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울리히 벡/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 강수영·권기돈·배은경 옮김, 새물결, 1999
현대 사회는 "위험 사회"이다. 확고한 것으로 여겨졌던 오래된 도덕과 계율들의 해체, 불확실성과 모순들의 혼재, 여러 중독 현상들과 압박감의 편재, 유동성의 증가...... 이런 것들과 함께 현대 도시에 널려 있는 불특정다수를 노리는 폭력과 범죄들, 우연한 사고들......우리는 사회의 안팎에 널려 있는 위험 인자들에 포위되어 있고 대개의 경우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편에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있다. 사람들은 "동시에, 연속적으로, 과도하게, 조용하게, 또 손으로, 이빨로, 말로, 시선으로" 사랑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안달루시아 지방, 할머니, 괴테, 하얀 피부 위에 걸쳐진 검은 망사 스타킹, 치즈 샌드위치, 풍만한 가슴을 가진 여자의 따뜻한 미소, 갓 구운 빵, 떠다니는 구름들의 희롱과 발장난"을 사랑하고, 누군가를 사랑한다.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들은 변함 없이 사랑을 찬미하고,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은 사랑 이야기를 화면 가득히 펼쳐낸다. 이 모든 사실들이 내 눈에는 이상하고 신기하게만 비쳐진다.
개인화(individualisierung)라는 어휘는 이 책의 퍼즐을 풀기 위한 키워드이다. 확실히 근대 이후 사람들은 더 빠르게 개인화 되는 길 위에 서게 되었다. 개인화는 공동체가 만드는 정신적 ·정서적 유대에서 개인을 조각으로 분리해낸다. 고립·유폐는 개인화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혼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때 사람들은 친밀감과 정서적 위안과 오락과 삶의 기쁨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어한다. 개인화가 더 넓고 깊게 진행될수록 외로움은 커지고 정서적 친밀감에의 목마름도 절박해진다. 사랑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타당하고 가치가 있다는 느낌을 주는 핵심 요인인 동시에 세상 속에서 혼자 있는 외로움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다. 사랑은 명백히 "외로움의 대안이며, 반(反)개인적"이다. 우리가 고립된 개인으로 이 삶을 감당하고자 할 때 실존의 외로움은 피할 수 없는 일종의 질병이며, 우리는 사랑의 환상이라는 치료제를 필요로 한다. 오늘날의 사랑이 "세속적인 신흥종교"이고, "사생활의 신(神)"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사랑은 그 본질에서 타자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추구하는 의존적인 행위이다. 누군가를 만나 우호적인 대화, 인정을 갈망하는 만남, 수용과 이해의 과정을 거치며 친밀감과 상호 신뢰가 두터워지면 사람들은 결혼을 서두른다. 그러나 결혼에 이르게 하는 더 직접적이고 강력한 동기는 언제나 그 밑에 숨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적 갈망이다.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면 연인들은 "예의바른 행동"이란 사회적 가면을 벗어 던지고 그 속에 숨어 있던 조급하고 참을성이 없는 "동물적 측면"을 드러낸다. 그렇게 되면 연인들은 "광란하는 바보"가 되어 일상과 사회가 요구하는 책임과 의무들을 더는 성실하게 수행할 수 없게 된다. 이 순간부터 주관적인 입법자 노릇을 해온 사랑은 성급하고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제 정체성도 바꾼다. 이 위기는 성적 갈망을 합법적이고 자유롭게 해소할 때 비로소 해결되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결혼이라는 형식으로 제도화했다.
