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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斗煥 전 대통령이 '全' 표기 「入」 쓰지 말고 「人」로 쓰라고 한 해프닝
李政炫 月刊朝鮮 기자입력 2014. 7. 1. 15:16수정 2014. 7. 1. 15:51
1980년 12월 2일 《경향신문》 2면에 기상천외(奇想天外)한 기사가 실렸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성(姓)에 대한 내용이었다.
< ;全 대통령 姓 표기 「入」 字 쓰지 말고 「人」 字로 錯誤 없게 注意해 달라
◇총무처는 2일 정부 각 부처와 중앙선관위, 입법회의, 법원행정처 등에 공문을 보내 앞으로 全斗煥 대통령의 姓을 표기할 때 「王」 자 위에 「入」 자를 쓰지 말고 「人」 자를 쓰도록 시달.
이 공문은 특히 "착오가 없도록 주의해 달라"고 당부. 총무처 당국자는 "이 같은 조치는 金容烋 총무처장관이 지난달 말 出國 전에 청와대를 다녀와 실무자에게 지시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그러나 全 대통령은 항상 한글로 사인을 하기 때문에 「全」으로 표기해 왔는지는 알 수 없다"고 부언. > ;
느닷없는 전두환 '全' 자(字)가 출현하자 국민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옥편(玉篇)에도 없는 한자를 만들어내고, 더 나아가 쓰도록 강요하는 권력에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간혹 대통령의 무식(無識)을 조롱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즈음 세상에는 전두환 '全' 자의 출현의 배경에 대한 다양한 소문이 돌았다. 대표적으로 이런 내용이 있었다.
< ;대통령이 결재를 하는 도중 '전두환'의 全에 入 자를 쓰지 않고 人 자를 쓴 것을 발견한 부하가, "각하 入으로 쓰셔야 합니다"고 말했다. 그러자 전두환 대통령이 "네가 감히, 앞으로 全은 人으로 써"라고 말했다. > ;
당시 상당히 설득력 있게 떠돌던 내용이었다. 1980년 12월 2일 《경향신문》 기사 역시 이런 소문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기사를 보면 "대통령은 항상 사인을 한글로 한다"며 "'全'으로 표기해 왔는지는 알 수 없다"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을까.
故 지창룡 회장 제자의 증언
6월 초 서울 중구 신당동 개인사무실에서 기자를 만난, 전용원(田龍元) 한국역학협회 회장은 전두환 전(前) 대통령과 고(故) 지창룡(池昌龍·1922~1999) 한국역리학 회장 사이에 있었던 숨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지 회장은 광복 이후 손꼽히는 풍수(風水)·관상가(觀相家)였다. 지 회장은 삼성 이병철 회장, 연세대 백낙준 박사, 홍진기 전 법무장관, 이범석 전 국무총리,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등 유력 인사의 묘 터를 잡는 데 자문했고, 동작동 국립묘지, 대전 국립묘지, 대전 정부청사 위치 선정(選定)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 회장은 1986년 1월 지 회장을 처음 만났다. 그 후 지 회장이 1999년 후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지 회장과 전 회장은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전 회장은 인터뷰 내내 지 회장을 '선생님'이라고 호칭했다.
인터뷰 배경에 대해, 전 회장은 "선생님과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일화는 이미 널리 알려졌지만, 전두환 대통령과 선생님 간의 일화는 소문으로만 조금 알려진 상태이다"며 "과거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진행 중인 관계로, 자칫 오해를 받을까 싶어 쉬쉬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혹시나 선생님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도운 것으로 오해받을까 싶어, 오랜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당시 상황을 말하지 못했지만 이젠 때가 된 것 같아 전말(顚末)을 털어놓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일부 지나치게 과장되어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이야기와 넘겨받은 문건을 바탕으로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池 회장, '全' 字를 破字해 전달
전 회장의 기억을 바탕으로 1979년을 돌이켜보면 이렇다. 전 회장은 지 회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 ;1979년 겨울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의 측근이 고 지창룡 한국역리학 회장을 찾았다. 1979년 12·12 사태를 불과 몇 달 앞둔 시점이었다.
