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덮인 소백산, 필자를 여러 번 곤경에 빠뜨렸던 산이다. |
|
|
각시봉 전설의 무대, 장마 때 토사가 흘러 내려와 지금은 많이 메워져 있다. |
|
|
단양은 강과 산이 어우러진 고장답게 아기자기한 관광지가 많다. 사진은 도담삼봉과 고수동굴(아래). |
|
|
단양 땅은 남한강, 소백산, 도락산, 금수산, 사인암, 고수·노동 동굴 등 산과 강이 잘 어우러진 고장으로 이름이 나 있으며, 절경에 한눈팔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곳이 또한 이곳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무릉도원'으로 불리웠던 것이다.
<전호에서 계속> 계곡은 인간의 손때를 전혀 타지 않은 채 신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어 이런 묘미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좀체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어디 계곡뿐인가. 때는 가을이다. 불그죽죽하게 단풍들기 시작한 머루넝쿨엔 새까맣게 익은 머루송이가 주렁주렁 열려 있어 군침을 목젖으로 넘기기 바쁘게 한다, 저 혼자 피고 지고 열매맺어 지나가는 다람쥐의 식량이 되기도 하고, 산새들의 좋은 먹이 감이 되어준다. 머루넝쿨 밑을 지나면 다래넝쿨들이 나그네를 반긴다. 그 터널 아래엔 머루와 다래알들이 떨어져 바닥에 깔렸다. 머루알을 주섬주섬 주워먹으며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한다. 혹시 산열매 주워먹고 취해서 낮잠 자는 다람귀가 없나 하고. 저 모퉁이만 돌면 금방 나타날 것 같던 마을이 좀체 보이지 않는다. 아니지. 저 개울만 건너면 나오겠지. 이 계곡은 사람을 지치게 하는 마력이 숨어 있는 걸까. 개울의 폭은 넓어지고 수량도 많아져 요란한 폭음소리를 내며 바위라도 휩쓸듯이 쏟아져 내린다. 이제 물을 건너기가 쉽지 않다. 바지를 걷고 첨벙첨벙 건널 물이 아닌 것이다. 유속도 빠르고 물이 차다. 주위의 빼어난 경치를 감상하는 것보다도 저 개울을 어떻게 안전하게 건너느냐가 주관심사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좀더 얕은 곳으로 건너볼까 하고 이리저리 기웃거려 보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산 능선으로 기어올라 우회해서 갈 수도 없다. 계곡의 양편엔 깎아지른 절벽이 솟아있어 날으는 새가 아닌 다음에야 앞에 놓인 계곡 물과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할 수 없지. 바지를 벗어 배낭 속에 구겨 넣었다. 이를 악 물었다. "젠장! 이래봬도 이런 개울을 수없이 건너본 백전노장이란 말이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자기 최면을 걸었다. 계곡 중간쯤 다다르자 물은 허리아래까지 차 올랐다. 머리털이 솟구치고 온몸은 공포감에 휩싸인다. 아래에는 검푸른 소가 그 음흉한 입을 벌리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시야가 아득히 흐려온다. 개울 한복판에 버티고 서서 숨을 길게 몰아쉬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다시 돌아갈까. 뒤를 돌아봤다. 지나온 길도 까마득히 멀게 보인다. 천천히 천천히 한 발자욱씩 앞으로 나갔다. "흠!"하고 호흡이 흐트러질 것 같았다. 여기서 호흡조절을 못하면 몸의 중심이 무너진다. 서두르면 물귀신이 된다. 여기서 물귀신이 되면 어떤 모습으로 떠오를까? 속옷까지 벗었으니 보기 흉한 물귀신일 것이다. 누구에게 발견될까. 여자보다 남자에게 먼저 발견되는 게 그나마 나을 것이다. 실종! 그렇지. 한달 뒤에나 아니면 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나 알게되겠지. 몇 발자욱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앞에 보이는 칡넝쿨을 휘어잡았다. 만세! 살았다. 긴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담배를 피워 물고 건너온 개울을 돌아봤다. 20m폭밖에 되지 않는 개울이다. 그러나, 까마득하게 보인다.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이상하다. 