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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서 본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 11강
오늘은 경전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바라밀(pāramī)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바라밀(波羅蜜)을 빠라미(pāramī)라고 합니다. 빠라미(pāramī)는 수행의 완성, 완전함을 뜻하는 영어의 퍼펙트(perfect)라는 뜻이며, ‘저 언덕’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저 언덕으로 간다는 의미는 붓다가 되기로 서원을 세운 보살(菩薩)이 현실의 생사의 차안(此岸)으로부터 열반의 피안(彼岸)으로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산스크리어로는 빠라미따(paramita)입니다.
빠라미(pāramī)는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빠라미(pāramī)입니다. 빠라미(pāramī)를 우리말로 바라밀(波羅蜜)이라고 합니다. 빠라미(pāramī)는 모든 보살들이 최고의 깨달음인 정등각이 되기 위하여 수련하는 수행의 완성인데 10가지 초월적 덕목입니다. 이것을 10바라밀이라고 합니다. 10바라밀은 보시, 지계, 출가, 지혜, 정진, 인내, 진실, 발원, 자애, 평정입니다. 주석서에 의하면 바라밀은 연민에 의해서 함양되고, 이성에 의해서 이끌리고, 이기적 동기에 의해서 영향 받지 않으며, 그릇된 믿음과 자만심에 의해서 타락하지 않는 덕목들입니다. 특히 보시 바라밀을 행할 때 물질적 보시, 자식, 아내보시 등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보시하고, 부처님은 마지막에 왕권까지도 보시합니다.
부처님의 본생담인 자따까(Jātaka)에서 보면 도솔천에 가시기 전 마지막 생에 왕으로 태어나서 왕권도 다 주고 숲으로 갔는데 또 사람들이 따라와서 있는 것을 전부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보시했습니다. 우리가 세속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인데 보살행을 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하십니다. 야소다라를 보시할 때는 보살도 마음이 흔들렸다고 합니다. 깨달은 후 처음으로 고향에 갔을 때 야소다라를 만나러 2층으로 올라갑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야소다라에게 “당신이 없었으면 나는 붓다가 될 수 없었다.”라고 위로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만큼 보시하기 어려운 것을 보시했고, 여러 생에 걸친 관계를 부부가 아닌 남매처럼 과거 생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둘째, 우빠빠라미(upapāramī)입니다. 우빠빠라미(upapāramī)는 ‘뛰어난 바라밀’이라는 뜻입니다. 내 몸에 있는 신체일부를 보시합니다. 헌혈보시도 여기에 들어갑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헌혈 보시를 좋아합니다. 스님들도 장기 기증 보시를 많이 합니다. 사람들이 스님들의 깨끗하고 건강한 몸 받으려고 스님들의 장기 받는 것을 좋아 해서 줄을 많이 섭니다. 큰 스님들이 몸 보시를 많이 하는데 죽을 때 몸 전부를 장기기증으로 보시합니다.
셋째, 빠라맛타 빠라미(paramattha pāramī)입니다. 빠라맛타 빠라미(paramattha pāramī)를 최상의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보시하는 것입니다.
삼빤뉴붓다는 30개 바라밀을 하고 연각불은 빠라맛타 빠라미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고 우빠빠라미까지만 해도 됩니다. 사제불(四諦佛)인 아라한이 되려면 첫 번째 10바라밀을 행하면 됩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도 이와 같이 바라밀행을 매우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삼붓다(Sambuddha)인 아라한과 삼마 삼붓다(Sammā sambuddha)인 정등각(正等覺)의 차이가 있습니다. 삼붓다(Sambuddha)인 아라한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러나 삼마 삼붓다(Sammā sambuddha)인 부처님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으로 정득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라한인 삼붓다(Sambuddha)와 정등각인 삼마 삼붓다(Sammā sambuddha)는 다릅니다. 삼마 삼붓다(Sammā sambuddha)는 어떤 사람의 인도 없이 금생에서 스스로 깨우친 분입니다. 상윳따 니까야에 부처님과 아라한의 차이점에 대해 나옵니다. 와사나(vāsanā)는 습관을 말합니다. 부처님인 삼마 삼붓다가 되면 습관이 없어지고 아라한인 삼붓다는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시대에 반말을 잘 하는 어떤 아라한 스님이 계셨습니다. 인도에서는 반말을 하면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반말은 싸울 때 쓰는 말이고 반말을 하면 못 배운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아라한이 뭐 저래 하면서 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사실을 아시고 이 스님은 마음으로는 문제가 없고 습관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어도 습관은 고치지 못한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스리랑카에서는 때려도 욕은 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쁜 말이 때리는 것보다 더 상처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욕을 해도 때리지는 말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것보다는 욕먹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인데 문화 차이가 있어서 그렇다고 봅니다.
