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반쯤 눈을 뜨다. 눈꺼풀이 떠지질 않는다. 온몸이 무겁고 나른하다. 애초에는 새벽 네 시부터 산행을 하기로 했었는데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 지금에서야 일어난 것이다. 충주 민예총 정재현 지부장의 소형트럭을 타고 대관령을 오르면서 차안에서 김밥으로 아침을 대신한다.
9시 40분 대관령 서편 휴게소에 도착했다. 안개가 살짝 끼어 있다. 오늘은 정 지부장, 장 화백과 함께 산행을 하기로 했다. 휴게소에 들러 간식 몇 가지를 샀다. 차를 주차장 한 켠에 세워 놓고 출발준비를 한다.
10시 대관령을 떠나 새봉으로 가는 능선길에 오른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헬기장이 나온다. 서쪽 산기슭에서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수만 평 규모의 구상나무 조림지를 지난다. 바람을 막아 주기 위해서 서쪽 산기슭 8,9부 능선에 통나무로 방책을 만들어 세워 놓았다.
10시 25분 대관령 중계소에 닿았다. 정문에는 수도가 있어 물을 받을 수 있다. 중계소 직원이 수질이 좋다며 물맛을 보라고 권한다. 조롱박으로 받아서 한 모금 마시니 물맛이 달고 시원하다. 중계소 담장옆으로 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국사 성황당이 왼쪽 계곡 아래로 보인다.
10시 55분 [강릉항공무선표지소] 입구에 도착했다. 새봉부근은 항공무선표지소가 다 차지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9부 능선으로 우회를 해야만 했다. 무선표지소를 조금 지나자 잡목이 무성하게 우거진 평전이 나타난다. 왼쪽으로는 광활한 [한일목장]의 목초지가 펼쳐져 있다. 내 평생 이렇게 드넓은 초원은 처음으로 본다. 능선이 밋밋해서 새봉을 어느 새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지나쳤다. 지도를 구정지도에서 또 다시 도암지도로 바꾼다.
오후 12시 30분 선자령[1100m]에 닿았다. 선자령은 강릉 초막골과 평창 횡계를 잇는 재다. [도암회]라는 단체에서 마가목 백 그루를 심었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마가목(天山花楸)은 청폐지해(淸肺止咳)와 보비생진(補脾生津)의 효능이 있어 폐결핵이나 위염, 복통에 좋다. 또한 비타민 A와 C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여름에 차로 마시면 더위와 갈증을 잊게 한다.
휴대전화가 울려 받아보니 [충주추어탕] 홍기돈 사장이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느라 고생이 많다면서 동해바다 싱싱한 생선회를 사 주러 오겠다는 것이 아닌가! 충주에서 곧 출발하겠다고 한다. 횡계에 도착하거든 다시 전화를 하라고 이르고는 전화를 끊었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생선회를 실컷 먹겠다. 한동안 목장의 목초지 한가운데를 걸어간다. 잘 자란 풀들이 싱그럽다.
1시 곤신봉과 보현사 삼거리에 도착했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보현사로 가는 길이다. 삼거리 정상부근에 고물 오토바이 한 대가 버려져 있다. 누가 고의로 갖다가 버린 것임에 틀림없다. 목초지는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된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목장의 목초지다.
1시 25분 곤신봉과 대공산성 갈림길에 닿았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산성이 나온다. 이 곳에도 푸르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산들바람에 풀잎들이 하늘거린다. 참으로 목가적인 풍경이다. 남진의 '님과 함께'라는 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노래를 부르면서 길을 가니 발걸음도 가볍다. 가사가 좀 유치하기는 하지만 그런들 어떠랴! 과연 남진은 이 곳을 와 보기나 했을까? 드넓은 초원이 계속 나타난다.
1시 33분 곤신봉에 오르다. 곤신봉 임도에 '仙者嶺 1200m'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아까 선자령을 지나왔는데, 똑같은 이름의 재가 또 나타난 것이다. 무엇인가 잘못 된 것 같다. 이 곳의 선자령은 평창 소동과 강릉 사기막리를 잇는 재다. 곤신봉에서 조금 내려오니 평평한 바위가 보인다. 여기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한다. 김밥과 소시지, 훈제 달걀, 오이 등을 먹으니 금방 배가 불러온다.
