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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슬 옹 *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한글교양》저자 |
한강문학 제36호 · 2024년 가을호 -권두특집
외솔 고향에서 시조로 길어 올린 소담스러운 이야기
-시조 미학의 극치, 김정수1)* 시조
시조로 외솔 정신을 이어가는 어느 시인 이야기
이제 울산시는 한글 도시로 우뚝 섰다. 매해 한글날 특별 행사 규모가 문체부 전체 한글 예산보다도 많다. 〈세종국어문화원〉은 벌써 6회째 한글날 기념 외솔 최현배 선생 기리기 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학술대회 긴 시간 동안 단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다소곳이 앉아 발표를 경청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울산이 낳은 시조 시인 ‘김정수’였다. 시조시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서였을까? 단아한 자태가, 수수하면서도 아름다운 시조 그 자체였다.
외솔 최현배는 워낙 큰 국어학자, 한글 운동가이다 보니 아주 빼어난 시조 작가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외솔이 남긴 〈한힌샘 스승님을 생각함〉 시조는 12수, 〈나날의 살이〉는 4수, 〈사철〉은 8수, 〈공부〉는 세 수, 〈해방〉은 한 수로 모두 28수나 된다. 대표 연시 ‘한힌샘 스승님을 생각함 - 가신지 열다섯 해에’를 읽노라면 한글학자가 아니라 시조 시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한힌샘’은 ‘한흰샘’의 옛날 표기) 외솔 기념관은 2023년에 재개관식을 열었다. 2010년 개관한 지 13년 만이다. 재개관식에 참석한 김 시인의 작품을 읽어보면 울산에서 외솔 정신으로 살아가는 그의 정신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흰 장갑 손에 끼고 오색 끈 자르던 날
빛날 가위 그 너머로 한 생각 깊어졌다
울산은 미리 알았을까 소년 외솔 재목 됨을
은회색 두루마기 단정하게 입으신
저 모습 따사로워 그 앞에 멈춰 서서
얼말글 어울림 뜻을 이제서야 알게 되어
응달진 곳 살펴 가며 나무 심어 키워낸
구름 속 뭉실뭉실 피어오른 눈부신 빛
당신이 살다 간 그 땅, 솔 한그루 섰습니다.
- 김 정수 작 〈외솔기념관 재 개관식〉 전 문
얼말글 정신을 오로지 한결같이 이어가겠다는 올곧은 정신으로 최현배는 ‘외솔’이란 호로 다짐을 거듭했다. 외솔의 외솔 정신을 시인은 ‘당신이 살다 간 그 땅, 솔 한그루 섰습니다’라고 외솔다움의 문장으로 갈무리를 하고 있다.
내용 여부를 떠나 시조를 꾸준히 이어간다는 것 자체가 외솔다움이다. 그래서 〈외솔 기억하다〉라는 작품이 나왔을 것이다.
이 계절 촉촉하게 봄비가 다녀간 뒤
벚꽃 망울 타닥타닥 하얗게 피워놓고
방문객 반갑게 맞아 향기까지 전한다
동상 앞 고개 숙여 잠시 머문 두 어르신
계단에 마주 앉아 옛 추억 더듬는다
쪼매만 자랑해 보자 여기 놀던 마당 아이가
근동 인심 좋기로 외솔 집 소문났제
뭐라카노 병영하면 큰 사람 태어난 것 맞다
짚었던 지팡이 흔들며 울산 퍼뜩 놀러 오소
- 김정수 작 〈외솔 기 억하다〉 전 문
울산시 병영이 낳은 큰 인물을 노래하는 시조의 언어 물결은 소담스럽다. 그러나 나직하니 속삭이듯 던지는 시조 한 구절, ‘울산 퍼뜩 놀러 오소’에, 퍼뜩 놀러 가고 싶은 속내가 물결친다.
〈한글새소식〉(613호, 2023. 9월호)에는 〈입말 글말 듣다〉라는 김 시인의 작품이 소담스레 실려 있다.
상현달 저 혼자서 영월盈月길 가다 말고
슬며시 되돌아와 어둠을 딛고서서
우뚝 선 한 그루 솔에 궁금한 게 있나 봐
그림자 손을 잡고 모퉁이 비켜서면
입꼬리 살짝 올려 소곤소곤 온아하게
아무리 두드러져도 넘치거나 모자람 없다
소리는 하나 우주 자음모음 훈민정음
이토록 과거 현재 미래로 열어가는
입체적 한글 돋움체 어울림의 미학이다.
