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 령 ( 惡 靈 )
지박령 (地縛靈). 부유령 (浮遊靈 )
인간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육체라고 하는 혼의 배에 미련과 집착을 가진다.
그러한 현상계에의 집념이,
지박령, 부유령등으로 되어
인간에게 부조화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지박령은 교통사고 현장, 불의의 죽음을 맞은 장소,
자살 현장, 전사(戰死) 장소, 선조 전래의 집념,
부조화한 것을 빌었던 장소, 동물의 집념,
신리(神理)를 깨닫지 못하고 이 현상계의 추억을 남긴 집념이 강한 장소,
등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중에는, 죽음을 자각하고 있는 자,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자가,
살아가고 있는 인간과 똑같이,
나의 장소이다, 나의 물건이라고 집념을 갖고 그곳에 있다.
<건드리지 않는 신(神)에게서는 재앙이 없다,>
토지를 사용할 때에는, 가령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토지의 지박령에게 신리(神理)를 가르쳐서,
사용함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현상계의 우리가, <이 장소는 나의 땅이다.>라고 말해도
그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대로 자기의 물건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사는 올바른 장소,
저 세상을 가르쳐, 신리를 설명해 주는 것이 필요하게 되는 이유이다.
철도사고 현장, 특히 건널목의 경우, 같은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그것은 현장에 지박령으로서 남아있는,
떠날 수 없는 영(靈)이,
비슷한 환경이나,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는 인간에게 빙의하여
사고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체를 떠났어도 죽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관성의 법칙,
<운동을 하고 있는 물체는 운동을 계속하려고 하고,
정지하고 있는 물체는 그 위치에 머물려고 한다.>
와 같이, 현상계에서의 상태와 같은 의식을 갖고 이 세상을 떠나갔기 때문에,
생과 죽음의 차이가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돌발 사고로 사망한 경우는, 잠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기억상실 같은 현상이 된다.
따라서, 죽음을 자각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
사고의 상황을 생각해내기까지는 큰 일이다.
(주; 특히 평소에 죽으면 끝이라고 하며,
사후의 세계는 없다고 믿고 있던 사람들...)
자기 자신이 자각할 수 있도록 되면, 깨닫는 것도 빠르지만,
현상계와 달라서, 실재계로 들어가면 표면 의식이 90%가 되고,
잠재의식이 10%로 되고 말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 소생이 어렵게 된다.
지옥에 떨어져 버리면,
같은 종류의 악령에게 방해받기 때문에 한층 깨닫는 것이 곤란하게 된다.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 상념이 현상화되어 자기 자신을 괴롭힌다.
부조화한 환경에는,
같은 마음을 가진 영(靈)이 모여들기 때문에,
가령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해도,
지옥의 영(靈)이 지배할 수 있는 상태로 정비되어 있으면,
사고에 노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은 자기를 위하여 인간에게 공양할 것을 재촉하고,
몇 번인가의 사고를 계속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어린아이의 경우는 양친의 마음의 조화도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어린이에게 사고가 일어나는 현상이란 것은,
양친의 마음의 자세, 생활의 자세에 대해서 반성을 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어린이의 자기 보존의 본능은,
자아아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순수하기 때문이다.
자주, <마(魔)가 끼었다>라고 하듯이,
우리의 생활 내부에는, 마음의 바늘이,
전류계나 온도계, 자동차의 스피드메타처럼,
선(善)과 악(惡), 밝음(明)과 어두움(暗)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움직이고 있다.
악(惡)의 어두운 상념으로 그 마음의 바늘이 가리킬 때,
우리에게 마(魔)가 끼는 것이다.
그런 고로, 항상 마음의 바늘이 빛의 선(善)한 세계를 가리키는 생활이,
인생의 수행 목적의 하나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부자 삼대 못 간다>라고 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육체 선조는 인생 항로의 배의 제공자라고 몇 번이나 서술한 대로인데,
신앙적인 입장에서 그것을 기도하는 것이 종교적 행사의 하나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관습적, 종교적인 사고방식이,
자손에 대한 과보호로 되어 재산이나 지위를 남기려고 한다.
선조의 공양,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
자기 보존의 인생을 보내고 마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 결과, 사자(死者)가 되어서도,
신리(神理)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재산이나 자손에게 미련을 갖고 성불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가족의 마음에 부조화한 원인을 남겨서,
재산 싸움, 병이라고 하는 유산을 남기는 것이다.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것도 아니고,
사회 인류의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하는데도,
그러한 집념이,
유서있는 집안이라고 칭하는 집에 많다.
선조인 악령(惡靈)의 영향이 많기 때문에,
자비와 사랑을 잃은 차가운 환경을,
만들기 쉬운 조건으로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조의 공양이, 형식 종교화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대처할까.
살아 있는 인간의 마음이 정법에 귀의하는 것.
이것이 선결(先決)이다.
그들도 그렇게 하는 것에 의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간다.
어려운 철학화한 경문을 올려서 이해하는 영(靈)이라면,
이미 현상계의 일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천상계에서 유유자적하게 생활하고 있으리라.
현상계(現象界)의 걱정을 하는 영(靈)은,
언제까지나 의식(意識)이 정화되지 않는 저급령인 것이다.
양친을 시작으로 하는 육체 선조의 공양은,
자손의, 감사보은의 실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이라고 알아야만 한다.
이처럼 지박령의 대다수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많다.
병원이나 사원 등에서도 영적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역시 금생에 집념을 갖고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영(靈)이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지박령의 한 예를 들어보자.
1970년 7월 19일
아사히 신문 도쿄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 치요다구 오테마치 1 정목 1번 1호에,
천 년 전의 추장의 무덤에 얽혀있는 원령전설(怨靈傳說)때문에
1 등지(等地)가 빌딩을 짓지 못하고 있다."
손바닥만한 공지인데도, 마루노우치의 괴담이다.
그 사건의 하나,
1926년,
관동대지진으로 불타버린 대장성이,
추장의 무덤도 정지하여 임시 관사를 만들었다.
얼마 되지 않아, 대장성의 공무원 중에서 환자가 속출,
1년 정도 사이에
당시의 대장 대신을 비롯해서 부장급의 간부 14명이 차례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