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더럽히지만 말라]
김홍근 교수
석가모니는 ‘일체중생이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했으며, 조사(祖師)들은 ‘누구나 본래부처’라고 했다. 모든 존재의 본래면목은 절대인 마음인데, 선불교(禪佛敎)에서는 이것을 ‘바른 견해[正見]’라 한다. 꺠달은 사람에게는 일체가 ‘한마음의 조화로운 세계[一心法界]’로 보인다. 마치 파도가 바다에서 일어났다 바다로 돌아가듯,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現狀)은 그 바탕인 본심(本心)에서 일어났다 본심(本心)으로 돌아간다.
「본래 있는 것이 지금도 있다.[本有今有] -중략- 도(道)는 닦을 필요가 없다.[道不用修] 다만 더럽히지만 말라.[但莫汚染] 무엇이 더럽히는 것인가? 마음을 일으켜 분별하고 취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더럽히는 것이다. 지금 즉시 도(道)를 알고자 하는가? 평상심이 도다.[平常心是道] 평상심이란 어떤 것인가? 조작하지 않고, 옳다 그러다 하지 않으며, 취하거나 버리지 않고, 허무주의나 영원주의에 빠지지 않고, 범부나 성인을 따지지 않는 것이 평상심(平常心)이다.」 - 마조선사
물은 ‘본래 있는 것’이고, 물결은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전자를 ‘진여(眞如)라 하고, 후자를 생멸(生滅)이라 한다. 진여 쪽에서 보면 생멸은 실체가 없으므로 환영(幻影)과 같은 것이다. 바다의 입장에서 보면 파도는 끊임없이 변하는 임시 모습인 것과 같다. 또한 생멸 쪽에서 보면 진여는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생멸이 생겼다 돌아가는 모체와 같다. 마치 파도의 입장에서 바다가 고향이자 ’참나‘인 것과 같다.
바다 같은 본마음은 무한하여 나지도 죽지도 않고[不生不滅],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不增不減],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다.[不咎不淨] 만물의 근거가 되면서도 만물에 물들지 않아 물에 비친 달[水月]처럼 자유롭다. 만물은 천차만별이지만 그 본질인 마음은 하나이다. 마치 물에 비친 달은 수없이 많지만, 하늘의 달은 하나뿐인 것과 같다.[月印千江] 삼라만상은 무한히 많지만, 그것을 담고 있는 허공은 하나뿐인 것과 같다.
불교에서 물을 ’체(體)‘라고 하고 물결을 ’용(用)‘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 ’체‘와 ’용‘이 불이(不二)로 ’한마음(一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마조선사는 그 ’본래 있는 것‘이 ’지금도 있다‘고 한다. 한마음은 언제나 여여(如如)하며 변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태어난 적이 없으니 죽을 것도 없다. 즉 이러한 ‘체용불이(體用不二)의 중도실상(中道實相)’이 단순히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사는 지금 여기 바로 눈앞에서 마음이 생생히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面前一絲 長時無間] 눈 앞에 체용불이의 한마음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여기에서 이것이 분명한 사람에게는 삶이 이대로 완전할 뿐이다.
매 순간이 그대로 영원한 현재[長今]이며, 이 공간이 그대로 크디큰[摩訶] 마음공간이다. 일거수일투족을 움직이는 ‘이것[當體]’이 그대로 절대마음이다. 따라서 마음을 찾아 수헹이나 좌선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스승 마조의 법문을 듣는 제자들은 이것을 아직 체득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명(無明)에 가려 있기 때문이다. 무명은 분별심(分別心)이며, 그것이 오랜 습관이 되어 갈애(渴愛)를 일으키고 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부처’나 ‘도’를 찾아서 밖으로 치달리고 있다. 이것을 어리석게 구하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치구심(馳求心)’이라 한다. 즉 마음이 마치 말처럼 내달리기만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으며,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겠는가. 이때는 달릴수록 오히려 목표와는 멀어지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가 찾는 부처나 도는 바로 자기마음이기 때문이다. 찾는 주체가 곧 답인데, 그 답을 가지고 답을 찾고 있으니 그래서는 영원히 답을 찾을 수 없다.
일단 그쳐야 한다. 방향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이드가 중요한 것이다. 참된 부처는 마음이요, 마음은 절대로서 전체이다. 따라서 찾아야 한다는 그 생각을 쉬게 하고 분별의 습관을 내려놓으면 저절로 생각을 쉬게 하고 분별의 습관을 내려놓으면 저절로 생각이 끊어진다. 생각만 끊으지면 이대로 전체가 하나의 마음으로 드러난다.