스리랑카 노동자들이 한국에 와서 이런 문화 차이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야 임마 잘 잤어!’라고 말하는 것은 따뜻한 애정 어린 말인데 스리랑카 사람들은 깊은 뜻을 모르고 그 말을 치욕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아침마다 그러는데 화가 난다고 말합니다. 상사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문화 차이가 있어서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습관을 버리기가 어려워서 아라한인데도 습관이 남아있는 스님들을 보면 사람들이 아라한이 맞는지 의심하는 일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삼마 삼붓다(Sammā sambuddha)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자, 습관을 버린 자,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자, 구경의 지혜를 구족한 자이십니다. 이때 구경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이 말과 비슷한 말이 삼마단냐(sammadaññā)입니다. 삼마단냐(sammadaññā)는 ‘완전한 지혜’라는 말입니다. 이는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른 구경의 지혜가 구족하다.’고 합니다. 이때 원인과 결과라는 연기가 이 말 뜻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가 무엇 때문에 일어났고, 무엇 때문에 사라지는지 안다는 뜻입니다. 단냐(daññā)는 ‘안다’, ‘본다’의 뜻입니다.
다음은 삼마단냐(sammadaññā)에 대한 법구경 게송입니다.
법구경 57번 게송
떼삼 삼빤나 실라난
tesam sampanna silānan
아빠마사 위하리나
appamāda vihārina
삼마단냐 위뭇따남
sammadaññā vimuttānam
바고 막감 나 윈다띠
māro maggam na vindati
그가 계를 잘 지키고
부지런히 머무른다.
올바른 깨달음을 얻어 해탈을 성취하면
마라도 그가 가는 길을 모른다.
담마빠다(법구경) 주석서에 이 게송에 대한 배경 설명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웰루아나 수행처에 계실 때 고디까(Godhika)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고디까(Godhika) 스님은 인도의 이시길리(Isigili)라는 산비탈의 바위에서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고디까(Godhika) 스님은 7번의 삼매 체험을 했었는데 삼매를 계속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스님은 삼매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싶은데 유지가 안 되니 화가 나서 그만 병이 생겼습니다. 인도 수행자들이 대마초를 많이 피우는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주석서에도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대마초를 피우면 삼매를 얻는 경우도 있지만 나중에 중독이 되니 문제입니다.
고디까(Godhika) 스님의 이야기는 상윳따 니까야 고디까(Godhika) 경(S4:23)과 법구 경 57번 게송에 있다. 상세한 내용은 주석서에 나와 있다.
