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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_도덕적 책임
제1장_행위는 자발적이거나 비자발적이다
미덕은 감정과 행위와 관련되고, 자발적 감정과 행위는 칭찬받거나 비난받는 데 반해, 비자발적 감정과 행위는 용서받거나 때로는 동정받기도 하는 만큼, 미덕을 연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발성과 비자발성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상벌과 관련하여 입법자도 그러는 것이 유익하다. (88쪽)
'자발적'이니 '비자발적'이니 하는 말은 행위가 행해지는 때와 관련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앞서 말한 경우 행위자는 자발적으로 행동한다. 그 경우 행위의 도구인 사지를 움직이는 제1원리(arche)는 행위자 안에 있고, 제1원리가 행위자 안에 있으면 행위를 할지 말지는 행위자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그런 행위는 자발적이다. 그러나 아무런 조건이 없다면 그런 행위는 비자발적이다. 그런 행위를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89쪽)
무지로 인한 모든 행위는 자발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비자발적이 되려면 고통과 뉘우침이 뒤따라야 한다. (...) 무지해서 행동한 사람 가운데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는 사람은 비자발적 행위자이지만, 자신의 그런 행위를 뉘우치지 않는 사람은 경우가 다른 만큼 자발적이지 못한 행위자로 볼 수 있다. 그는 경우가 다른 만큼 고유한 이름을 갖는 것이 더 좋겠다. (91-92쪽)
* '자발적이지 않음'과 '비자발적임'을 구분함. 전자는 '자발성이 없음'을 뜻함. (박희택)
어떤 행위를 비자발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합리적 선택에서의 무지(그것은 사악함의 원인이다)도 아니고, 일반적 무지(이런 무지는 비난받는다)도 아니며, 개별적 무지 곧 행위의 상황과 대상에 무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개별 상황과 대상에 근거하여 동정하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든 그런 개별 사정을 모르고 행동하는 사람은 비자발적 행위자이다. (92쪽)
따라서 비자발적 행위가 강요당하거나 무지해서 행한 것이라면, 자발적 행위는 그 제1원리가 행위자 자신 안에 있으며, 행위자가 자기 행위의 개별 상황을 알고 있는 행위인 것 같다. (94쪽)
제2장_합리적 선택은 자발성과 다르다. 어떤 대상을 선택할 때는 먼저 숙고해야 한다
합리적 선택은 분명 자발적인 것이지만, 이 둘이 같은 것은 아니다. 자발적인 것의 외연이 더 넓다. 아이와 동물도 자발적으로 행동하지만, 합리적으로 선택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순간적 충동에서 비롯한 행위를 자발적인 행위라고는 불러도, 합리적 선택의 결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95쪽)
합리적 선택은 욕구, 기개, 소망 또는 일종의 의견(doxa)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주장은 옳지 못한 것 같다. (96쪽)
소망은 목적에 더 관련되고, 선택은 수단에 관련된다. (96쪽)
우리는 행복하기를 소망할 뿐더러 소망한다고 말하지만, 행복하기를 합리적으로 선택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합리적 선택은 대개 우리 힘이 미치는 것들에 관련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96-97쪽)
의견은 참과 거짓(옳음과 그름)에 따라 구분되고 좋음과 나쁨에 따라 구분되지 않는 데 반해, 합리적 선택은 좋음과 나쁨에 따라 구분된다. (97쪽)
합리적 선택은 분명 자발적인 것이지만, 자발적인 것이 모두 합리적 선택의 대상은 아니다. 그렇다면 합리적 선택은 미리 숙고된 것일까? 합리적 선택은 이성과 사고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또한 합리적 선택이라는 말도 다른 것보다 먼저 선택된 것을 의미하는 것 같으니 하는 말이다. (8쪽)
제3장_숙고의 성질과 대상. 숙고는 수단에 관련하고 목적에 관련하지 않는다
우리의 숙고의 대상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 그들은 먼저 목적을 설정한 뒤에 어떻게, 어떤 수단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지 생각한다. 그리고 목적이 여러 수단으로 달성될 것 같아 보이면, 어느 수단을 써야 목적을 가장 쉽고 가장 고매하게 달성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반면 목적이 단 한 가지 수단으로 달성될 수 있다면, 목적이 그 수단으로 어떻게 달성될지, 또 그 수단은 어떤 다른 수단으로 획득될지 생각한다. (100쪽)
숙고의 대상과 합리적 선택의 대상은 합리적 선택의 대상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점 말고는 동일하다. 왜냐하면 합리적 선택의 대상은 숙고 끝에 결정되기 때문이다. (101쪽)
