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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이민주
김 선생은 의사 얼굴을 힐끗 바라봤다.
의사는 엄지손가락으로 마우스를 움직이며 모니터에 집중했다. 그의 눈동자는 커서가 가리키는 곳을 예의주시 하면서 따라 갔다. 굳어 있는 표정이 어떤 불안을 예고하고 있었다. 김 선생은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의사의 입술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죽음 같은 정적이 흘렀다. 평소에 건강을 무시하며 살았던 죄가 얼마나 클까?
김 선생은 2년 마다 돌아오는 건강검진을 귀찮아서 두 번 빼먹었다. 그 후 아내의 등쌀에 못 이겨 기초검진과 초음파를 했다. 건강검진 결과를 본 담당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바로 대학병원으로 가서 조직검사 할 것을 권유했다. 한 달 후 조직검사 결과를 보기 위해 김 선생은 득달같이 달려왔다.
김 선생은 재판장에서 준엄한 판사의 판결을 기다리는 것처럼 떨렸다. 마음속으로 형량을 가볍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였다. 종교는 없지만 급한 대로 하나님을 찾았다. 이미 건강상의 피의자 신분이 된 김 선생은 제발 무죄는 아니더라도 형량이 가볍기를 빌었다. 목숨이 판관인 의사의 말 한마디에 왔다 갔다 하는 절박한 상황이 못 견디게 낯설고 괴로웠다.
의사가 드디어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김 선생을 잠시 바라보았다. 곧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하더니 커서가 가리키는 곳을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 보이시죠? 이게 혹인데 모양이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커질 때까지 몰랐다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진즉 검사를 하시지 그랬어요.”
일말의 희망을 기대했던 김 선생은 해머로 머리를 세게 두드려 맞은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럼 3기 쯤 된가요?”
“네! 그렇습니다.”
의사는 단호하고도 건조하게 대답을 하였다. 이런 말기 환자들을 만나면 의사로서 괴롭다는 것이었다.
준엄한 심판관의 사형 언도에 김 선생은 의사 가운을 붙잡고 살려달라고 빌고 싶었다.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아서라도 목숨을 부지하고 싶었다. 무조건 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언제부터 이렇게 생의 의지가 불타올랐는지 자신도 놀라웠다. 순간적으로 자존감이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망연자실한 김 선생을 간호사가 부축을 해서 환자 대기실 의자에 앉혔다.
“괜찮으시겠어요?”
간호사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김 선생은 슬픔으로 가득 찬 마음을 어떻게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슬픔을 문지르고 문지르다가 습자지처럼 얇아져 자칫 온 몸과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았다. 진료 대기석 구석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꿈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팔뚝을 꼬집었다.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내 목숨인데 왜 의사가 함부로 사형선고를 해야 하지?
“제발 오진이라고 해주십시오.”
창가에 앉은 김 선생은 중얼거리며 엊그제 이발한 짧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신은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는지 알 수가 없고 살고만 싶었다. 그는 낼 모레이면 정년퇴직할 나이였다. 100세 시대에 그리 많은 나이도 그렇다고 작은 나이도 아니었다.
병원을 나선 김 선생은 차를 몰고 무작정 달렸다. 차츰 시내를 벗어나고 있었다. 여전히 거리에는 사람들이 생기 있는 모습으로 지나다녔고 삼월의 햇살은 빛났다.
“이게 뭐지? 나만 빼고 모두들 행복해 보이고.”
그는 뭔가 억울한 느낌이 잔뜩 들었다. 차를 무계산 쪽으로 몰았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내와 딸 지현이가 있는 아파트로 아무 일이 없는 척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내랑 같이 안 오길 잘했다. 성격으로 봐서 같이 왔으면 병원에서 울고불고 야단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 하루 결근계를 낸 학교로 다시 갈 수도 없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인생이 무너지는가 싶어 허공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직장생활하며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오늘 결과에 황망하기만 했다.
무계산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무계사가 있는 길을 따라 걸었다. 갓 피어난 개나리가 길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포장된 도로였지만 조금 가팔라서인지 숨이 찼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친구끼리 또는 부부끼리 걸어가는 발걸음들이 부러웠다.