2시 45분 임도를 따라서 걷다가 삼양초지[三養草地] 동해전망대에 도착했다. 전망대에 올라 소금강 계곡의 경치를 넋을 잃고 바라본다. 능선을 따라서 임도가 끝없이 계속된다. 능선을 사이에 두고 대관령 목장지대와 소금강지대의 지형이 판이하게 다르다. 목장지대는 평평한 구릉인데 비해 소금강지대는 경사가 급한 암릉지대가 많다. 서고동저 지형으로 인해서 생겨난 특징이리라. 전망대 바위에는 삼양목장 목초지 조성내력이 음각되어 있다. 지도를 도암지도에서 연곡지도로 바꾼다. 스물 한 장째 지도다.
전망대를 내려오니 매봉이 바로 앞에 보인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매 세 마리가 상승기류를 타고 삼각편대를 이루면서 날고 있다. 한동안 제자리에서 그대로 떠 있기도 한다. 뛰어난 비행술이다. 그러다가 나를 안내라도 하듯이 매봉쪽으로 사라진다. 아하! 그래서 산이름이 매봉이로구나!
3시 30분 매봉에 오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부 다 삼양목장의 목초지다. 매봉을 내려가는데 진고개에서 온다는 등산객 한 사람이 올라온다. 대관령까지 간다고 한다. 물이 조금 남았기에 나누어주려고 했더니 사양을 한다.
매봉을 다 내려오니 키가 낮은 참나무숲이 초원 위에 그림같이 자리잡고 있다. 앉아서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인 평평한 바위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다. 그냥 가기가 아쉬워서 시원한 그늘에 앉아서 땀을 식힌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한가로이 흘러간다.
작은 봉우리를 앞에 두고 오르는데 꽃뱀 한 마리가 길 한가운데 있다가 풀섶으로 황급히 도망을 친다. 미당 서정주의 '화사'란 제목의 시가 떠오른다.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아주 관능적이고 원초적인 이미지를 띤 시다. 미당은 일제시대 때 친일행적으로 인하여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시인이다. 차라리 붓을 꺾고 침묵을 지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십여 년간이나 붓을 꺾었었는데.............
길가에는 연분홍색의 조팝나무꽃, 자주빛 꿀풀꽃, 연분홍 노루오줌꽃들이 즐비하게 피어 있다. 왼쪽 산비탈 아래로 삼양목장의 축사와 아파트가 보인다. 이런 산골짜기에 아파트가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4시 30분 삼양목장과 소황병산 갈림길에 닿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산행을 하기로 되어 있다. 친구인 [충주추어탕] 홍 사장과 통화가 되어 삼양목장 입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삼양목장 아파트까지 왔을 때 장 화백 부인이 차를 가지고 데리러 왔다. 목장의 입구로 내려가니 홍사장의 차가 보인다. 홍 사장은 점심도 굶은 채 내가 산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미안하던지...
장화백 부인을 먼저 보내고 홍 사장과 함께 진부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산채비빔밥으로 요기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진고개로 올라가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동대산이 바로 왼쪽에 있다. 노인봉은 오른쪽에 있는데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
진고개를 넘어 주문진 생선회를 파는 시장으로 갔다. 시장안 [일출]횟집에서 소주를 곁들여 오징어와 놀래미, 가자미회를 먹으니 꿀맛이다. 놀래미와 가자미는 뼈채 세꼬시로 회를 쳤는데 고소하면서도 찰져 입에서 살살 녹는 것 같다. 생선회로 배가 불러 밥생각은 나지도 않는다.
횟집을 나와 강릉 [재즈보트]로 돌아와 생맥주를 한 잔씩 더 했다. 홍 사장을 충주로 떠나 보내고 빨래와 샤워를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술이 얼콰하게 오른다. 양말을 빨다가 보니 한 짝이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만큼 구멍이 크게 뚫려서 버렸다. 트렉스타 트레킹화 신발창도 너덜너덜해져서 버리고 새 것으로 갈았다. 트렉스타 트레킹화는 장기간 산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적당하지가 않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드니 천국에 온 것 같다. 바로 꿈나라로 들어가다.
2001년 6월 28일[목].흐림.
이 글은 2001년 5월12일부터 7월10일까지 60일동안 백두대간을 순례한 기록입니다. 이 날은 대관령을 떠나 대관령무선중계소, 새봉, 선자령, 곤신봉, 동해전망대, 매봉을 넘어서 삼양목장으로 내려 왔습니다. 정재현 민예총 충주지부장, 장 백 화백과 함께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행을 하니 힘든 줄도 모르겠더군요. 드넓은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지요. 하루종일 목장길만 따라서 걸었답니다. 충주에서 '충주추어탕'집을 하는 친구 홍기돈 사장이 여기까지 달려와 영양보충을 하라고 생선회를 실컷 먹여 주더군요. 아주 신바람나는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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