예상한 2시간을 훨씬 지나서 4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 지도상에 나와 있는 거리가 분명 정확할 진데 너무하다 싶은 생각이 든다. 적어도 항공촬영에 의해 제작된 지도니 만큼 오차란 있을 수 없다. 서두르기로 했다. 그 동안도 결코 느린 걸음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길을 찾지 못했으니 뭔가 잘못되어 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산모퉁이를 몇 굽이나 돌고 물은 몇 번이나 더 건넜던가. 길이 보였다. 약초 캐러 다니던 길이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신이 나른해지고 허기가 몰려온다. 해는 서산에 지고 저녁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마을이 보일 땐 다리가 풀려서 갈지자로 흐느적거려야했다. 꼬박 6시간 30분을 계곡 속에 갇혔다 탈출한 것이다. 마을에 내려와서 확인해 보니 애초에 계획했던 목적지의 마을이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내려선 것이어서 한동안 멍청해진 채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조선 중엽의 유명한 예언가 격암남사고마저도 이 소백산을 지나면서 그 신령스러움에 탄복한 나머지 타고있던 말에서 뛰어내려 넙죽 절하며 경의를 표한 영기가 서린 산 일진데, 하물며 그런 경외심도 없이 산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들어선 필자에게 소백산 신령이 노한 건 당연한 것이다. 단양에 오면 멀리 펼쳐진 소백산능선부터 우러러보는 버릇이 생긴 건 그때쯤부터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서너 번을 그런 식의 산행을 한 경험이 있으니 못 말리는 산객임이 분명하다. 앞서도 소개했지만 '단양 향토문화회(회장 김재호)'는 전국의 어느 지방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문상오(단양군청 기획실 근무)씨 또한 그 주축 회원으로써 그가 전하는 '각시봉과 도마이굴'에 대한 이야기는 단양지역의 잊혀져 가는 전설을 발굴 보존하고 있는 좋은 예이다. 가난한 집이 있었다. 원래는 부자였으나 두 내외 인정이후하기 이를 데 없어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굶는 사람, 병든 사람, 이래저래 다 나눠 주다보니 그 많던 재산이 거덜난 것이다. 아들만 오형제를 뒀는데, 하나 같이 제 부모를 닮아 모진데 없고 인정이 넘쳤다. 살림살이도 어렵고 양식도 쪼들릴 대로 쪼들리는 판이라 이제 자식은 그만 생산해야지 하는 생각이야 굴뚝같았지만 맘대로 안되는 게 부부관계 아니겠어. 잠도 배부른 놈이 깊게 잔다고, 멀건 죽 한 사발로 물린 저녁상이고 보니 초저녁 기척도 하기 전에 잠은 멀리 도망쳐 버렸다. 딱히 할 일도 없으니 긴긴 밤 그저 남녀지간에 그런 일 밖에 더 있겠는가. 그런 뒤 바로 태몽이 있었는데 참으로 요상한 것이 용도 아니고 배암도 아닌 꿈을 꿨는데 밤새 뒤숭숭한 꿈자리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무당을 찾아가기로 했다. 차마 빈손으로 가기도 뭣해서 잿밥용으로 남겨둔 쌀 됫박을 허리춤에 안고 윗마을 태주무당을 찾아갔다. 태주무당이라고 하면 무당 중에서도 동자신을 모시는 무당으로 일부러 어린애를 굶겨 죽인 뒤 원귀를 붙여오던가 아니면 어린애 손가락을 작두로 잘라 갖고 다니는 끔찍하고 잔혹한 무당이다. 그러나, 그 효험은 영특하였고 특히 태몽이나 어린애들의 병치레를 다스리는 데는 다른 어떤 박수나 무당보다도 뛰어났다. "당신네 집에 출산이 있을 것이다. 태어날 아기가 고추인지 숯검댕인지는 말할 수 없으나 내가 이르는 말을 정히 지켜야만 아무 탈없이 살려낼 수 있으리라. 하기가 힘들면 애초에 약속을 하지 말아야지 중간에서 포기하면 만사 휴지가 될 것이다. 행할 자신 있느냐?" 아낙네는 고개만 끄덕일 뿐 나오느니 그저 한숨이다. 한 입이 더 불어난다니 그러잖아도 개미같이 간당거리는 허리끈이 아예 두 동강으로 부러질 판이다. 임신중절 수술이나 산아제한 약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아이가 뱃속에 들어서면 어떻든 낳아야 되는 것이다. 태주무당이 엄중히 경고하듯 다시 다짐을 해둔다. '애기를 낳으면 엎어놓거라. 