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0일 주일대예배 설교문 / 마 5:13-20 / 너희는 세상에 소금과 빛이니
할렐루야! 사랑하고 축복하고 존경합니다.
새해 벽두부터 팔복의 말씀을 가슴에 담았습니다.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 영이 가난하여 더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 – 천국의 그들의 것입니다.
애통하는 사람 –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하며, 이웃들의 아픔에 애통하는 사람 –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 – 프라우스(들짐승이 집짐승이 되었다) 모든 혈기가 깨어지고 화내지 않고 욕하지 않고 욕정대로 살지 않는 자 –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의는 말씀. 불의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생을 살려는 자 – 배부를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 – 측은지심입니다.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는 자 –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 – 카타로스(깨끗하고 순수하다)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은 자 –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 – 화목과 평안을 위해 힘쓰는 자 –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예수님)과 같은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 내가 받는 고난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기쁘게 받고, 그 고난을 믿음으로 이기는 자 – 천국의 그들의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그 어떠한 상황이 온다 할지라도 팔복의 말씀과 같이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복의 복을 더하는 형통의 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여호수아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오늘은 빛과 소금의 삶.
주변에 염광교회, 광염교회 이렇게 이름을 짓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소금 염(鹽)자 빛 광(光)자
“너희는 소금이니 소금처럼 살아라, 너희는 빛이니 빛처럼 살아라.” 이 말씀이 굉장히 좋아서 심지어 교회이름으로 하고 사람이름으로도 많이 쓰는데 실제로는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소금처럼 사는 것이 무엇이고 빛처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 좀 들어보세요? 소금과 빛은 비유입니다. 비유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일단 비유를 풀어야 본 의미가 나오는데 글자 그대로만 보아서 너희는 빛이니 빛을 발하면 된다. 너희는 소금이니 짠 맛을 내어라. 이렇게 본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지 잘 알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소금으로 산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완전히 100% 소금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구지요? 롯의 부인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뒤를 돌아보아서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9: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잘했다는 것입니까? 못했다는 것입니까? 예수님도 이 여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32-33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자기 목숨, 즉 자기 욕심을 이루려고 인생을 산 자는 결국 소금기둥밖에 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소금이 되라고 하신 것이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되라는 말씀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14절에 너희는 세상이 빛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빛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이사야 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교인들이 어디든지 가서도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고 빛을 발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빛이 너무 강하면 볼 수도 없습니다. 눈이 부셔서 눈도 못 뜨게 만드는 것입니다. 무조건 발광한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너무 밝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끔 적당하게 빛을 발해야 합니다. 경우에 맞게, 상황에 맞게 비추어야 합니다. 빛을 발한다고 하다가 오히려 눈을 다치게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
도대체 이 비유의 말씀을 어떻게 풀어야 하겠습니까? 어려울 때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주관으로, 자기의 생각과 이념으로 말씀을 풀면 영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영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 이외로는 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을 함께 찾아봅시다.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이고 말씀은 빛이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막연히 빛을 발하라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빛이 나오면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우리가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면 빛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5장으로 넘어갑시다. 그래서 예수님이 빛, 소금 말씀을 하시고 나서 17-20절에 율법, 말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이제 소금에 대해서 묵상하겠습니다. 소금은 맛을 내는 것이지요. 다 알지요? 자 소금이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좋은 것입니까? 그런데 왜 서울사람들은 경상도 음식이 짜다고 난리입니까? 소금이 좋다는 거예요? 나쁘다는 거예요? 소금만 가지고서는 뭘 할 수도 없습니다. 배고파 굶어 죽는 사람에게 소금을 먹여 보십시오. 죽으라는 것이지요. 갈증으로 목이 타들어가는 자에게 소금물을 줘보세요. 욕 바가지로 먹습니다. 소금은 땅을 불모지로 만듭니다. 그리고 소금은 우리 몸에 당뇨를 유발하고 신장을 병들게 하고 혈압을 높입니다. 소금이 다 좋은 게 아닙니다. 소금은 무겁고 소금은 그 자체로는 전혀 유익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소금이 적당히 들어가면 소금만큼 좋은 것도 없습니다.
이 소금이 제대로 쓰이면 얼마나 귀하냐면 로마가 소금으로 일어났고 중국 진시황의 천하통일 사업도 소금 덕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대로만 쓰이면 금상첨화요, 잘못 쓰이면 소금같은 놈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소금은 적용을 말합니다. 나의 가장 큰 문제덩어리가 변화를 받아 소금이 물에 녹아나듯이 녹아나는 삶을 말합니다.
