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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거리는 300km가 되지 않아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오랜 시간 걷다보니 "가다 보면 끝난다"는 말에 실감하고
"피곤은 나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위로 삼는다
가야 할 곳으로
구름이 많이 보이는데 구름이 머리위에 있어야 시원한데 저 앞에서 알짱거리고
마치 날파리 때처럼 앞에서 알짱거리는 구름이 야속하기만 하다.
지천면 연화역이 보이고
신나무골 성지에서
성지순례길은 이곳에서 시작해서 팔공산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잠시 쉬었다가
읽어 보시고
갓길 따라
오늘은 하루 종일 구름이 왔다 갔다 하는데
비가 내리려나 구름이 조금씩 모여들더니 파란 하늘이 사라져 버렸다
지천역으로 가는 길에
왜관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에 땡볕에서 몇 번 쉬다 왔건만 덥기도 덥고 비가 곧 올듯하다
지천역에 도착해서 (1시 40분 630km 지점)
지천역 앞 국밥집에서 밥 한술 뜨고
사수로 따라 이동해서 팔달교까지 이어간다.
경부선은 1904년도 12월 27일 완공되어 이듬해인 1905년 5월에 서울역에서 개통식을 했다.
일제에 의해 철도가 만들어질 무렵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을 연결한 441km 인근에 사는 조선인들은 토지와 인력 동원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행(恣行)되다 보니 기력(氣力)이 남아있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닭과 돼지가 멸종하였다고 전한다.
같은 가축이라도 소(牛)는 달구지 끌며 무거운 짐을 날라야 하기에 잡아먹지 못하고 닭이나 돼지 같은 작은 가축들 경우 남아나지 않았다고...
이후 일제 강제점령기(1910년-45년까지) 우리나라 침략 정책의 발판이 되었는데 1899년 경인선에 이어 두 번째 철도 개통이다.
그리고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경상도에서 상주를 거쳐서 한양으로 청운의 꿈을 품었던 선비들이나 상인들의 애환이 묻어났던 문경새재길은 교통의 발달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철도가 지나는 대전이나 김천이 철도 교통의 중심으로서 크게 성장하고 조선시대 약 200년간 경상 감영이 있었던 상주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였다.
대구 초입
경부 고속도로와 중앙 고속도로가 만나는 곳으로
비가 내린다.
비가 오니 이렇게 시원할 수가 있나 했더니
잠시 후 비가 그치고 후덥지근하니 더 덥다.
팔달교를 만나면 부산까지 같은 길 250 km 왕복인데 그 길은 무척 지겨운 길이고
특히 낙동강 자전거길은 고무줄 늘여 놓은듯 아주 죽여줄듯하다
금호강이 흐르는 팔달교 다리
많은 비가 내리는 건 아니지만 더위를 식혀줄 비는 또다시 소리 없이 내리고 10일 전에 지난던 길을 다시 지난다.
이곳에서 문경새재로 가느냐? 괘방령으로 가느냐? 결정되는 곳, 문경새재길은 조금 가깝지만 처음 가시는 분들은 길 찾기 조금 낯설고, 괘방령길은 길 찾기가 조금 편하지만 거리가 조금 더 멀다.
만평역 이곳까지 4번 국도이고
서울에서 부산을 지나려면 팔달교 다리를 건너와야 만평 지상철 역을 지날 수 있다
북비산 사거리 원님 행차길
인근 20미터 안에 e산경표의 이산님이 계시는 건물 2층에 창문이 열려있다.
잠시 들어가 커피 한잔 얻어 마시고 나올까 하다가
대구분들께 연락해서 모두 나올까 싶어 후다닥 지난다.
원님 행차길에 붙어있는 옛길 표시판
일제 강점기 무렵에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면서
문경 새재길은 쇠퇴하였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옛길은 추정만 할 뿐이다.
예전의 고정된 길은 아무도 모르고 주요 도시를 지난다는 것만 알면 그리 어려운 길은 아닌 듯
비는 좀 더 많이 내리는데 리어카에 폐지 줍던 할머니가 비를 맞으며 리어카를 끌고 가는 게 보인다
걸치고 있던 비옷을 할머니께 입혀 드리고 달성공원방향으로 간다.
달성공원 앞으로 가서 (8월 4일 오후 4시 30분 무렵)
비는 더 많이 내리고 축축하게 걷는다
약령시장 서문을 지나며
영남대로
부산에서 최단거리이며 그 중심에 문경새재가 버티고 있다.
크고 작은 재는 모두 33개 정도이며 경상도에 15개의 재를 넘어야 충청도 땅이다.
반월당 현대 백화점 (오후 4시 42분)
대구에서 문경새재를 지나 용인, 한양을 돌아 다시 처음 그 자리까지 641km 지점이니 한양까지 4일 반나절, 그리고 돌아오는 길 5일 반나절 모두 10일 걸렸다
여기서 부산까지 왕복은 240km 정도 남았다 4일 정도 걸으면 될 것 같고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동대구역이 나오는데 우리나라에서 열차 횟수가 가장 많은 곳으로 경상도 말로 디지게 많은 곳이다
경부선, 동해선, 영동선, 경전선, 충북선, 대경선 어지간한 곳은 모두 다 간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반월당에서 잠시 트랙을 정지시키고
지나는 길에 집으로 와서 화분에 물 주고, 청소하고.