- 김정수 작 〈입말 글 말 듣 다〉 전 문
‘입말’은 입으로 말, ‘글말’은 글로 말, ‘입말, 글말’, 이렇게 쉬운 말을 지식인들은 ‘구어, 문어’라고 뇌까리지만 금방 다가오는 말은 역시 토박이말이다. 소곤소곤 소곤대는 말에도 우주가 담겨 있다. 그 말을 담은 문자 또한 우주다.
필자는 ‘입체적 한글 돋움체 어울림의 미학이다’라는 종장 글귀에, 한글학자로서 외솔의 뜻을 잇는 학자로서 온몸이 우주로 떠올랐다.
흔히 한글은 과학적인 문자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과학의 문자이기도 하고 철학의 문자이기도 하다. 그냥 우주 문자라고 해두자. 더욱 중요한 것은 과학적이면서 철학적인 문자이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 과학과 철학의 공통점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성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세종이 한글에 그런 보편 원리를 부여한 것은 ‘하늘(우주)과 사람을 하나’로 보는 사람다움의 가치를 위해서였고 실제 그런 문자가 되었다. 그러한 보편적 원리는 소리와 문자에 동시에 적용되어 그야말로 소리가 문자가 되고 문자가 소리가 되는 소리문자, 음소문자의 이상을 실현하게 되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서〉의 첫 문장은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천지자연의 문자가 있다’ 이다. 곧 천지자연의 이치인 천지인 삼태극, 음양오행 원리가 소리와 문자 모두에 담겨 있다고 보았다. 실제 소리 이치를 따져 거기에 맞는 문자를 만들었으니 과학의 문자가 되었고 철학의 문자도 되었다.
한글은 자음에는 작은 우주(몸)를 담았고 모음에는 거대한 우주를 담았다. 그래서 자음은 숨의 원리에 따라 발음기관 또는 발음하는 모양을 본떠 만들었고, 모음은 숨기운의 바탕인 천지자연의 우주를 담아 하늘과 땅과 사람을 본떴다. ‘하늘, 땅, 사람’은 삼재 또는 삼태극으로 흔히 음양오행 동양 철학 원리라고 한다.
숨은 허파에서 비롯된다. ‘허-’하면 들숨, ‘파-’하면 날숨 그래서 ‘허파’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숨을 쉬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말을 한다. 세종은 바로 말소리의 이러한 가장 근본 이치를 관찰하고 그것을 반영한 문자를 만들었다. 허파에서 숨이 나와 목구멍을 거쳐 어금니, 혀와 이를 거쳐 입술을 통해 숨이 나오는데, 그 차례대로 상형 기본자 ‘ㅇㄱㄴㅅㅁ’다섯 자를 만들었다. 거기에 소리가 더 세지는 원리에 따라 가획자 9자를 만들고 가획 원리는 같지만, 소리가 더 세지는 것이 아닌 특별가획자 이른바 이체자인 옛이응, 리을, 반시옷을 만들었다.
이렇게 자음자는 말소리를 내는 발음기관의 모양과 그 움직임을 정확히 관찰하고 분석하여 만든 과학의 결과물이다.
모음 기본 상형자는 ‘하늘(•), 땅(ㅡ), 사람(ㅣ)’의 모양을 본떴다. •는 양성, ㅡ는 음성, ㅣ는 양음(중성)을 뜻하는데, 이것은 양성(밝은 소리)은 양성끼리, 음성(어두운 소리)은 음성끼리 어울리는 우리말의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한글이 뛰어난 것은 한글은 과학적이면서 실용적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자음과 모음이 발음 나는 방식이 다르므로 전혀 다른 모양으로 설계하되 점과 원과 직선만으로 디자인했다.
자음은 발음기관 어딘가에 닿으면서 나오기 때문에 닿는 곳의 모양이나 상태를 본떠 만들었다. 그래서 입 모양, 이 모양, 목구멍 모양을 본떠 각각 ‘ㅁ ㅅ ㅇ’를 만들고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ㄴ’,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ㄱ’ 다섯 자를 만들었다. 다섯 자를 바탕으로 같은 자리에 나되 소리가 다른 글자들은 획을 더하는 방식으로 만드니 자음 전체 짜임새가 잘 짜이게 되었다.
