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란텔라: 거미에 물린, 거미가 된 이들의 춤
news letter No.363 2015/4/21
“여기는 이탈리아 풀리아 지방의 남쪽 끝, 살렌토, 태양과 고독에 의해 갈라진 땅. 사람들은 마른 흙 위를 걸어간다. 수 세기를 거치며 돌들은 부서지고 부식되었다. 고통과 희망이 그 안에서 서로 겨루는 교회는 침묵 속에 메마르고 부서진다. ... 여기는 독(毒)이 서린 땅, 대낮의 열기 속에 광기와 결핍의 거미, 타란툴라의 지배가 시작된다. 그 독은 땅 위에서의 고된 노동 밖에 알지 못하는 이들의 약해진 몸, 피 속을 흐른다. .. 거미에 물린 여인, 타란타테(tarantate)는 권태가 이 질병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 질병은 빠른 리듬으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음악과 거미의 춤, 타란텔라(tarantella)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이는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살바토레 콰지모도(Salvatore Quasimodo)의 글로서, 이탈리아 영화 감독 지안프랑코 밍고지(Gianfranco Mingozzi)의 1962년 다큐멘터리 <타란툴라(Tarantula, 혹은 La Taranta)>에 삽입된 내레이션 중 일부다. 밍고지는 1961년 여름 살렌토 지방에서, ‘타란티즘(tarantism)’이라 불리는 질병에 걸린 이들의 의례를 카메라에 담았다. 오랫동안 이 병은 ‘타란툴라’라는 독거미에 물려 생긴다고 여겨졌으며, 이 병에 걸린 이들에게는 극도의 피로감, 사지의 무력감, 근육통, 구토, 정신적인 흥분, 안절부절함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이는 특정한 음악과 춤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고 믿어졌다. 이들의 의례에 사용되었던 빠른 춤곡이 후에 쇼팽이나 리스트에 의해서도 다시 만들어졌던 ‘타란텔라’다. 밍고지를 살렌토 지방으로 가게 만든 것은, 그 보다 먼저 이 지역에 가서 타란티즘에 대한 연구를 한 이탈리아의 종교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에르네스토 데 마르티노(Ernesto De Martino)의 책 《회한의 땅 (La Terra del Rimorso, 1961)》이었다. 나폴리 대학에서 서양 고전학과 비교 종교학을 공부한 데 마르티노는, 초기에는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의 영향 하에 종교사를 연구하였으나, 나중에 이탈리아 사회당과 공산당 활동에 몸담게 되면서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후 데 마르티노는 이탈리아 남부지역에 가서 그곳의 장례 의식, 애도 의례, 주술 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는데, 그 결과 나온 세 권의 책 중 하나가 바로 타란티즘에 관한 연구서인 이 책이었다. 1959년 데 마르티노는 신경정신과학자, 독물학자, 심리학자, 민속음악연구가 등으로 구성된 팀을 이끌고 살렌토 지방의 갈라티나(Galatina)라는 작은 도시에 갔다. 이 곳에 있는 성 바오로 소성당에서는 매년 6월 29일 성 바오로와 성 베드로의 축일에 타란티즘에 걸린 이들- 주로 여성들이 와서 춤을 추며 병을 치료하는 치유 의례가 열렸다. 타란티즘과 독거미의 연관성에 대한 의심은 이미 이전부터 제기되어 왔지만, 데 마르티노는 이를 더 확실하기 위해 신경정신과학자와 독물학자의 도움을 받았고, 이들로부터 타란티즘이 독거미에 물리는 것과는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나서 몇 달에 걸친 현지 조사와 연구 끝에, 데 마르티노는 이를 문화적 질병이라 결론지었다. 그는 우선 이 의례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지중해지역의 춤 의례와 관련있다고 추정했고, 이후 그리스도교가 들어 온 이후에도 이것이 없어지지 않자 오히려 그리스도교가 이를 수용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오랜 시간동안 이 지역에서 이렇게 거미처럼 몸을 움직이며 신들린 듯 계속해서 춤을 추는 의례를 지속하게끔 만들었을까. 데 마르티노는 타란티즘 의례가 행해지던 곳이 이탈리아 역사 속에서 항상 소외되고 가난했던 남부 지역이었다는 것, 그리고 특히 타란티즘을 앓는 이들 중 대부분이 항상 여성이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권력의 중심부로부터 언제나 소외된 지역, 몇 백년을 이어져 온 빈곤, 그리고 그 안에서도 더욱더 억압되고 소외된 여성들, 자신의 존재를 드러 낼 그 어떤 수단도 지니지 못한 결핍된 이들에게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몸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이러한 질병과 의례였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데 마르티노의 이 책을 읽고 만든 밍고지의 다큐멘터리에서 우리는, 뜨거운 태양 아래 메마른 대지와 오래된 건물들, 그리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지극히 평범한 얼굴들을 보며, 그 중 어느 한 집 바닥에 엎드려 이리저리 뒤척이며 빠른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여성을 본다. 또한 마치 병원에 오듯 실려와 성당 바닥에 누워있는 여성들, 그러나 음악이 시작되자 바닥 위에서 빠르게 들썩이는 그들의 몸. 거미처럼 성당 높은 곳에 올라간 그들의 공허한 눈빛, 춤추다 쓰러지는 그들의 몸을 보며, 그들의 날카로운 울부짖음을 듣는다. 데 마르티노 책의 영어판 권두언을 쓴 빈센트 크라판자노(Vincent Crapanzano)는 자신이 연구한 북아메리카에도 이와 비교할 만한 의례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크라판자노처럼 구체적인 의례가 얼른 떠오르지 않더라도, 이 다큐멘터리 속 여성들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왠지 완전히 생소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들의 몸짓과 눈빛, 울부짖음이 언젠가 다른 곳에서도 본 듯한 ‘몸짓’을 순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고통의 몸짓이면서 강한 욕망의 몸짓이기도 하고, 견딜 수 없는 무력감 끝에 자신을 무엇인가에 온전히 던져 버리고 싶은 몸짓이기도 한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의 표현을 빌자면, 그들의 몸짓은 “자신들의 ‘무능력’을 선언하면서, 자신들에게 결여된 것과 욕망하는 것을 동시에 확언”한다. 그것은 결국에는 없어지고 사라지겠지만(타란티즘도, 의례로서의 춤 타란텔라도 이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가 (다른 이름과 다른 모습으로) 다시 출현할 몸짓이며, 종교의 가장 밑바닥을 이루는 몸짓이기도 하다. 거미가 자신의 몸으로부터 실을 자아 자신의 세계를 만들듯이, 그 어떤 목소리와 수단도 지니지 못한 이들에게 몸짓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유일한 통로일 것이기 때문이다. “거미에 물린 타란타테 자신이 이제 그녀 안에 있는 거미가 된다. 그녀의 생각은 온전히 리듬이 되고, 몸의 기계적인 움직임을 통해 해방과 안도의 형상들이 솟아나온다, 공포와 절망의 힘에 맞서서. (살바토레 콰지모도)” 최화선_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hschoe72@gmail.com 최근 논문으로 <이미지와 응시:고대 그리스도교의 시각적 신심(visual piety)>,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 남장여자 수도자들과 젠더 지형>, <기억과 감각: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의 순례와 전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