김 선생은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스님의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모처럼 듣는 목탁소리에 격해진 감정이 누그러졌다. 의사에게 받았던 사형선고가 거짓말처럼 생각되었다.
“얼마나 오진이 많은데.”
혼자 입 밖으로 나온 말이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합장을 하며 무계사 안으로 들어갔다. 스님이 목탁 소리를 내보내며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 절 문으로 들어오라고 한 것일까? 김 선생은 목탁 소리가 자신에게 보내는 어떤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입구에 “욕심을 버려라.” 라는 문구가 적힌 돌이 세워져 있었다. 버리고 싶다고 해서 욕심이 버려지나? 이미 마음덩어리가 욕심인데. 욕심을 비우면 암세포도 사라질까? 김 선생은 절망스런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사선으로 빗질된 절 마당의 흙 내음이 마음을 안정시켰다. 동자승이 쓸었을까? 김 선생은 정갈한 마당을 보며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열다섯 살 애기머슴 복만이가 과거 두꺼운 시간을 깨고 나왔다. 소년은 빗질을 잘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마당을 쓸었다. 마당을 쓸고 나서 얻어먹는 밥은 소년에게 꿀맛이었다. 같은 나이인데 김 선생은 중학생이었고 복만이는 자기 아버지의 노름빚에 팔린 머슴이었다. 김 선생은 그때는 몰랐다. 소년의 노동이 얼마나 신성했는지를. 어린 소년의 노동을 당연시했고 속으로 무시했던 과거를 반추하자 부끄러웠다. 무계사에 와서야 비로소 그녀석의 마음을 느껴보았다. 김 선생은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그는 대웅전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향을 사른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곧 화려한 단청색깔에 약간 미열이 느껴지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대웅전 흙바닥 지하에서 엎드려 있는 고양이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 선생은 고양이가 자신을 쏘아보는 것 같았다.
‘혹시 복만이가 죽어서 고양이로 환생했을까? 내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는지 몰라.’
김 선생은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사과하고 싶었다. 인기척을 느낀 고양이가 잽싸게 도망을 갔다. 고양이를 따라 달려가다가 멈추고 말았다. 공양간 큰 아궁이 속으로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돌아와 대웅전 앞에 섰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서 있으니 바람에 풍경이 울었다. 매달린 목어가 눈을 뜨고 내려다보았다. 스님이 단정하게 꿇고 앉아 부처님을 향해 목탁을 두드리며 독경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머리를 빡빡 깎고 중의 길로 들어서면 어떨까?’
김 선생은 이 길로 불교에 귀의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독경이 끝나면 스님한테 의논하고 싶었다. 십여 분을 서 있어도 독경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기다릴까? 그냥 가던 길을 갈까? 5분을 서성거렸다. 스님은 아직 불경 삼매경에 빠져 있다. 김 선생은 포기를 하고 마당으로 내려오는 층계를 밟았다. 절 문을 나섰다. 독경소리를 배낭처럼 짊어지고 작은 봉우리를 향해서 걸어갔다.
무계산 봉우리로 가는 길은 비교적 완만했으나 가파른 길도 나왔다. 가파른 길에선 숨이 헉헉 거렸다. 힘든 산길 때문인지 기침이 나오고 어깨가 뻐근했다. 무계산에 온 지도 10년은 된 것 같다.
아내가 그렇게 산에 한 번 가자해도 가질 않았다. 토, 일요일엔 쉬고 싶었다. 읽고 싶은 책 한 권 들고 서재에 틀어박혀 지냈다. 읽었던 책이 끝나지 않으면 아내가 차려주는 세 끼 밥상도 두세 번 불러야 식탁으로 나갔다. 고기가 있지 않으면 밥상 메인이 뭐냐며 투정을 부렸다. 그 대가를 혹독히 치루는 것 같다. 얼마나 몸이 소리 없이 망가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중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참새가 하늘을 향해 비행을 하면서 노래 불렀다.