가장 큰 문제덩어리는 무엇이지요? 나를 빛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죄’입니다. 그 죄를 구체적으로 어디에 적용해야 하냐면 십자가에 적용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미역국에 소금을 적당히 넣었습니다. 소금국이 됩니까? 맛있는 미역국이 됩니다.
나물에 소금을 적당히 간했습니다. 소금무침이 됩니까? 맛있는 나물무침이 됩니다.
강순욱의 죄를 십자가에 적용하여 다 버렸습니다. 강순욱의 죄가 보입니까? 아니지요. 이제 맛난 진짜 강순욱 같은 인생살이가 되는 것입니다.
나를 나 다운 삶이 되게 하려면 여러분, 십자가에 자신의 죄를 적용해보십시오. 세상사람들이 볼 때는 똑같은 ‘나’이지만 전혀 다른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평화가 찾아오고, 그 사람 때문에 웃음이 찾아오고, 그 사람 때문에 축복이 찾아오고...
ex1.) 일본의 국화와 칼: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6월 당시 전세는 미국에게 유리하게 기울었으나 미국 정부는 일본인, 일본 문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상태였다. 미국 국무부는 일본이 항복 후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예측하기 위해 일본인과 일본 문화에 대한 저서를 집필해 줄 것을 당시 최고의 문화인류학자였던 컬럼비아대학의 루스 베네딕트에게 위촉하였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에 직접 간 적은 없으나, 미국에 거주 중이던 일본인 이민자와의 인터뷰, 미국 내의 일본학 연구자들과의 협조, 영화, 도서 등을 통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평했다. 국화는 일본인의 예술성, 예의, 충, 효 등 아름다움을 의미하며 그와 대조되는 이미지의 칼은 일본인의 무(武)에 대한 숭상을 나타낸다.
일본은 작은 것을 아름답게 여기는 국화를 키우는 재미로 사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이 만들면 다릅니다. 제가 몇 년전 한 일본의 집사님 초대로 일본 후쿠오카에 갔는데요 배울 것이 있었습니다. 거리가 너무 너무 깨끗합니다. 그리고 뭐를 만들던 확실합니다. 건물이 하자가 없이 정말 완벽하게 지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지었습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문화는 사무라이 문화입니다. 죄가 발견되면 죽어야 하는 사무라이 문화. 우리나라로 치면 조폭문화란 말입니다. 회사가 망하면 기업주가 우리나라처럼 도망가는 것이 아니고 체육관에 직원 가족들 다 모아놓고는 통곡하고 울면서 크게 사죄합니다. 우리 가족들을 먹여 살리지 못해서 미안 죄송하다고...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뉴스를 보면 할복했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있다고 다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죽기 싫으면 대신 오리발을 내밉니다. 내가 안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독도문제, 정신대문제, 생체실험 등등 자기들이 안했다고 오리발 내미는 것입니다.
반면에 한국의 문화는 봐주기 문화입니다.
ex2) 학창시절 임형사 이야기 – 매일 괴롭히던 사람이 정작 유치장에 가니까 자기가 알던 사람이라고 봐주더라.
ex3) 교통범칙금 끊을 때 같은 강씨에 전라도 완도 산다고 봐주더라.
한국의 죄 문화는 봐주기 문화입니다. 그래서 아동 성추행도 미국같으면 최소 80년형인데 우리나라는 초범이라고 봐주자, 3년입니다.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치면 미국에서는 잘못하면 총도 맞을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술 먹고 제정신이 아닌 가운데 범죄했다고 봐주자, 집행유예로 풀려납니다.
일본은 할복 아니면 오리발, 우리나라는 봐주자. 이래서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를 십자가에서 말씀으로 해결해야 일본은 일본대로, 한국은 한국대로 제대로 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16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이 말씀은 전도자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착한 행실이란 원어러 칼로스입니다. 이는 아름답다. 마땅하다. 잘하다라고 번역되기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살면 빛된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죄를 십자가에 적용하고 버릴 것을 다 버리면 소금과 같이 맛을 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 자신을 십자가에 적용하고,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아름답고 착한 성도가 되어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참된 전도자의 삶이 될 줄 믿습니다.✞-동문교회 강순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