 보완적이며 불가분의 필연적 관계성을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편에서 우리의 부족한 열심을 가상(嘉尙)히 여기셔서 어떤 특별한 보상을 해 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는지는 모른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 또한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지 우리가 마땅히 대가와 조건의 심정을 가지고 요구하며 기대할 만한 성질의 것은 결코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목회현장에서 상급과 보상을 당연한 요구조건으로 제시해서 성도들의 영적 무관심과 게으름을 책망하는 한편, 열심과 헌신을 촉구하는 행위는 정당한 교리적 논리로 수용되기에 앞서 깊은 재평가와 고려가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작금에 이르러 만연된 기복주의와 지성감천주의 신앙관이 한국적 기독교의 왜곡된 대표적 특징으로 지적되는 분위기 속에서, 누가가 기술한 대로 주인을 위해 힘을 다해 봉사와 헌신을 마다 않는 무익한 종의 고백을 통해 신앙적 열심의 결과가 지적하는 상급의 성경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구속사의 총체적 관점에서 바르게 해석하는 지혜가 필요할 줄 압니다. 어느 한 본문의 내용이 불분명할 때 이를 동류(同類)의 보다 명백한 본문에 근거해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한 성경해석의 한 방법이기에 말입니다.
(2)장자재앙의 필연성
하나님께서는 당장에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에게서 출애굽 시키는 데 아무런 장애를 받을 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의 창조자적 권능과 권세는 피조물의 어떤 방해와 공작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뜻을 펼쳐나가시는 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어느 누가 감히 창조자이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방해하며 그 분에게 도전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 분은 모든 일을 창세 전에 계획하신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에 근거해 오직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과 마음의 원하심을 좇아서 역사해 가시는 절대 주권자이십니다(엡1:4-5, 11, 3:11, 딤후1:9, 딛1:2 롬16:25, 고전2:7).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일말의 실수나 실패, 그리고 한 순간의 오차조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상황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아홉 번의 재앙을 거쳐 이제 마지막 열 번째 장자재앙에까지 바로 왕과의 첨예한 적대적 대치국면을 전개시켜 나가시는 데는 그럴만한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적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신앙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430여년 전 야곱의 70인 식구가 요셉의 초청을 따라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이주해 올 당시만 해도 이들은 투철한 여호와 중심의 신앙관에 깊이 접촉돼 있었습니다(창46장). 비록 극심한 가뭄과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을 망정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단순히 식량을 위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쉽게 등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급기야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현현하셔서 야곱과 그의 식구들의 애굽 행을 재가해 주시기에 이릅니다(창46:1-4). 이는 야곱의 애굽 행이 단순히 육신의 생존만을 위한 자구책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으로 아브라함 언약의 맹세적 보증으로 주신 횃불언약(창15장)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적 조치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70인 식구들이 애굽의 고센 땅에 이주 후 많은 세월이 흐르고 애굽의 왕조(王朝)마저 바뀌는 가운데(출1:8), 비록 야곱의 후손들은 큰 민족을 이룰 정도로 생육하고 번성하기에 이르나 저들의 처지는 한낱 노예신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에 더해 애굽의 우상숭배적 분위기에 익숙해 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족장들이 섬겼던 여호와 하나님은 더 이상 이들 후손들이 섬겨야만 될 유일한 신앙의 대상으로 인식되기에는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모세의 출현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바로의 심기가 더욱 불편해 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과된 노역의 정도를 한층 강화시킴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면전에서 원망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처사를 통해 명백히 확인됩니다(출5:20-21).
그렇습니다. 이제 명색만 하나님의 언약백성이지 실제로는 거의 이방인화 돼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여호와 신앙의 회복입니다. 나아가 이를 통해 언약백성으로서의 참된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족장들의 하나님이 동일하게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저들은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관계의 분명한 재확립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애굽의 우상들과는 근본적으로 차별화 된 절대 주권자로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셔야 했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지금까지 고센지역을 제외한 전 애굽지역에만 제한적으로 내려졌던 아홉 번의 초월적 재앙들과 그 심대(甚大)한 피해들은 이를 생생하게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그 하나님이 조상들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후손들인 자신들의 하나님이신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확인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하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언약관계의 회복과 재정립이라는 구속사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런 종교적 인식의 전환과 사상적 전이(轉移)현상이야말로 출애굽 후에 시내산에서 민족적 차원의 언약식을 체결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됩니다(출19:1-6, 24:1-9).