서울시 중구 을지로 7가 '지(池) 청오(靑奧·지창룡 회장의 號)' 간판이 붙어 있는 사무실을 방문한 이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지 회장에게 전두환 사령관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까요?"
답변 대신 지 회장은 5글자를 적어서 "이렇게 전해 달라"고 말했다. 5글자에는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숨은 뜻이 담겨 있었다. 5글자는 '세로'로 '人 王 二 十 煥(年)'이었다. > ;
'人 王 二 十 煥(年)'은 무슨 뜻이었을까. 전 회장은 "사람(人)이 왕(王) 노릇을 이십(二十) 년(年) 한다는 이야기였다"며 "全 자를 파자(破字·한자 자획을 풀어 나눔)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것이다"고 말했다. 또 "환(煥) 옆에 연(年)을 써넣은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당시 상황은 이러했다.
관상을 보러 사무실을 찾았을 때 상황은 어떠했다고 해요?
"아마도 허○○, 허○○, 이○○ 3명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 같아요. 1979년 겨울이 시작될 무렵 선생님을 찾아서 사진 한 장을 보여줬어요. 이름도 밝히지 않았어요. 당시 전두환 장군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선생님도 누군지 알았다고 말씀하셨어요. 쿠데타 성공 여부를 묻는 질문은 아니었고,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했다고 들었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人 王 二 十 煥(年)' 즉 전두환 성(姓)을 파자해서 (전두환에게) 전해 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관상과 이름의 우연의 일치
전두환이라는 이름 때문에 대통령이 된 것인가요.
"그건 아니에요. 관상(인상)과 이름이 우연히 일치했던 것이죠."
'人 王 二 十 煥(年)'이라고 적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어요?
"선생님이 직접 써서 보여주셨어요. '세로'로 '人 王 二 十 煥(年)'이라고 쓰셨습니다. '入'이 아니라 '人'이었어요. 또 20년을 권력을 잡는다는 의미로 그렇게 써주신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가지게 될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다 보니 그렇게 설명하신 것이에요. 또 환 옆에 연을 붙인 것도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름으로 쉽게 풀어쓴 것에 불과한 것이죠."
지 회장이 그런 판단을 내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순전히 관상만을 보고 판단하신 것이죠. 훗날 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두방정고 존위천자(頭方頂高 尊爲天子·두상이 가득하고(꽉 차고) 머리 정수리가 높이 솟으면 천자가 된다)라는 중국 고어를 인용하면서, 관상으로 볼 때 집권에 성공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이야기했어요.
공교롭게도 선생님이 돌아가실 즈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아주 좋지 않았어요. 자칫 전두환 정권을 도운 것으로 오해받을 것이 걱정되어서 당시 이야기는 피했어요. 술 마시고 지인(知人)들에게는 가끔 이야기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80년 전 대통령 성 표기에 '入' 자를 쓰지 말고 '人' 자를 쓰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결국 '人 王 二 十 煥(年)' 즉 '사람이 왕 노릇을 이십 년 한다'는 예언에 따라, 전두환씨는 대통령이 되었어요. 선생님이 후에 이야기했는데, (지 회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보낸 자필 메모에) '入'이 아닌 '人'을 쓴 것은 특별한 이유는 없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은 '전두환 대통령이 성에 入이 아닌 人을 쓰면 20년을 집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20년이라고 한 것은 20년 집권한다는 뜻이 아니라,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고 후에 이야기했어요."
"과장된 이야기 너무 많아"
결국 전두환 대통령이 지 회장의 예언을 잘못 이해한 결과, 1980년 "全 자 성 표기에 '入' 자를 쓰지 말고 '人' 자를 쓰라"는 어이없는 지시를 내리게 된 것이다. 사실 이와 관련한 구전은 오래전부터 계속되었다. 조금씩 과장된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 ;전두환 대통령이 아직 집권하기 전에 유명한 지관(地官) 한 사람이 그에게 비기(?記·비밀스러운 기록)를 보냈다. 종이에는 '귀의삼보(歸依三寶)나 삼이후예(三耳後裔)라. 입왕이십환(入王二十煥)이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니라'라고 쓰여 있었다.