된장찌개 해서 밥 먹고
보따리 다시 제정비 해놓고
에어선생을 켜니 뭔가 잘못되었는지 33도에서 온도가 내려가지 않는다
얼마 전 큰애가 에어컨 청소하는 분 불러서 청소했다는데 설정을 잘못 맞춰놓은 듯하다. 하는 수 없이 선풍기 틀고 조금 누워있다가 다시 반월당으로 가서 트랙을 켜고 건들바위 앞을 지난다
어둠이 깔리는 신천 대백 플라자 앞 대봉교 다리 아래서 잠을 청한다
다리 아래가 체질이었나 꿀 잠자고 일어나 신천길을 따라 파동으로 올라가는데 정자마다 사람들이 누워있다.
정자와 나무 의자에 누워 쪽잠을 조금씩 자며 (8월 5일 02시 무렵)
비는 내렸지만 그래도 대구라며 후덥지근하다.
이른 새벽 혹은 늦은 밤 누군가와 함께 걷거나 생각을 나눈다면 어떤 기분일까
어제(4일)부터 일주일간 서로가 힘들고 외로운 길을 함께 공유할 강릉의 초보 대간꾼 레선생과 전화를 하며 서로에게 힘을 실어준다.
레선생께서 진부령에서 강릉 삽당령까지 가시는데 힘내서 잘 이어가시길 기원드린다
물소리가 요란한데 그렇게 거칠 곳도 아닌데 물소리만 요란하다.
사람도 그런 것 같다
나 같은 돌팔이는 깊이가 없어 늘 시끄럽다
찐빵골목을 지나고
걷는 길에 찐빵이나 편의점에서 파는 빵과 컵라면은 가급적 먹지 않는데 먼 길을 걸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사거나 먹지 않는다.
대구를 동과 서로 가르는 신천이 물안개를 내며 깨어나고
참깨 밭 너머
태양이 보였다 사라지고
제발 구름 속에 있어라
이러다가 땡볕에 중독되겠다.
쫌!~~~
팔조령으로 올라가는 길은 도로 좌측에 마을 농로 겸 자전거길이 길게 이어지니 편하게 다닐 수 있다.
옥분이 마을을 지나고
팔조령 터널은 자전거나 걸어서 갈 수 없으니 참고하시고
몇 굽이돌아가는 팔조령은 의외로 금방 올라갈 수 있겠고, 돌아가는 길이 멀다면 인근 석주사로 들어가서 옛길을 찾으면 팔조령으로 금방 올라갈 수 있는데 초보자는 길 찾기가 수월하지 않을 수 있다.
음력 7월 7석 날 은하수를 마주 보며 견우가 직녀가 만난다면 충북 옥천의 "주전자 황진이"와 서로 만난다는 그 방독면 사나이가 바로 이분이다.
방독면 남자는 팔조령 올라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으며 이 길은 나무 그늘이 많아 좋긴 한데 어디서 몰려온 건지 모르겠지만 날파리 군대가 온몸을 점령하고 난리도 이런 난리도 없다.
"두 눈을 점령하겠노라"며 얼굴 앞에서 그리고 눈으로 맹렬하게 달려드는 녀석들을 손바닥으로 치고 잡아 짓눌러도 또 다른 녀석이 눈으로 직행이다.
이길 수가 없다
팔조령에서 (8월 5일 오전 8시 무렵)
영남대로중 문경새재 다음으로 높은 곳이다.
부산에서 양산-밀양 -청도땅을 지나면 만나는 곳이건만 예전에는 도둑이 출몰해서 최소 8명이 함께 올라가야 한다고 한다. 글을 해석하면 도적들도 최소 8명이니 한판 붙으면 이길 가능성이 있다로 해석 가능하다.
또, 영남대로에서 8번째에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로 팔조령이라 부르는 곳이다.
지명에서 알듯 땅의 이름은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따라 지어지고, 사람의 이름은 앞으로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이름을 짓는다
청운의 꿈을 안고 떠나는 과거길 그리고 죄를 지었거나 모함을 받았거나 신분에 관계없이 떠나는 유배길이기도 했으며 임란 때 부산 동래성을 함락하고 나라의 관문 격이던 낙동강 작원관을 무너뜨리고 밀양, 청도를 거처 올라왔던 팔조령 고갯길이다
사대부들께서 "주상전하 아니되옵니다"를 외치다가 유배를 떠나곤 했는데 한양에서 가까운 경기도로 유배를 간다면 모를까 멀고 먼 곳으로 간다면... 아주 식겁하는 길이다. 조선 팔도에 유배지가 가장 많은 지역은 어디일까?
사형 다음으로 힘들었다는 조선 초기의 대명률에 따른 유배길은 나라가 좁아, 돌고 돌아 맞춤형으로 만들어진 3 천리길
의금부에서 고신과 궁둥짝 얼얼하게 얻어맞고, 걷는데 이골 나지 않는 한 걸어야 했던 유배길
가장 많은 유배지로는 한양에서 멀고 섬이 많은 전라도나, 여진족이 지척에 있는 함경도가 아닌 의외로 아름다운 산수를 간직한 경상도에 가장 많았으니 무려 71곳에 이른다.