이런 사실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만고불변의 원리원칙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지식에 근거할 때만이 참된 신앙관의 정립은 가능합니다. 그러기 위해 다른 무엇에 앞서 성경에 대한 깊고 체계적이며 일관된 학습이 요구됩니다(딤후3:16-17, 롬10:2-3, 마7:21-23). 따라서 성경에 대한 무지와 왜곡과 오해는 필연적으로 자기소견에 좋을 대로의 자의적 숭배 신앙관을 형성케 하는 대로 빠르게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정당한 신학이 신앙에 앞서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롬10:17). 그렇습니다. 신학은 신앙의 기반일 뿐 아니라 울타리로서 기능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는 태생적으로 종교적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태생적 종교심이 본성의 타락으로 인해 성경의 지도와 안내를 철저히 받지 않으면 그 활동성이 비정상적으로 전개된다는 데 있습니다. 롬1:21-23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런 결과는 다름 아닌 죄성의 발로(發露) 때문입니다. 정당하고 적법한 성경공부의 당위성이 이래서 필요합니다. 바른 지식은 바른 믿음을, 바른 믿음은 바른 순종을 수반한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식과 믿음과 순종은 상호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습니다. 이 중 어느 하나도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기능할 수 없습니다. 이 때의 지식은 체계적이고 통일된 전체로서의 지식을 전제합니다. 총체적 계시관에 접촉됨이 없이는 자칫 부분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편의적이며 작위적으로 적용할 위험이 상존합니다. 특별히 말씀을 맡은 목회자들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식의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그러기에 목회의 일 순위는 다른 무엇에 앞서 성경연구의 일상화입니다. 이는 달리 교회를 전심을 다해 말씀으로 보양(補陽)하는 일을 가리킵니다(엡4:11-12, 요21:15-17, 벧전5:1-4).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둘째로 신적 언약성취의 확실성에 대한 믿음의 고취입니다. 430년의 종살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들기에 족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한낱 애굽의 노예신분에 불과했습니다. 저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언약과는 무관한 자들처럼 여겨졌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모세를 통해 애굽인들에게만 차별적으로 발하시는 각종 재앙들은 여호와신앙에 대한 회복은 물론 족장들과 맺으신 언약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고취와 더불어 그 성취시기가 임박해 왔음을 알리는 결정적인 메시지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조만간 실현될 것입니다. 재앙이 이를 보증하고 있습니다. 신적 언약의 특성상 성취는 불가피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벌써 일하시기 시작한 사실을 이스라엘은 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잃었던 여호와 신앙이 회복될 뿐 아니라, 잊혀진 언약의 내용들이 기억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애굽의 각종 재앙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족장들과 맺으셨던 하나님의 언약이 이제 바야흐로 성취의 직전에 이르고 있음을 회복된 믿음의 눈으로 주시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계시(언약, 말씀) 의존적인 신앙의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를 의존하는 대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성도의 신앙의 정체성이 한결 같이 계시(啓示)의존적인데 근거해서 자연스럽게 섭리(攝理)의존적인 성격을 띠고 발휘돼야 함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적 삶을 일괄적으로 기술하면서 ‘믿음으로’란 표현을 통해 저들의 삶의 내용을 설명한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으로’란 하나님의 미래적 약속(계시)의 말씀을 현재적으로 소유한 것처럼 여기면서 이를 생명같이 귀한 것으로 붙들고 살아갔음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1:1에서 이들이 한결 같이 소유했던 믿음의 성격을 규명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설명했던 것입니다. 본 절에서 ‘바라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은 미래적이며 종말론적인 약속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이에 반해 ‘실상’과 ‘증거’란 사실적이며 현재적인 것으로 성취된 약속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현재적으로 성취되지 않은 미래적이며 종말론적인 약속의 내용들을 이미 현재적으로 성취돼 실존하는 것처럼 소유해서 누리며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의 삶의 특징과 성격이 그런 식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정의하면서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히11:39)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좋은 것”(40절)으로서 ‘온전한 구원의 약속’을 이미 소유한 자들로 존재합니다. 그렇습니다. 가공할만한 애굽의 재앙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와 방불했던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의 신앙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바야흐로 성취될 것을 믿고 확신하는 계시 의존적 신앙관에 깊이 접촉되는 이중의 계기를 마련하게 됐던 것입니다.
셋째로 유일신으로서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이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세상 가운데 유일한 참 신이신 사실을 공식적으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반면 애굽의 여러 우상들의 무능력은 물론, 바로 왕 또한 한낱 무력한 피조물에 불과한 사실이 여실히 밝혀진 사건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애굽을 휩쓴 아홉 종류의 초자연적 재앙은 한편 이적기사의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표적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합법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계시적 효과를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열 번째 장자살해 재앙이 이를 결정적으로 수행하는 데 선용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애굽의 장자살해 재앙은 오랜 세월동안 침묵으로 일관해 온 것 같은 아브라함 언약이 한 순간에 총체적으로 성취되는 성격을 띠면서 동시에 공식적으로 출애굽사건을 알리는 결정적인 팡파르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실로 아브라함의 횃불언약이 430년만에 그 구체적 성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야곱의 애굽 이주 후 430년만에 성취되는 출애굽 사건은, 25년만에 아브라함에게 언약자손으로 이삭을 주신 아브라함 언약의 일차적 성취(창12:4, 21:1-5)를 포함해 하나님의 뜻인 약속의 말씀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 가운데 실현되는 지를 알려 주는 데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무엇보다도 ①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입니다(당위성). 하나님의 약속이 신적 기원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모든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적 삶의 특징이 다름 아닌 이런 원리에 집중됩니다(히11장). ②하나님의 약속은 정하신 때가 찰 때에 성취된다는 사실입니다(시간성).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약속은 한결 같이 섭리적 작정의 기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때가 차야 합니다(창21:2, 출12:41, 갈4:4, 요2:4, 마16:21). ③언약의 당사자 편에서 시종일관한 믿음의 인내가 요구되는 것도 이런 사실로 말미암습니다(참을성). 인내에 한계를 느끼게 될 때 자연히 제반 인간적인 방법이 시도된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창16:2, 40:14-15, 삼상13:9). 그것은 실패를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불신의 행위입니다. 범죄행위가 성립됩니다(삼상13:13). 결국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만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경험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히11:38, 합2:4, 갈2:20).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모세의 재앙을 통해 점진적으로 긴장을 더해 가고 있는 출애굽사건의 절정은 애굽의 장자살해 사건에 집중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사건의 결정적인 시기를 위해 애굽의 장자살해 사건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 애굽의 전(全) 역사를 섭리하고 계심을 봅니다. 다시 말해 당시 세상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애굽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사건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의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역사는 구속사의 무대이며 동시에 도구로 기능합니다.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창1:28)이 여전히 수행(遂行)되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3)유월절 규례의 제정
열 번째 애굽의 장자살해 재앙을 내리기 전 하나님께서는 먼저 유월절 규례를 선포해 주십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으로 마침내 출애굽한 날을 기념하는 최고의 명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선포하시면서 그 달을 일년의 첫 달로 정하는 한편,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일대 변혁의 날로 선포할 것을 명령하십니다(출12:1-2). 이는 태양력(太陽曆)이 아닌 종교력(宗敎曆)을 가리킵니다. 태양력이 인간중심의 역법(曆法)이라면 종교력은 하나님과 택한 백성들 간의 새로운 관계정립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종교력은 유월절을 계기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속함을 받아 새로운 언약관계를 맺은 것을 기념하는 새로운 역법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계기로 제정된 BC(Before Christ) 와 AD(Anno Domini : in the year of our Lord)의 역법이 하나님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역사적 정립을 상징하듯이 말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유월절 규례는 출애굽사건의 완성이며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동시에 출애굽의 성격을 분명히 규정짓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구속사적 의미가 매우 큽니다. 사실 출애굽 사건은 억압받던 한 민족이 무혈항거를 통해 명실공히 참 자유와 해방을 되찾은 사건의 의미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이는 유월절 규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친히 주도하신 신적 구원사건이며, 동시에 희생의 피를 통해 생명을 구원하는 대속 원리의 절정을 이룬 구속사의 백미(白眉)입니다. 따라서 본 출애굽 사건은 역사적 이스라엘의 진정한 출생의 근거를 밝혀주며, 후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체화 될 거듭난 영적 새 이스라엘의 출생을 예표하는 구속사적 사건의 의미를 갖습니다.
