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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3.오후8:49 月. 어두움
국화菊花, 국화색菊花色, 국화향기菊花香氣, 그리고 서산과 홍성의 하늘.
명화스님이라고 했다. 명화明華스님이면 찬란하게 빛나라.는 뜻이고, 명화明花스님이면 향기로운 꽃.이라는 뜻이고, 명화明火스님이면 불처럼 타오르라.는 뜻이고, 명화名華스님이면 이름이 존엄하다.는 뜻일 게다. 명화스님은 폴란드에서 온 비구니 스님이었다. 사람은 자신의 소망을 담아 이름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이 불러주는 이름은 또 그 사람을 만들어 간다. 명화스님도 이름 속에 들어있는 가장 참다운 뜻처럼 스스로 그렇게 되어 가시라고 기원을 해본다.
이곳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백삼십여 년 전에 경허스님께서도 이 비탈진 돌계단을 오르내리셨을까?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시멘트로 포장을 해놓은 경사 급한 오른편의 차도는 만들어진 지가 얼마 되지 않았을 터이니 천장암을 드나드는 통로라고는 유일하게 돌계단밖에 없어서 응당 그랬을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실감이 나지를 않았다. 석가모니 부처님 성지처럼 경허스님 발자국을 특별히 조성해놓지 않았으니 돌계단 어디에 경허스님의 발자국이 흔적이라도 남아있는 줄을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이 돌계단 위에 무수한 경허스님의 발자국과 체취體臭가 묻어 있으려니 하는 생각만으로도 언제나 마음이 좋았다. 그랬다. 천장암 도량 안으로 들어서자 아내와 함께 곧장 연암산 산신당으로 올라갔다. 윤구월 예수재豫修齋 회향을 할 동안에는 산신당에서 기도를 올리자고 아내와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산신당은 부처님을 마주보는 가운데 자리를 제외하면 그 양옆으로 딱 두 사람이 기도할 공간이 비어있었다. 아내는 경을 읽었고, 나는 108참배를 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부터 간간히 뿌려대는 빗방울들로 선선해진 날씨였으나 절을 했더니 몸이 점차 훈훈해져왔다. 아내는 경을 읽고 나서는 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108배를 마치고 잠시 자리에 앉아 입정入定에 들었다가 산신당 밖으로 나와 주변 경치를 둘러보며 늦가을이 소신껏 주장을 해대는 연암산의 가을 색色과 향香을 소소히 맛보았다. 연암산 기슭이나 봉우리가 단풍이 뛰어난 절경은 아니었지만 온 산을 뒤덮고 있는 추련한 가을색은 어느 산 못지않게 기세 있고 단정해보였다. 기도를 마치고 산신당을 나선 아내와 함께 법회를 보기 위해 몇 개의 돌계단을 내려가서 법당으로 들어갔다.
오늘 법회를 보면서도 부처님 초기경전을 읽고 스님과 질의 응답시간을 가졌다. 부처님 말씀인 불경을 읽을 때도 그러하고 교회에서 성경을 배우고 공부할 때도 느낀 일이지만 불경은 불경을 보는 방식에 근거해서 읽어야하고, 성경은 또 성경을 읽는 방식대로 읽어야한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유학 경전은 유학 경전을 읽는 방법에 따라가면서 읽어야 본래의 의미에 어긋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경전은 홀로 독학을 해가면서 읽는 것보다 학인들과 함께 훌륭한 스승 밑에서 가르침을 받으면서 읽는 것이 훨씬 좋은 방법이다. 법회를 보고 있는 도중에 주지스님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어느 절 신도님들이 단체로 천장암에 성지순례를 오는데, 천장암으로 들어오는 길을 확인하는 전화였다.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난 주지스님이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하셨다. “서울에 있는 정각사 신도님들이 한 80여 분가량 우리 천장암으로 성지순례를 오시는데, 법회를 마치고 나면 차가 있는 분들께서는 저 아래 제1주차장으로 가서 그 분들을 좀 모셔와 주세요.” 관광버스가 천장암으로 오르는 산길이 좁아 들어올 수가 없는데다가 또 노老 보살님들이 걸어오기도 만만치 않은 숲길이라 누군가가 봉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그 누군가 안에는 나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벌써 많은 보살님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숲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분들을 보이는 대로 차에 태우고 되돌아오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나이가 많은 보살님들이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제1주차장이나 더 아래쪽 길에 계실 것 같아서 일단 주차장까지 내려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주차장에서 두 분을, 숲길 어귀에서 세 분을, 전원주택 앞에서 한 분을 더 태우고 천장암으로 돌아왔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뒤에 돌계단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보살님 두 분 손을 양손으로 꼭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씩 돌을 발로 꼭꼭 딛어 가면서 계단을 올라섰다. 한꺼번에 공양간에 80여 명의 보살님들이 들이닥치니 공양간이 잠시 소란해졌으나 금세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아 공양을 드리니 방안의 오순도순한 분위기가 풍선처럼 화기애애和氣靄靄해졌다. 공양도 드리고 참배도 하고 보살님들은 성지순례를 마치자 올 때 한꺼번에 들어왔던 것처럼 조금에 썰물 빠지듯이 산에서 내려갔다. 점심공양을 마친 우리들에게도 오늘 성지순례 코스가 서산 고북면의 국화축제와 홍성의 용봉사龍鳳寺라고 공지가 되었다. 각자 차량에 나누어 타고 행사장인 고북중학교로 향했다.
