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제1년 8월 10일(2) 룻기 4장 찬송가 94장(새찬송가 96장)
01.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서 거기 앉았더니 마침 보아스의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그가 와서 앉으매
02. 보아스가 성읍 장로 십 인을 청하여 가로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그들이 앉으매
0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므로
04.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그가 가로되 내가 무르리라
05. 보아스가 가로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
06.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07. 옛적 이스라엘 중에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의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08.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 신을 벗는지라
0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
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12.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16.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18.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보아스와 룻의 결혼과 다윗 가계의 형성”
룻의 청혼을 받은 보아스는 신속하면서도 신중하게 일을 추진합니다. 먼저 기업 무를 책임이 일차적으로 있는 나오미의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룻과 결혼할 의사가 있는가를 확인하고, 그가 그 일을 하기를 거절하므로 보아스 자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되었음을 공인받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보아스는 모든 백성들의 축복을 받으며 룻과 결혼을 하고 그들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 나오미의 양자로 입양이 됩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들 오벳은 장차 이스라엘의 가장 이상적인 왕이 될 다윗의 조부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사사 시대의 암울하고 혼란한 시대가 종식되고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오게 되는 것은 이런 가계적 배경을 갖고 있는 다윗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인애로서, 그런 하나님의 인애하심이 베풀어지는 과정에서는 이처럼 룻과 보아스가 행한 인애가 그 매개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성경 기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업 무를 자의 책임 회피(1-6절)
【1-2절】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 앉아서 나오미 가정의 기업을 무를 자를 만납니다. 성문에 앉는다는 것은 보아스가 그 성의 장로임을 말해주며, 또 성문에서 그를 만났다는 것은 죽은 엘리멜렉의 기업을 물러주는 문제가 공식적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기업을 무를 책임이 있는 친족의 이름이 그저 “아무여”라고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3-6절】그 기업 무를 자는 처음에는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랬다가 그 자부 룻이 살아있으므로 그녀와 결혼을 하여 엘리멜렉 가문의 대를 잇게 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기업 무르는 일을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기업을 무르는 일에 자기의 돈이 들어도, 그 땅은 자기 땅이 되지 못하고 룻이 낳은 아이와 나오미의 소유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기 나오는 기업 무를 자는 실리적 계산으로 친족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는 희생을 통한 나눔의 정신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보아스와 룻의 결혼과 에필로그로서의 족보(7-22절)
【7-8절】기업 무를 자가 신발을 벗습니다. 기업을 물러줘야 할 자가 그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 사람의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어 모욕하고 그 집안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고 불러 조롱하도록 되어 있습니다(신 25:5-10). 그런데 여기서는 이 사람이 직접 신을 벗고 있습니다.
【9-10절】사실 율법에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기업을 물러주지 않았을 때에는 그 다음으로 가까운 친척이 물러줘야 한다는 규정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자기의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율법에서 직접적으로 규정하지도 않은 은혜를 룻과 나오미에게 베풀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만났을 때부터 자기가 도의적으로 마땅히 해야 할 수준이나 율법을 지키는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수준을 뛰어넘는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다.
【11-12절】그곳에 모여있던 백성들과 장로들이 룻과 보아스를 축복합니다. 이 축복에서 언급되는 여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며, 결국은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13-17절】마침내 보아스와 룻이 결혼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나오미의 아들로 입양이 되어 죽은 남편인 엘리멜렉의 대를 잇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나오미는 잃었던 기업을 되찾게 되었으며, 아들들을 잃었던 나오미의 품에 다시 아들이 안겼습니다. 이는 텅 빈 나오미의 삶을 가득 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절정에 이른 것으로서, 이 손길은 보아스와 룻의 인애를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상실하고 절망 가운데 있던 시어머니를 봉양하기로 결단하고 이스라엘과 여호와께로 온 룻은 장차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될 뿐 아니라, 인류의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았으며, 연약한 이방 여인과 몰락한 친족의 가정을 위해 자기의 재산을 희생하면서 기업 무를 자가 되어 준 보아스 역시 영광스러운 가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 묵상을 돕기 위한 질문
1. 기업 무를 책임이 있는 친족은 왜 룻과의 결혼을 거부합니까?
2. 룻기의 마지막 족보가 말해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기도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연약한 자들을 세워주며 베푸는 자가 되게 하소서!”
◈믿음의 글◈ “아무여!”
룻기에서 원래 나오미 가정의 기업을 되찾아 줄 의무가 있었던 자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보아스가 그를 부를 때 “아무여”라고 부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4:1). 이처럼 그의 이름을 생략한 것은 아마도 룻기 저자의 의도적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름이란 존재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구속 계시의 책인 성경에서 이처럼 의도적으로 그의 이름을 ‘무명의 아무개’로 처리한 것은 그가 행한 처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합당치 못하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무가치한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실리적인 계산을 해보고 자기에게 이득이 될 것이 없고 경제적으로 손해 볼 것밖에 없다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나오미 가정의 기업을 무르는 일과 룻과 결혼하는 일을 포기하고 보아스에게 그 권리를 양도했던 것으로서, 어떻게 보면 그는 계산이 빠른 영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동체나 형제들의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한마디로 인애를 모르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는 “아무여”로 불리는 무명의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 사도는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고 질문합니다(요일 3:16-17).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속에 생명이 없다는 것이요, 곧 거듭나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이름은 하늘 생명책에도 기록이 되어있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