모음은 입 모양, 혀 모양, 목구멍 상태 등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특정 발음기관을 본뜰 수 없었고 그래서 세종은 일단 하늘과 땅과 사람들 본뜬 ‘·, ㅡ, ㅣ’를 만든 다음 합성하는 방식으로 글자를 확장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을 본뜬 것 자체가 과학은 아니지만, 자음자와 다른 방식으로 만든 것 자체는 매우 합리적이었다. 천지인 기본 세 자를 합쳐 단모음 ‘ㅗ, ㅏ, ㅜ, ㅓ’, 이중모음 ‘ㅛ, ㅑ, ㅠ, ㅕ’를 만들었는데 이러한 여덟 자에는 우리말의 특성이 그대로 담기게 했다. 원래 우리말에는 음양의 기운이 있어 그것을 반영하여 양성모음(15세기에) 점을 위와 바깥쪽으로 합성했고 ‘ㅗㅛㅏㅑ’와 같은 음성모음은 아래와 안쪽으로 점을 찍어 ‘ㅜㅠㅓㅕ’를 만들었다. 자음 모음 모두 간결하면서도 뚜렷하게 구별되어 읽기 쉽고 쓰기 쉬운 글자가 되었다. 그래서 ‘ㅎ’을 고정한 가운데
모음만 90도씩 틀면 ‘호하후허’가 생성된다. ‘호호후후하하허허’ 웃어봄직하지 않은가. 이렇게 한글이 과학적으로 짜여 있다 보니 ‘공꽁콩, 불뿔풀, 정쩡청’와 같이 소리와 글자가 짜임새 있게 대응되는 말과 글이 연출된다. 기계가 소리를 알아듣는 인공지능 등에서도 한글은 여지없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김 시인은 “입체적 한글 돋움체 어울림”이라고 했듯이 한글은 어울림의 문자이다. 우주를 품은 문자, 그 바탕인 우리말의 멋까지를 잘 담았다.
조용히 드러나는 지역 토박이말들
서울말도 서울 방언이지만 우쭐대는 표준어에 밀려난 방언은 더욱 방언답고 사투리답다. 그렇다고 대놓고 지역 방언을 쓸 수는 없지만, 문학에서의 방언 사용은 굴레가 없다. 그래서일까. 많은 어휘가 나오지는 않지만, 시인이 사용한 방언의 숨결은 고즈넉하면서도 힘이 세다.
불새 떼 모여들어 저녁밥 먹고 간 뒤
말없이 바라보며 저만치 돌섬에서
처용은 감감무소식 소금쩍에 바람만
어둠을 득음하고 먼 길 온 둥근달이
처용암 부추기어 대낮처럼 밝혀놓고
빈 배에 파도를 불러 춤사위도 후끈하다.
- 김정수 작 〈청라언덕 오 르며〉 전문
‘불새’는 노을의 방언이다. 노을이라는 말을 썼다고 하면 이런 시조는 아예 나올 꿈도 못 꾸었으리라. 노을 무리는 정말 불새 떼같다. 뜨겁게 사라져 갈 새라서 아름다울수록 처연한 느낌을 줄까? 노을은 사라져가지만, 다시 나타내기에 그나마 무덤덤한 느낌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울산은 처용의 고장이다. 아니 울산의 상징이다. 대표적인 공업 도시이지만 처용암 바다 풍경은 늘 평화롭다. 세찬 파도가 밀려와도 처용신 때문인지 거대한 노랫가락으로 들린다. 처용은 신라말 49대 헌강왕 때 울산 개운포 앞바다의 처용암에서 나타난 동해 용의 아들로 신라인들에게 호국 사상을 심어주고 무언가 힘을 불어넣어 주는 정신적 지주로 등장한 인물이다. 처용가는 처용이 당시 나라 최고의 적이라 할 수 있는 역병을 용서와 관용으로 물리치는 주인공으로 사회 병폐를 관용과 배려와 화합으로 풀어가는 인물이다. 둥근달 아래 처용암의 파도를 ‘춤사위’로 묘사
한 시인의 탁월한 묘사력에 무릎을 절로 치게 된다.