우리가 서울에서 출발을 했던 이른 아침부터 가을비가 오락가락했던 어수선한 날씨였는데, 경기도를 지나 충청도에 들어서니까 비가 멎은 듯했지만 하늘표정은 그리 밝지 못해서 기분에 따라 언제든지 비를 더 뿌려주마.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고북중학교 운동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국화축제장으로 들어서서 잘 꾸며놓은 행사장과 잘 가꿔놓은 다양한 국화를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후드득.. 후드득.. 거리면서 대중없는 가을비가 쏟아졌다. 우리 일행들은 얼른 커다란 비닐하우스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비 덕택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와 비닐하우스 국화전시장이 좀 북적거렸지만 원래 축제의 분위기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들어보는 비닐하우스 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가을의 소리를 실감나게 전해주는 듯 제법 운치韻致 있게 들려왔다.
요즘에는 보기가 쉽지 않지만 예전에는 중소도시에 양철 지붕집이 꽤 많이 있었다. 양철이라는 게 열전도율熱傳導率이 높은데다 그때는 단열제가 그다지 개발되지 않아서였던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워서 좋은 주거환경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비가 올 때 양철지붕에서 들려오는 리드미컬한 멜로디는 인생人生의 낭만浪漫과 애환哀歡이 어우러진 삶의 소나타 같은 생생한 음악이었다. 비가 좀 걷는 듯하자 밖으로 나갔더니 비닐하우스 앞에 사과 과수원이 있었다. 내가 살던 고향 부근에서는 배나 복숭아는 많이 기르지만 사과재배는 거의 없어서 사과가 나무에 매달린 채 영글어있는 모습은 어른이 된 후에야 볼 수 있었다. 저 조그마한 나무에 저리 큰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린 풍경은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바로 지척인데 사과를 한 개 따서 한 입 깨물어 먹어보고 싶었으나 팻말에 이렇게 큰 글자로 쓰여 있었다. ‘여기는 체험장이 아니니 사과를 따면 안 됩니다. 눈으로만 보고 즐겨주세요.’ 오호! 방금 나 같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비단 나만의 경우만은 아닌가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침개에 막걸리도 한 잔 걸치고, 신바람이 나는 노래공연도 잠깐 구경을 한 뒤에 이제는 홍성의 용봉사로 향했다.
절집 이름을 듣고 음식이 생각났다면 사실 그게 좀 그렇지만 용봉사라는 말을 듣자 왠지 바로 머릿속에 용봉탕龍鳳湯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살던 고향에도 용봉동이란 동네가 있었는데, 그 동네 인근이 용봉탕龍鳳湯이라는 향토음식으로 유명했었다. 일반적으로 용봉탕하면 닭과 잉어를 함께 넣어 푹 삶아낸 보양식을 말하지만 용봉동에서는 잉어대신 자라를 영계와 함께 넣어 푹 삶아낸 용봉탕이 더 유명했었다. 자라와 닭고기 맛이 잘 어울렸고 국물 맛도 일품이었다. 어렸을 적 용봉탕을 끓이는 솥 안에서 살아있는 자라가 기어 다니는 것을 보고는 용봉탕이라는 음식을 안 먹었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적의 날카로운 기억은 우윳빛 추억으로 바뀌었던지 용봉탕을 맛있게 잘만 먹었다.