스님은 죽어도 삼매를 얻고 싶은데 삼매가 안 되어 너무 슬퍼하다보니 우울증이 왔습니다. 우울증이 심해져서 죽으려고 면도칼로 목을 천천히 자르기 시작했고 목을 자르면서 느낌을 관찰했습니다. 이때 느낌을 알아차리는 웨다나누빠사나(vedanānupassanā)를 한 것입니다. ‘웨다나누빠사나(vedanānupassanā)’는 ‘웨다나(vedanā)’와 ‘아누빠사나(anupassanā)’의 합성어입니다. ‘웨다나(vedanā)’는 ‘알다, 느끼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어근 ‘vid’로부터 파생되어 ‘느낌’ 혹은 ‘감각’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아누빠사나(anupassanā)’는 ‘~을 따라서, ~와 결합하여’ 등의 의미를 가진 ‘아누(anu)’와 ‘보다’라는 뜻의 ‘빳사띠(passati)’가 결합된 ‘아누빠사띠(anupassati)’로부터 나온 명사형입니다. 그래서 ‘따라가며 본다, 관찰, 응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웨다나누빠사나(vedanānupassa-nā)’는 ‘느낌, 감각’이라는 뜻의 웨다나(vedanā)에 대한 ‘사띠(sati)’를 확립한다는 의미로써 느낌을 따라가며 보는 알아차림을 나타냅니다. 이때의 사띠(sati)는 알아차림입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따라가며 본다’라는 말을 한문으로 수관(隨觀)이라고 하면 오해의 소지가 발생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는 따라가면서 보면 안 됩니다. 대상과 알아차림과 아는 마음은 세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따라가면서 보면 이미 일어난 행위를 뒤에 알아차린다는 뜻인데 이것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현장성, 즉시성, 동시성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만약 일어난 현상을 시차를 두고 뒤에 알아차리면 이는 일어난 것을 기억하는 것이며 이 사이에 망상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따라가면 본다’는 말은 뒤따라가며 본다는 말이 아니고 계속해서 쉬지 않고 알아차린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의 지속이 바로 집중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고디까(Godhika) 스님은 웨다나누빠사나(vedanānupassanā)를 하면서 목을 자르는 순간에 아라한과를 성취했습니다. 비구는 자살하면 빠라지까(pārājika)에 저촉됩니다. ‘빠라지까(Pārājikā)’는 바라이죄로 비구가 승단을 떠나야하는 무거운 죄를 말합니다. 그러나 ‘빠라지까(Pārājikā)가 되지만 도과를 성취한 것입니다.
마라(Māra)가 와서 부처님께 이 스님이 안 보이는데 어디로 가셨는지 여쭤봤습니다. 이것은 마라(Māra)조차도 모르는 일이고 오직 부처님만 아시는 일입니다. 그때 부처님이 법구경 57번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그가 계를 잘 지키고 부지런히 생활을 했는데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한 길은 마라도 알 수가 없다”라고 부처님이 게송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기위해 자결을 시도한 고디까(Godhika) 스님이 아라한이 되지 못했다면 재생하므로 마라(Māra)의 눈에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님은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해탈을 하였기 때문에 마라(Māra)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말은 아라한의 윤회가 끝나서 어느 존재계에 계시지 않아서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죽음 직전에 아라한이 되는 경우를 사마시사(samasīsa)라고 합니다. 사마시사(samasīsa)는 두 가지의 결과를 동시에 얻는 것을 말하는데 갈애와 생명을 동시에 소멸시키는 행위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공덕에 따라 다른 결과가 생기기도 합니다. 이는 죽음 직전까지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사마시사(samasīsa)가 아니더라도 죽기 전에 알아차림을 계속하면 죽는 순간에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아라한이 되지 않더라도 다음 생은 위대한 수행자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는 순간에 마지막 죽음의 마음인 쭈띠 찟따(cuti citta)가 다음 재생연결식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죽는 연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빨리어 경전을 최초로 영어로 번역하신 분이 냐나몰리(Nyanamol) 스님인데 이 스님은 2차 세계대전 때 비행기 조종사였습니다. 전쟁 상황 속에서 무상을 보고 불교에 귀의했습니다. 냐나몰리 스님의 도반인 영국인 냐나위라(Ñāṇavīra) 스님이 계셨는데 이 스님은 명상을 했습니다. 냐나위라(Ñāṇavīra) 스님에게 피부병이 있었고 삼매가 안 되어서 약을 먹었는데 혼란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내 삶에서 죄를 짓고 싶지 않다. 나는 청정한 비구로 회향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숲에서 목을 매서 자살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스리랑카에서 유명한 이야기인데 불교에서 자살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성직자 대우를 해서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아라한이 된 상황에서는 자살이라는 자체가 죄가 되지 않지만 아라한이 아닌 상태로 자살을 하면 지옥에 떨어집니다.