'귀의삼보'란 불교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삼이후예'란 전씨를 뜻하는데, 거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전씨의 시조(始祖)가 이름에 섭(攝) 자를 사용하는데, 그 글자엔 이(耳)가 세 개 들어 있다는 것이 이유다. '입왕이십환'은 전두환 대통령의 이름을 파자 법으로 쓴 것으로, '王이 入 (되면) 二十 년간 빛(煥)이 난다'는 의미였다.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이며, 본래 불교와 인연이 깊다'고 정리할 수 있다. 예언은 적중했고, 그 지관은 이름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 > ;
위와 같은 소문에 대해, 전 회장은 "여러 경로를 통해 선생님 일화가 조금씩 과장되어 소개되었다"며 "역술가들이 조금씩 전해 들은 이야기를 나름대로 각색하다 보니, 픽션(허구)이 많이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한편, 고 박정희 대통령과 지창룡 회장과의 일화는 유명하다. 구전, 혹은 과거 일부 매체를 통해 소개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 ;1961년 5월 14일, 5·16 쿠데타 바로 직전이었다. 박정희 소장이 지창룡 선생을 찾았다. 그리고 "난 박정희라는 사람입니다. 육군 소장입니다"라고 소개한 뒤, "비밀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적어도 며칠간 그럴 자신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지 회장이 "손님의 신상 기밀을 남에게 말하는 것은 천기를 누설하는 것이다"며 비밀 엄수를 약속하자, 박 소장은 "성공할 수 있는지, 실패할 것인지 말씀해 주세요"라고 물었다. 이에 지 회장은 "성공합니다. 이제 박 장군과 저는 같은 운명입니다. 성공할 터이니 안심하세요"라고 말했다. 이틀 후 5·16 군사쿠데타는 성공했다. > ;
박정희 전 대통령 쿠데타 성공 직감
이렇게 전해지는 일화에 대해, 전 회장의 설명은 이렇다.
"상당히 픽션이 섞여서 과장되었어요. 다만 박 소장이 선생님을 찾아온 것은 맞아요. 그러나 이름을 밝히지도 않았고, 군인이라고 하지도 않았어요. 일절 신분을 밝히지 않았던 것이죠. 질문도 '큰일을 하려고 하는데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로 단순했어요. 선생님은 나이만 물었습니다. 나이를 듣고, '틀림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틀림없다"고 이야기한 근거는 무엇일까. 전 회장 역시 궁금해서 이에 대해 질문했다고 한다.
"선생님에게 왜 '틀림없다'고 이야기했는지 물었어요. 선생님은 '철면은아 병권만리(鐵面銀牙 兵權萬里)'라고 말하셨어요. '얼굴이 무쇠 솥처럼 검고 윤기 나고 치아가 은색이면, 병권이 만 리를 떨친다'는 이야기입니다. 중국 《마의상법》 《유장상법》 등 중국에서 전래되는 상학(相學·관상학) 관련 73종의 책에 공통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내용이죠. 기색(氣色), 골상(骨相)으로 '장수(將帥)'라는 것은 알았다고 후에 이야기했습니다."
기자는 전 회장의 설명에 의문이 들었다. '병권(兵權)'을 가지게 된다면, '국방장관 정도 하게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었다. 기자의 이의 제기에, 전 회장은 "'만 리(萬里)'란 천하를 뜻하고, 천하에 병권을 떨치게 된다는 것은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는 은유이다"고 부연 설명했다.
전 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지창룡 회장이 잡았다고 알려진 사실에 대해서도 부연 설명했다. 전 회장의 설명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 ;대전 국립묘지를 잡고 난 후에, 어느 날 저녁 박정희 대통령이 지창룡 회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박 대통령이 부탁했다. "지 박사, 내가 죽거들랑 내 자리도 부탁한다." 박 대통령의 묘소를 잡아주기로 약속한 지 회장은 국립묘지(현 국립 현충원)를 찾아 자리를 물색했다. 현재 장군묘역 근처 자리였다.