“무엇이 그리 좋냐? 나는 슬픈데?”
눈부신 하늘을 향해 소리 지르다가 아청빛으로 쏟아지는 하늘 색깔에 눈이 시려 눈을 감았다. 숲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눈을 숲으로 돌렸다. 다람쥐이었다. 토종 다람쥐를 오랜만에 보았다. 작은 다람쥐가 겨울을 잘 이기고 봄 산을 누비고 다니는 것을 보자 기특했다. 큰 동물에 잡히지 않고 통통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다람쥐가 넘 귀여웠다.
“그래 나도 절대로 암세포에게 잡히지 않을 거야.”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산으로 가는 길은 탄탄했다가 가파른 언덕이 나오기도 했다. 참 인생이란 그렇지. 탄탄한 길만 계속 걷는다고 해서 행복할까? 그렇지만 암 진단을 받는 것은 죽음 선고인데 …. 김 선생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늘어진 벤치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 있는 곳으로 가기가 싫어졌다. 이젠 건강치 못한 몸을 확인한 이상 그들과 다름을 인정하기 싫어졌다. 건강한 신체를 가진 그들이 눈물 나도록 부러웠다.
산봉우리로 가는 작은 길이 나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송전탑이 보였다. 걷다가 나무를 붙잡고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가 푹 내쉬었다. 속에 갇혀있는 공기가 품어져 나왔다. 피톤치드가 폐부를 뚫고 들어갔는지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나뭇가지가 튼튼한 곳에 바위가 있었다. 걸터앉았다. 돌에서 품어져 나온 차가운 기운이 엉덩이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가슴으로 전해졌다. 김 선생은 몇 시간동안 휴대폰을 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병원에서 무음으로 돌렸던 게 그대로 뒀던 것이다. 휴대폰을 열었다. 아내한테 10통화가 부재중으로 찍혀 있었다. 카톡을 열었다.
“여보! 어디야?”
“조직검사 결과 나왔어?
“괜찮은 거지?
“왜 전화를 안 받아?”
“카톡 본 즉시 전화 줘?
“나 숨넘어갈 것 같애.”
김 선생은 아내한테 전화를 하지 않고 휴대폰 폴더를 닫았다. 다시 봉우리를 향해 걸었다. 걷다보니 땀이 비질비질 흘렀다.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걷다보니 한결 몸이 개운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감이 올라왔다. 말기암이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천히 한걸음씩 발을 내디디었다. 이상하게도 발을 내디딜 때마다 생의 의지가 생기는 것이었다.
“용기를 내자. 힘을 내자.”
김 선생은 두 주먹을 쥐고 하늘을 바라보며 외쳤다. 더 걸어가니 쉼터 벤치가 반겼다.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을 위해 비켜준 것처럼 생각이 들자 고마웠다. 바람이 골짜기에서 불어와 이마에 땀방울을 식혀 주었다. 아파트가 빌딩처럼 서 있는 도심지가 환히 보였다. 김 선생은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찾아보았다. 무계산과는 반대 방향인지란 아주 멀리 보였다. 집이 있는 쪽을 향해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아내는 소식 없는 남편 때문에 지금 멘붕이 되었겠지.’
아내와 딸에게 미안했다. 딸 지현은 대학 졸업반으로 한참 공부에 바빴다. 김 선생은 지현이를 떠올리자 마음이 아팠다. 결혼한 지 5년 만에 얻은 귀한 딸이었다. 딸이 결혼해서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폴더를 여니 메인 창에서 지현이가 웃고 있다. 아빠가 폐암 말기라고 하면 얼마나 슬퍼할까? 누가 공부하라고 안 해도 스스로 하는 모범생이었다. 오히려 일찍 자라고 하면 조금만 더 하고 자겠다고 하던 녀석이다. 누가 뭐래도 속이 알찬 아이다.
“기특한 녀석!”
김 선생은 가볍게 웃으며 숫자 1번을 길게 눌렀다. 아내라는 글자와 하트가 동시에 떴다. 금방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어디야?”
아내의 말투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당신 사람의 애간장을 그렇게 녹여도 되는 거야? 뭐래 의사가.”