한편 본 유월절 규례(출12:1-14)는 이어서 소개되는 무교절 규례(15-20절)와 더불어 열 번째 애굽장자 살해 재앙(29-36절)의 결과,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게 된 것(37-42절)을 전제로 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유월절이 이스라엘의 절기 중 가장 중요한 축제가 된 이유는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자리매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는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을 통해 절정을 이루게 될 인류구원을 위한 대속적 사역을 예표하기도 합니다. 한편 출애굽의 구원사건은 과거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일어났던 평범한 사건으로만 간주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민족적이며 거국적인 구원사건으로서 대대에 그 의미를 기리며 감사해야 할 축제적 사건입니다. 유월절 예식을 해마다 거국적 축제로 승화시켜 지킬 것을 명령하시는 의미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창조자와 절대 주권자의 그 무한하신 권세와 능력으로 친히 이들을 구원해 주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은 자자손손 대를 이어 영원히 바로의 노예신분으로서 애굽의 정치 군사 경제적 목적에 이용과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월절 규례에 내포된 대속과 구속의 원리는 신약의 백성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다만 유월절 예식에 함의된 구속의 본래적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실체화 된 이유로, 신약의 백성들은 구약의 유월절 예식을 더 이상 율법의 규례를 좇아 문자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으로 지키지는 않습니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한 대속적 속죄사역을 상징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성찬예식으로 갱신해서 지킵니다(눅22:14-20). 즉 구속의 예표로서 구약의 유월절 예식을 폐지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화 된 성찬식으로 대체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유월절은 신약의 성찬식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찬양하며 감사함으로 기념하는 축제적 성격을 띠고 주님의 재림시까지 계승된다 하겠습니다(고전11:23-26).
그렇다면 유월절 규례의 내용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①먼저 전(全) 가족이 함께 먹을 수 있을 정도의 1년 된 어린양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를 유월절 어린양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어린양은 온 가족의 생명을 대속할 희생양 곧 속죄양(scape goat)의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유월절 어린양에 부속(附屬)돼 온 가족의 생명이 보장됩니다. 구원을 받습니다. 자유를 얻습니다. 해방됩니다. 속죄함을 받습니다. 유월절 속죄양으로서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체화됩니다. 신약의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고전5:7), 혹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런 신구약의 신학적 상응(相應)성의 원리에 근거한 표현입니다. 여기서 어린양으로 인해 온 가족이 구원받음의 의미는 결국 구원의 총체적 성격이 하나님의 권속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적 성격을 띠고 나타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개별적으로 받는 것이지만 결국은 주님의 몸 된 교회공동체 속에 지체로 더해지는 것을 통해 상호 연합된 방식으로 구원의 실질이 확인된다는 의미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위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마16:19)는 표현은 본질적으로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결국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는 데서 그 본래적 의미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이루는 구원 말입니다. ②어린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1년 된 어린양’이 요구된 것은 한 가족이 먹기에 적합한 크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명령 속에서 그 의미를 넉넉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예표하는 성물로서 제물이 더렵혀지거나 소홀이 취급될 것에 대한 경고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의 전인격은 하나님께서 산 제사로 받으심 직한 성물(聖物)에 해당됩니다(롬12:1). 하나님께서 거(居)하시는 성령의 전(고전3;16)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전인격을 늘 성별(聖別)되게 보존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17절, 벧전1:14-16). ‘수컷’의 의미는 어린양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을 대속할 뿐 아니라, 특별히 애굽의 장자살해 재앙과 관련해 이스라엘의 장자대속을 상징적으로 표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초태생 규례에서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을 다 거룩히 구별해 하나님께 헌납하라고 명령하십니다(출13:1-2). 이때 특별히 이스라엘의 장자는 어린양으로 대속해 헌납하도록 규정돼 있습니다(14-15절). ‘흠 없는 어린양’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상태와 열납의 조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자체로서 죄와 무관한 신인(神人)으로서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요일3:5, 히4:15)를 적절히 예표한다 하겠습니다. ③유월절 어린양은 종교력으로 첫 달인 아빕월(출13:4) 10일에 준비해서 그 달 14일(유월절)이 되기까지 나흘 동안 간직해야 합니다. 이는 어린양의 흠 없는 상태를 살펴보기 위한 충분한 시간일 뿐 아니라, 어린양의 대속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깊이 인식하며 감사하는 시간을 갖게 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자주 성찬식을 거행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기념해야 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④해질 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좌우 설주(楔柱)와 위아래 인방(引枋)에 바릅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 피가 표적(表蹟)이 돼 그 집을 넘어감으로 장자살해 재앙이 그 집에 임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당신의 백성들을 죄 가운데서 구속하시는 속죄사역(엡1:7, 골1:14)을 극명하게 예표합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용서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9:22, 레17:11). 한편 어린양의 피를 문 좌우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이 의식은 첫 번째 유월절에만 실시되었습니다. 