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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정조실록]
1. 정조의 문화 정치와 실학의 융성
(1752-1800, 재위 기간 1776년 3월-1800년 6월, 24년 3개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항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며 왕위에 오른 정조는 문예 부흥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려 한다. 그의 이 같은 문화 정치를 가능케 했던 것은 규장각과
실학자들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노론 권신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게 전개된다.
정조는 1752년 영조의 둘째아들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산, 자는
형운으로 1759년 8세의 나이로 세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횡사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제왕 수업에 들어갔다. 이후
1775년 82세의 연로한 영조가 대리청정을 시켰고, 이듬해 3월 영조가 죽자 그는 25세의 나이로
조선 제22대 왕에 즉위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역시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세손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홍국영 등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지켜나갔고, 철저히
내면을 숨기며 살았다. 그래서 '개유와'라는 도서실을 마련하여 청나라 건륭 문화에 열중하면서
전혀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 그의 태도는 달라졌다. 11세 이후 줄곧 가슴앓이로만 간직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는 한편, 파당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등용해 친위 세력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화 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하던
정후겸, 홍인한, 홍상간, 윤양로 등을 제거하고,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꾸었다. 또한
세손 시절부터 줄곧 그를 경호하던 홍국영을 동부승지로 전격 기용했다가 다시 도승지로
승격시켰으며, 날랜 병사들을 뽑아 숙위소를 창설하여 왕궁을 호위하게 하고,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직하도록 했다.
이처럼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홍국영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랑직의 인사권 등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그리고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정권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모든 관리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으므로 이른바 '세도'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홍국영의 세도 정치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누이동생 원빈은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고, 정조 또한 그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조는 그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홍국영은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1780년 집권 4년 만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전리로 방출되었다.
정조는 홍국영의 4년 세도 정치 기간 동안 충실히 규장각을 확대하고 인재를 끌어모았다. 즉,
모든 신하들의 눈을 홍국영에게 집중시킨 다음, 자신은 앞으로 펼칠 문화 정치를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고의로 홍국영의 세도 정치를 부추기거나 방치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가 규장각을 설치한 것은 단순한 왕실 도서관을 얻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는 규장각을 통해
인재를 모아 외척과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고 새로운 혁신 정치를 펼치려 했다. 말하자면
규장각은 정조의 근위 세력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1776년 설치된 이래 규장각은 급속도로 규모가 확대되었으며, 기능도 다양해졌다. 창설
초기에는 사무청사인 이문원 등을 내각으로 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거나 편서, 간서 등의 업무를
주관하게 하고, 주로 출판의 일을 맡아보던 교서관을 외각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 외각의
기능이 정착되자 3년 뒤인 1779년에는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그곳에 박제가 등의 서얼
출신 학자들을 배치하여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개국 이래로 능력과 학식에 상관없이
입신의 길이 막혀 있던 서얼들에게 조정으로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터줌으로써 사회의
분위기를 집안과 당파 위주가 아닌 능력과 학식 중심으로 끌고 갈 수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운영하면서 당하관의 소장 관원 중 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매월 두 차례 시험을 실시하여 상벌을 내리는 방법을 택했다. 또한 각 신하들은 초계문신의
시험관이 되게 했으므로 규장각은 실질적인 경연관으로 왕과 정사를 토론하고 교서 등을 대리
찬술하는 일에서부터 편서와 간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업무를 수행했다.
1780년 홍국영이 제거될 무렵, 규장각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고 있었고 규장각에 모여든
인재도 적지 않았다. 그 무렵 정조는 친정 체제를 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고 홍국영을 방출시킨다.
홍국영을 방출시키면서 친정 분위기를 정착시킨 정조는 그 동안 시험 가동한 결과를 바탕으로
1781년부터 본격적으로 규장각 확대 작업에 돌입했다. 그가 후에 규장각 설립 취지에서 밝힌
바대로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근래 그 선법이 해이해져 종래의 타성에 젖어 있으므로 왕이
의도하는 혁신 정치의 중추로서의 규장각'이 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1781년 규장각 청사는 모든 청사 중에서 가장 넓은 도총부 청사로 옮겨졌으며, 강화사고
별고를 신축하여 외규장각으로 삼았다. 또한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조선본을 보관하는
서고와 중국본을 보관하는 열고관을 세워 내외 도서를 정리하여 보관하도록 했다. 한편 규장각에
속한 각 학자들은 승직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아침저녁으로 왕을 문안하였고, 신하와 왕의
대화시에는 사관으로서 왕의 언동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로써 정조는 규장각을 홍문관을 대신하는 학문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시켜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이른바
'우문지치(학문 중심의 정치)'와 '작성지화(만들어 내는 것을 통해 발전을 꾀함)'라는 규장각의 2대
명분을 앞세우고 본격적인 문화 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정조의 이 같은 규장각 중심의 정치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당쟁은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즉, 영조 때 형성되었던
외척 중심의 노론은 끝까지 당론을 고수하며 벽파로 남고, 정조의 정치 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시파는 '시류에 영합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고, 벽파는 '시류는 무시하고 당론에만 치우쳐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조는 학문적으로 육경 중심의 남인 학파와 친숙하였고, 예론에서도 왕권의 우위를 주장하던
남인 학파 내지 남인 정파와 밀착될 소지를 충분히 안고 있었다. 그리고 신권을 주장하였던 노론
중에서도 젊은 자제들이 북학 사상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학자적 소양에도 호응하고
있었다.
