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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48
요한계시록 13:1-10
바다에서 나온 짐승
13장은 두 짐승을 언급하는데 그 출처가 하나는 바다이고 또 하나는 땅이다. 두 증인과는 대조되어 반대의 역할을 한다. 1-4절은 짐승의 특징을 말씀하고, 5-10절은 짐승의 활동을 보여준다. 오늘 본문도 시간적 순서로 용과 여자의 전쟁 다음에 짐승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11:7에서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라고 말씀한 바와 같이 두 증인이 증거하는 그 상태에서 용이 짐승을 통해 어떻게 박해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말씀들이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1-2절). 용은 일곱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고 뿔은 열인 반면 짐승은 일곱 머리에 뿔이 열이고 그 뿔에 열 왕관이 있다. 용과 짐승이 동일체이지만 용에게는 없는 머리에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다는 것은 짐승이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2:17에서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라고 하였기에 용이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다는 것은 비진리로 자신과 함께 할 자들을 부르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다”(헬, ‘달랏사’)란 성경에서 열국, 이방 세계를 의미한다. 다니엘 7장에서도 바다에서 짐승이 출현하는 내용이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세상의 열국들을 상징하고 그중에서 강한 나라가 나타난다고 말씀한다.
21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과 더불어 싸워 그들에게 이겼더니 22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 23 모신 자가 이처럼 이르되 넷째 짐승은 곧 땅의 넷째 나라인데 이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라서 온 천하를 삼키고 밟아 부서뜨릴 것이며 24 그 열 뿔은 그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25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1-25)
다니엘서에 나오는 네 짐승은, 첫째는 사자 같고(7:4), 둘째는 곰 같고(7:5), 셋째는 표범 같고(7:6), 넷째는 강하고 무서운데 열 뿔이 있다(7:7-8). 다니엘서에서 짐승은 세상 나라의 권력자들을 상징화한 것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본문에서는 다니엘 선지자가 본 네 짐승을 모두 합쳐 놓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즉 아주 강하고 힘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세상의 권력이나 권세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힘을 지닌 어떤 부류로 한정하여 생각해서는 안 된다. 좁은 의미로 국가라는 것에 한정시켜 이해한다면 국가 권력과 상관없이 살면 우리는 바르게 사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나라의 권력이나 정치적인 어떤 직책을 가지지 않는 것이 세상의 힘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땅에 산다는 것은 누구나 다 용의 힘을 숭배하고 사는 짐승이다. 창세기의 표현으로 하면 씨 맺는 채소와 나무를 양식으로 삼지 못하고 풀을 먹을거리로 삼는 존재, 즉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비진리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는 존재이다.
“신성 모독”의 헬라어 ‘블라스페미아’는 ‘비방, 중상(하는 말), 욕설’이라는 뜻이다. 두 증인이 주의 이름을 증거하며 고난을 견디어 배반하지 않은 것(2:3, 2:13, 3:8)과는 대조되어 신성 모독하는 이름으로 대조적으로 짐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기 이름을 내세우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더라”라고 말씀한다. 즉 짐승의 사고방식, 정신이 오로지 자기 명예를 위해 하나님을 비방하고 대적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렇게 강하게 힘 있는 모습으로 복음을 대적하는 이유는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보좌”란 다스리는 권세를 의미한다. 이렇게 보자면 성전을 보좌로 삼고 율법의 행위를 진리로 전하는 것이 다스리는 것이다. 용의 능력, 권세로 다스리는 모습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3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3-4절). 짐승의 머리 하나가 상해서 죽게 되었다가 소생하였는데 이 말씀이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후손이 그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과 연결시켜 생각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그 머리를 상하게 하였지만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그런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외형적으로 “온 땅이 놀랍게 여겨”라고 말씀한 것과 같이 땅적 존재들에게는 회복되어 활동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래서 땅적 존재들이 그를 따르며 경배한다.
강하고 힘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이 “온 땅”이며 “이 땅에 사는 자들”(8절)이다. 그래서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라고 짐승을 대적할 존재가 없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짐승을 경배한다. 마치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 15:11)라고 한 것과 같이 말이다.
세상이 용으로부터 권세 받은 짐승을 경배한다는 것은, 세상이 추구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대로 보여준다. 세상은 힘을 원하고 능력을 원한다. 능력이 있고 힘 있는 존재로 산다는 것, 즉 강자로 사는 것은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이고 머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원하는 것이 세상이고 짐승이고 곧 용이요 마귀이며 사탄이다. 그런데 문제는 짐승의 머리에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다고 하였는데 현실적으로는 ‘주의 이름’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마 7:22) 행한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교회들이 주의 이름을 말하지만 기도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기도 만능주의의 이적을 추구한다. 오늘날 교회가 원하는 아들은 여자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 세상에서 잘나고 힘 있는 네피림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까지 세상의 머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은 결국 용과 일체가 된 짐승으로 계속 잘 나가는 삶, 그 안에서 더 풍요롭게 살도록 원한 것이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 보여주기를 원했던 그 마음이 오늘 우리의 마음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마 12:38).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5-7절). 용으로부터 하나님을 모독하는 입을 넘겨받아 비진리,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라고 하였다. 성도들이 죽임을 당하니(11:7) 세상적 관점에서 보자면 짐승이 승리한다. 그러나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8절)라고 말씀한다. 우리 성경에 “창세 이후로”라고 번역하였는데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창세 이전에’이다. 본문을 다시 직역하면 ‘창세 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이 땅에 사는 자들이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라는 말이다.
“어린 양의 생명책”이라고 생명책이 어린 양의 소유이다. 하늘나라에 생명책이라는 거대한 책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책이다. 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된 것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교회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생명책이 된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 사는 자들”(6절)과 “이 땅에 사는 자들”(8절)은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 이 땅에 속한 자들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짐승으로서 하나님을 비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믿음이 없는 상태가 비방자였다고 하였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블라스페모스)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블라스페미아)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0-32)
진리의 영 안에 있다는 것은 비방하지 않는 자가 된 것이다. 하나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않고 “일곱 머리”로 하나님과 같은 모습으로 드러내며 “열 뿔”로 자신의 힘과 권세를 드러낸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을 자랑하며 율법적 행위를 강조하는 그 상태가 비진리, 다른 예수, 다른 복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권세를 이적으로 나타내며 미혹한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전한다.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8-10)
“우는 사자”란 ‘포효하는 사자’라는 뜻이며, “굳건하게”라는 말의 헬라어 ‘스테리조’는 ‘고정시키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잠깐 고난을 받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신 그분이 온전하고 강하게 고정시키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9절)라고 말씀하였는데 귀가 있다고 해서 다 듣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 사는 자들”은 짐승이 전하는 비진리를 진리로 알아듣고 그를 따르며 경배한다. 짐승이 짐승의 우두머리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들을 귀가 주어진 자는 “하늘에 사는 자들”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10절).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라고 하였는데 헬라어 ‘휘파고’(떠나가다)를번역하지 않았는데 직역하면 ‘누가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정해진다면 그는 포로로 떠나간다. 누가 칼로 죽임을 당하도록 정해진다면 반드시 그가 칼로 죽임을 당하도록 하라 거룩하게 된 자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에 있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세상을 이기고자 한다. 기도로 말씀으로 무장해서 세상에서 낙오되지 말고 앞서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이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요 성도는 세상에서 지고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권세이다. 그것이 말씀에 사로잡힌 인내요 믿음이며 이김이다(2023082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