두 번째 유월절부터는 양 잡는 일과 피 뿌리는 일이 성소와 성소의 제단에서 시행되었습니다. ⑤그 밤(아빕월 14일)에 어린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되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고 남은 것은 곧 소화(燒火)시켜야 합니다. 여기서 무교병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逾月節)에 무교병을 먹어야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누룩을 넣어 밀가루를 부풀릴 시간적 여유조차 없는 유월절의 긴박한 상황을 가리킵니다. 동시에 누룩은 옛 사람의 죄와 행실을 상징하는 바(고전5:6-7, 눅12:1), 무교병을 먹는다는 것은 구속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을 신령한 음식을 상징한다 하겠습니다. 쓴 나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 이것은 애굽에서 노역으로 학대받은 노예생활을 상징함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쓴 나물을 먹을 때마다 애굽에서의 쓰라린 옛 생활을 겸손히 돌아보며 더욱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감사할 것을 촉구함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⑥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음식을 이런 식으로 먹어야 했습니다. 즉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했습니다. 이는 서둘러 먼길을 떠날 사람의 황망(遑忙)한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무서운 장자살해 사건이 애굽 전역을 휩쓸 가공할 재앙으로부터의 출애굽은 마치 전시(戰時)체제와도 같은 긴장과 긴박감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 출애굽하라는 명령이 떨어질 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만반의 준비를 갖춘 가운데 일사불란하게 대처해야 했습니다. 실로 이런 지시는 그 동안 430년간이나 학수고대(鶴首苦待) 기다려 왔던 횃불언약식의 출애굽 약속(창15:13-14)성취가 바야흐로 목전에 임박했음을 결정적으로 시사합니다. 구원을 기다리는 저들 마음의 기쁨과 감격과 감동의 설레임이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때가 차면 반드시 성취됩니다. 어떤 열악한 환경과 방해와 장애요인 가운데서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현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생명처럼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출애굽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하게 될 실제적인 구원의 감격과 기쁨 속에 죄로부터 구원받은 우리의 기쁨과 감격이 반영돼 있음을 확인해봐야 할 줄 압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능력의 구원이며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절박한 상황에서의 소망의 구원이었는지를 말입니다. ⑦이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애굽의 장자들을 칠 때에 피를 보면 넘어갈 것입니다. 그 집은 생명이 보존됩니다. 구원을 받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온 가족을 대표하는 장자의 생명을 대속했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유월절 규례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규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대대로 지켜 행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그만큼 감격적이며 감동적이고 큰 기쁨의 축제가 되기에 족한 역사적 기념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육신 하신 어린양 독생자의 죽음을 담보로 이루어진 전무후무한 우주적 구원사건의 예표로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 신약의 성도들은 유월절을 더 이상 문자적으로 지키지 않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구속사역을 성취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성례전적으로 상징하는 성찬식에 자주 참여함으로써 구속의 크신 은혜와 그 감격과 기쁨을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기념함으로 유월절의 정신을 이 시대에 지속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셈입니다. 유월절 규례는 후에 성막의 제사제도 안에서 5대 제사, 특히 속죄제로 갱신(更新) 발전됩니다. 다시 말해 유월절 예식은 시내산 언약식체결 후 비로소 구체적으로 시행 될 모든 성막제사의 근간과 효시로 작용하기에 이릅니다. 아울러 유월절은 오순절과 장막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3대 절기로 확고부동하게 자리매김 하게 됩니다.
(4)무교절 규례의 제정
무교절은 유월절에 바로 이어서(아빕월 15일) 7일 동안(21일까지) 지켜지는 기념 절기로서 이 기간 동안에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룩 없는 빵 곧 무교병을 먹어야 했습니다(출12:15).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출애굽의 상황이 얼마나 화급(火急)을 다투는 급박한 탈출이었는 지를 넉넉히 짐작하게 됩니다. 여기서 누룩이란 죄와 부패로 점철된 옛 사람의 죄악 된 삶의 전 과정을 총체적으로 상징합니다. 이는 이제 잠시 후 유월절 의식을 통해 미증유(未曾有)의 전무후무한 출애굽의 역사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간섭과 개입으로 일어나는 것을 통해 상대적으로 세상과 죄악 된 옛 사람적 삶을 총체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애굽과의 영원한 결별이라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의 회중 가운데서 철저히 끊어버릴 것을 명하십니다(15절). 이는 하나님의 선민(選民) 공동체로부터 제거, 축출, 출교 당함을 가리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백성으로서의 일체의 특권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으며 의와 불의가 조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유월절 희생제사의 공효 안에서 이스라엘은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존재하고 있음을 원리적으로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후 무교병을 먹는 것을 통해 더 이상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던 죄악 된 옛 사람의 제반 행실로부터 철저히 단절해야 할 것을 다짐하며 천명(闡明)해야 합니다(엡4:22-24). 이를 신약적 표현을 빌리자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은 죽었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고후5:17). 행함이 없는 구원의 믿음이 그 자체로서 죽은 믿음으로 간주되며 이는 나아가 구원 자체의 무효화까지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약2:17, 26). 이처럼 유월절과 무교절은 상호의존적이고 보완적인 밀접한 영적 관련성을 맺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 두 절기는 상호 공용해서 부릅니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에 말입니다. 따라서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무교절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무교절을 지킨다는 것은 이미 유월절을 지켰음을 전제합니다.