1974년 8월 15일 휴가 중이었던 지 회장은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며칠 후 경찰 지프를 타고 동작동 국립묘지를 향했다. 육 여사의 묘소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도착하니, 이미 다른 지관이 (육 여사 묘소) 자리를 잡아놓은 후였다. 이미 자리를 잡아놓고 소견을 물었다. "여기 말고 내가 보아둔 곳이 따로 있다." 추인(追認)을 거절하고, 이미 정해 놓은 자리를 보여주려 했으나, 국립묘지 소장이 반대했다. 소장은 "이미 국방부에서 토질검사를 마쳤는데, 토질도 좋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유족 대표로 김종필씨와 육인수씨도 다녀갔는데, 그냥 쓰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추인 요청에 지 회장은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박 대통령의 묘소는 당연히 영부인 옆이 될 것이다. 그 순간 박 대통령 묘소 역시 정해진 것이다. 결국 지 회장은 박 대통령의 묘소를 잡아주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후에 박 대통령 묘소가 잘못됐고, 묘소는 지창룡 박사가 잡았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지 회장은 억울해했다. > ;
청와대 풍수 관련 보고서
과거에 대한 회상과 함께, 전 회장은 기자에게 문건 하나를 공개했다. 도읍지편(都邑地篇)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는 "지 회장이 전두환 정권시절, 청와대로부터 '행정수도 건설'에 대한 풍수 자문을 요청받아 작성한 보고서이다"며 "풍수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기초로 행정수도로서 계룡산 신도시의 타당성을 논증하는 내용이다"고 설명했다. 내용의 대부분은 한자어로 되어 있고, 풍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이해가 어려운 내용으로 전 회장의 자문·감수를 바탕으로 해설('→' 부분 해설)했다. 우선 해당 보고서의 머리말(序文)은 이러하다.
서(序)
대저 하늘에 일월(日月)과 성진(星辰)이 있어 음양(陰陽) 변화(變化)의 이(理)가 존(存)하고 땅에 강해(江海)와 산악(山岳)이 있어 청탁소종지기(淸濁疏鐘之氣)가 생(生)하고, 사람은 사생수요(死生壽夭)가 있어 길흉존망지기(吉凶存亡之機)가 계(係)하였으니 기음양변화(基陰陽變化)의 이(理)와 청탁정조(淸濁精粗)에 이(理)를 찰(察)하여 능(能)히 흉(凶)을 피(避)하고 길(吉)을 취(取)하는 것은 누구나가 다 바라는 바다.
→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이 있어 음양변화에는 이치가 있고 땅과 강물과 바다, 산악 등에는 맑은 기운과 탁한 기운이 생기고 사람에게는 생사(生死)와 오래 살고 일찍 죽는 차이가 있고 길흉과 존망의 차이가 있으니 음양변화의 이치와 청탁정조(淸濁精粗·맑고 흐리고 정밀하고 거친)의 이치를 관찰하여 길흉을 파악해 흉을 피하고 길을 취하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옛부터 우리나라에 있어서 모든 역대(歷代)의 도읍(都邑)을 세운 땅이 정용(正龍)의 기운(氣運)을 모은 곳을 얻고 자미원국(紫微垣局)에 합(合)하면 많은 대(代)를 전(傳)하여 역년(歷年)이 오래였고 정용(正龍)이 아니며 성원(星垣)에 합(合)하지 않으면 다 곧 나라를 세웠다가도 곧 없어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지리(地理)의 밝은 증거라 하겠다.
→ 예부터 우리나라에 있어서 모든 역대 도읍을 정룡(正龍·풍수의 맥)의 기운이 모이고 자미원국(紫微垣局·북극성과 북극성을 호위하는 별무리와 같은 지형지세)에 부합된 곳에 정하면 나라가 오래 유지되지만 정룡이 아니고 자미원국에도 부합하지 않은 곳에 도읍을 정하면 나라가 섰다가도 곧 멸망하고 말았으니 이것은 곧 지리에 반드시 이치가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 하겠다.
예나 지금이나 길지(吉地)를 얻어 도읍지(都邑地)를 정(定)한다는 것은 국가(國家)가 지향하는 바다. 이에 통투(通透)하고 현명(賢明)하신 대통령(大統領) 각하(閣下)의 지시(指示)에 따라 관계관(關係官)과 같이 새로운 길지(吉地)를 물색하여 선정(選定) 예정(豫定)인바 간단(簡單)한 내용(內容)으로써 그 지역(地域)의 고사(古事)와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상(上)으로 본 도읍지편(都邑地篇)을 기록하여 삼가 대통령(大統領) 각하(閣下)께 올리나이다.