이 경에서 나오는 마라(māra)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라(māra)의 뜻은 ‘죽음, 악마, 유혹자, 사신(死神), 마라(魔羅)’ 등 다양한 뜻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원래는 모두 ‘죽음’이라는 뜻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상윳따니까야에 사밋띠경이 있는데 사밋띠 스님에 대한 경이 6개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사밋띠 스님이 ‘세존이시여 ’마라(māra)‘ ’마라(māra)‘라고들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마라(māra)가 있으며 마라(māra)란 개념이 있습니까?’ “사미띠여 눈이 있고 형색이 있고 눈의 아는 마음이 있고 눈의 아는 마음을 알아야하는 법들이 있다, 거기에 마라(māra)가 있고 마라(māra)라는 개념이 있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마라(māra)가 도망갔습니다. 12처 18계 즉, 오온을 마라(māra)로 본 것입니다. 마라(māra)를 죽음의 왕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당시 신을 믿는 인도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신의 개념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죽음도 파괴의 신인 시바(Siva)가 관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죽음은 원인과 결과로 오는 것이지 이것을 관장하는 어떤 초월적 존재가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신을 믿는 사회의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마치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 있는 것처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단지 죽음인 마라(māra)를 부처님께서는 마라 빠삐만(māra pāpimant)이라고 의인화해서 부릅니다. 이때의 빠삐만(pāpimant)은 죽음이라는 마라(māra)의 별명입니다. 우리가 경전을 공부할 때 이런 사회적 배경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을 믿는 인도사회에서 죽음을 그냥 죽음일 뿐이라고 하면 미쳤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지만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시대는 전혀 다릅니다. 이천 오백년 전에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진리를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셨습니다.
마라(māra)가 부처님께 아라한의 죽음에 대해 몇 번 물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대체 아라한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부처님께서는 등불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불이 꺼지면 어디로 갔습니까? 불이 꺼지면 간 곳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어디로 간 것이 아니고 단지 소멸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오온 12처 18계를 마라(māra)로 말씀하십니다. 또 사밋디 스님이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중생 중생이라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 중생이 있으며 중생이란 개념이 있습니까?” “세존이시여, 세상, 세상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세상이 있으며 세상의 개념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5온 12처 18계가 세상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불교에서 오온을 바로 보면 모든 것을 느끼고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질문하는 사람에 따라서 답변이 다릅니다. 수행자가 물어보기 때문에 수행자에 맞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 중에 ‘험난한 길을 평탄하게 간다.’라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짜란띠 위사메 사망(caranti visame samaṁ)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험난한 세상살이에서 바르게 가기 때문에 평탄하게 가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삶을 살아도 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똑같이 유지합니다. 평범할 때나 평범하지 않을 때도 똑 같고, 이익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똑같습니다. 명성이 있을 때나 훼손이 있을 때나, 칭찬할 때나 비난할 때도 똑같이 흔들림이 없습니다. 세속의 여덟 가지 경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팔풍경계라고 하는데 흔들림 없이 사는 것을 말합니다. 팔풍경계는 이익과 손실,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비난과 칭찬을 할 때 흔들림이 있습니다. 팔풍경계를 잘 알아차릴 수 있으면 생활을 잘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위가 없는 깨달음을 얻으시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인 삼마 삼붓다(Sammā sambuddha)라는 단어와 완전한 지혜라는 뜻의 삼마단냐(sammadaññā)라는 단어를 잊지 않고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수삼뭇타 숫따
Susammuṭṭhasutta
참으로 혼미함 경(S1:8)
Sāvatthinidānaṃ. ~~ (생략)
1. 에까만땅 티따 코 사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가탕 아바시.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1.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앞에서 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2. 예상 담마 수삼뭇타,
Yesaṃ dhammā susammuṭṭhā,
빠라와데수 니야레;
paravādesu nīyare;
숫따 떼 납빠붓잔띠,
Suttā te nappabujjhanti,
까로 떼상 빠붓지뚠띠.
kālo tesaṃ pabujjhitun”ti.
2. 법에 참으로 미혹한 자들은
이교의 교설로 인도됩니다.
그들은 잠들어 있어서 깨어나지 못했지만
그들은 이제 깨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바가와(Bhagavā)
세존
4. 예상 담마 아삼뭇타,
Yesaṃ dhammā asammuṭṭhā,
빠라와데수 나 니야레;
paravādesu na nīyare;
떼 삼붓다 삼마단냐,
Te sambuddhā sammadaññā,
짜란띠 위사메 사만띠
caranti visame saman”ti.
