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수학 여행지 경주는 그렇고 그런 여행지 중의 하나다. 그러나 우연히 경주로 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나는 뜻밖에 경주를 사랑하게 됐다.
요즘 중년 세대 사이에서 옛날 검은 교복을 입고 불국사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으며 추억의 수학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건 중고교 시절 수학여행의 추억이 그립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시절의 청춘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좋아서이기도 하다.
내 기억의 경주와 달리 경주가 아주 좋은 여행지라고 깨닫게 되는 것은 이제 우리들도 서서히 나이를 먹어 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천년의 역사 그리고 천년의 세월
경주에는 신라왕조 천 년의 역사가 있고, 왕조 이후 또 천년의 세월이 얹혀 있다. 왕조의 유물은 수없이 발굴되었는데, 발굴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 문화의 원형질이 묻혀 있는 역사도시가 경주다.
그러나 이름난 관광지일수록 짜증스러울 수 있다. 관광객에게 치어서 여행의 기분을 망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벚꽃 철에 차를 운전해 경주로 갔다간 시내에 들어가기 전부터 길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주차할 자리 찾느라 또 시간을 보내고….
그러나 여행지에서의 교통수단이 자전거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천년 고도로 자전거를 타고 수학여행! 아주 느낌 좋은 콘셉트 아닌가!
반월성에서 계림을 지나 교동마을로
경주박물관 제2주차장에 도착해 자전거를 차에서 꺼내고, 간단히 몸을 풀고 나서 반월성을 향해 달렸다. 반월성은 신라 4대 왕위를 오른 석탈해가 잔꾀를 내서 왕궁 터로 삼았다고 하는 곳이다.
반월성은 지난해 왔을 때도 발굴 중이더니 지금도 펜스가 쳐져 있다. 신라시대 얼음 창고로 쓰였다는 석빙고를 지나 반월성을 반 바퀴 돌고서 오른쪽 아랫길로 내려갔다.
가까운 곳에 첨성대가 있지만, 이따가 돌아올 때 들리기로 하고 계림 옆을 지나 교동으로 갔다. 교동은 경주향교가 있는 마을이다.향교 옆 300년을 이어온 거부 경주최씨 종택이 우리가 잠시 들를 장소다.
교동마을에 있는 경주 최부자집
어른들 말씀에 “3대 가난이 없고, 3대 부자가 없다.”라고 했는데 경주최씨 집안은 12대 째 만석지기로 재산을 이어왔다고 하니 그 비결이 궁금하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지나가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도록 하라.”
경주 최부잣집의 이 가훈이 오랫동안 집안의 부를 대물림한 비결이다. 종택 건물은 12대 손에 이르러 영남대학교에 기증됐다고 한다. 가문의 기부 내력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 부자집 골목에서 빠져나와 강변으로 500여 미터 내려가다가 다리를 건너 오릉으로 향했다. 오릉은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그리고 신라 제2, 3, 5대 왕의 무덤 5기가 함께 있는 곳이다.
오릉 담장 옆길을 지나 남산으로 향하는 길
안장에서 엉덩이를 떼고서 높이 들어 올려보지만, 시선은 담장을 넘지 못한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흰 목련이 담장을 넘나들 듯 하며 백색의 향연을 벌인다. 이런 분위기로 여행자의 마음은 들뜬다.
오릉을 지나 우리를 잡아끄는 곳은 박혁거세의 탄생전설이 깃든 우물 나정이다.
천년을 이어온 박, 석, 김의 나라 신라
2천여 년 전, 그 시대의 승자가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위해 허구적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역사는 이루어졌겠지만, 박·석·김 3개 성씨를 가진 왕들에 의해 신라 천 년 사직이 이어져 온 것을 부인하는 이는 없다.
일행 중 박씨 성을 가진 분은 시조의 탄강설화가 서린 상서로운 땅에서 특별한 감회에 잠긴 듯 나정 둘레를 홀로 한 바퀴 돈다.
나정에서 마을 안으로 쭉 올라가다가 저수지 아래 쪽 농로를 따라 달렸다. ‘삼릉 가는 길’ 안내판을 따라가니 포석정이 나왔다. 경애왕이 술잔을 돌리며 연회를 베풀다가 후백제 견훤에게 죽임을 당했다던 슬픈 역사가 서린 곳이다. 입장료도 내야 하고, 자전거를 맡길 마땅한 곳도 없어 들어갈 생각을 못했다.
포석정 앞에서 남산 자락으로 난 옆길로 핸들을 꺾었다. 신라 6대 지마왕의 능을 지나자 삼릉 입구에서 둘레길이 끝났다.
남산자락을 향하는 둘레길은 지마왕릉 앞까지 이어져 있다.