사연 없는 절집이 어디 있고, 곡절 없는 사찰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용봉산 용봉사는 사연과 곡절의 크기가 예산 보덕사報德寺를 창건하게 한 가야사伽倻寺에 못지않았다. 그 사연과 곡절의 이면에는 꼭 당대의 세도가가 나오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평양平壤 조 씨가 주연으로 등장을 했다. 어느 입 잰 풍수風水가 저 터가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나오는 터라고 귀엣말을 해주고, 그 말을 들은 세도가는 두 손에 들린 자신의 권세를 이용해서 절을 폐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조상을 모신 봉분을 만들었다.는 대개 천편일률적千篇一律的인 내용이지만 당시 그 일을 당했던 당사자와 관련자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묘 자리를 잘 쓰면 왕후장상이 굴비 엮듯이 후손에서 줄줄이 잘 나오는 것일까? 고찰古刹 가야사를 불태우고 그 자리에 자신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 묘를 쓴 덕분인지 여하튼 대원군의 후손 중 왕이 나오기는 했지만 막상 대원군이 정권을 오로지 한 뒤에 몇 가지 국내정책에 변화를 시도한 것 외에 국제정세라는 것에는 까막눈이어서 쇄국鎖國을 고집하여 세계정세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절호의 근대화 발전 기회를 일본에게 넘겨준 채 주변 강대국들에게 무수히 침탈을 당했던 우리의 고통스러운 근대近代는 어떻게 되었던가? 중국이나 미국처럼 땅덩어리가 무진장 넓다면 혹 모르겠으나 그 산이 그 산이고, 그 계곡이 그 계곡이어서 이리 봐도 잘생기고 저리 봐도 안락한 터인지라 우리 뒷마당이 뒷집 앞마당이 되고 우리 앞마당이 앞집 뒷마당인 좁으막한 삼천리강산에 명당明堂이 따로 있고 음지陰地가 따로 있을 턱이 있겠는가?
용봉사에서 산길을 한 십여 분 올라가면 한 개의 천연바위 전면을 깎아 감실龕室을 만들어 여래를 모신 마애불상이 있었다. 그곳은 용봉산 중턱의 아담한 봉우리인데, 평평하고 너른 장소가 오대산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연상하게 할 만큼 주변의 경관이 뛰어나고 터가 안정이 되어 있었다. 이 부근에서 백제 때 기와조각이 많이 출토된다고 하니 마애불상은 고려초기의 불상이지만 벌써 백제시기부터 이곳은 부처님을 모시는 절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 공식명칭이 홍성 신경리마애석불인 마애불상은 오랜 시간동안 노천露天에 방치되어 유물로서는 보존상태가 썩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종교적 예경의 대상인 부처님으로서는 빼어난 불상이었다. 이곳 마애불상은 멀리서 볼 때보다도 가까이에서 볼수록 인자한 입가의 미소가 뚜렷하게 보이는 보기 드문 상호相好를 가지고 있었다.
이곳 홍성 용봉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홍성댁 길상화 보살님이 집으로의 초대는 다음 기회로 순연시키고 용봉사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거리에 있는 두부요리가 맛나다는 음식점으로 우리 일행들을 안내해주었다. 충청도 음식이라고는 천장암 음식밖에 모르는 나는 기대 반 호기심 반이었는데, 식탁위에 먼저 나온 반찬부터가 맛깔나고 간이 잘 맞았다. 양도 많고 매콤하고도 시원한 순두부찌개도 좋았고, 식후에 나온 오마자차도 깔끔한 맛이 괜찮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자 이제 각자 가야할 곳으로 출발을 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일주일 중 일요일에 한 번, 법당에서 일요법회를 보고 절에서 점심공양을 하고 난 뒤 충청도권내의 주변 사찰을 한두 군데 성지순례 하는 일이 매번 기다려지고 매우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런 법회와 순례 모임을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쉽지 않을 터인데 자연스레 깊은 뜻을 내어주신 천장암 주지스님과 법회법우님들께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귀경길에는 백팔십 보살님과 함께 차를 타고 왔다. 지난번에 함께 서울로 온 적이 있어서 동행길을 조금 더 편하고 친숙하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나와 아내도 마음이 흐뭇했다.
(- 국화菊花, 국화색菊花色, 국화향기菊花香氣, 그리고 서산과 홍성의 하늘. -)
첫댓글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