정조가 중용하였던 대표적인 사람은 남인 계열의 채제공을 비롯하여 실학자 정약용, 이가환
등과 북학파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었다.
이처럼 정조가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모든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정국을 이끌어가자 조정은 당연히 정조의 통치 이념에 찬성하던 시파 중심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벽파는 자신들의 위기 상황을 실감하고 종전보다 훨씬 더 똘똘 뭉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 벽파는 1791년에 일어난 신해박해를 기점으로 서서히 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신해박해는 천주교 수용 여부에 대한 논란 끝에 결국 수용불가 결정이 나면서 일어났다.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은 양반으로서 천주교를 신봉하던 인물이었는데, 모친상을 당하자 천주교
의식에 따라 상을 치렀다. 이 일로 그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인척이자 같은 천주교인이던 권상연이 그를 비호하고 나서면서 이 문제는 정치 쟁점화되어
조정은 서구 문화 수입을 공격하던 공서파(벽파)와 천주교를 신봉하거나 묵인하던 신서파로
갈라져 정면 충돌하였다.
이에 정조는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권상연과 윤지충을 국문케 하여 사형시켰다. 이 때문에
조정의 대세는 벽파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4년 뒤인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밀입국 사건으로 벽파는 또 한 번 기세를 떨치게 된다.
이때 남인의 실학자로서 차기 정권의 주자로 인식되고 있던 정약용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
외직으로 나가게 되고, 채제공 등의 중신들도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1799년 채제공이 죽자
남인 세력은 완전히 위축되었고, 이듬해 정조가 죽음으로써 남인은 거의 축출당한다.
그나마 친위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시파들 역시 일부 노론 출신의 외척 세력만 남고 대부분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렇게 해서 24년 만에 정조의 문화 정치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가 남겨 놓은 크나큰
업적들이 있었다.
우선 규장각을 중심으로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의 새로운
활자들이 만들어졌고, 영조 때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오던 문물 제도 정비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 결과물들이 이때 편찬된 '속오례의',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 '동문휘고',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의 책들이었다.
한편 그의 문화 정치는 중인 이하의 평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위항 문학을 낳기도 했다.
인왕산의 경아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인 이하의 위항인들이 귀족 문학으로만 인식되던 한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하여 '옥계시사'라는 그들 독자의 시사를 결성하고 그들만의 공동 시집인
'풍요속선'을 발간하는 등 대단한 문화적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정조 시대는 이처럼 양반, 중인, 서얼, 평민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
부흥기였다. 그러한 문예 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 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문화의 전반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를테면 그림에서는 '진경산수'라는 국화풍,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국서풍이
유행했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 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이러한 축적 위에서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 정챌의 추진과 선진 문화인 건륭 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조선 후기는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룰 수 있었다.
이처럼 문예 부흥의 선봉에 서 있었던 정조는 1800년 6월, 49세가 되던 해에 지병으로 앓고
있던 종기가 도져 세상을 떴다. 그는 효의왕후를 비롯한 3명의 부인에게서 3명의 자녀를
얻었으며, 능은 건릉으로 경기도 화성에 있다. 대한 제국 성립 후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가
되었다.
2. 정조의 가족들
정조는 효의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3명의 부인에게서 3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효의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선빈 성씨가 문효세자, 수빈 박씨가 세자 공(순조)과 숙선옹주를 낳았다.
이들 중 문효세자는 어린 나이에 죽은 탓으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생략하고, 효의왕후의
삶을 간추려 적는다.
제22대 정조 가계도
영조와 영빈 이씨의 차남인 장조(장헌<사도>세자)는 3명의 부인(혜빈 홍씨, 숙빈 임씨, 경빈
박씨)이 있으며, 혜빈 홍씨 사이에서 차남인 제22대 정조가 태어났다. 3명의 부인은 효의왕후
김씨(자식 없음)와 문효세자(일찍 죽음)를 낳은 의빈 성씨 그리고 제23대 순조와 숙선옹주를 낳은
수빈 박씨가 있었다.
효의왕후 김씨(1753-1821)
좌참찬 김시묵의 딸이다. 1762년 10세 때 세손비로 책봉되어 정조와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진봉되었다. 그녀는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빈 홍씨를 지성으로 모셨기에 궁중에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우애가
극진하여 고모인 화완옹주가 그녀를 몹시 괴롭혔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왕가의 자녀들을
돌보는 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성품이 고결하고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아 사가에 내리는 은택을 매우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그래서 수진궁과 어의궁에 쓰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궁중의 물품은 공물이라 하여
일체 사가에 보내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 채 1821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일생을 검소하게
보냈으며, 생전에 여러 차례 존호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능은 경기도 화성의 건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