남산 둘레길로 가는 자전거 여행
소나무 숲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내남면 방향으로 달렸다. 300여 미터 달렸을까, 경애왕릉 표지판을 보고 왼쪽 솔숲 길을 따라 올라갔다. 휘어진 소나무 사이로 핀 진달래꽃의 자태가 곱다. 이런 곳은 안개 자욱한 새벽, 혹은 햇살이 퍼지는 이른 아침이나 일몰 직전도 사진 찍기 딱 좋다.
서울에서 당일치기로 다니는 우리들에겐 그런 행운은 쉽게 주어질리 없다. 그나마 요즘 같은 봄은 해가 짧아서 운이 닿는다면 석양 무렵 대릉원 인근 혹은 첨성대에서 일몰의 풍경을 감상할 수도 있겠다. 내심 그런 그림을 기대하며 오늘 코스를 짰다. 그 기회를 얻으려면 목적지에 너무 일찍 도착해서도, 너무 늦게 도착해도 안 된다.
경애왕릉으로 가는 길
35번 국도를 따라 내남면 소재지로 향했다. 거기까진 약 5킬로미터 거리. 다행히 길 옆으로 자전거 도로가 별도로 만들어져 있어 좋다. 국도와 904번 지방도가 나눠지는 사거리에서 좌회전, 거기서 쭉 2.5킬로미터 정도 달리면 노곡리 마을 입구 삼거리가 나온다.
노곡리 마을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임도가 있다. 이곳은 경주 남산의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자락의 끝이다. 계곡 옆 임도를 따라 올라가서 고개를 넘으면 불국사 방향으로 이어진다.
반월성에서 불국사를 가기 위해 선덕여왕릉, 효공왕릉, 신문왕릉을 둘러보며 7번 국도를 따라 가는 것도 편하지만, 이렇게 남산자락 산길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다. 이 길은 두 바퀴로 가는 자전거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선택은 아닐까.
자전거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길, 남산임도
자전거를 타는 대부분의 사람은 적당한 업 힐과 다운 힐의 쾌감을 즐긴다. 도로만 연속되면 밋밋하여 재미가 없다. 만약 오늘 이 임도가 없었다면 라이더들은 실망했을 것 같다.
임도는 대부분 구간에서 시멘트 포장이 돼 있다. 일부 구간만 자갈과 흙길이다. 길가엔 개나리꽃, 산에는 진달래꽃, 임도는 꽃길이다. 왼쪽 아래로 계곡물이 바위를 부딪쳐 작은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 임도 정상까지 도중에 두 번을 쉬고 올랐다. 천천히 오르면 단박에 오를 수도 있지만. 여행 삼아 타는 자전거 라이딩을 굳이 무리할 까닭이 없다. 도중에 쉬어야 자연의 소리도 들린다. 쉬었다 가면 웬만한 언덕도 힘들지 않고 오를 수 있다.
예전에 선친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일본 사람들은 재에 올라가기 전에 미리 쉬었다가 가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꼭대기 다 올라가서야 쉰다고.
마지막 깔딱 고개 직전에 쉬었더니 남은 길은 식은 죽 먹기다. 해발 250미터, 고갯마루의 바람이 시원하다. 고개 조금 위로 어느 무덤가 개활지에 올라갔다. 길게 산맥을 이룬 토함산 일대의 산과 불국사 역 앞 너른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라의 수도 서라벌 수도권은 서쪽으로 건천, 북으로 경주시 안강, 남으로 울산쯤 됐을 것 같다.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신라의 왕과 왕비가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의 글자가 새겨진 각석이 있고, 안강에 신라 42대 흥덕왕의 능이 있는 것을 보면 서라벌 수도권의 범위를 짐작케 한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 지리상 가장 불리한 지역에 있었지만 삼국통일을 했고, 통일 후엔 더 찬란한 문화를 이뤘다. 신라는 생각 외로 개방적인 나라였다.
<신라 서역 교류사> 무함마드 깐수(정수일) 저, 1992년 단국대학교 출판부
무함마드 깐수(정수일) 박사가 쓴 『신라·서역교류사』에 보면 아랍 문헌에 9세기 경 신라와 아랍·무슬림들과 최초 교류의 기록이 남아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아랍의 지리학자인 이븐 쿠르다지바(820-912)가 쓴 『제도로 및 제왕국지』라는 책에 이런 기록이 있다.
“중국의 맨 끝에는 많은 산과 왕들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신라국이다. 이 나라에는 금이 많으며 무슬림들이 일단 들어가면 그곳의 훌륭함 때문에 정착하고야 만다.”