이런 상호 관계로 인해 유월절의 본질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안에서 베푸시는 구원에 대한 ‘교리적’ 사건으로 해석한다면, 무교절은 구원의 ‘실천적’ 측면 곧 성별 된 거룩한 성화(聖化)의 삶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무교절에 반드시 무교병을 먹어야하며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필히 내어쫓아야 하는 규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 안에 여전히 옛 사람적 죄성(罪性)이 활동함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죄에 종노릇했던 옛 사람적 옛 자아도 죽은 셈이며(갈2:20상, 5:24), 그래서 성령의 인침과 내주 및 인도와 다스림 하에서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할 수 있는 거듭난 새 사람적 교회아(敎會我)가 철저히 우리의 전인격을 주장할 수 있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롬6:12-14). 이런 복음의 공효적 원리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성도를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의인으로 여겨주십니다(롬3:24). 이런 의미에서 칭의(稱義)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법정적이며 동시에 은혜적인 이중의 성격을 띱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유월절과 무교절은 따로 구별된 별개의 절기가 아닙니다. 출애굽사건이라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사(언약사)적 성역사(聖歷史)에 그 기원을 둔 하나의 연속적인 축제적 기념제입니다. 따라서 이를 엄격히 구분한다면 유월절은 아빕월 14일 저녁에 어린양을 잡아 속죄적 희생제사(본질적 의미에서)를 드리는 날을 가리키며, 무교절은 15일부터 21일까지 1주일 동안 무교병을 먹는 기간을 가리킵니다. 이런 이유로 유월절이 장자사망 곧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영원히 끊쳐지는 형벌에서 구원을 받는 데 대한 속죄제로서의 감사제(感謝祭)의 성격을 지닌 것이라면(출12;13-14), 무교절 또한 같은 맥락에서 430년간 종살이했던 애굽 땅에서의 일체의 노예적 삶의 고난과 핍박을 청산하고 ‘구원받은’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화목제(和睦祭)의 성격을 띤다 하겠습니다. 유월절을 ‘영원한 규례’로 지켜 행하라는 명령과 관련해 신약의 성도들은 더 이상 유월절을 문자적으로 지키지는 않습니다. 다만 유월절의 실체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해 주신 성찬예식을 통해 유월절에 담긴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기념하며 감사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눅22:14-20).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유월절의 구속사적 본질을 성취하시고 대신 이를 자신의 사역 안에서 성찬식으로 갱신(更新), 발전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을 특별히 ‘군대’라고 부르십니다(출12:17).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애굽의 노예신분이 아닙니다. 족장들과의 언약 하에서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백성 된 신분으로 존재해 나왔습니다. 이런 가운데 언약의 점진적 진행을 좇아 야곱의 70인 식구가 애굽으로 이주했습니다(창46장). 하나님은 야곱의 70인 식구를 거대한 민족과 나라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기 위해 당시 강대한 제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애굽을 최적의 목양지(牧羊地)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들 가족이 하나의 명실상부한 나라와 민족 단위로 형성될 때까지 한시적 기간동안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애굽은 이스라엘의 출산을 위한 모태로서의 보호적 기능과 목양적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 성취를 위한 도구로 선용될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역사의 본질은 구속사인 사실을 성경역사는 일관되게 증언합니다. 야곱의 70인 식구가 애굽이주 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모태인 애굽으로부터 출산의 때가 임박했습니다. 모태의 기능을 담당했던 애굽으로서는 이스라엘을 출산시켜할 때가 찬 셈입니다. 이런 사실은 바야흐로 출애굽을 위한 횃불언약(아브라함 언약)의 섭리적 작정의 때가 충분히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엄밀한 의미에서 출애굽 사건은 다음 단계로 ‘가나안 정복’이라는 구속사적 언약의 대과업을 목적 삼는 전제요 시발에 불과합니다. 이런 이유로 출애굽 사건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첫 걸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정복은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듭니다. 이제 때가 차매 마침내 출애굽 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군대’(출12:17, 41절)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의중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명실공히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며 동시에 출애굽의 구원의 목적과 관련해서는 가나안 정복의 과업을 완수해야 할 ‘하나님의 군대’로 존재해야 합니다. 이는 구약교회로서 이스라엘(행7:38)의 실체인 신약교회의 표상(表象)을 ‘전투하는 교회’(엡6:12)로 해석하는 관점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갈6:16)로서 사단이 왕 노릇하고 있는 현 세상 가운데서(요12:31, 요일5:19)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선양하고 운반하며 확장시켜 나가야 할 동일한 신분의 하나님의 군대로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엡6:12-13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과 옛 사람의 소욕에 대해 값비싼 신앙적 투쟁과 고난의 대가를 먼저 지불함이 없이는 그 종말론적 영광에 참여할 수 없음을 명백히 선언합니다(롬8:18, 행14:22, 빌1:29, 딤후3:12). 성경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성도를 향해 결코 ‘파랑새의 꿈과 장미 빛의 성공’을 보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세상으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아야 될 것을 전제합니다(빌1:29, 딤후3:12).