깨진 사랑, 깨진 결혼을 목격하거나 직접 경험하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과 결혼, 그리고 아이에 대해 환상이라는 당의(糖衣)를 씌워 바라본다. 사랑은 "쾌락, 신뢰, 애정"이며 동시에 그것과 상반된 것, "권태, 분노, 습관, 배신, 외로움, 위협, 절망, 그리고 쓴웃음"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가족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결혼을 해서 가족이라는 동맹을 결성한 성인남녀는 이 관계를 무너뜨릴지도 모를 잠재적 위험성을 가진 타자들과 사회를 가로지르는 방호벽을 쌓는다. 그러나, 이 "굳건한" 관계의 붕괴는 방호벽 안쪽에 안전하게 보존된 그 결혼관계의 내부로부터 시작된다. 대부분의 가정은 사소함과 비밀들, 실망과 죄의식들에서 비롯된 위기와 의혹을 안고 있다. 이 긴장이 해소되지 않고 지속되면 가정 구성원들간의 결속의 고리들은 급격하게 헐거워질 것이다. 결혼 관계 안에서 더 이상 우호적이기를 포기한 남녀 양성은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겼던 힘으로 이제는 서로를 의심하고 내치며 싸운다. 사랑은 "의심에 대한 대안"이다. 따라서 의심은 사랑의 가장 기초적인 근거의 위반이며, 그 토대를 위협하는 공격이다. 불신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다시 불신을 키운다. 이제 결혼이나 가족 제도는 위선의 껍데기 안에서 온갖 추악한 것을 기르는 온상이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날 즈음 두 사람은 갈라선다.
과거에는 이혼이 결혼의 실패이고 사회적 수치의 표지였지만 이제 사람들은 이혼에 대해 달리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해 이혼은 더 늘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이혼을 새로운 삶의 선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혼녀와 미혼 남자가 커플을 이뤄 결혼하는 일이 빠르게 늘어가는 것도 그 한 증거이다. 이혼이 늘어나는 또다른 유력하고 간접적인 사유의 하나는 여성의 활발한 사회활동 때문이다. 다양한 가전제품, 기계,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비재, 유료 서비스의 확산은 여성들을 가사 노동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시켰다. 피임법과 사회적으로 관용되는 낙태 등도 모성의 의무를 자연적 운명에 맡기지 않고 선택과 이성적 계획 아래에 두게 되었다. 거기에 교육 기회의 평등화 역시 여성들에게 대부분의 가정에 잔재하고 있는 현대의 봉건 요소들, 이를테면 남녀 사이의 위계질서, 가사 노동, 육아 전담을 벗어나 일을 통해 자신을 찾도록 부추기고 있다. 여성이 취업하기에 유리하도록 변화하고 있는 취업 시장, 고용제도 혹은 법률 등도 여성을 만족감이 작은 결혼에서 자아실현의 기회가 큰 바깥으로 끌어내는 강력한 동기들이다.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결혼하는 걸까 ? 냉정하게 말하자면 오늘날 "가족과 결혼을 묶어주는 것은 사랑과 물질적 안정이기보다는 혼자 남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결혼은 책임 있는 선택도 아니며 사랑의 최종 기착지가 아니다. 사랑은 우리 자신이 "타인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다는 환상"을 키우게 하지만, 충족은 언제나 다음으로 유예되고 결국 우리 존재 안의 텅 빈 부분은 우리 자신으로만 채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다. 사랑이 얼빠진 몰입이고, 미친 혼돈이며, 그것이 현실 도피였음을 깨닫는 것은 사랑이 깨졌을 때이다. 제 정신을 갖고는 결혼을 못한다. 그러니 어느 영화 제목처럼 결혼은 미친 짓이다 ! 여전히 한쪽에서는 깨어져 이혼하는데, 또 한쪽에서는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 자본주의 정보사회의 핵가족은 폭풍우 속에 무방비 하게 노출된 미루나무 꼭대기에 놓여 있는 까치 둥지와 같다. 깨진 결혼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야만의 풍경이며, 더 이상 더러울 수 없이 추악한 인간의 내면이다.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은 바로 그런 시대에 풍부한 예화들이 곁들여진 사랑, 결혼, 가족, 아이들, 함께 살기에 대한 사회생태학적인 임상보고서를 펼쳐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