이슬람 제국의 저명한 사학자겸 지리학자인 알 마스오디(?-965)은 『황금초원과 보석광』에서 아랍인들의 신라 내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신라에 간 이라크 사람이나 다른 나라 사람은 공기가 맑고 물이 좋고 토지가 비옥하며 또 자원이 풍부하고 보석이 일품이기 때문에 극히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이렇듯 통일신라의 국제성은 실제 유물로도 증거를 남기고 있다. 울산 가는 국도 옆에 있는 괘릉에 매부리코와 주걱턱의 턱수염을 가진 석상이 있는데, 그 인물이 아라비아 계통의 상인으로 추정되고, 처용가에 나오는 처용 또한 아랍계 외국인이라는 주장이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닌 것은 기록과 유물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는 먼 아라비아까지 교류하는 국제적, 개방적인 나라였다. 요즘 우리의 K-Pop의 인기가 아랍에까지 미친다는 기사는 새로울 것도 없다. 이미 천 년 이전부터 신라의 자연과 문화는 세계인에게도 매혹적이었던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이렇듯 역사 공부는 행복한 추적이다. 고개 밑으로 가파른 길을 몇 구비 돌아서 내려가니 사리라는 마을이다. 마을 앞 너른 들판 옆 아름다운 호수를 돌고 나서 논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가다가 철길을 건너 불국사역 쪽으로 향했다.
제대로 경주 기행을 하려면 불국사를 관람해야 하지만, 자전거를 맡길 마땅한 곳이 없어 오늘도 불국사를 둘러볼 형편이 못됐다.
도중에 카페에서 충분한 휴식 덕분에 보문호수 고갯길은 식은 죽 먹기다. 오르막이 끝나면 약 1킬로미터 정도 신나는 내리막이다.
보문호로 빠지지 말고 삼거리에서 감포 가는 방향에 있는 덕동호를 한 바퀴 돈 다음에 보문호수로 돌아오면 더 좋을 텐데. 감포 가는 길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가 그토록 감탄하던 한국의 아름다운 길인데….
보문호수 벚꽃길 따라 봄의 향연을 느끼고
단체 여행의 특성 상 후미에 따라오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코스를 무리하게 늘릴 수도 없다. 덕분에 내 몸도 그만큼 편해지니 위안을 하면 된다. 그게 모두에게 만사형통. 서로 타협하지 않는 함께 하는 여행이란 없다.
보문호 주변의 벚꽃은 경주시내와 달리 만개상태다. 오후가 돼서 꽃이 더 핀 것일까. 많은 상춘객들 사이를 비집고 유유히 페달을 밟는다. 저마다 만면에 환한 웃음, 봄의 향연을 즐긴다. 돌다리를 건너 보문호수 동쪽 둘레길로 달리다 빠져나와 도로 옆 자전거 길로 달렸다. 자전거 도로는 보도와 겸용인데, 간간이 마주치는 보행자들이 있어 속도를 낼 수 없다.
해질 무렵 천년고도 여행의 매력
보문호수에서 빠져 나와 분황사 곁에 다다르니 해가 서서히 넘어가고 있다. 일몰 직전, 황룡사지와 동궁과 월지를 지나고 첨성대로 향했다. 늦은 시각인데도 사람이 여전히 많다. 밤이 되면 다양한 색깔의 빛을 밝히는 첨성대 야경을 기다리는 관람객일 것 같다.
동산 같이 둥글둥글한 인왕동 고분이 황남동 고분과 중첩되는 풍경의 끝으로 서쪽 하늘 아래 산 능선이 또 한 번 겹친다. 죽은 자의 공간이 시간을 초월해 이어진 천년고도의 풍경은 늘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나에게 경주는 해질 무렵이 가장 이끌림이 강하다.
넘어가는 해가 산마루에 걸릴 무렵, 우리는 첨성대를 떠나 다시 반월성으로 오른다. 오전에 가보지 못한 반월성 건너편 길로 달린다. 산책로 아래 절벽에선 흰 벚꽃이 남천의 고요한 물에 어린다. 안장에 앉아 셔터를 눌러보지만, 제대로 나올지 미지수다.
저물어 빛이 부족하니 흔들리는 사진이 되겠지. 주마간산 격으로 달리는 자전거 여행에 어울리는 영상이 될 지도 모른다. 자전거 여행은 늘 아쉽다. 그래서 내년 봄에 또 경주에 오고 싶다. 그때도 오늘처럼 벚꽃 핀 봄날 자전거 타고 수학여행을.
경주 자전거 여행길 (단위 km)
반월성 - 1.5 - 경주 최부잣집(교동) - 1 - 오릉 - (나정, 지마왕릉,삼릉입구) - 4.5 - 경애왕릉 - (용장리) - 8.5 - 노곡리 - (임도,고개) - 5 - 시리 - (대제저수지) - 3.5 - 불국사역 - 9 - 보문호 - 6 - 분황사 - 2.5 – 첨성대
[출처] 경주 - 천년고도, 자전거 타고 '수학여행' (자출사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 | 작성자 김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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