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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돌아 어디가니? 2탄 - 책돌이 탐험대 >
그림책 <조천석>과 떠나는 시내구경
언제 : 2013년 5월 25일 토요일 2~4시 책돌이 탐험대
구경할 곳 : 산지천 조천석 ~ 건입동 동자복 ~ 옛 화력발전소 터 금산공원
조천석 朝天石
조천석은 관모를 쓴 사람의 얼굴 모양이 새겨진 아래 몸통 부분에 〈朝天石〉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팔의 형태는 새겨지지 않았고 머리와 몸통의 비율이 1:1 정도의 높이이다.
<조천석의 유래>
① 옛날에 명나라로 가던 배들이 모두 이곳에서 바람 자기를 기다렸으므로 이 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산지천을 거슬러 올라오는 배들이 이 표석을 기준 삼아 배를 매었다고 한다.
②옛날 산짓내(산지천)가 자주 범람하여 성안 사람들의 피해가 컸다. 타지방에 있을 때 물을 관리하는 방법을 알았던 어느 목민관(牧民官)이 돌을 세워 가뭄이면 기우제를 홍수가 나면 지우제(止雨祭-비를 그치게하는 제사)를 지냈다. 그 뒤부터 홍수나 가뭄의 피해가 적어졌다고 한다.
③「삼국유사」에는 이 돌을 ‘도제암(都帝岩) 또는 조천석이라고도 하여 옛 성제(聖帝)가 이 돌에서 타서 올라가 하느님을 만났기에 그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처음 조천석을 만든 김정사는 영조 11년(1735, 을묘) 4월 부임하여 영조 13년(1737, 정사) 9월 재임중 화북관(禾北館)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가 새겼다는 ‘조천석’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조천석은 정조2년(1778, 무술) 12월 남도병마절도사로 있다가 제주도에 와서 정조5년(1781, 신축) 3월에 떠난 김영수 겸방어사(兼防禦使)가 경자년(1780)에 세운 것이다.
복신미륵(福神彌勒, 동자복)
지방민속자료 제1호 / 제주시 건입동 1275번지 / 고려시대 / 불교 유적(미륵신앙)
'자복(資福)' '자복미륵(資福彌勒)' '큰어른'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제주 다공질 현무암으로 조각되었고 예날에는 아들을 낳기 바라는 사람들이 와서 빌던 곳이다.
건입동에 있는 동자복과 용담동의 서자복은 둘 다 달걀 모양의 둥그스름하고 얌전한 얼굴에 벙거지 같은 감투를 써서 늠름히 서 있는 모습이다. 그 키는 동자복이 334cm, 서자복은 290cm이다. 미륵의 모습과 조각 수법이 같은 것으로 보아 같은 시대의 작품이다.
신기하게 동자복과 서자복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두 미륵이 민간에서 목숨을 관장하는 신으로 숭배되고 있으나 그 기능은 조금씩 다르다. 동미륵은 절 없이 민가의 뒷 뜰에 있어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집안의 나쁜 기운을 없애고 아이들이 잘 클 수 있게 도와준다고 한다.
《제주시 옛지명》에는 용담동 미륵은 '할망'이고 건입동 미륵은 '하르방'이라 한다. 미륵은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57억년 후에 세상에 줄현하여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이다. 미륵불은 미래를 내다보며 걱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앉아 있지 못하고 서서 천리안으로 세상을 앞질러본다고 한다. 미륵불은 우리 나라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 보통 투박하고 거칠게 민간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서 볼품은 없지만 무척 친숙한 느낌이 든다. 건입동 동자복은 원래 개인주택 뒤에 있던 것을 2009년 말 제주시가 매입하여 주택을 철거하고 공원처럼 꾸며 놓았다.
동미륵(동자복)이 있는 자리는 만수사(萬壽寺), 동자복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서미륵(서자복)이 있는 자리는 해륜사(海輪寺), 서자복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이 두 사찰은 모두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1700년 전후) 무속 및 불교 타파 정책에 의하여 절이 없어지면서 원래 이 절에 세워졌던 미륵불만 남은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열녀비과 같이 작은 것도 자세히 그린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1703년)에는 제주성의 동쪽과 서쪽 가까운 곳에 있는 복신미륵이 그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김만덕이 서울에 갔을 때에 제주에서는 불상을 본 적이 없다고 대답한 점 등을 근거로 할 때 1700년대 말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복신미륵(福神彌勒, 동자복)
지방민속자료 제1호 / 제주시 용담동 385번지 용화사 구내 / 고려시대 / 불교 유적(미륵신앙)
서미륵은 현재 용화사 구내에 있는데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이 미륵을 보호하기 위하여 용왕각이라는 정자를 지어 놓고 있었다. (현재는 용왕각이 철거되었다) 이 미륵이 용왕신앙과 관련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근처의 주민들은 고기잡이 할 때 안전과 풍어, 출타한 가족의 행운을 빌면 효험이 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일도1동 삼천서당터
원래의 위치는 일도1동 1198-8. 가막새미 북쪽, 곧 제주측후소 바로 남쪽 선일건재사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름다운가게 앞에 표석이 세워져 있다.
제주도에 제일 먼저 생긴 사설 교육기관으로는 중종29년(1534) 심연원목사가 세웠던 향학당(鄕學堂)을 들 수 있다. 이것이 폐쇄되자 임형수목사가 인종원년(1545)에 부임하여 김녕 포구 위에 김녕정사(金寧精舍)를 지어 동학이라 하였고 명월성 서쪽에는 월계정사(月溪精舍)를 지어 서학이라 하여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원래 서당이라고 하면 동네 사람들이 학식 있는 사람을 위촉하거나 훈장 한 사람이 여러 학생들을 교육하는 곳이다. 교육 내용도 기초과정이어서 이곳을 거친 학생들은 향교나 서원(현대의 고등학교나 대학)에 진학하였다.
삼천서당은 영조11년(1735)에 목사 김정에 의해 제주성 북동 모퉁이에 세워진 서당이었다. 당시 세워진 서당 건물은 유생을 기숙시키는 존현당(尊賢堂) 2칸, 삼읍(三邑:제주목·대정현·정의현) 자제를 기숙시키는 강당(講堂) 8칸, 서민의 자제를 기숙시키는 장랑(長廊) 12칸 등 세 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삼천서당이란 명칭은 산저천(山底泉)· 감액천(甘液泉)· 급고천(汲古泉)의 세 하천이 흐르는 곳이라는 뜻에서 따왔다고 하여 三泉은 주변의 샘 3곳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 쉬우나 사실은 주역에 있는 내용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무지몽매함을 깨우치는 샘, 그 샘과 관련해서 선현들이 말한 것 3가지가 있어서 그런 이름을 쓴 것이라고 한다. 학생 정원은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종8년(1871)에는 좌학당(左學堂)이 폐지되면서 정원을 40명으로 증가하였다고 한다.
서당 건물은 광복 후까지 보존되어 왔으나 1958년 헐리었다. 제주 전 지역의 선비가 이곳에서 글공부를 하였으며, 이 삼천서당을 통하여 『표해록(漂海錄)』을 쓴 장한철(張漢喆)을 비롯하여 오점(吳霑), 신상흠(愼尙欽), 오태직(吳泰稷), 안영수(安永綬), 김양수(金亮洙) 등 수많은 학자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고종30년(1893)에 김정목사를 기리는 흥학비가 삼천서당 안 존현당에 세워졌는데 삼천서당이 헐리면서 이도1동 1421번지에 있는 오현단(五賢壇) 경내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