“응! 미안해. 내가 소리모드로 돌려놓는 걸 깜박했어. 나 암이래. 그것도 말기.”
“… ….”
갑자기 소리가 끊겼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아내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니지? 나 겁주려고 일부러 그런 거지? 흑흑!”
아내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마음이 착잡해진 김 선생은 집으로 가겠다고 하면서 서둘러 종료를 했다. 산에서 얻은 고요한 평화가 아내의 울음으로 인해 깨졌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의사가 아니 판사가 내린 준엄한 판결이 생각났다. 아내한테 그대로 말한 게 후회가 되었다. 그냥 염증이 심하다고만 할 걸. 이미 뱉어버린 말을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막막했다. 이대로 땅 속으로 꺼져버리고 싶었다. 정신없이 길 가운데로 내려오는데 송신소에서 내려오는 차가 빵빵 거렸다. 차라리 저 차에 치어 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지 나 좋자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지 않는가. 운전기사가 뭔 죄가 있다고. 허접해진 마음에 허공에다 돌팔매라도 하고 싶었다. 마음을 다잡고 김 선생은 길을 내려 왔다.
아내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충혈 되어 있었다. 온 정성을 다해 아침 5첩 밥상을 날마다 차려내는 아내였다. 요리 솜씨가 좋은 그녀는 저녁에도 7첩 밥상을 차려 퇴근한 김 선생 앞에 내놓았다. 거의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왜 아내는 멀쩡하고 나만 이렇게 병이 들었는가? 김 선생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아내 이름은 성희다. 5년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같은 대학교 독서 동아리에서 만난 2년 후배였다. 아내는 줄곧 도시에서 살아온 여자였다. 겉모습은 지적 허영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름이 아직 안 왔는데도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게 특징이었다. 멋 부리려고 쓴 것은 아니라고 했다.
“나는 90세가 넘어도 독서를 할 거야. 그러려면 자외선으로부터 눈을 보호해야 해.”
독서 클럽회원들이 딴지를 걸지 못하도록 미리 선포를 했다.
그녀는 헤밍웨이를 좋아했고 그가 쓴 소설을 즐겨 읽었다. 처음 만났을 때 헤밍웨이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연보랏빛 브라우스를 입은 옷차림에 그 소설책이 별로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아 오히려 인상이 깊었다. 헤밍웨이를 좋아한 문학소녀답게 여리면서도 허무주의 색채가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그녀가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는 전쟁소설을 귀한 보물 다루듯이 품에 안고 있는 게 의아해서 관심이 갔다. 사실 대학생 김 선생도 헤밍웨이 소설『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고 영화도 본 터라 더욱 그녀에게 마음을 두게 되었다. 그렇게 둘은 가까워졌다. 성희는 실제 영화 속에 나오는 잉그리드 버그만과 여린 듯 강인한 모습이 닮아 보이기도 했다.
만난 지 일주년 때 첫 키스를 했다. 도서관에서 나오다가 캠퍼스 뒤편으로 어스름한 곳에서였다. 뒤뜰에 피어있는 철쭉이 그날따라 요염했다. 꽃빛이 성희에게 어룽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잡은 손을 끌어당겼다.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품에 힘없이 안겼다. 김 선생 은호의 입술이 다가가자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코는 어떻게 해?”
영화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이 했던 말을 하자 그는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우린 서양인이 아니잖아.”
진지한 분위기가 깨지자 은호는 아무소리 말라는 듯이 고개를 약간 옆으로 비켜 성희의 입술을 덮쳤다. 그날 이후로 관계가 진전되고 캠퍼스 커플로 공식 연인이 되었다. 사귄 지 4년 차 될 무렵 은호는 연애하는 게 심드렁해졌다. 허무주의가 밴 성희의 얼굴빛이 학원 강사를 하면서 달라졌다. 때론 살짝 화가 나면 그 큰 눈을 부릅뜨기도 했고 목소리도 굵어졌다. 예전의 순수하고 여린 듯 강인한 이미지의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사실 은호는 막 학교에 새내기 선생님으로 출근하면서 바빠져 누굴 만난다는 자체가 힘들기도 했다. 여자의 직감은 정확했다.