눈이 밝은 선지식이라면 정곡을 찔러 일러주지 않을 수 없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더럼히지만 말라!” 자기 마음이 부처이므로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그대로 부처이다. 하지만 중생은 천식을 앓듯이 쉬지 않고 마음을 일으켜 대상을 분별하고, 취사선택하고 집착하고, 일희일비하며 괴로워한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공연히 자기 마음을 더럽힌다. 그래서 심심한 천국보다 재미있는 지옥을 더 좋아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나 보다.
‘깨닫는다’와 ‘깬다’의 어원은 서로 같다. 둘 다 틀 자체를 부수는 데 있다. 가장 완전한 탈출은 꿈에서 깨는 것으로, 참나가 ‘체용불이(體用不二)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보는[徹見] 데 있다. 그렇게 하면 귀에 대고 속삭이는 에고의 ‘현존의 형이상학’⓵에 더 이상 속지 않는다. 무명에 속지 않고 공연히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바로 ‘평상심(平常心)’인데, 이는 병이 없이 무탈하다는 뜻이다.
한 율사(律師)가 대주 스님에게 물었다.
“ 스님도 도를 닦기 위해 노력하십니까?”
“ 그래,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자지.”
“ 그거야 모든 사람이 다 하는 일 아닙니까?”
“그렇지 않네. 사람들은 밥을 먹으면서 온갖 잡생각을 하고, 잠자면서 쓸데없는 꿈을 꾸지.”
평상심(平常心)이란 무탈하여 잡념이나 꿈이 없는 백 퍼센트의 건강한 마음이다. 도(道)는 공기처럼 당연하며 그저 이미 완벽하게 주어져 있다. 그래야 절대(絶對)이지 않겠는가? 무언가 특별한 것은 절대(絶對)가 될 수 없다. 지극히 평범힌 것이 진정 소중하다.
임제 스님의 아래의 말이 폐부를 찌른다.
「여러분! 제방(諸方)에서는 ‘수행해야 할 도(道)가 있으며, 깨달아 증득해야 할 법(法)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대체 그대들은 어떤 법(法)을 깨닫고, 어떤 도(道)를 닦는다고 하는가? 그대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평상심이 무엇이 부족하며, 어떤 곳을 보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 『임제록』
‘무엇이 부족하냐[欠少甚麽(흠소삼마)]?’
선(禪)은 절대적인 마음이고, 선사(禪師)는 이 ‘공개된 비밀’이 눈앞에 명백히 드러나 있는 사람이다. 온 세상에 절대 하나만 있는데 호들갑을 떨 일이 있을까. 그저 아무 일 없고, 그러면서도 하는 일마다 도리에 정확하게 맞아 돌아가는 것이다.[無爲而無不爲]
평상심(平常心)은 쉽다면 매우 쉽고 당연하지만, 어렵다면 까마득하게 어렵다. 가만히만 있으면 저절로 평상심이지만, 보통 사람들이 일 없이 무사하기란 어렵다. 끊임없이 어떤 일을 도모하려고만 한다.
절대(絶對)를 알고 절대(絶對)가 되어 상대(相對)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살 것인가, 아니면 상대 세계 안에서 쳇바퀴 도는 삶을 살 것인가. 선택은 각자의 목이다.
* 주⓵ ‘현존의 형이상학’- 사회가 합의하여 형이상학의 자리에 어떤 가치를 추대하면 그때부터 구성원은 그 가치를 자신의 현존에서 구현하기 위해 몰두한다. 실존철학에서는 이것을 ‘현존의 형이상학’이라고 불렀다. 문명사는 ‘현존의 형이상학’ 실현의 역사이다.
인간은 현존의 형이상학의 본질이 탐심(貪心)이란 것을 모르고 이상주의(理想主義)에 빠진다. 가장 가까운 예로 정치적 이념에 목숨을 건 혁명가나 종교적 이념에 목숨을 건 근본주의자들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이상(理想)을 구현하는 ‘혁명’이나 ‘종교전쟁’애 목숨을 건다.
*‘인생교과서 02 『부처』’ [플라톤 아카데미 총서, 21세기 북스 출판, 조성택 교수 + 미산 스님 + 김홍근 교수 공저] 중에서 김홍근 교수의 글(274P~280p)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