(5)열 번째 장자살해 재앙
모세를 통해 예고된 장자살해 재앙(출11:4-7)이 마침내 애굽 전역에 임하게 됩니다(출12:29-30). 아홉 번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강퍅한 바로의 마음은 적극적으로 하나님과 대결할망정 결코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열 번째 재앙은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을 통해 예고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430년의 고역으로부터 해방시키실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 불법을 철저히 응징하는 하나님의 심판적 재앙입니다. 사단에게 부속돼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적대적 세력의 결국이 어떠함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시는 종말론적 심판의 예시(豫示)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장자살해 재앙이 구약교회로서 이스라엘에게는 오랜 세월 그토록 갈망해 오던 자유와 해방을 위한 구원의 복음으로 다가오는 것을 통해 신약교회의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과 승리를 표상합니다. 반면 바로를 위시한 전(全) 애굽인들에는 철저한 패배와 참담한 죽음의 장송곡이 되는 것을 통해 사단과 그에게 종노릇하고 있는 모든 불신자들의 종말론적 멸망을 예표합니다. 성도들이 사단의 미혹과 역사를 경계해야 하겠지만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있습니다. 사단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절정을 통해 그 머리가 깨져 이미 치명상을 당한 상태입니다(창3:15).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담대히 선언하시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런 영적 세계의 실상을 믿음의 눈으로 통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의 신앙적 삶의 성격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세상을 이기신 이김 안에서 살고 있는 셈입니다. 비록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는 주변 여건이 열악하다 할지라도 성도가 세상의 온갖 경우에 대해 담대하게 맞서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김에 연합돼 이미 천상의 영광의 보좌와 권세에 함께 참여해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주님의 왕권에 선취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자들로 존재합니다(엡2:4-6, 골3:4, 마28:18, 벧전2:9).
장자살해 재앙의 임함은 위로 바로의 장자로부터 시작해, 옥에 갇힌 자 곧 가장 미천한 자(출11:5)의 장자 및 가축의 초태생까지를 포함해 전 애굽적인 심판으로 내려졌습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이때의 비극적인 참상을 소개하면서 ‘그 밤에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는데 사망치 않은 집이 하나도 없다’(출12:30, 11:5)고 기록합니다. 반면 이스라엘 지경에는 앞에서 이미 예고한 대로 일체의 짐승조차도 그 입을 열지 않을 정도로 고요와 적막만이 감돌았음을 설명합니다(출11:6). 이는 상대적으로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사망 재앙으로부터 철저히 이스라엘을 보존하고 계심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보혈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자들입니다(고전6:20, 행20:28). 성도는 땅에서 존귀한 자들입니다(시16:3). 성도는 그의 머리 털 하나 상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를 받는 자입니다(마10:30-31).
드디어 바로가 황망히 모세와 아론을 부릅니다(출12:1).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허락합니다. 마음대로 가서 여호와를 예배할 것을 인정합니다. 이때 예배에 필요한 제물과 가축들 일체까지도 다 몰아갈 것을 아울러 승인합니다. 여기에 더해 바로는 모세에게 자신을 위해 축복해 줄 것을 간청합니다(출12:31-32). 이는 하나님의 능력과 모세의 신적 권위 앞에서 철저히 자신의 연약과 패배를 인정하는 요청으로서 다시는 이런 재앙들이 애굽 땅에 임하지 않도록 제발 여호와 하나님께 빌어 달라는 애원입니다. 이런 식의 절박한 상황의 반전은 이미 앞서 모세로 하여금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시겠다(출7:1)는 여호와의 말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열 번째 하나님의 장자사망 재앙은 강퍅한 마음으로 교만에 가득 찼던 오만방자(傲慢放恣)한 바로를 철저히 패배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승리하신 사건입니다. 이로서 당시 애굽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은 참신과 거짓신의 진위(眞僞)를 가리는 표적적 이적기사로 작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애굽을 비롯한 열방 앞에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신이신 사실을 선명히 드러냈으며, 이스라엘은 명실공히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들의 결국은 무서운 공의적 심판에 처해 질 것임을 명백히 선언하는 계시적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사실들이 후에 가나안 지경에까지 이르러 널리 전파됐음을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정탐할 때, 기생 라합의 신앙고백과 간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수2:10-11). 그녀는 심지어 하나님께서 가나안 지경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을 정도로(수2:9),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철저히 언약에 근거해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천상적 능력으로 기능합니다(롬1:16). 믿음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나라와 인종과 남녀노소의 구별이 극복됩니다(요3:16).