“자기! 좀 변한 것 같아.”
“내가 아니고 네가 변했다는 생각 안 해봤어?”
“내가 왜?”
“됐고! 지금 새 학교에 신학기야. 적응하기도 힘들어.”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환경의 영향을 받기도 해서 외모나 성격이 변할 순 있지.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아. 내가 노력해 볼게.”
결정적인 이유는 같은 성씨에 본이 같다며 김 선생 아버지가 반대를 했다. 피곤하다며 이리저리 피하는 김 선생을 성희는 끈질기게 쫓아다녔다. 하숙집까지 찾아오자 주인아주머니에게 아직 퇴근하지 않았다고 거짓말 부탁까지 했다. 뭔 사정을 모르는 성희는 김 선생의 속옷을 깨끗이 빨아 다림질까지 해서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께 맡겨놓곤 했다.
“아가씨가 참하던데 왜 그렇게 피해요?”
안타까워하던 하숙집 아줌마가 묻자 그때서야 아버지가 반대하는 사정을 이야기 했다. 그 이야기가 성희의 귀에 들어가고 그녀는 시골 먼 곳까지 버스를 타고 김 선생 아버지를 찾아갔다. 큰 절을 올리고 사온 홍삼을 드리면서 찾아온 까닭을 말씀 드렸다.
“아버님! 은호 씨를 많이 사랑합니다. 지금 세상에 동성동본은 문제가 안 됩니다. 은호 씨를 뒷바라지 잘할 자신이 있으니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성희는 무릎을 꿇고 앉아 간절하게 말했다.
“은호에게 잘 이야기해 볼 테니 아가씨는 그만 돌아가요.”
그의 아버지는 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홍삼 박스를 든 성희의 두 번째 방문이 이어지자 그 진심에 아버지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내가 동성동본이 같아 반대한 것은 분명했지만 이 시간 이후론 그 마음 버리겠으니 우리 아들의 마음을 얻으시오.”
김 선생의 아버지는 이왕이면 다른 성씨의 여자를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읍내에 사는 친구 면장 딸 윤주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윤주는 김 선생과 남녀공학인 읍내 중학교를 같이 다녔다. 둘은 1등을 번갈아가며 했다. 그녀는 교육대를 나와 읍내서 초등교사 발령을 받고 재직 중이었다. 김 선생 아버지는 맞벌이를 하더라도 초등교사라면 일찍 퇴근하고 육아에 도움이 많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윤주도 중학교 때부터 은근히 김 선생에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친구인 면장은 사윗감을 의사나 약사를 눈여겨봤다. 그런 점을 알기에 섣불리 면장 친구에게 마음을 내보일 수 없었다.
성희는 친구들이 소개팅을 주선해도 거절을 하였다. 그녀는 예전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무던히 애썼다. 김 선생에게 꽃잎을 편지지에 붙여서 예쁜 편지를 쓰기도 했다. 편지라면 자신이 넘쳤다. 고등학교 때 국군장병께 편지를 쓰면 언제나 답장을 받아낸 이력으로 가을엔 단풍잎을 주워 편지를 썼다. 김 선생은 편지를 받고 조금씩 맘이 움직였다. 자신이 뭐라고. 한 여자의 순정을 무시할 만한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신을 돌이켜 보니 성희의 진심이 아름답게 닿는 것이었다.
관계회복을 어렵게 한 두 사람은 양쪽 집안 어른들을 모시고 상견례를 치렀다. 단아한 옥색 투피스 차림을 한 김 선생 어머니는 나이보다 훨씬 고와 보였다. 성희는 백화점에서 준비한 실크 스카프를 예비 시어머니에게 매어 드렸다. 스카프란 말에 김 선생 어머니가 좋아하는 모습이 역력해 성희는 기뻤다. 그렇게 결혼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결혼 프러포즈를 성희가 할 정도로 그녀는 김 선생을 사랑했다. 친구가 하는 작은 카페 하나를 2시간 빌렸다. 직접 바닥에 분홍 장미꽃을 하트 모양으로 깔고 천장에 풍선을 매달았다. 라이브로 마음을 전했다. 선물은 예쁘게 포장한 상자 안에 세련되고 심플한 파란색 넥타이를 담았다. 감동한 김 선생은 성희를 안았다.