‘처용가’는 우리의 대표적인 고대 문학작품이다. 그런 ‘처용’의 고장이라 그런지 문인인 ‘오영수’ 이외에도 동요 작가 서덕출, 최현배, 김어수, 박상지, 박종우, 송석하, 이기원 등의 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나는 그 반열에 당연히 김정수 시조 시인을 넣어야 한다고 감히 처용가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홍합을 지역 방언으로는 ‘섭’이라 한다. 홍합 해장국을 끓이는 이웃에 대한 시선이 얼큰하다. 화상 사고는 안쓰럽지만 직접 얼큰한 섭국을 먹는 울산 사람들이 부럽게 다가온다. 시인의 눈에는 일상의 모습이 담담하게 다가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인의 온갖 감정이 녹아 있다.
때로는 매운 속을 풀어야 편안하지
바쁜 손 뻔질나게 도마소리 요란하다
선택한 어느 길에도 평범하긴 쉽지 않아
가난도 비단 가난 칠성이 큰집 아재
줄잡고 간당간당 처음 섭을 따던 날
갯바위 아침 풍경이 아슴아슴 비친다
얼큰한 맛에 끌려 조심성이 부족해
앗 뜨거 미끄러져 놓치지 않으려다
김서린 국그릇 세례 삼도 화상 아니야.
- 김정수 작 〈섭국을 끓 이다〉 전 문
울산 하면 역시 태화강이다. 태화강은 울산시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 지르면서 동해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울산의 두드러진 강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태화동에 세웠다는 태화사太和寺 앞으로 흐르기 때문에 ‘태화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영축산에 있는 ‘통도사’도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통도사의 ‘자장 매화’는 홍매화 가운데서도 일품이다. 자장율사의 덕이 서려서일까. 반구대 암각화 답사를 위해 태화강으로 가는 긴 길을 걸은적이 있다. ‘베리끝’은 태화강 상류 버룻길 방언이다. 자장 매화의 향기와 빛깔이 미치는 곳이 어디 영축산뿐이랴. 태화강을 돌고 돌아 뭇 중생들에게 봄소식을 알렸을 터이다.
잔설 속 맑은 햇살 비추는 금강도량
묻어둔 가지마다 눈 틔운 씨앗 불佛꽃
통도사 영각 앞마당 터트린다 순간포착
소란할까 조심스레 사붓한 걸음으로
자장율사 친견한 듯 가까이 다가서자
향기는 범종소리 타고 영축산을 다 덮네
선잠 깬 산 도랑물 봄소식 받아 읽고
베리 끝 휘돌아와 태화강 잠시 쉴 때
십리 대 마디마디 열어 피리 소리 강물 소리.
- 김정수 작 〈자장매화〉 전 문
시조가 본래 군더더기 없는 문학이지만 김 시인의 시조는 많은 이야기와 생각과 느낌을 담으면서도 군더더기가 없다. 그래서 방언도 나즈녁하게 그 색깔을 드러낸다.
말하듯 포근한 시조의 운치
김 시인의 시조는 이웃집 아낙이 말을 건네듯 살포시 말의 물결이 밀려온다.
“밤하늘 저 별 하나 너라 믿고 싶어서/ 잠깐씩 조금 세게 젖은 눈 반짝이는/ 굿바이 밤길 조심해 돌부리에 넘어질라” 〈별이 된 너〉 3연
별이 된 너에 애틋한 감정이 절절하게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그 감정을 더 절절해 보인다. ‘돌부리에 넘어질라’ 걱정하고 있지만 이미 젖은 눈은 돌부리에 넘어져도 상관없다는 듯 넌지시 방임형 어미(-ㄹ라)로 끝을 맺는다.
그 어떤 갑갑함도 너스레 떨다보면
특별할 것 하나 없어 예사롭고 수월해
센 고집 내세우지 말기 처방대로 믿고서
까마득 놓쳐버릴 비문법 글귀 따위
생뚱맞아 지적하면 중립에 삭둑 잘려
뜨겁게 오르는 온도 왼쪽으로 기울지
벗어난 경계서도 그러나 중요치 않아
비로소 돌아온 길 여백을 채운 자리
바람이 나답게 살기, 건네는 말 정겹다.