하나님께서는 바로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출애굽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이미 예고하신 대로(출11:2) 애굽 백성들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취하게 하셨습니다(출12:35-36). 이 일에 하나님께서 애굽 백성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켜 주셨음을 저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사실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이 단순히 정치적 탈출이나 노예해방 사건이 아닌, 흑암의 세력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바로와의 영적 전쟁에서 하나님의 군대의 자격으로 이스라엘이 승리한 사건으로서 당연히 승자가 패자로부터 취할 바 전리품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후에 이스라엘을 ‘군대’(41절)라고 묘사하고 있는 내용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향후 성막건축에 필요한 재료로서 제반 은금의 수요까지를 고려해서 이런 식으로 미리 준비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아직은 전혀 훈련되지 않은 오합지졸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직접 군대장관이 되셔서(출14:14, 수5:13-15) 바로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끄셨습니다. 이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이미 430년 전부터 아브라함을 비롯해 이삭과 야곱 등 이스라엘의 족장들과의 언약을 때가 차매 이런 방식으로 신실히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후 출애굽 사건은 하나의 계시적 표징(表徵)이 되어 앞으로 전개될 모든 이방 족속들과의 전투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승리할 것에 대한 예표적 사건의 성격을 띱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이 시급히 회복돼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사건은 언약적 성취사건이며 동시에 믿음의 승리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홉 번째의 재앙으로도 바로가 강퍅한 마음을 열지 않고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았는데, 열 번째 재앙이라고 승낙하겠느냐고 이스라엘이 모세의 유월절 규례를 믿음으로 수납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물론 이스라엘의 생존 자체도 보장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에는 때가 차매 마침내 언약을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 담겨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이스라엘에게 유월절 규례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가 섭리적으로 작용했음을 암시받게 됩니다(출12:27-28, 36절). 다시 말해 하나님의 언약은 항상 믿음을 수단으로 성취에 이른다는 원리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섭리적으로 진행 될 때, 하나님께서는 항상 ‘사람과 때와 환경’을 섭리의 삼 요소로 선용하시는 것이 하나님 사역의 특징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도구로 부름 받은 사람에게 요구되는 제 일된 영적 덕목은 다름 아닌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생명처럼 붙드는 것을 통해 미래적인 것을 현재적인 것으로 여겨서 소유하는 확신의 마음을 가리킵니다(히11:1). 본 절에서 ‘바라는 것들’과 ‘보지 못하는 것들’은 미래적이며 불가시적인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반면 ‘실상’과 ‘증거’는 현재적이며 가시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믿음의 성격은 미래적이며 불가견적인 하나님의 약속들을 현재적이며 가견적인 실존(實存)으로 소유해 확신하는 마음상태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선언합니다. 나아가 구약의 제반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적 삶의 특징이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갔음을 히11장 나머지 부분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구약의 성도들과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서 이들이 소유했던 동질의 믿음의 연장선상에서 보다 적극적인 믿음을 발휘해야 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성도들에 비해 신약의 성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화 된 완성된 구속의 은혜를 입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히11:39-40).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약속의 말씀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살아가는 자를 기뻐하십니다(히11:6). 이런 상태는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철저히 포기하고 대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인정하는 삶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 순종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전인적 존재의미와 삶의 궁극적 목적을 찾는 자세 말입니다. 이런 신앙적 태도야말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갈2:20상)에 가장 깊이 접촉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과 능력을 불러일으키며 이를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철저히 훈련시켜서 명실상부한 여호와의 군대를 만드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여정의 길을 떠날 때, 지중해 연안 블레셋 지경의 나흘 길 지름길을 마다하시고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출13:18)도 이스라엘의 불평과 후회를 염려해 단순히 정예화 된 블레셋 군대를 피할 목적만으로 취한 선택이 아닙니다(출13:17-18). 보다 적극적으로 애굽에서의 오랜 고역과 종살이로 인해 거의 실종되다 싶이 한 여호와 중심의 신앙을 명실상부(名實相符)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복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신앙적 실패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과 정(淨)한 마음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온갖 옛 사람적 쓴 뿌리와 애굽에서의 우상 숭배적 잔재(殘滓)들을 제거시켜야 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명실공히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와 그 분의 소유된 친 백성의 신분에 걸맞게 변화돼야 했으며(출19:5-6, 벧2:9), 하나님의 거룩한 신정왕국을 가나안에 수립해야 할 막중한 시대적 사명을 소유했기에 말입니다. 이런 중차대(重且大)한 의미에서 광야에서의 다양한 실패의 경험은 당장은 그것이 비록 고난과 시련으로 다가올지라도 후에 나타날 영광을 소망하면서 마땅히 극복해야 할 필연적 훈련과 연단의 과정으로 수납해야 할 것입니다(롬8:18).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경험은 오늘날 새 이스라엘로서 신약의 성도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보다 바르고 온전하게 세우는 일과 관련해서 부딪치는 다양한 영적 시련을 지혜롭게 대처하며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최선의 경계(警戒)와 경종(警鐘)으로 작용합니다(고전10:6).
(6)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
마침내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납니다. 430년간의 뼈저린 애굽의 종살이를 뒤로한 채 한 많은 애굽을 등집니다. 바야흐로 아브라함 언약의 맹세적 보증과 필연적 성취의 담보로 확인해 주셨던 횃불언약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시점입니다. 당시 횃불언약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의 향후 진행과 관련해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 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창15:13-16)라고 예언돼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서 기자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관련해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 삼십년이라.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 즉”(출12:40-41)이라고 설명합니다. 본문에서 기자는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날’이라는 강조적 표현을 통해 횃불언약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대(400백년에 해당하는 예언적 기간)만의 섭리적 기간이 다름 아닌 430년에 해당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강조해 시사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당초 계획하셨던 바 언약의 섭리적 작정기간이 출애굽의 시점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을 강력히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절대 주권자로서의 신적 기원의 성격상, 성취의 시기와 내용이 어떤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중도에 변경되거나 취소될 수 없습니다. 오직 섭리적으로 작정 된 시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전 계획과 기뻐하시는 뜻대로 성취될 뿐입니다(창21:1-5, 41:1, 갈4:4, 롬11:25).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신적 언약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 생명처럼 귀하게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아울러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다고 기술함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열두 아들들로 말미암는 모든 아브라함의 후손들, 곧 민족단위로 생육하고 번성한 이스라엘이 남김 없이 출애굽에 참여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명실공히 아브라함의 횃불언약이 일점일획의 차질도 없이 완전무결하게 성취됐음을 가리킵니다.
나아가 출애굽의 성취는 동일한 언약 속에서 보증하고 있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창15:16하)이 이미 관영(貫盈)했음을 확증합니다. 따라서 출애굽 사건의 궁극적 목적이 될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약속은 동시에 아모리 족속으로 대변되고 있는 가나안 족속들의 관영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적 심판을 대리적으로 수행한다는 계시적 의미도 담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약속은 이중의 의미가 내포돼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가나안 지경에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현시하는 제사장 나라로서 신정왕국을 세우는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향후 가나안에 수립될 통일 이스라엘의 제반 왕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왕권을 대신하는 대리적 통치자의 자격과 신분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이때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 대리적 통치자의 정통성과 적법성은 다름 아닌 율법준수에 모든 근간(根幹)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신17:18-19). 다윗이 임종을 앞두고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기는 과정에서도 모세의 율법준수를 그토록 신신당부했던 배경(왕상2:1-4)이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준수의 여부는 하나님의 신정왕국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가늠하는 결정적인 근거이며 잣대로 작용합니다. 시내산 언약식에서 율법수여와 준수명령을 확인하시는 구속사적 배경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출19:5-8, 24:1-8).