“코는 어떡해?”
가볍게 입술에 대고 키스를 하자 성희는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장미꽃이 화려한 오월 김 선생은 그 넥타이를 매고 결혼식장에서 새 출발을 하였다.
아내는 산에서 내려온다는 김 선생의 연락을 받고 저녁을 준비해놓았다. 결혼하고 5년 만에 아이가 생기자 학원을 그만 둔 아내는 가정 살림만 했다. 살림 하면서 딸과 김 선생만을 바라보며 내조를 했다. 그게 그녀에겐 행복이었다.
다른 때보다 반찬이 더 걸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김 선생은 식사를 했다. 끓여놓으라 했던 청국장이 뚝배기에 담겨져 나왔다. 식탁 위에서 아직도 보글보글 끓고 있는 청국장을 한 숟갈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예전에 어머니가 해줬던 맛을 느껴보려고 했으나 혀에 착 감기는 요란한 양념 맛만 느껴졌다. 아내는 옆에서 밥 먹는 것을 지켜볼 뿐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내일 서울 큰 병원으로 갑시다.”
“뭐 하러 서울까지 가? 나더러 또 같은 준엄한 판사의 판결을 들으라고? 그건 나를 두 번 죽이는 일이야.”
“그럼 암으로 유명한 한의원 가볼까?”
“돈이 썩었니?”
김 선생은 젓가락을 든 채 버럭 성을 내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당신 이대로 죽고 싶어?”
말이 먹히지 않자 아내도 지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아내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급기야 소리 내어 아이처럼 울었다. 그때서야 김 선생은 목소리를 낮추고 조단조단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산에서 많이 생각해 봤는데 6개월 휴직계 내고 일단 시골로 갈 거야. 시골에서 살면서 자연식 요법으로 다스리고 싶어. 좋은 공기를 마시고 어머니가 만든 청국장을 먹으면서 몸을 흙에 밀착 시키는 거야. 사람의 몸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말도 있잖아.”
불안감이 가득 찬 아내는 듣지 않고 서울 큰 병원으로 가서 다시 검사를 받아보자고 졸랐다.
“내 몸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김 선생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이미 시골생활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더 이상 말릴 생각하지 말라고 못 박았다.
“나는 당신에게 도대체 어떤 존재야?”
아내는 울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미 시골 부모님께 연락을 한 상태였다. 검진 결과에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이제 초기이니 너무 걱정 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켰다. 어머니는 너무 걱정 말라며 요즘은 의술이 좋아져서 암환자도 살 수 있다며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김 선생은 시골에서 묵을 수 있도록 사방에 흙을 짓이겨 만든 아랫방을 치워달라고 했다. 아랫방은 60년 전 집을 지을 때 흙으로 만든 방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방에서 자고 나면 몸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방들은 시멘트로 개조를 했는데 아랫방은 그대로 두었다. 아궁이도 있어 불을 땔 수 있었다.
침대에 누었으나 김 선생도 아내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동안 아내에게 아이처럼 투정부리고 성깔을 부렸던 과거가 떠올라 미안했다. 최선을 다하며 산 아내를 사회적 지식에 둔하다고 평가절하 했던 어리석음이 떠오르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지난날을 헤집어 보면 심지어 언어폭력을 행사한 날도 있었는데 잘 참아준 아내가 고마웠다. 맞춰 사느라 고생한 아내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아내는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여보! 미안해. 나를 이해해주면 안되겠어?”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남편의 목소리에 아내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래요! 이해해요.”
“그동안 미안했어. 잘해주지도 못하고.”
“…….”
“오늘이 부부의 날인데 당신한테 슬픔만 주었네. 선물은커녕 울게 해서 정말 면목 없어. 여태까지 결혼기념일 한번 챙기지도 않고 툭하면 화냈던 일 사과 할게.