유배를 향한 길은 하루 평균 80-90리 이상을 걸어서 가는데 30km가 조금 넘는 거리다.
팔조령 무인가게
무인가게만 보면 땀이 나는데
한여름 에어 캐리어 선생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간장선생을 닮은 콜라가 냉장고 안에 줄지어 서있다.
일단 마빡에 붙은 뚜껑을 따면 그 소리가 남 다르고 입에 거품을 물고 나온다.
목을 타고 들어가는 쏘는듯한 느낌은 에어선생 보다 더 좋고
짜릿한 기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데 목구멍까지만 그렇게 시원하고 알싸하다
잠시 의자에 앉아 쉬다가
굽이 돌아가는 길 어디 버려진 구르마라도 있으면
빠르게 타고 가겠건만 눈에 보이는 건 도로를 침범하는 칡덩굴뿐이다
이 길을 삼일뒤에 또 올라와야 한다
청도 연화지
마을에서 나오신 할매분들과 말(馬) 이야기 듣고 제가 아는 말이야기도 나누고 일어선다
연화지 맞은편의 의마총 유래비
조선 선조 때 이해(李海)라는 분께서 아끼고 사랑하던 말 무덤이 이야기다
이야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 장군 휘하의 의병장이던 이해(李海)를 태우고 창녕 화왕산성 전투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돌아온 의로운 말이다.
이후에 정유재란과 남원성 전투에서 왜군 5만과 싸웠지만 평지에 쌓아 올린 성(城)인 남원성에서 왜적에 숫적으로 감당하지 못하고 모두가 비참하게 전사했을 때 이해선생께서 사태가 심각함을 알고 고향에 있는 아들에게 절명사(絶命詞)를 써서 생사를 같이 했던 말안장 밑에 넣어 홀로 집으로 돌려보낸다.(예전에는 먹을것과 편지는 말안장 밑에 보관)
말(馬)은 전북 남원에서 함양-합천을 거처 수백km를 걸어와 청도 고향집에 당도해 이해 선생이 전사했음을 알린 후 지쳐 쓰러졌고 ,가족들은 선생께서 이제나 저제나 돌아올까 했으나 말 혼자 돌아와 시신 없는 초혼장(시신을 찾을수 없을때 죽은이의 혼을 불러들여 지내는 장사)으로 마을 산에 장례를 치르니 말 또한 먹이를 거부하고 울기만 하다가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유래비는 있는데 말 무덤을 찾지 못하고 돌아선다.
이곳 이외 전라도 강진에도 논 가운데 커다란 말무덤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휘하에 있던 황대중 장군의 애마 무덤 이야기가 있는데,황대중 장군이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하자 시신을 등에 업고 강진 고향집까지 찾아간 말(馬)로써 후손들이 무덤을 만들었고.경주 복토리에는 신라시대 때 박제상 선생께서 왜국(일본)으로 미사흔 왕자를 구하러 가기 전 동해바다 어느 해안가에서 부인께 보낼 편지를 타고 다니던 말 발목에 묶어 집으로 보냈는데 말이 경주 집을 찾아가다가 길을 잃고 지쳐 쓰러져 죽자 그곳에 무덤을 만들어 줬다는 곳도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경산 자인면에도 임진왜란때 한장군의 말무덤이 삼정지란 저수지 안에 있고
전쟁터에서 함께한 말은 가축이상의 짐승이었기에 후손들이 무덤을 만들어 보호하려했던것 같다
한편 경북 예천에는 말(言) 조심하란 뜻의 말(言) 무덤도 있다
어릴 적 고향 정자나무 아래에 말 무덤이 있었는데
어떤 연유로 생긴 말 무덤이었는지 그곳에서 흙장난하며 놀았지만 위와 같은 전설이 있었는지 어릴 적 이야기라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다.
연화지에서 할매분들께 제가 아는 말무덤 이야기 해드리고 이틀뒤 이 길을 다시 지나니 그때 보자 인사드리고 청도로 향한다
의마총 말무덤은 임란창의 고성이씨 청도 오의사 숭모단 옆에 비석만 있을뿐 정작 말무덤은 없어 수소문해서 찾아 가본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유등교회를 지나 가면 또다른 의마총 비석이 서있다
안쪽 복숭아 밭길로 이어지는 시맨트길따라 가서 산으로 오르는길로 가면 더이상 갈수없는 곳에서 복숭아 밭으로 가야하는데 숲이 우거져 포기하고 돌아 나온다.
생각보다 의마총은 찾는이가 없어 관리가 안되는것 같다
멀리 지나온 팔조령
길이란 언제나 그 자리가 시작이고 끝이다.
계속이어 가면 시작이고 여기서 끝내면 끝인 것이다.
청도 읍성 서문
조선 백성이 살아가는 읍성
15세기에는 전국에 96개의 읍성이 있었는데 경상도와 전라도가 가장 많았고 (세종실록지리지)
16세기 무렵인 1501년-1600년대에 160개로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에 가장 많았고(신 증동국여지승람)
18세기에는 107개로 경상도와 전라도가 가장 많았으나 임란이나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이 줄어든 경향이고 (여지도)
경상도와 전라도에 읍성이 많았던 건 왜구들의 영향이라 보면 되겠고 전국의 그 많은 읍성은 일제 강점기, 6,25 전쟁, 산업화 발달(먹고사는 문제)로 대부분 훼철되어 지금은 많이 없어졌다.