→ 좋은 땅을 골라 도읍을 정한다는 것은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해 지향해야 할 일이다. 이에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관계관(청와대 비서관으로 알려짐)과 함께 좋은 땅을 확인해, 풍수지리학으로 정리된 기록을 만들었다. 해당 기록을 대통령에게 올린다.
차편(此篇)을 일람(一覽)하시고 다행히 후초(厚?)함이 없으시면 필자(筆者)의 행(幸)일까 하나이다.
→ (대통령이) 해당 보고서를 읽으면, 필자에게 큰 기쁨이다.
1982년 2월 일
사단법인 한국역리학회 회장 지창룡(池昌龍) 근지(謹識·삼가 적음)
계룡산은 풍수적으로 명당
48페이지에 이르는 청와대 보고서는 역대 도읍지의 장단점을 비교 분석하고, 태조 이성계의 계룡산 신(新) 도읍 과정과 중도포기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또 마지막으로 계룡산 신도시 건설의 풍수학적 타당성을 논증하고 있다. 내용이 방대해, 풍수지리 백과사전으로 불릴 만했다. 보고서 앞부분은 풍수지리 기본 이론에 집중되어 있고, 뒷부분은 계룡산 근처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당위성을 기술하고 있다. 결론 부분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 ;신도(新都) 후보지의 주산과 진산은 계룡산이다. 계룡산은 전라도 지리산에서 발주하여 덕유산에서 갈라져 역(逆)으로 삼백여 리를 달려 공주 동쪽에 이르러 반달형으로 우회하여 높이 솟아 남쪽을 향하고 있어 회룡고조(回龍顧祖?산의 내맥(來脈)이 돌아서 본산(本山)과 서로 대치하는 지세)의 형국을 이루었다.
상봉에서 다시 형제봉을 이루어 놓고 한줄기가 다시 뻗어내려 중두봉(中頭峯)을 이루고 여기서 또다시 일어나 종봉(終峯)을 이루었으니 제자봉(帝字峯)이다.
(중략)
동서남북 사방사유(四方四維?8방위)에서 꿈틀꿈틀 뛰어 나는 것과 같은 산 형세는 다시 차분히 회동하여 모이는 형상으로 머무는 듯하고 수려한 듯 봉우리들은 마치 사신팔장(四神八將?길흉을 나타내는 '방위')이 옹위하는 듯하고 삼길육수방(三吉六秀方?길흉으로 본 '방위')에 영봉들은 정기를 뿜어 도성을 비추어준다.
그래서 천 년이 지나도 제도와 사상이 계속 발흥할 것이다. 남면(南面)이 멀고 안산(案山)이 적당하니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이요. 천하 나라들이 조공을 드리는 형상이니 세상을 통틀어 가장 좋은 길지이다. > ;
역술, 정치인 판단에 큰 영향
지나치게 풍수, 관상을 믿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다만 취재를 하면서 과거부터 정치인들이 중요한 정치적 판단을 하는 데 풍수, 관상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과거 정치인들이 역술인의 조언이 단지 참고 자료에 그쳤는지 혹은 중요한 판단 자료가 되었는지 지금 와서 알 길은 없다. 그러나 1970~1980년대는 정치인과 점(占)은 일종의 문화였다.
기자는 역술, 관상가들과 오랜 기간 교류하면서 지금도 관상과 점이 유력인사의 판단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모 유명 방송인의 경우 이직(移職)을 하면서 관상가의 도움을 받았다. 기자는 유명 방송인과 관상가가 상호 주고받은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통해, 이직 결심에 관상, 역술이 크게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야권 유명 정치인의 경우, 역술인에게 향후 문재인, 손학규, 안철수 가운데 어느 쪽과 가까이해야 하는지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해당 정치인과 역술인의 전화 통화를 옆에서 들으면서, 정치인들에게 역술인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아직까지 사주, 관상, 풍수는 정치권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바람직한가 혹은 바람직하지 않은가 판단할 수는 없으나, 현실이 그렇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 못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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