세상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개 속이라는 걸 왜 이제야 깨달았는지. 길 건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 일하다가 다쳐 죽은 사람, 다들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상상 못하지. 남아 있는 가족들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겠어. 나 역시 이렇게 죽음 선고를 받을 줄 꿈에도 몰랐지. 그래도 나는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해. 생을 정리할 시간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야. 생전 신약이 개발 된다면 더 오래 살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니 맘이 편해지더군. 아니지 행운아라고 말해야지.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해.”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내가 부드럽게 말했다.
“마음 무너졌을 텐데 그렇게 생각해줘서 참 든든하네. 당신은 반드시 잘 이겨낼 거야.”
“어차피 우린 누구나 태어나면서 사형 선고를 받았어. 그것도 깨닫지 못하고 그동안 내가 너무 자만하게 살았지. 행복이 뭔지도 모르고 바보같이 살았어. 살아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달아 라고 신이 일침을 주신 것 같기도 해. 그 일침이 무지 아프긴 하군. 이제부터 새로운 출발이다 생각하고 낮은 자세로 열심히 살아볼 거야. 팔십이 다된 부모님께는 미안하지만 시골로 가서 건강한 나를 만들 거야. 자연인처럼 살다가 좋아지면 당신이랑 영원히 시골에서 살 수도 있고. 지현이와 당신을 위해 꼭 살 거니까 너무 걱정 하지 마.”
김 선생은 슬며시 아내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아내가 포근하게 안겨왔다.
이튿날 김 선생은 교육청으로 찾아가 일단 6개월 휴직 신청을 했다. 학교로 찾아가 담임을 맡았던 애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아이들이 건강해서 돌아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알람이 없어도 아침 새들의 지저귐에 잠이 깨었다. 동창이 밝아오고 있었다. 벌써 한 달 째였다. 김 선생은 신흥춘 밭이 있는 들길을 1시간씩 산책하는 게 하루를 시작하는 일이었다. 검둥이 코코를 앞세우고 조금 빠른 걸음을 걸으면 코코는 앞서서 뛰어갔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풀잎에서 풀향기가 났다. 들판의 푸른 물결이 상큼했다. 도회지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냄새였다. 바람은 옵션으로 끼어 들었다. 산책 후면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코코와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가 청국장을 끓여놓고 기다렸다.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는 청국장 냄새가 나면 식욕이 돋았다. 직접 농사지은 콩으로 짚을 깔아 아랫목에서 청국장을 띄워 끓인 청국장은 구수했다. 김 선생이 온 뒤로 어머니는 청국장을 날마다 끓였다. 텃밭에서 자란 부추와 상추 그리고 열무로 반찬을 만들어 밥상을 차렸다. 어렸을 때 끓여주신 청국장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보리와 콩을 넣은 거친 밥은 꼭꼭 씹게 만들었다.
김 선생은 소일거리로 마당에 있는 텃밭에 풀을 뽑고 화단의 꽃을 가꾸었다. 처음엔 출근하지 않은 자신이 많이 낯설었는데 한 달이 지나니 시골 생활에 익숙해졌다. 채소와 꽃들은 김 선생의 손길을 받아 싱싱하고 윤이 났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관심을 갖고 예뻐해야 잘 자라며 향기롭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책을 읽거나 잠깐씩 낮잠을 잤다. 방 벽 흙에서 품어져 나오는 기운으로 잠깐씩 낮잠을 자고나면 머리가 개운했다. 도회지 시멘트 벽 공간에서의 낮잠은 두드려 맞은 것처럼 몸이 찌뿌둥했는데 그게 없어졌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사람의 몸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더니 정말 믿어졌다. 마당 텃밭의 흙을 만지기만 해도 건강해진 느낌이 났다.
김 선생의 아버지는 올해부터 농약 대신 친환경 우렁이 농법으로 농사를 지었다. 아들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우렁이를 논에 투여하면 잡초를 먹어치우므로 제초제를 쓸 필요가 없다. 농약의 독성을 알고 있는 김 선생은 우렁이 농법을 환영했다.