합리적 선택의 대상은 우리 힘이 미치며 숙고 끝에 우리가 욕구하는 것이므로, 합리적 선택은 우리 힘이 미치는 것들을 향한 숙고 끝의 욕구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숙고 끝에 결정했다면 그것은 숙고에 따라 욕구하기 때문이다. (102쪽)
제4장_소망의 대상은 좋음이거나 좋음으로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소망의 대상이 절대적으로는 또 실제로는 좋음이지만 개인에게는 자신에게 좋음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그래서 훌륭한 사람에게는 진실로 소망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이 소망의 대상이 되지만,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는 아무것이나 소망의 대상이 된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103쪽)
훌륭한 사람은 그때그때 진리를 본다는 점에서 남들과 가장 다르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 고매하고 즐거운지를 가리키는 일종의 기준이자 척도이다. 그러나 대중은 쾌락에 속는 것 같다. 쾌락은 좋음이 아닐 때도 좋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은 즐거운 것을 좋은 것인 줄 알고 선택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나쁜 것인 줄 알고 회피한다. (103쪽)
제5장_미덕과 악덕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소망의 대상은 목적이고, 숙고와 합리적 선택의 대상은 수단이므로, 수단에 관련된 행위는 합리적 선택에 따른 것이며 자발적인 것이다. 그런데 미덕의 활동은 수단에 관련된다. 따라서 미덕의 실행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 그 점은 악덕도 마찬가지이다. (104쪽)
실제로 입법자들은 무지에 대한 책임이 범죄자에게 있다고 생각되면 무지 자체 때문에 범죄자를 처벌한다. 이를테면 술 취한 범죄자에게는 가중처벌을 내린다. 술에 취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므로 제1원리는 그에게 있고, 술에 취한 것이 그의 무지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105쪽)
* 「미란다팡하」의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다는 논리와 통함. (박희택)
미덕은 중용이며 마음가짐이다. 또한 미덕은 유덕한 사람에게 그것에 따라 미덕이 생겨나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게 하며, 우리 힘이 미치며, 자발적이며, 올바른 이성이 지시하는 대로 행한다. (109쪽)
제6장_용기.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
용기가 두려움과 자신감의 중용이라는 것은 앞서 이미 밝힌 바 있다. 우리는 분명 두려운 것들을 두려워하고, 두려운 것들이란 대체로 나쁜 것들이다. 그래서 두려움을 나쁜 것을 미리 헤아리는 예측이라고 정의하는 사람들도 있다. (110쪽)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종말이며 죽은 사람에게는 좋음도 나쁨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죽음이 용감한 사람의 관심사는 아닌 것 같다. 예컨대 바닷물에 빠져 죽거나 병에 결려 죽는 것이 그렇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죽음이 용감한 사람의 관심사인가? 분명 가장 고매한 죽음일 것이다. 그런 죽음은 전쟁터에서의 죽음이다. (...) 엄밀한 의미에서 용감한 사람은 고매한 죽음 또는 즉사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며, 그런 상황은 주로 전쟁터에서 벌어진다. 물론 용감한 사람은 바다에서도, 병에 걸려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선원들과는 다르다. 용감한 사람들은 살아남기를 체념하고 그런 종류의 죽음을 경멸하겠지만, 선원들은 경험이 많아 희망을 버리지 않을 테니 말이다. (111-112쪽)
제7장_용기의 동기는 고매함이다. 비겁함과 무모함의 특징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인내력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런 것들은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두렵다. (...) 용감한 사람은 인간으로서 가능한 범위 안에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 인내력의 한계를 초월하지 않는 것들을 두려워하더라도 고매한 것(이것이 미덕의 목적이니까)을 위해 그런 것들을 올바른 방법으로, 이성이 지시하는 대로 견딜 것이다. (112쪽)
* '인간 인내력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들' : 대표적인 것이 지진 같은 것임. (박희택)
용감한 사람은 당연히 두려워해야 하는 것을, 당연한 이유에서, 당연한 방법으로, 당연할 때에 참고 견디며 두려워하는 (또는 그와 같이 자신감을 갖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용감한 사람은 이성이 시키는 대로 순리대로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의 목적은 그 행위에 상응하는 마음가짐과 일치한다. 용감한 사람에게는 용기가 고매하다. 따라서 용기의 목적 또한 고매하다. 무엇이든 그 목적에 따라 성격이 규정되니까. 그러니 용감한 사람은 고매한 목적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가 시키는 대로 행한다. (113쪽)