- 김정수 작 〈하루, 띄 다〉 전 문
시인은 왜 ‘하루 띄다’ 시조를 표제작으로 정했을까? 하루하루의 일상이 예사로와도 시인의 눈에는 하루하루의 일상이 늘 긴장감 넘치는 사건이 될 수 있다. 시인에게 이 시조를 쓰게 된 이유를 살짝 물어보니. “산개울에 누군가 놓아둔 돌다리를 딛고 건너다 개울 가운데쯤에서 돌 하나를 딛는 순간 흔들거리다가 오른쪽으로 막돌이 기울어 그만 저는 왼쪽으로 물에 풍덩 빠졌지만, 얕은 물이라서 사고는 없었고, 더 건널 수 없어 되돌아와 물에 젖은 신발을 가을바람 불어오는 볕 잘 든 나뭇가지에 걸어 놓은 그런 광경”이라고 그림 그리듯 일상을 설명했다.
김 시인은 일상으로 파묻혀갈 하루하루를 눈에 띄게 또 다른 생명을 불어넣는 마술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조 미학의 극치 한국어 묘미
솔직히 시인은 많다. 그만큼 시를 즐기고 사랑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니 무척 반길 일이다. 그러나 시조 시인은 드물다. 예전에는 국어 교과서에 옛시조가 솔찮이 실려 있어 흥얼흥얼 암기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지금은 교과서에서조차 시조를 만나기 힘들 정도로 사라져가는 문학이 되었다. 이런 실정이라 오롯이 시조로 시흥을 풀어내는 김 시인이 천연기념물처럼 반갑다.
시조의 대중화는 어려운 것인가? 대중화할 수 있다. 김 시인과 같은 시조 시인을 많이 배출해 시조를 즐겨 읽는 이와 창작하는 이들이 많아지게 하면 된다.
시조의 가장 큰 묘미는 운율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정해져 있는 만큼 표현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정해진 운율 덕에 일반 자유시와 다른 격조 높은 묘미를 느낄 수 있다. 김 시인의 시조는 시조 미학의 극치다. 왜그런가 보자.
“꼬리표 달고 오는 변덕쟁이 삼월은/ 내치다 들이치다 마음이 가는 대로/ 꽃망울 하하 웃는 꼴 못 보겠다 저 시샘”
-〈봄을 캐다〉 1연
일상 대화인 듯하면서도 3, 4조 운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마지막 행 첫 ‘꽃망울 하하’는 자연스러우면서도 5자의 묘미가 하하 웃음 짓게 한다.
“서문시장 원단가게 당당한 쉰 살 그녀/ 제 짝지 자로 재며 아직 찾는 중이란다/ 세상을 다 재고서도 배필 하나 못 찾는” -〈노처녀 사설〉 전문
종장의 “세상을 다 재고서도 배필 하나 못 찾는”은 일반 문장 같은 줄임표가 없지만 생략된 마지막 표현이 노처녀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나는 묘미가 있다.
“조금 전 헤어졌던 낮달 너를 또 만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늘쩡늘쩡 걸으며/ 담쟁이 푸른 수인사 헤어짐이 아쉬워” -〈청라언덕 오르며〉 3연
이 시조에서는 ‘늘쩡늘쩡’ 곧 느슨한 태도로 느리게 쉬엄쉬엄 행동하는 모양을 뜻하는 흉내말이 앞서거나 뒤서거니 하는 풍경을 마치 그런 발자국 소리가 그려지듯 시조의 흐름을 확 드러내 주고 있다.
외솔은 빼어난 시조 시인이지만 워낙 큰 봉우리의 학자라 그런지 시조 작품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정수 시인의 시조를 보노라면 시조 시인으로서의 외솔은 김정수 시인으로 다시 태어난 듯싶다. 울산이 한글 도시를 지향하지만, 한글에 담길 값진 말이 없으면 어찌 한글이 빛이 날까? 김정수 시인의 소담스러운 말이 한글로 빛이 나듯, 울산은 시조 문학의 본고장이 되어야 한다.
입에 착착 달라붙는 언어 마술, 한국어 마술, 삼태극의 조화
시조는 15세기 한글 창제 이전에 생긴 문학이다. 시조창 노래로도 많이 불렸다. 한글 집이 없었을 때는 허공을 맴돌다가 한글이라는 글집이 생기면서 글말로 적히고 다시 더 널리 노래로 불렸다.
4음보 3장 가락 속에 한국어가 담기다 보니 한국어 형식미가 새롭게 드러난다. 김 시인의 시조는 한국어 마술을 부리듯 더욱 그런 점이 도드라진다.