도주관
도주는 청도의 옛 이름으로 도주관은 조선시대 때 청도군의 객사를 쓰던 곳
조선시대 때는 사대부 양반가들의 일생의 숙원인 과거시험
과거시험은 고려 광종 때 수나라로부터 도입되어 조선말까지 약 900년이나 숱한 양반님네들의 영예를 위해 죽을 때까지 괴롭혔으니 43만 자 되는 한자를 모두 외우고 사서삼경을 통달해야 했기에 먹고살기 바쁜 사람은 과거시험 보기 어려워 이러한 이유로
과거시험은 양반의 전유물이 되었다.
소과에만 합격해도 부역과 군역이 면제되었는데 아무리 양반가라 하더라도 3대에 걸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사대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하니 3 부자가 함께 과거시험을 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과거시험은 3년에 1번 33명 합격시키는데 특별시험이 있다 보니 1년 3개월마다 1번은 과거를 볼 수 있었는데 난다 긴다 하는 사대부들이 모여들다 보니 경쟁률이 대단하다
조선 초기에는 10대 1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지만
중기에는 100대 1 부처님께 삼천 일 기도로는 부족하고 만일 정도는 기도해야 할 듯
정조 때는 110,000명이 응시했으니 3,333대 1 부처님께서도 야!~그건 힘들다며 돌아 앉으셨을 듯하다
떨어질 운명이라면 뭘 해도 떨어진다
청도 선정비군
청도 읍성에는 애민 선정비와 영세 불망비들이 줄지어 서있다.
읍성(邑城)의 정확한 연대는 알길 없고 고려 때 축조되어 조선 선조 때 지금의 규모로 만들어졌으나
임란 때 허물어져 다시 증축과 보수하여 왔고 고종 때 남문을 건립하며 4문을 갖추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도시화와 도로 건설로 문루는 철거되고 성벽은 훼손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많이 복원한 상태다
공사 중인 청도역을 지나고
청도에서 밀양 상동면까지 25번 국도를 지나는데 인근으로 하천길도 있어 병행하며 지난다.
천 원짜리가 땅에 떨어져 있지만 그냥 두고 지나간다.
청도천은 비슬산 정상 북쪽에서 흘러 내려와 청도군 유천면에서 밀양강에 합류하는 강으로
비가 와서 걸쭉한 미숫가루를 닮은 흙탕물이 내려간다.
청도 새마을 운동 발상지 안내판 인근을 지나며
잠시 청도 레일바이크 길 따라
평일이라 손님이 없다
멀리서 보니 우산이 매달려 있는데 이유가 있겠다 싶어 보니 파이프에서 물방울이 빗물처럼 떨어지도록 설계해 놨다
우산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시원한 물을 맞아보며
더위를 식힌다
유천역을 지나며
한적한 시골 마을에
첫 증기기관차의 등장으로 많은 사람이 모이던 곳
이후에 디젤기관차가 생기고
그다음에 무궁화호가 지나다녔으나
또다시 세월이 지나 지금은 기차선로도 사라지고
그 많던 사람도 대부분 떠났다
간이역은 만남과 기다림 그리고 헤어짐에 있어
기억하기 좋은 장소다
밀양 상동역을 지나는데
누군가 옆에 오더니 왜 걷느냐? 묻는다
질문에 답하기 전에
어느 불교 신자가 기돗발 좋기로 유명한 절에 가서 부처님께 두 손 모아 지극 정성으로 삼천배를 올리며 "부처님 부처님 우리 부처님 제발 로또 당첨되게 해 주세요" 라며 하루가 멀다하고 기도를 올렸는데 부처님께서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던지" 제발 그 로또 사고 와서 기도 좀 하라"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한번 걸어보세요 "이렇게 말씀드린다
뭐든 해보기 전까지 모르고 그걸 해봐야 아는 문제다
상동면에서 밀양강을 건너는 용평교를 건너 안인로 따라가다가 24번 국도를 만나는 교통 교차로에서 24번 길로 올라간다
이후에 밀양 동문까지 가는 길은 밀양 공원대로 끝까지 가면 삼거리에서 우측길로
밀양 읍성 동문을 지나며
밀양 읍성은 조선 성종 때 만들었으며 1,902년 경부선 철로로 인해 많이 훼손되었으나 최근에 다시 복원했다
덥기로는 대구와 막상막하인 동네에 오니 후덥지근하고 곧 소낙비가 올듯하다
밀양 관아
나랏일을 처리하던 관아가 있던 자리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광해군 때 새로 지었고
조선후기까지 우리나라에는 약 334개의 관아가 있었으니 조선팔도 360주 고을마다 거의 모든 곳에 관아가 있었다고 보면 될듯하다.
죄가 있건 없건 두들겨 패면 누구나 자백하게 된다는 묻지마 고신과 형벌 살면서 절대 오면 안 될 곳이다.