가나안 정복약속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의 신정왕국을 수립하는 것과 관련해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전쟁의 방식을 통해 축출하는 문제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강제축출의 방식은 결코 부당한 처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미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관영한 저들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적 심판자의 자격으로 정복사역을 수행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관영(貫盈)은 항상 불가피한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케 하는 결정적인 단서로 기능해 왔음이 성경의 진술입니다(창6:5-7, 18:20-21).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의 도구로 선용하셔서 가나안의 관영한 죄를 대리적으로 심판하심으로 전 인류를 향해 죄의 결국은 하나님의 공의적 심판이라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아울러 이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철저한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회복 뿐임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이런 식의 심판의 일환으로 수행하게 될 정복사역의 성격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신분과 자격으로 이 사명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저자가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군대(출12:41)라고 묘사하는 배경이 이런 일련의 향후 구속사 진행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올 때 유아(幼兒) 외에 보행할 수 있는 장정이 육 십만이었으며 이들 중에는 중다한 잡족 곧 섞여사는 일단의 이방인의 무리(민11:4)가 동참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이로 보건대 출애굽에 참여한 총수는 남녀노소를 합해 대략적으로 2백만명 이상이 될 것으로 추산됩니다. 야곱의 70인 식구가 애굽으로 이주한 후 430년의 기간이 지나는 동안 이렇게 엄청난 국가적 규모의 숫자로 인구가 불어난 것입니다. 출애굽기서 기자는 이런 괄목할 만한 인구증가와 관련해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기술한 바 있습니다(출1:7). 이는 표현상 이미 아담의 창조언약(창1:28)과 노아의 보존언약(창9:1-2) 및 아브라함 언약(창12:1-3)을 통해 약속하신 바 언약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지적함에 다름 아닙니다. 나아가 이런 사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스라엘을 통해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코자 하셨던 하나님의 언약적 의지가 얼마나 강렬했으며 확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구체적인 실례(實例)라 하겠습니다.
이들 중다(衆多)한 잡족들은 그 혈통이 이방인들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신앙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의 도리를 예표하는 유월절 예식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출12:43-49). 이로 보건대 새로운 선민(選民)으로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길은 혈통적 순수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증표인 할례가 유일한 관건(關鍵)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봅니다(창17:9-14). 이는 곧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불문하고 오직 마음에 인(印)쳐진 할례인 믿음으로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신약적 구원관을 예표해 주는 구약적 단서조항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봅니다.(롬2:28-29, 5:1, 갈2:16).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효를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이 한 새사람 곧 교회가 됩니다(엡2:14-15). 참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입니다(엡1:23, 10절).
3.결론
선(先)언약과 후(後)성취는 세상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진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고전적(古典的) 섭리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속사는 신적 언약의 방식을 통해 사람과 때와 환경을 도구로 삼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현 역사 속에서 성취돼 왔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소위 원시복음이라 일컫는 ‘여자의 후손언약’(창3:15) 속에 계시된 대속적 속죄사역의 성취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성취의 절정을 이루었습니다(요19:30). 그래서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의 구속사를 여전히 운반하는 자들로 존재한다는 의미는, 이미 성취된 십자가의 대속적 공효가 세상 가운데 잃어버린 바 된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통해(눅19:10),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는 일에 집중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마16:18, 엡2:11-22). 그렇습니다. 구원의 결국은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왕적 통치와 권세를 능력 있게 받아 누림으로 하나님나라의 실질을 현재적으로 맛보며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어야 된다는 지적이 이런 의미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가운데 그 분의 약속의 말씀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가리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왕적 권세를 실질로 소유해 체험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믿음의 마음을 통해 하나님의 미래의 약속을 현재적으로 소유해서 누리게 하는 신앙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세상의 그 어떤 것에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영원한 가치관으로 여길 수 있는 결단의 신앙심이 그의 전인격을 주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와 가장 값진 진주의 비유(마13:44-46)가 이런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애굽 전역에 내려진 열 번째 장자살해 재앙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횃불언약이 출애굽의 시점과 때를 맞춰 성취케 하기 위해 시기 적절하게 임하게 되는 일종의 표적이며 동시에 언약적 재앙의 성격을 띱니다. 이 열 번째 재앙으로 바로는 마침내 항복하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아브라함의 횃불언약의 구체적 성취를 함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애굽의 장자사망 재앙은 애굽에게는 죽음을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①악을 멸하시는 종말론적 심판을 예표적으로 표상(表象)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유월절 규례를 통해 베푸시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 ②이는 유월절 어린양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고전5:7)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모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③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그 신실하신 신적 속성(屬性)상 필연적 성취를 전제합니다. 성도에게 믿음의 인내가 필요한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믿음의 인내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영적 덕목입니다(히10:36).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아브라함의 횃불언약에 근거해 430년간의 오랜 종살이를 마감케 하시는 가운데 마침내 이스라엘을 해방케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구원사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횃불언약의 남은 부분인 가나안 정복사역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은 명실공히 하나님의 군대로서 하나님의 신정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출애굽의 목적지인 가나안에로의 여정을 재촉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동일한 원리 하에서 가나안의 영적 실체인 천상의 도성(히11:10), 곧 하나님 나라를 향해 신앙의 경주를 마다 않는 신약성도의 현재적 삶(히12:1-2)을 원리적으로 예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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