삼칠일이 지나기 전엔 절대 안아주거나 똑바로 뉘어선 안되느니라! 내 말을 명심치 않으면 화가 있으리!' 태기가 있었고 출산이 따랐다. 그날은 바로 절기로 치자면 대서요, 절후로 치자면 중복이 가까운 칠석날이었더라. 삽짝에 금줄이 걸렸는데 숯검댕이였다. 고추는 아닐지라도 경사는 경사였다. 아낙은 핏덩이인 딸을 바라보며 태주무당의 경고를 명심했다. 엎어놓기를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아이의 울음소리는커녕 숨마저 끊어질 판국이었다. 그래도 안된다고 고개를 도리질하며 어금니를 욱신 물었다. 명줄이 길기는 긴 계집아이였다. 삼칠일이 지나도록 목숨이 붙어 있는 게 신통했다. 이제 오늘로 마지막 하루가 남았다. 그런데. 창창하던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일더니 번개가 날았다. 천둥이 산을 쪼개고 벼락이 물길을 끊었다. "우르르르‥‥‥ 콰콰쾅! 콰쾅!" 갑자기 온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소나기가 장대같이 퍼붓기 시작했고, 천지가 개벽할 듯이 번개와 천둥이 번갈아 들이쳤다. "우우우우응……! 크르르… 쿠엉!" 천둥소리 같기도 하고 맹수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참으로 괴이한 소리가 창호지를 바르르 떨게 했다. 아낙은 너무나 기괴한 소리에 기절초풍할 듯 놀라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어미가 너무도 소스라치게 놀라자 이제껏 죽은 듯이 축 처져서 엎어져 있던 어린 핏덩이가 "응아아!"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게 아닌가. 그 울음소리는 20일씩이나 엎어져 있던 갓난애의 울음소리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우렁찼다. 그 순간 '번쩍! 콰콰콰쾅…!' 번개가 일고 벼락이 앞마당의 대추나무에 내리꽂혔다. 그와 동시에 아낙은 갓난애를 끌어안았다. 벼락에 놀란 아낙이 거의 본능적으로 어린애를 안은 것이다. 그와 때를 같이 해서 또다시 놀라운 일이 벌어졌으니, 문틈으로 밝은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것이었다. 한순간에 먹구름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그 애가 별 탈없이 자랐다. 방년 십육세. 물오른 버들 같았다. 이름은 상녀라고 했다. 집안이 가난하기는 여전했다. 선을 베푸는 집안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거라고 누가 말했던가. 오형제가 장성하여 다들 일가를 이루었으나 뿔뿔이 헤어져 소식조차 막막하고 애비 또한 연로하여 운신하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그나마 근근히 모아둔 재산마저 후덕한 인심으로 날려보냈다. 가난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두 모녀는 누에를 쳤다. 그 애 이름은 뽕나무 상자를 쓴 연유도 거기에 있었다. 누에는 춘잠이 있고 추잠이 있는데 봄누에 치는 것을 춘잠이라 한다. 작렬하는 태양이 바야흐로 칠월을 준비하고 있었다. 만물이 생육하는 초여름. 상녀네는 전답이 없는지라 뽕밭이 있을 리 없었다. 도리 없이 야생 뽕나무인 산뽕나무를 찾아야 했다. 기름지고 야트막한 산자락 뽕잎은 남아나지 않았다. 산을 돌면 물 깊은 곳에 절벽이 있었다. 그 절벽에는 유난히 뽕나무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곳에 오르기를 꺼렸다. 천길만야한 낭떠러지 탓도 있지만, 그 밑에 있는 물은 역류하며 빙빙 도는데 용소는 언제 봐도 검푸른 물결이 음험하고 소름끼쳤기 때문이다. 도저히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고 소문이 난 것이다. 그리고 물빛은 언제나 시커멓고 한 가운데만 불그스름하니 더더욱 사람의 발길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산모퉁이를 돌면 커다란 굴이 있는데 당장이라도 산발한 귀신이나 괴물이 튀어나올 듯이 음침하고 괴괴한 침묵이 있는 곳이었다. 절벅 꼭대기에 다다른 상녀가 마른침을 삼키며 낫을 고쳐 잡았다. 여린 마음에 자신이 비록 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어린 누에들이 말라죽는 꼴을 차마 눈뜨고 못 볼일이었다. '휴우…!' 