밀양 관아지 앞으로 19개의 선정비와 공덕비
조선시대 밀양 도호부의 부사와 관찰사등 재임기간 동안에 베푼 선정과 애민정신을 널리 후세에 알려 포상으로 삼고자 밀양 주민들이 세운 비석들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지고
영남루
밀양강가 수려한곳에 자리 잡은 영남루
신라 경덕왕 때 이 자리에 있던 영남사가 폐사되고 흔적만 남게 되자 고려 공민왕시절 당시 밀양군수 김주가 신축하여 영남사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한 것이다.
영남루 맞은편에 만덕문과 그 안에 천진궁이 있다.
만덕문 안에 천진궁 1,665년에 건립 역대 왕조 시조의 위패를 모신 곳 정면에 단군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왼쪽 벽에는 부여 고구려 가야의 始祖 왕과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고
오른쪽에는 신라 백제 始祖왕과 발해 고왕(高王) 조선 태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헌병대가 이곳을 감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소나기가 한줄기 세차게 내리더니 그치고
시간이 늦은 건지 비가 와서 그런 건지 관광객들이 없다.
영남루가 보이는 밀양강을 건너가며
밀양강은 낙동정맥의 영남 알프스 고봉(高峰)을 오르는 첫 관문 격인 고헌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울주군 상북면 소호리 마을을 지나, 경주시 산내면, 청도군 운문댐, 청도군 매전면, 청도읍 유호리, 밀양, 삼량진까지 흘러 낙동강에 합류한다.
낙동강으로 흐르는 동안 비슬산에서 흐르는 청도천과 낙동정맥의 능동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단장천을 합류시키며 물의 세력은 커진다.
밀양강 상류나 청도천, 단장천 상류는 물이 맑은 반면 사람 사는 곳으로 내려온 물은 맑지 못하나 다른 지방에 비해서는 그나마 깨끗한 편이다.
밀양역 703KM 지점
이제 부산 찍고 대구까지 180km만 남겨두었다
창원에서 전국구님께서 찾아와 주셔서 황태 잡아 쌀밥으로 아침, 점심, 저녁 겸해서 먹고
하루 종일 쫄쫄 굶어 많이 먹을 것 같았는데 많이 먹지 못하고 수저를 놓는다.
아직 해는 한 뼘 정도 남아 있지만 발가락 상태도 그렇고 쉬다가 다시 걸어가려니 엄두가 안 나서 숙소를 정하고 보니 전국구님께서 자리를 봐주시고 댁으로 가셨습니다.
저보다 더 잘 걸으시고 걷기에 최적화되신 국구님께 감사드리며
빨래하고 씻고 자리에 누워 잠시 백두대간 진행하시는 레선생과 통화하고 잠이든다.
내일은 부산 동래성 찍고 다시 돌아 나와야 하는 날이다.
밀양강 예림교를 건너와서 8KM 지겨운 길을 지난다 (8월 6일 01시 40분)
길가에 나비꽃이라 불리는 가우라꽃길인데 내일 지나오면서 다시 봐야할것 같다.
차 다니지 않는 길에 누워 별 구경하는데 구름이 몰려오더니 별은 모두 사리졌고
아스 구들장이 아주 따뜻하니 좋고
여름에는 이만한 안방은 없는 듯하다.
삼상교를 건너가며
03시34분 삼랑진 미전마을을 지나 중앙고속도로 대구-부산 다리 아래를 지나 미산고개로 행한다.
이후에는 58번 국도 갓길 따라 송지사거리에서 삼랑진 역방향으로
04시 무렵에 삼랑진역에 도착하니 역에는 불이 꺼져있고 편의점은 모두 닫혀있다
부산 동래구청까지 거리도 그렇고 역 앞 좁은 의자에 누워 모자란 잠을 자고
04시 30분에 일어나 보니 의자 끝부분에 천 원짜리 2장이 있다.
누군가 불쌍해 보여 2천 원을 놓고 간 것 같다.
잠들기 전에 찍어놓은 사진
ㅎㅎㅎ
환장하겠다.
결국 이걸 들고 역 안에 들어가서 자판기에 콜라 하나 꺼내서 마시고 나온다.
살다 살다 이런 날도 오는 걸 보니 진정한 노숙의 걸뱅이가 다 되어 가는 듯
다음부터는 깡통을 머리맡에 두고 자야겠다
삼랑진 콩나물 해장국집
이른 아침에 문이 열려있어 주인분께 "혹시 밥 되냐"라고 하니 "아직 준비 중이라"라고 하신다.
물 동냥하니 시원한 물 두 개 얻어 들고 "내일 다시 찾아오겠노라 "말씀드리고
지겨운 낙동강 자전거길로 걷는데 지겨워 죽겠다.
작원관
이곳을 지나야 밀양이며 청도 그리고 대구를 지나 문경새재를 넘을 수 있다는 말
조선시대 2대 國防(국방) 관문인 작원관, 그리고 한양 입성을 하기 위해서 꼭 넘어야 했던 문경새재의 조령관이 있다
작원관지는 영남지방의 동과 서. 남과 북을 연결하던 교통의 요지에 세운 숙박과 검문을 위한 시설이며
조선시대 때에는 공무로 여행하던 관원들의 숙소를 원(院)이라 하고,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을 검문하는 곳을 관(關)이라 하였다. 이곳 작원관은 관원의 숙소와 일반인의 검문을 위해서 지은 시설로 남해에서 올라오는 왜적의 방어를 담당하기도 하였고 작원관은 낙동강 강가에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철도 건설로 삼랑진 방향으로 700m 정도 옮겨 복원한 것이다.
