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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 세계유산 정릉이다.
서울 성북구 정릉 2동 산 87-16번지에 자리한 정릉의 능역은 29만 9천574평방미터에 이른다.
사적 제 208호로 지정되었다.
정문 매표소를 들어서 왼쪽 관리사무소로 가는 언덕에서는 재실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기초 발굴작업은 거의 끝나 오는 2013년까지 재실이 복구될 예정이라고 한다.
능역에 들어서서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은 이곳 주인의 성품과도 같지 않을까 한다.
"다른 능과는 다르게 정릉에 오면 차분하고 정숙한 분위기에 취하게 된다."
집과 이웃해 있어 정릉을 자주 찾는다는 50대 여인이 전하는 정릉이다.
궁궐이나 사당 향교 등에 있는 금천이 왕릉에도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다.
금천은 왕릉의 제1차 지킴이인 셈이다. 왕릉과 바깥 세상과의 경계도 짓는다.
"조선의 기(氣,Energy)는 수영을 못한다. 물을 만나면 모든 동작이 중단되는 게 바로 그 기이다."
그 약점을 이용해 금천을 능역입구에 둔 것이다. 금천은 밖에서 능역을 공격하는 사특한 기를 막아준다.
또 안에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좋은 기는 능역 안에 잘 갈무리하여 주는 역할을 한다.
능역을 지켜주는 제2차 수비수 홍살문이다.
빨강 파랑 노랑 3색의 세 원은 하늘과 땅 사람이 하나되고 싶어하는 삼태극을 상징한다.
그 옆에는 홍살이 하늘에서 왕릉을 공격하려는 나쁜 무리를 막아낸다.
홍살문에 자주색은 귀신 등이 가장 무서워하는 색갈로 귀신을 쫓는 역할을 한다.
그 역신을 몰아내는 자주색은 신라의 처용가에서 전해온다.
능역은 죽은 자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는 음의 수 2 4 6 8을 쓴다.
홍살문을 지나 제향공간으로 들어가는 참도(參道)는 박석을 깔았다.
참도에서 왼쪽의 높은 길은 신도(神道)다. 또 오른 쪽 낮은 곳에 자리한 어도(御道)다.
참도는 신도와 어도 등 바로 죽은 자의 공간에서 쓰는 음의 수 이도(二道)로 구성된다.
참도의 어도 옆 잔디로는 능역에서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능참봉이 왕을 모시고 걷는다.
산 사람의 공간인 궁궐 등에서는 삼도 삼간 등 1 3 5 7 9 등 양의 수를 쓴다.
흥인문 근처에는 5간수문이 있고 시체가 나갔다고 하는 광희문(시구문) 근처에는 이간수문이 있었다.
정자각은 위에서 봤을 때 '丁' 를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제례를 올리는 공간으로 제향을 올릴 때 왕의 신주를 이곳에 모신다.
정자각의 계단은 측면에 있다. 동쪽(오른쪽)으로 올라가서(혹은 들어가서) 서쪽(왼쪽)으로 나오도록 설계됐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듯이 탄생에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는 인간의 삶을 건축물에 활용한 것이다.
올라가는 동쪽계단은 두개, 내려가는 서쪽계단은 하나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갈 때에는 참배자만 내려 오기 때문이다.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뒤 문을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왕의 영혼이 올라가는 동쪽 계단의 머리에는 태극문양이 새겨있고
계단 측면에는 문양을 새겼지만 참배자의 계단은 그냥 단순한 모양이다.
정자각 왼쪽 뒤편으로 제향이 끝난 뒤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다.
이 소전대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 그리고 정릉에만 있다.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까지는 산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공간이다.
이 제향공간에서는 속과 성이 공존한다.
수복방이다. 능역에서 온 갖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정자각 왼쪽에 있는 비석과 이를 보호해 주는 비각이다.
정릉(貞陵)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1396) 강씨가 잠든 곳이다. 강비는 태조 이성계의 경처(京妻)였다.
당시 풍습대로 향리에 두는 향처(鄕妻·신의왕후 한씨)와 개경에 처를 두는 경처가 있었는데 강비가 경처였다.
신의왕후 한씨는 태조가 등극하기 1년 전인 1391년 9월에 세상을 떠난다.
그 이듬해 1392년 7월 17일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강씨는 8월 2일 현비(顯妃)로 책봉된다.