상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좀 힘들긴 했지만 뽕잎이 다래끼에 가득 찼다. 이젠 집으로 가야겠다고 막 발을 내딛는 찰라! 상녀의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했다. "아아악…!" 그녀는 의식이 아득해지며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아! 이제 끝이구나.' 짧은 세월 가난에 서럽기만 했던 열여섯 해가 빗살처럼 펼쳐졌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모든 걸 포기한 그녀가 거기서 눈을 감았다. 그때! "두두둑… 툭!" 하는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몸뚱이가 용수철처럼 불쑥 튀어 오르는가 했는데 거기쯤에서 딱 멈췄다. 눈을 번쩍 뜬 상녀가 휴우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신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지 않은가. 한숨을 내쉰 그녀는 다시 눈을 질끈 감으며 몸서리를 쳤다. 절벽 끝으로 노송이 한 그루 있는데 자신은 그 나무의 썩은 옹이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찢어진 치마폭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어 살랑 바람만 불어도 당장 떨어질 위기였다. 살아있긴 해도 이미 산목숨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절벽 아래에서 속이 니글거리도록 역한 비린내가 솟아오르는 게 아닌가. 아아! 갈수록 태산이라 더니 용수 저 밑에서 불그죽죽한 물체가 꿈틀꿈틀 용트림하고 있었다. 이무기! 아가리를 딱 벌린 놈은 눈에선 붉은 핏발이 섰고 붉은 수염이 하늘로 치솟았다. 한발에 뛰어올라 상녀를 집어삼킬 기세였다. 이어서 불그스름한 안개가 꾸역꾸역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주변은 안개에 휩싸였다. "쿠와아‥" 놈이 아가리를 딱 벌리며 불을 토했다. 핏발선 눈에선 빛이 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아아아악!' 상녀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순간 치맛자락이 걸려있던 옹이가지가 부러지고 그녀는 한 떨기 꽃이 되어 절벽 아래로 날아갔다. 실로 절대절명의 순간! 아아 이건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그녀가 적룡의 아가리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찰나! 산밑 동굴 쪽에선 살기 어린 차가운 기운이 창날처럼 쏟아져 나오면서 경천동지할 진동이 일었다. "크아아앙…!" 살을 에이는 찬바람이 불며 흰빛 안개에 가려있던 긴 꼬리를 냅다 휘두르자 막 적룡의 아가리로 빨려들던 상녀의 몸이 가랑잎처럼 날렸다. 그리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가 눈을 떴을 땐 실로 필설로 표현하지 못할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모를 낸 들판은 벼 한 포기 보이지 않았다. 폭풍우가 할퀴고 간 듯 이리 쓸리고 저리 패인 채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 너른 들판은 시뻘건 핏물로 범벅이 되어 피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두 마리의 적룡과 백룡은 서로 뒤엉켜 죽어 있었는데 그 거대한 몸집이 걸레조각처럼 너덜거렸고 허연 뼈가 모골송연 하도록 참혹하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런 끔찍한 광경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상녀는 깜짝 놀랐다. 