작원관 전투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낙동강변을 따라 이곳 밀양으로 가는 관문 작원관에서 이틀간 조선의 민관군과 이틀간 전투를 치른다.
조선 박진 장군이 이끄는 민관군 병사 300명
일본 소서행장의 주력 부대 18,700명
이곳 작원은 밀양에서 40리 정도 떨어져 있으며 부산-양산 -밀양을 거쳐 한양으로 가러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이곳으로 오려면 황산잔도(작원 잔도)라는 낙동강이 흐르는 절벽길을 지나야 하기에 지세만 잘 이용하면 적은 병력으로 많은 군대를 막을 수 있는 곳이다.
임진년 1592년 4월 18일
일본군은 원동면 용당리 신곡천 골짜기로 돌아 토곡산을 넘어 안태리 마을로 넘어 작원관 반대편으로 돌아와 황산잔도에서 싸우던 민관군은 양편에서 공격을 받게 되어 혈전 중 모두 전멸했다
그나마 그늘인 대숲에서
鵲院棧道(작원잔도)
영남대로 구간 중 棧道(잔도)라는 명칭이 붙은 곳이 있다.
이는 말 그대로 험한 벼랑에 암반을 굴착하거나 석축을 쌓아 도로를 내었는데
이 길은 조선왕족 실록에 잔도라 하였고 대동여지도에서는 작천(鵲汘)이라 불렀다.
영남에는 이곳 황산잔도, 작천잔도와 점촌-문경의 토끼벼루가 대표적이다.
양산시에 들어와 (8월 6일 아침 06시 무렵)
자전거 타는 분들이 몇몇 지나가고 조용한 날이다.
내 발가락
거의 끝나갈 무렵에 몇 개 물집을 지었지만
물집보다 낙동강 길을 내일 또 걸어야 하는데 죽을 맛이다
해가 자리를 잡으니 덥다 더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늘은 없어지고
행 동래 부사 정공현덕 영세 불망비
1871년에 조성한 비석으로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흥선대원군의 심복인 동래부사 정현덕의 덕을 칭송하기 위해 세웠다
물금역을 지나서
아침 식사 된다는 곳에 가서 소고기 비빔밥으로 아침해결하고 나오니 더 뜨거워
인근 편의점에서 각얼음 큰 거 하나 목에 올리고 진행한다
양산천을 건너는 호포대교로 가는 길에 이제부터 그늘길이 이어지는데 바람이 조금 불어주면 좋겠으나 바람이 전혀 없다
부산광역시 표지판이 보이고
다리 아래로 정원이 길게 이어지고 낙동강 바람이 제법 불어 시원하다
이런 곳에서 자는 잠은 천금을 주고도 사지 못하는 보약이라며 30분 정도 자다가 간다
양산대로와 금곡대로 따라 갓길은 마을분들이 운동하는 길이라 그늘이 좋고
금곡역, 화명역, 수정역을 지나 삼거리에서 의성로 따라 이동후 만덕대로를 따른다
만덕 터널은 사람 통행은 불가하고 만덕고개로 오르는 임도길을 이용한다.
산에 오르다 보니 온몸에 용과 호랑이, 잉어를 문신한 40대 초반의 총각 두 분과 함께 이야기하며 오른다.
낙동 정맥길인 만덕고개로 올라와
읽어보시고
인증 담고
마치 로마 병사들의 신발처럼 슬리퍼 신고 걷는데 통풍이 잘되어 발 건강에 아주 좋고
등산화는 통풍이 잘 안되다 보니 물집이 잘 생기고 운동화는 어딘가 불편하다.
11일간 3kg이 빠졌고
좌측에 낮은 산이 동래읍성인듯하다
동래역으로 와서
이번 목적지인 동래구청 전체 761KM 지점 (8월 6일 오후 3시 무렵)
발이 많이 부었고 물집 때문에 등산화를 신지 못해서 대부분을 슬리퍼신고 진행한다.
이제 다시 방향을 대구로 향한다
동래읍성지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이며 대일 외교의 첫 관문격인 곳 하지만,
1592년 임진년 이른 아침 동래성 맞은편 황령산에서 봉수를 보던 봉수군이 왜적이 침입했다는 사실을 다급하게 보고 한다.
하루 전 부산진을 지키던 부산첨사 정발 장군은 왜군의 숫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고
경상 우수사 원균은 낙동강 하구까지 왔다가 대규모 왜적이 침략한 걸 알고 수군이 가지고 있던 70척의 판옥선을
모두 불태워 버린 후 김해로 도망갔고
그리고 경상 좌병사 육군 사령관 이각이 병사 몇 백 명을 데리고 동래성을 왔으나 허접한 군인 몇십 명만 남기고 도주한다
부산진 전투에서 정발 장군이 힘 없이 전사하고,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왜군 1만 8천 명은 곧바로 동래성 남문(현 동래시장)으로
쳐들어와 " 길 비키라"라며 목판에 글을 써 보내니
동래부사 송상현"택도 없다"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글로써 주고받았으나 서로간의 협상은 결렬되고
성안으로 민관군 3천 명이 있던 동래성 성외곽을 고니시 부대 1만 8천 명이 둘러싼다
6대 1의 전투
왜군은 귀신 형상을 한 이상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공격하고
2시간 동안 벌어진 치열했던 전투에서 동래부사 송상현과 민관군 3,000명이 죽었으나 왜군은 불과 100명 안팎만 죽었다고 한다.