용감한 사람은 실제로 용감하지만, 무모한 사람은 용감한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무모한 사람은 가능하면 용감한 사람을 모방한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대부분 무모한 겁쟁이들이다. (...) 겁쟁이는 비관적이다. 겁쟁이는 무엇이든 두려워한다. 그러나 용감한 사람은 그와 정반대이다. 자신감은 낙관적인 사람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겁쟁이와 무모한 사람과 용감한 사람은 같은 대상들에 관련되지만, 그 대상들에 대한 마음가짐은 서로 다르다. (...) 용감한 사람은 행동할 때는 민첩하지만 그전에는 침착하다. 그렇다면 앞서 말했듯이 용기는 앞서 언급한 상황에서 자신감을 불어넣은 것들과 두려움을 불어넣는 것들 사이의 중간상태이다. (...) 힘든 일을 회피하는 것은 유약함이며, 그런 사람은 회피하는 것이 고매하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서 죽음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113-115쪽)
제8장_용기와 비슷한 다섯 가지 마음가짐
용기란 그런 것이지만, 다섯 가지 다른 마음가짐도 용기라 불린다. 첫째는 시민적 용기이다. 이것인 진정한 용기와 가장 비슷하다. 시민들은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처벌받거나 불명예를 당하고 명예가 주어지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같으니 말이다. (...) 이런 용기는 수치심과, 고매한 것 즉 명예를 바라는 욕구와, 불명예의 일종인 비난을 회피하려는 마음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115-116쪽)
둘째는 개별 사물들을 겪어본 경험도 용기로 간주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용기가 일종의 지식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용ㄱ이를 어떤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저런 상황에서 과시하지만 싸뭉텨에서는 대체로 직업군인들(용병들)이 과시한다. (117쪽)
셋째는 기개(氣慨) 역시 용기로 간주된다. 자기에게 부상을 입힌 자들을 공격하는 야수들처럼 기개로 인해 행동하는 사람들 역시 용감해 보인다. 용감한 사람들도 기개가 높기 때문이다. 기개는 위험을 무릅쓸 각오가 가장 잘되어 있으니까. (...) 용감한 사람들은 고매한 것을 위해 행동하는데, 기개는 그의 보조원이다. 그러나 야수들은 고통 때문에 행동한다. 야수들은 부상 당하거나 겁이 나야 공격하기 때문이다. (118쪽)
넷째는 낙관적인 사람들도 용감하지 않다. 그들은 여러 차례 다수의 적을 물리친 경험이 있기에 위험에 자신감을 갖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들은 용감한 사람들과 비슷하다. 양쪽 다 자심감이 있다. 하지만 용감한 사람들은 앞서 말한 이유에서 자신감이 있는 데 반해, 낙관적인 사람들은 자기들은 가장 강한 만큼 어떤 해도 입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다. (119-120쪽)
다섯째는 무지해서 행동하는 사람들도 용감해 보인다. 그들은 낙관적인 사람들과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낙관적인 사람들은 자신감이 있는데, 그들은 자심감이 없다는 점에서 낙관적인 사람들만 못하다. 따라서 낙관적인 사람들은 한동안 견디겠지만, 사태를 잘못 파악한 사람들은 상황이 예상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거나 의심스러워지면 곧장 도주한다. (120쪽)
제9장_용기는 고통과 쾌락에 관련된다
용기는 자신감과 두려움에 관련되지만 양쪽에 같은 정도로 관련되지 않고 두려운 것들에 더 많이 관련한다. 두려운 것들에 동요하지 않고 올바르게 대처하는 사람이, 고무적인 상황에서 그렇게 처신하는 사람보다 더 용감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고통스러운 것을 참고 견디기에 용감한 사람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용기는 고통을 내포한다. (120-121쪽)
그리고 즐거운 것을 멀리하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이 더 어려우므로 용기가 칭찬받는 것은 당연하다. 용기가 추구하는 목적은 물론 즐거운 것이지만 이런 사실은 부수적 상황 때문에 가려지는 것 같다. 그런 일은 이를테면 운동경기에서 일어난다. (121쪽)
제10장_ 절제, 절제에 관련된 쾌락들
절제는 몸의 쾌락에 관련된다. 그렇다고 모든 몸의 쾌락에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색채, 형태, 그림 같은 시각의 대상들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절제 있는 사람이라고도 방종한 사람이라고도 불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보고 좋아하는 데도 적당한 정도와 지나침과 모자람이 있을 것이다. (123쪽)