강비는 조선 최초의 공식 왕비였다.
태조는 강비를 무척 사랑했다.
궁궐에서 잔치를 벌일 때 강비는 주렴을 드리우고 뒤에서 항상 참석했으며
절을 찾을 때든 어디를 가든 강비를 동행했다.
강비가 아프면 승을 궁궐에 불러들여 기도를 드리게 했으며 지극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1396년 8월 13일 강비가 병으로 앓다 죽자 태조는 대성통곡하며 슬퍼했다.
원래 정릉은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었고 태조가 강비에 대한 사랑을 다 바쳐 지은 능이었다.
고려왕릉을 본 떠 조성한 정릉은 조선 최초의 능이었다.
사랑하는 강비가 세상을 떠났어도 그 사랑을 식을 줄 모른다.
태조는 경복궁을 나왔다. 흥천사의 공사장으로 가는 길인 것이다.
태조는 마치 강비가 거처하고 있는 집에 나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였다.
아직 2월이라고는 해도 동녘 하늘에 아지랑이가 끼고
여기저기 민가의 울안마다 살구꽃이 피어 흐드러져 완연히 봄날이었다.
옛날의 개경 수창궁의 전정에 강비와 함께 교의에 앉아 봄을 즐기던 생각이 태조는 문득 났다.
그때 화원에 핀 모란의 신비로운 색깔에 둘이는 취하고 있었다.
「모란이 참 아름답지요?」
강비가 그렇게 말했었다.
「꽃은 다 아름답지. 사람은 악독하지만」
「여보! 당신에게 청이 하나 있어요?」
「무슨 청이지?」
「저 거제도로 귀양 보낸 왕씨들이지만 겨울에 반이나 죽었대요」
「그래서?」
「남은 사람들을 어떻게 할 방도가 없을까요. 더는 죽지 않게 말예요」
언제나 이렇게 인정이 많고, 지나친 태조를 뒤에서 붙잡는 현비였다.
그때는 태조도 강비의 그 정에 감격하여,
「생각해 보지. 우선 남은 사람들을 육지로 옮겨 놓고 그들의 동태를 살펴볼까?」
「그럼 얼마나 좋겠어요」
그리하여 거제도에 있는 왕씨들을 모두 뭍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통의방(通義坊)을 지나면 이내 취현방이었다.
왕이 흥천사의 공사장에 당도하자 공사 중인 사람들은 모두 일손들을 놓고 땅바닥에 부복하고,
주지선사가 앞으로 나와 읍하고 태조를 맞았다.
「그 동안 공사에 무슨 불편이라도 없으오?」
태조가 말에서 내리며 선사에게 말했다.
「아무 불편도 없사옵니다.
다만 공사를 좀더 빨리 진행시켜 성상 전하께 하루 빨리 낙성된 절을 보여 드리고 싶을 뿐이옵니다.」
「고맙소」
태조는 공사장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진척되어 가는 것이 모두가 만족하였다. 대웅전이며 승방이며
기와 한 장 나무 한 토막에 이르기까지 허술한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아마 낙성 때는 보게 되지 못할 것 같으오」
태조는 진행 중인 절 경내를 한 바퀴 돌아와서 선사에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주지선사는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오늘 멀리 북쪽에 좀 다녀오려는 참이오」
「북쪽이라면 개경이오니까?」
「아니오. 훨씬 북쪽 천신산에까지 갔다 올 작정이오. 마음도 적적하고 해서」
그제야 주시선사는 태조의 심정을 알아채고,
「그러하시옵니까? 부디 기체후 봉안하시어 다녀오십시오」
「잘 부탁하오」
태조는 주지선사와 작별하고 흥천사 위에 있는 강비가 잠든 능으로 올라갔다.
덩실하게 높은 능에는 새로 입힌 떼가 새움이 돋아 파릇파릇하였다.
그곳에서는 경복궁 바로 문 앞이 보이고 장안 사방이 모두 보였다.
「어때? 자리가 이만하면 괜찮지?」
태조는 그 능침 자리를 자신이 잡은 것을 자랑스레 주위의 환관에게 말하였다.
「참으로 이 조선 땅에는 두 군데 다시 없을 듯 싶은 곳이옵니다.」
「나도 죽으면 여기 와서 같이 묻히련다」
「황공하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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