고립무원의 땅인 동래성에서 전투는 이렇게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끝난다
잠시 동래성 시체가 드나들던 야문터와 동래성으로 가서 인증 담고 다시 만덕고개로 오른다.
오늘은 이곳 동래시장 인근에서 자고 새벽에 출발 할까 했지만 아직 10KM는 더 가야 70KM를 맞출것 같아 다시
만덕고개로 힘들게 올라와 부산 북구 덕천동에서 저녁으로 전복죽으로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내일은 청도까지 가고 그 다음날 오전에 대구 반월당에서 끝날것 같으니 길고 지루했던 후기도 이제 끝나간다

첫댓글 둘레길이나 국토종주길을 걸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등산화를 신고 걷는건
지양해야 될거 같습니다.
요즘 편하게 많이 신는 크록스신발은 신어야하나
라는 쓸데없는 걱정도 해봅니다.
오래 그리고 많이 걸으려면 발이 편해야하는데
만신창이가 된 방장님의 발을 보면
뭔가 애잔하기도하고 마음 한구석이
아련하기도 합니다.
방장님이 처음 이 길을 나섰을때 보현지맥길을 걸으면서
통화한거 기억나시죠.
이 더운 여름날에 끝내 그 길을 다 걸으셨군요.
그리고 부산왔으면 마무리하고 차타고 집에 가야지
뭘 또 걸어서 가십니까....ㅠㅠ
엄청시리 고생한 발바닥에게 영양보충 많이해 주시고 푹 쉬세요.
부산에서 기차타고 갈까 하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방법도 나쁘지 않았겠다 생각해봅니다.
이번에는 만덕 지맥길 걸으셨죠
만가지 덕을 쌓는다는곳을 지나셨으니 복 받았을 것 같습니다.
잘 읽으면서 내려가다가 2,000원에 빵터졌네요. ㅎㅎ
집에는 기차타고 가시지..걸어가다니
상상할 수 없는 마무리입니다~ ㅎ
살다보니 그런날도 있더군요
앞으로는 깡통을 하나 가지고 다녀야겠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이번 구간은 국토종주길 걸으며 봤던
눈에 익은 구간들도 좀 보입니다.
환장하겠다~라는 소리가 제 입에서도 절로 나오는 2천원.
앞으로 방장님 배낭에 빈 깡통 하나씩 매달고
다니신다면 아마 국토종주길 본전은 챙기실 수 있을 듯.
우리나라가 또 아직 정이 있는 사회라^^
십리간에 말이 다르고, 백리간에 풍속이 다르다라는 말에 맞지~맞지~해보며...
주전자 황진이와 팔조령 방독면 사내^^ 현대판 견우와 직녀 이야기에도 흐뭇해봅니다.
비오는 고된 길, 비 맞으며 리어카 끌고 가시던 할머니께
우비 하나 벗어 씌워드리는 모습이 그려지며...
그래. 그런 방장님이셨지...
존경스러움이... 역시 방장님.
참 본받고 배울게 많은 방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길을 걸으면 사방팔방 관찰을 하며 지나는데
그러다 보니 많은걸 보려고 노력 합니다.
이제 이길도 끝나고 다른길도 준비해보는데 어디가 좋을까
어디가 좋을까 하고 있습니다.
장문의 글 감사드립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실천은 고사하고 생각할 수조차 없는 길을 걸으시는 걸 보면서 ...
천오백 년 전, 구법 여행을 떠났던 밀교의 승려들을 떠올려봅니다.
혜초, 혜륜, 혜업, 현각, 원표 등은
텐샨을 넘고 인도를 횡단하며 카슈미르 지역 일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까지 다녀왔다지요.
法은 그리도 우리에게 멀리 있는 것인지.
방장님 정도는 걸어줘야 도법의 세계에 조금 편히 다가갈 수 있는 것인지.
후기를 읽다가 까무룩 잠에 들 정도로 허약한 나로서는
그저 눈만 꿈적거립니다. 먼 길 애쓰셨습니다.
ㅎㅎㅎ 살다보면 끝나는게 인생이고
걷다보면 끝나는게 길인데 다소 지루함만 있지만
거리가 차곡 차곡 쌓이면 지루하지 않는게 길입니다.
다음길을 준비해보며 이이선생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해볼까 합니다.
@배병만 어제는 천안 광덕산(699m)을 방향에 따라 세 번 오르기를 하러 갔다가
강당골을 지나는데 '강당사'라는 절이 있더군요.
이름도 이상하고 가람 배치도 새로운지라
집에 와서 찾아보니 여기가 원래 외암 이간의 '외암정사'였더군요.
