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47)
조심해, 전갈
내가 장래 희망을 이야기하자 누가 깨진 이빨처럼 킥킥 거린다 희망보다는 장래 쪽에서 고개를 갸웃, 갸웃 한다 나는 모르는 척, 유유하게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다
나는 이제 내일을 이야기하면 웃기는 사람 아무도 내 나이를 묻지 않는다 그건 내가 이미 송두리째 들켰다는 거, 신기루처럼 무대에서 흐려졌다는 말씀
그러나 저는 모르고 나만 아는, 생은 누구나 봉투를 뜯는 순간 생돈이 줄줄 새는 생피 팔아치우는 장사라는 거, 누가 밑천이 바닥난 봉투 앞에서 즐거울 수 있을까마는,
세상에 졌다는 전갈이 빠르게 허벅지 안쪽으로 기어들어온다 웃을까, 울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멀쩡하게 숨을 쉬는 내 코앞에서 검지로 콕 집어 나를, 기어이 똑똑해야 직성이 풀리겠니, 넌?
- 손현숙(1959- ), 시집 『멀어도 걷는 사람』, 리토피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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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네가 3천 년을 산다고 해도, 아니 3만 년을 산다고 해도, 여전히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현재 살아 있는 삶 이외의 다른 삶을 잃지 않는다는 것, 또 무엇보다도 지금 잃으려고 하는 삶 이외의 다른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긴 일생도 가장 짧은 일생과 같다. (…) 어떤 사람도 과거나 미래를 잃을 수 없다.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어떻게 빼앗길 수 있겠는가. (…) 가장 오래 사는 사람이나, 가장 일찍 죽는 사람이나 잃는 것은 같다. 왜냐하면 사람이 잃을 수 있는 것은 현재뿐이기 때문이다.”(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 김재홍 옮김, 그린비출판사, 2023, 90-92쪽) “희망보다는 장래 쪽에서 고개를 갸웃, 갸웃”하면서 “킥킥 거리”는 것 “모르는 척, 유유하게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노년의 행동은 정당합니다. 미래의 시간에 방점을 찍고 웃는 저 웃음에 의문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가타부타하는 동안 잃을 현재를 생각하면 저 ‘도망’마저도 삶입니다. “생은 누구나 봉투를 뜯는 순간 생돈이 줄줄 새는 생피 팔아치우는 장사라는 거”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요. 우리가 사는 건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라는 것, 시간이 아니라 순간이라는 것. “세상에 졌다는 전갈” 운운하며 나이 듦에 대해서 속상해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지만 저 ‘전갈’을 전하는 ‘전갈’에게는 아마 독성이 없을 겁니다. 저 독기가 느껴지지 않는 화난 듯한 표정은 유머러스하니까요. “늙어 젊은 당신은 씽씽씽 자전거를 달리다가/휙! 자전거를 길바닥에 던지고 오늘/5월의 보리밭에 누웠다.//너도 내 나이 돼 봐라/젊어 늙은 당신의 입버릇마저 버리고 오늘/보리밭의 풍경으로 납작 엎드렸다.//평생 어려 젊은 나는 애써 넘을 고개가 없었고/오늘의 소화성 장애는/내일의 오늘에도 안 사라졌다.//푸른 보리 이랑은 문득 오늘 황금파도로 일렁였고/당신의 입버릇에 무심한 나는/결코 당신의 나이에 이르지를 않았다.//당신이 누운 저 오늘의 보리밭 풍경에는/당신의 내일이 없고 나의 겨울이 없고/나의 오늘이 없고 내가 없다.//오늘 떠오른 보리밭의 태양이/철모르게 뜨거웠어도/나는 오늘 다시고 삼킬 입 다 다시고 삼켰다.”(졸시 「오늘 내일 보리」 전문) 젊어서는 미래를 살고 늙어서는 과거를 사는 삶, 주위에 허다하지요. 이런 삶에 현재는 없습니다. 형이라고 하기에도 선생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나이의, 제 어리고 젊을 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너도 내 나이 돼 봐라”하던, 정작 늙어서는 “씽씽씽” 겁나게 젊게 산다던, 그러다가 어느 날 급작스럽게 부음을 전하던 고향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 고향 선배를 추억하며 쓴 시를 오늘의 이야기에 덧붙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시가 수록된 이 시집 『멀어도 걷는 사람』으로, 시인으로 에세이스트로 강사로 사진작가로 산악인으로…… 다양한 삶의 순간을 멀어도 걸으며 살아가는 시인이 올해 ‘제14회 김구용 시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도 함께 덧붙입니다. 손현숙 시인의 ‘김구용 시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20240522)
첫댓글 김구용 문학상도 수상한 손현숙 시인의 시 잘 읽었습니다. 무언가 시 같아요! 보광님 <오늘 내일 보리>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