4. 법에 혼미하지 않은 자들은
이교도의 교설로 인도되지 않는다.
올바르게 깨달은 자들은 완전한 지혜로
험난한 길을 평탄하게 간다.
‘참으로 혼미함 경(Susammuṭṭhasutta)’은 ‘지혜로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무너진다. 지혜로 이해하면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 경입니다. 여기서 단어 2개를 살펴보겠습니다. 수삼뭇타(susammuṭṭhā)는 ‘참으로 혼미함’이라는 뜻이지만 이는 ‘통찰하지 못함’이라는 뜻입니다. 수삼뭇타(susammuṭṭhā)는 수(su)와 삼뭇타(sammuṭṭhā)의 합성어입니다. 이때의 수(su)는 '참으로', '실로'라는 뜻입니다. 다음에 삼뭇타(sammuṭṭhā)는 ‘혼란한’, ‘혼미한’, ‘알아차림이 없는’, ‘잊혀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혼미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논에 모를 심지도 않고 벼가 안 나왔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짓지도 않고 쌀을 수확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노력하지도 않고 깨달음 얻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자신한테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노력은 하지 않고 좋은 결과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주석서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법(dhammā)은 사성제와 팔정도를 의미합니다. 천신은 수삼뭇타(susammuṭṭhā)라는 뜻으로 ‘참으로 혼미함’을 말했지만 부처님께서 답변하실 때는 아삼뭇타(asammuṭṭhā)라고 하셨습니다. 아삼뭇타(asammuṭṭhā)는 수삼뭇타(susammuṭṭhā)의 반대로 ‘혼미하지 않음’이며 이는 ‘통찰함’을 뜻합니다. 이는 ‘모를 심어서 벼가 나왔다. 벼가 나왔으니 쌀이 나온다. 이교도의 교설에 인도되지 않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 묻고 답하기 >
(질문 1) 불교에서 자살하면 죄가 되나요?
(답변 1) 부처님 시대에 부정관 명상을 하면서 스님들이 자살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돈을 주면 목을 잘라주는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죽는 수행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살하는 수행자들이 나오자 법으로 정해서 자살을 못하게 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큰 분노로 자살을 합니다. 내가 자살할 때도 다른 사람을 죽일 때 나오는 분노와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살하면 지옥에 갑니다.
지옥에서 제일 힘든 지옥이 무간지옥이라고 합니다. 무간지옥은 타는 목마름이고, 끝없는 목마름이 있는 곳입니다. 뜨거운 물을 먹으면 목이 다 녹아버리는데 그런데도 뜨거운 물을 먹고 싶어 합니다. 순간순간을 불로 태워 가는데도 계속 거기서 태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거기서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목련존자가 지옥인 아윗지에서 어머니를 구제하려고 했는데 안됐다고 합니다. 다른 지옥들은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 조금은 있는데 무간지옥은 아상카겁을 지내야 합니다. 죽어가고 있는데도 거기서 태어나고 싶고, 목이 녹아버리는데도 먹고 싶고 그래서 거기에서 벗어나기 힘든 곳입니다. 수명을 숫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짧은 순간이 반복되는데 그래도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고, 무수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고 합니다.
(질문 2) 주석서는 누가 썼습니까?
(답변 2) 주석서는 1차 결집 때부터 있었습니다. 부처님 입멸 후 사람들이 궁금한 것들을 풀어서 써놓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경전에 천신이 나오는데 경전에서는 어떤 천신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후학들을 위해서 스토리를 만든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경전중심이고 주석서는 아라한이 설명한 것도 있을 것이고, 부처님 말씀도 있을 것이고, 시대 상황에 따른 것도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아라한이 주석을 했을 경우는 신통한 힘이 있는 아라한이라서 모든 것을 자세하게 알 수 있어서 기록했을 것입니다. 또 후대에 수행자들의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한 자애로움으로 기록하셨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주석에 대한 주석을 쓰는데 이것을 복주라고 합니다. 지금도 학문과 수행을 한 스승들이 끊임없이 주석을 해서 이로움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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