외암 이간은 권상하의 문인으로 율곡으로부터 내려오는 학통으로 치자면
율곡의 증손쯤 됩니다.
방장님이 율곡에 대해 공부를 하신다 하시니
이간과 한원진 사이에 일어났던
조선 유학사 최대의 논쟁, '인물성동이론'에 대해서도 살펴보시지요.
다시 한번 더 신선이 되신것을 축하드립니다.
막걸리 한잔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번주 모임에서 보입시다
두번이나 지나면서 연통이라도 주시지 않고요
시원한 밥 한끼 대접 못해서 미안해요
앞으로 그라기 없기
귀한님 잘 지내시지요? 오랜만에 흔적 남기셨네요. 반가워요^^
@Jiri-깽이(신은경) 카페 자주 들락거리고 있은데
폰으로 글쓰기가 불편하여
읽기만.하고 나와요
더운데 고생.많아요
연락드리면 좋았는데 장군님께 잡히면 하루 일정이 일부 틀어질 것 같아서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그냥 지나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가면 꼭 연락 드리겠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고생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와~화분이 많네요.
우리집은 화분 있음 다들 관심을 안줘서 말라 죽어요.
예전엔 누명쓰면 딱히 항소할 방법도 없어 억울한 사람이 참 많았을 듯요.
청도 연화지는 끝이 안보일 정도로 넓으네요.
밀양에서 하루 한끼 식사도 많이 먹지 못했군요.
여름 산행중 아주 힘들때는 먹거리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던데 그래서인가 봅니다.
삼랑진역 2천원 웃어도 되는거지요~
그 분 사람을 잘못 봤지만 마음은 따뜻한 분이네요ㅎ
더운 여름 땡볕 도로 몇km걷기도 힘든데 수백 km를 걸어내시니 신선계의 경지여야 가능할 듯 합니다^^
화분에도 관심을 가지려고 하다보니
멀리 나가면 이 녀석들이 죽을까봐 늘 걱정입니다.
밥 먹는 시간도 아끼며 걷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누가 2천원을 머리맡에 두고 간것 같습니다.
살다 보니 별 일도 다 겪어 봅니다.ㅎㅎ
국토종주 진행하면서 많은 날은 걷노라면 주변의 퓽경과 많은사람들 그리고 기후의변화를 적응하면서 힘들고 고달픈 날들일텐데
방장님의 글에서는 세세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고뇌를 느끼리라 봅니다
목표가 가까워오니 마음은 편하게
부산에서 서울 왕복이면 부산에서
대구 복귀는 차로 오시지요
이번 극토종주는 더웠는데
고생하셨습니다
이번주 모임 준비하신다고 바쁘실텐데
나와 주셔서 다시한번 더 감사드립니다.
토요일날 조금 일찍 도착해서 준비하시는것들 도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글 감사드립니다.
입이떠억 벌어지네요~
수고하셨습니다
글 감사드리며 처서가 지났지만 더위는 물러날 기미가 없으니
마지막 더워 질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어느 시인 왈
지구위에 길이 있고
길위에 삶이 있다.
그 시절에 태어 났으면 봇짐장수로 갑부가 되고도 남았지 싶네요.
세수 안하고 턱수염만 더 길었어도 3000원
짜리인데 아깝습니다.
청도읍성 근처에 고모집(존암은 배병두)
설마 집안어른은 아니실테고
매년 화양에 벌초는 꼬박꼬박 하고 있지요.
(청도읍성 모습보니 반가워서)
볼품없는 혹서기에 고생많으셨습니다.
금년 여름은 연일 폭염 경보에 열대야인데
너무 고생이 많으십니다.
만이거러따아잉교
인자는고만하이소
육신이뭔죄잉갑쇼
그넘발빠닥이뉘요
~~~♡♡♡~~~
2부에서 충주와 문경새재 3관문, 작원관, 동래읍성도 그렇고 임진왜란 왜놈들이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약 300년이 지나 을사늑약으로 또 나라가 팔리고~
참나! 과거는 과거 일 뿐인건지? 이웃나라니 잘은 지내야 겠지만 아직까지 국민학교때 부터 일본놈들은 나뿐놈들이다.라고 쇠뇌교육을 받아서 그런건지 옆나라 일본이 아직은 멀게 느껴지네요! 아직 가본적은 없지만~
요즘은 현금을 잘 들고 다니지 않아 주머니에 2000원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까 본 1000원는 줍지 않은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암튼 거리가 긴 만큼 후기도 길지만 기다려지는 후기입니다. 마지막 남았는데 아쉽습니다.
제가 아쉽다고 방장님 발바닥이 골빙 들면 안되니...ㅎㅎ
이 무더위에도 길 위에 항상 우뚝 서 있는 거목에 경의 표합니다.
안녕하십니까.^민규입니다!
군대에서 방장님의 후기글을
읽으니 다시금 장거리 걷기의 DNA가 근질거립니다..🤣
무사완주 축하의 댓글 남깁니다.!!!
로마군의 전투화 칼리가입니다.
여름철 포장도로에선 샌들도 괜찮을 듯. 근데 샌들은 발뒤꿈치나 발등이 잘 쓸려요.
https://youtu.be/gbkFZNnkcgQ?si=Xm3K4LnlByP9HDh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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