“동박새 이른 봄날 노란 문장 불 지펴/ 모락모락 김이 오른 고봉 담은 차조밥/ 다람쥐 제 꼬리 다듬다 군침 꿀꺽 눈 반짝” -〈생강꽃 눈뜨다〉 전문
말하듯 속삭이면서도 간결한 명사 단위 나열로 표현의 묘미를 극대화하고 있다. 그야말로 읽을수록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뜻의 펼침이 끝나지않은 듯한 문장의 묘미로 번져 끝내 뜻이 입에서 마음으로 날아오른다.
스스로 방 깊숙이 갇혀도 보고 싶다
철없는 햇볕보다 살붙이 바위 찾아
산기슭 잘박한 등을 평평하게 다져서
설계한 맞춤형 집 수놓은 융단까지
함께할 이웃과도 소소한 정을 나눌
계곡물 돌돌 길따라 유기적인 이야깃감
막힘도 소통으로 실실이 풀어 가면
말갛게 씨앗 톡톡 싹을 틔워 이어져
통점을 건드린 음계 뿌리내린 꽃자리다.
- 김정수 작 〈이끼를 읽 다〉 전 문
김 시인의 시조는 단시조에서 더욱 빛나는 듯하지만 아주 길지 않은 연시조는 연시조대로 리듬과 말결이 살아 있다. ‘이끼를 읽다’는 초장, 중장, 종장이 삼태극 삼박자를 빚어내고 그것은 다시 1연 2연 3연 삼태극 삼박자로 뻗어 나가 살포시 하고픈 이야기들을, 쏟아내고픈 감성들을 뿌리내리게 한다.
수 세기 오고 가는 누천년 흔적들이
한 공간 머물 수 없어 이어가는 진행형
때로는 해무 속으로 떠돌기도 했었지
발길질 아득한 곳 여기까지 닫기 위해
바람의 불협화음 가슴으로 받아치며
시퍼런 매질까지도 끌어안고 뒹굴었지
먼 수평 몰고 와서 모래톱에 부려 놓고
꿀잠 든 갯바위에 소금꽃도 일깨워
수없이 피고 지면서 꽃씨 한 톨 둔 적 없다.
- 김정수 작 〈꽃피는 바 다〉 전 문
시인의 연시조는 유달리 3연이 많다. 삼박자 삼태극의 묘미라고 필자가 감탄하는 이유다. ‘꽃피는 바다’, 수만 년의 인류의 표현 욕구가 잠들어 꿈틀거리는 반구대 옆에서 살아가는 시인이라서 그런가. 수 세기 오고가는 누천년 흔적들이 현대 한국말의 숨결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천 년을 이어갈 문장이고 숨결이고 누구나 따라 부르고 싶은 시조창의 노랫결이다.
시조같은 한결같은 그 모습
시조의 오랜 역사를 보듬어보면 시조는 세종의 한글 창제, 반포 덕에 더 큰 집을 집고 더 큰 나래를 펴 왔다.
고려가요는 한글 덕에 기록되기만 했지만, 고려말에 생긴 시조는 한글로 적히면서 더욱 널리 창작되고 때로는 노래로 때로는 붓으로 성별과 관계없이 신분과 관계없이 은근히 그 멋을 뽐내고 향기를 풍겨왔다.
2017년, 〈외솔 문학 전집〉이 나왔을 때 더욱 반가워했던 이가 김정수 시인이다. 국어학자로서의 외솔을 누구보다 잘 알고 한결같이 흠모해온 김 시인이지만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문학인으로서의 외솔을 더욱 반기지 않았을까?
시조를 유달리 좋아하고 직접 명시조를 남기기도 했던 외솔, 그 또한 한글사랑이요 우리말사랑이었다.
울산 〈외솔회〉의 기둥으로, 외솔 정신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 김정수 시인의 두 번째 시조집이 시조 향기를 더욱 널리 퍼뜨려 모두가 시조에 취해보는 소중한 징검다리가 되기를 빌어본다.
*김정수 : 이 글은 김정수 시조집 《하루, 뛰다》(2024, 책만드는집, 86-106쪽)을 좀 더 다듬은 것이다.
* 김슬옹 :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짚신문학회 상임부회장. 7회 짚신문학 평론상 수상. tomul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