태산같은 두 마리의 이무기가 싸울 때 그 한복판에 팽개쳐 있던 자신의 몸이 털끝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한 것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두 마리의 이무기는 아직 천년을 넘기지 못해 승천하지 못했는데 용으로 변해 하늘로 올라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용으로 변하려면 동정을 간직한 처녀와 결혼을 해야 했는데 마침 그녀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들의 배필이 되어 함께 천상에 올라야 하는 귀한 몸이니 서로가 죽기살기로 싸우면서도 그녀의 몸만은 털끝 만한 상처를 내지 않은 거였다. 그녀가 정신을 수습하고 일어서는데 어디선가 번쩍 하는 섬광이 있었다. 주먹만한 구슬 두개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그것은 이무기 입에서 나온 백광과 홍광의 여의주였다. 여의주! 어떤 보석이 이보다 더 값질 것인가. 상녀가 두개의 여의주를 품에 안고 집으로 가는 길은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그녀는 그 두개의 값진 여의주로 부족함 없는 여생을 보냈다 한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가 삼칠일의 맨 마지막날에도 그녀를 안아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용과 같이 승천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떨어졌던 절벽을 이곳 사람들은 각시봉이라 부른다. 그 밑엔 지금도 붉은기가 도는 용소가 있어 옛 전설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각시봉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굴은 도마이굴이라 불리운다. 또한, 적룡과 백룡이 뒤엉켜 싸운 들판이 각시봉 바로 앞에 있는 들인데 사람들은 아직도 용을 장사지낸 곳이라 하여 용장 뜰이라고 부른다. 단양은 강과 산이 잘 어우러진 고장답게 아기자기한 관광지가 많이도 널려 있다. 조선시대 실학파의 거유 이중환은 그의 명저 「택리지」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이곳을 잘 소개하고 있다. '단양, 영춘, 청풍, 제천 등 네 고을은 두메 가운데 있는 마을이고 석벽과 반석이 어우러져 있다. 그 중에서도 단양이 첫째로써 고을 전체가 만첩 산중에 있다. 10리가 넘는 들판은 없으나 강과 시내에는 바위와 골짜기의 빼어난 경치가 널려 있다.'고 했다. 남한강, 소백산, 도락산, 금수산, 사인암, 상·중·하 선암, 고수·천동·노동동굴, 구인사, 단양유황온천, 소백산관광목장… 등등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이중환'이 1768년 여름. 단양읍 앞에서 배를 타고 옥순봉을 지나다가 시를 지었다. '땅위의 높은 형상은 단정한 선비가 서있는 듯하고 물결 속에 어리는 그림자는 늙은 용이 꿈틀대는 듯하다. 정신은 강산의 아름다움을 더욱 부추기고 기세는 높이 우주의 형상을 버티었다. 만첩 두메 황홀하니 봄꿈인가 의심스러워 오랜 세월 두고 신선노름이나 할까보다.'면서 구름 위에서 노니는 듯한 벅찬 가슴을 토로했다. 이곳을 거쳐간 그밖의 인사들 중 이름만 대면 누구라는 걸 금새 알 수 있는 저명인사들이 수두룩한데 그들은 하나같이 이곳을 찬탄하는 시 한수씩을 남겨두어 자신의 족적을 후세에 알렸다. 그 중에 1,000원짜리 지폐의 늘 변함없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퇴계 이황 선생도 조선 명종 때 이곳 단양군수로 재직했고,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이곳 출신으로 도담삼봉에서 호를 따서 삼도봉이라 지을 정도로 각별한 연고를 내세우고 있다. 고려말의 대유학자인 우탁선생도 이곳 태생이며, 서애 유성룡은 이곳에 아예 정자까지 짓고 후진양성과 풍류를 즐겼으며, 우암 송시열 역시 이곳에 들렀다가 찬탄을 금치 못했다는 기록이 내려오고 있다. 아마 조선팔도를 통틀어 이곳만큼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잦았던 지역도 드물 것이다. 따라서 단양 땅이 조선의 무릉도원으로 지정되었던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또한,「택리지」에 기록되어 있듯이 도관(도를 닦는 도사들이 사는 집)의 자리로써도 합당하고, 절경에 한눈팔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곳이 또한 이곳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