방종은 우리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동물로서 갖는 속성이기에 비난받아 마땅해 보인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좋아하고 무엇보다도 그런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동물적이다. 그러나 촉감이 주는 가장 자유민다운 쾌감, 이를테면 체육관에서 마찰을 하여 몸이 더워질 때 느끼는 쾌감은 여기에 포함되지 앟는다. 방종한 사람에게는 촉감이 몸 전체가 아니라 몸의 특정 부위에 관련하기 때문이다. (125쪽)
제11장_절제와 방종의 특징. 무감각
개인적 쾌락의 경우 많은 사람이 여러 방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다.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것들의 애호가라고 불리는 것은 좋아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좋아하거나, 정상 수준 이상으로 좋아하거나, 그래서는 안 되는 방법으로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종한 사람들이란 세 가지 모두에서 과한 사람들이다. (126쪽)
괘락과 관련해서는 지나침은 분명 방종이며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고통과 관련해서는 용기의 경우와는 다르다. 말하자면 누군가 고통을 참고 견딘다고 해서 절제 있는 사람으로 불리지 않고, 고통을 참지 견디지 못한다고 해서 방종한 사람으로 불리지 않는다. 오히려 방종한 사람은 즐거운 것들을 얻는 데 실패할 때 (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쾌락인데도) 지나치게 괴로워하기 때문에 방종하며, 반면에 절제하는 사람은 즐거운 것들이 없거나 쾌락을 멀리해도 괴로워하지 않기 때문에 절제 있다. (127쪽)
따라서 방종한 사람은 즐거운 모든 것 또는 가장 즐거운 것을 욕구하며 이런 욕구에 이끌려 다른 것들보다 먼저 그런 것들을 선택한다. 그래서 그는 그런 것들을 얻는 데 실패할 때도, 그런 것들을 욕구할 때도 괴로워한다. 욕구는 고통을 수반하니까. 그러나 욕구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불합리해 보인다. 쾌락과 관련하여 모자라는 사람들, 다시 말해 즐거운 것들을 지나치게 적게 즐기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런 무감각은 인간의 특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절제하는 사람은 괘락과 관련하여 중용을 지킨다. 그는 방종한 사람이 흔히 즐기는 것들을 즐기기는커녕 싫어하며, 일반적으로 말해 좋아해서는 안 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 이런 제약들을 무시하는 사람은 그런 쾌락들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지만, 절제하는 사람은 그러지 않고 그런 쾌락들을 올바른 원칙에 따라 즐긴다. (128쪽)
제12장_방종이 비겁함보다 더 자발적이다. 방종한 사람과 응석둥이의 비교
방종은 비겁함보다 더 자발적인 것 같다. 방종은 쾌락으로 유발되고 비겁함은 고통으로 유발되는데, 방종은 선택 대상이고 비겁함은 회피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본성을 흐트러뜨리고 파괴하는 데 반해, 쾌락은 전혀 그러지 않는다. 따라서 방종이 더 자발적이다. 그래서 방종이 더욱 비난받아 마땅하다. 쾌락에 반항하는 습관을 들이는 편이 더 쉽기 때문이다. (128-129쪽)
우리는 아이들의 잘못에도 방종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 둘은 비슷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어느 쪽에서 유래했는지 지금 우리 주제에서 중요하지 않다. 다만 후자가 전자에서 유래한 것 같다. 이런 명칭을 돌려서 쓰는 것은 제법 괜찮아 보인다. 수치스러운 것들을 욕구하며 빨리 자라는 것은 억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욕구와 아이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아이들은 욕구에 따라 살고 즐거운 것을 바라는 욕구는 아이들 속에서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129쪽)
* 후자는 방종이고, 전자는 아이들을 지칭함. (박희택)
즐거운 것을 바라는 지각 없는 존재의 욕구는 충족되지 않고 무차별적이며, 욕구행위는 그의 타고난 성향을 강화해주니까. 그리고 욕구가 강하고 지나치면 실제로 이성을 내쫓는다. 따라서 그런 욕구들은 온건해야 하고 그 수가 적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이성에 반항해서는 안 된다. '고분고분 복종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을 의미한다. 또한 아이가 가정교사(paidagogos, 아이의 교육을 책임지는 유식한 노예)의 지시에 따라 살아가야 하듯 우리 안의 욕구적 부분도 이성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따라서 절제하는 사람의 욕구적 부분은 이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 둘이 추구하는 목표는 똑같이 고매하기 때문이다. (1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