모내기를 하던 날 새벽에 김 선생은 아버지를 따라 직접 논으로 갔다. 옛날엔 거머리 물려가며 일일이 손으로 심었지만 지금은 육묘상에서 기른 모를 이앙기가 심는다. 갈 필요가 없긴 했지만 김 선생은 모 심을 논배미를 보고 싶었다. 모자를 쓰고 허름한 잠방이에 장화를 신으니 영락없는 농부였다. 약간 안개가 스멀거리는 농로를 따라 걷는데 아카시아 우거진 곳에 여자로 보이는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좀 더 걸어가니 안개가 걷히면서 정체가 드러났다.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동시에 세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윤주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오호! 은호도 왔네.”
“윤주 너 읍내가 아닌 여기 살고 있어?”
“응. 2년 전 이곳 학교로 교감 발령 받아왔어. 학교 한 번 놀러와.”
윤주는 휴대폰 케이스에 꽂힌 명함을 내밀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출근 준비해야 한다며 총총히 사라졌다.
뜻밖의 해후에 은호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아버지가 빨리 논으로 가보자며 재촉을 하였다. 써레질이 된 논은 정갈했다. 며칠 전 아버지와 다져놓은 논두렁이 두둑했다. 논바닥은 질펀하니 모심을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한쪽엔 육묘가 놓여 있었다. 이앙기가 와서 모를 심으면 그만이었다. 너른 들판을 둘러보니 마치 펄벅의『대지』왕릉이 된 듯싶었다. 논두렁을 걸으면서 이젠 모든 희망을 땅에서 찾고 싶었다. 흙과 함께 뒹굴고 노동을 하며 살리라는 결심이 굳어졌다. 그때 아버지가 말문을 열었다.
“윤주가 이혼했다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지?”
“이혼을 했어요?”
윤주가 시골 학교로 온 것도 이혼 소식도 놀라웠다. 김 선생은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말없이 논둑길만 걸었다. 아버지는 논두렁이 잘 다져졌는지 꼼꼼하게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모내기가 끝나면 논두렁에 메주콩을 심을 예정이었다.
김 선생은 시골로 온 뒤부터 모든 욕심이 사라졌다.
아프기 전은 돈에 굉장히 욕심이 많았다. 재산을 불리기 위하여 아파트 분양시장을 쫓아다녔다. 분양에 당첨이 되면 몇 천씩 P를 받고 넘겼다. 교사 봉급생활로는 만지기 어려운 목돈이 새 아파트에 당첨이 되어 그걸 되 파니 손쉽게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버지 명의까지 빌려 그런 수법으로 돈을 제법 벌었다. 죄의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경제관념이 뛰어나다고 오히려 자찬을 했다. 정말로 내 집이 필요한 사람은 당첨이 되지 않으면 P가 붙은 가격으로 사야했다. 아파트 가격을 올리게 만든 죄임에도 김 선생은 무감각 했다. 그렇게 돈을 얻은 대신 건강을 잃은 것이다. 시골에 와서야 그걸 진정으로 깨달았다. 가난하지만 맑고 청빈하게 사는 것도 얼마나 향기 나는 삶인지를.
김 선생의 얼굴빛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한결 몸이 가벼워지고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한결 윤기가 났다. 엊그제 내려왔던 아내의 말이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 얼굴이 많이 좋아 보이는데 병원에 가서 다시 검진 받아보자.”
“아직은 아니야. 최소한 6개월 더 치열하게 살아보고.”
욕심을 내려놓고 흙 앞에서 겸허하게 마음을 낮추니 건강이라는 선물이 찾아온 것 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조끔씩 익혀가고 있었다. 그는 흙 묻은 장화를 신은 채 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봤다. 푸른빛이 망막 안으로 가득 들어왔다. 부엌에서 나오는 청국장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그는 뒷주머니에 찔러두었던 윤주의 명함을 꺼냈다. 프로필을 죽죽 찢었다.
김 선생은 청국장 냄새를 따라 식당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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