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경 29.21-35 야고보서 3.14-26
믿음과 행함의 하나됨
1. 야고보라는 신약성경의 이름은 구약의 야곱에서 연유한 것이다. 말하자면 야곱의 희랍식 이름이다. 성경에 야고보는 여럿으로 나타난다. 제자 야고보가 있고, 주님의 동생 야고보도 있다. 이 편지를 쓴 이는 자기를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표현했다. 편지를 보낸 이가 누구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이 편지가 신앙상의 여러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편지가 언제 쓴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교회의 초기 시절 가운데 시간이 상당히 진전된 다음의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것은 편지에 제시된 그 기준들이 신앙적으로 원숙해진 단계에서 나올 수 있는 것들로 헤아려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다음에 나온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그 기준들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신앙적 관점들을 정리해 보도록 하자.
2. 야고보가 첫째로 우리에게 훈계하는 내용은 시험이다. 그는 하느님이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시험을 하지도 않으신다고 못박는다(약 1.13). 이는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서 첫째로 세워야 할 기준이 될 듯하다. 많은 이들이 신앙생활에 접어들면서 ‘하느님이 시험하셨다’는 의미가 담긴 말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구사하곤 한다. 상황에 따라서 어느 정도 용인될 수도 있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그것은 신성모독에 해당할 수 있거나 신앙적으로 왜곡된 내용인 경우가 적지 않다. 야고보는 단언한다. ‘시험은 욕심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14절). 이것은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서 늘 주의깊게 살펴야 할 일이다. 그는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낳는다고 했다(15절). 탐욕은 인간을 죄악으로 몰고간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벌의 상태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신앙에서 이러한 중차대한 기준을 우리에게 설정해주고 있는 것이다.
3. 이러한 교훈들은 영적인 차원에서 헤아리면, 영적인 것에 반대되는 모든 탐욕을 금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추구하는 영적인 내용들인 믿음과 사랑의 사실들을 바로 세우지 못하게 막는 요소를 금지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탐욕을 제어하지 않으면, 육체에 속한 성정이 제멋대로 날뛰어 온갖 악에 빠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육체가 영을 거스르고 영이 육체를 거스른다고 말했고(갈 5.17), 베드로는 “육체의 정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벧후 2:9-10)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탐욕은 주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니 그만두라는 것이 제자들의 전언이다(참조. VCR 327).
4. 오늘 읽은 본문의 중심이 될 주제를 살펴보자. 바로 믿음과 행함의 문제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이 문제이다. 편지를 면밀하게 들여다 보자. 야고보는 문제를 이렇게 제기한다: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면서 행함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믿음이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겠느냐?’(약 2.14).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실제로 있을 만한 일들을 예로 들었다. 형제가 헐벗고 굶주리는데 말로만 평안하라고 한다면 평안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행함을 갖지 않았다면, 그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죽은 [주검인] 것이다’(약 2.17). 그것은 한마디로 이렇게 규정된다: ‘행함으로 인해서 믿음이 완성된다’(약 2.22). 여기서 ‘완성된다’고 새긴 원어 ‘텔레이오오’(τελειόω)는 가지고 있는 어떤 목표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야고보는 그러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사례를 그 예로 들고 있다. 그는 거기에 이렇게 덧붙인다: ‘너희는 알아라! 행함으로 인하여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 하나로 인한 것은 아니다!’(약 2.24, 개인역). 여기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모노스, μόνος)다. 이 어구를 흔히 ‘~만’이라고 새긴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만으로’라고 읽게 되면, 그 핵심을 비켜 갈 수 있다. ‘믿음 하나로’라고 받아들여야 그것이 무언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헤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믿음 하나’가 아니라 다른 것도 있다는 사실을 내포하게 되기 때문이다. 믿음 하나가 아니라 다른 것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행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둘의 하나됨을 염두에 두게 된다.
5. ‘믿음과 행함은 둘로 나눌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야고보의 편지 바로 이 거론에서 깨달아야 할 것 같다. 바꾸어 말하면 믿음과 행함에 대한 논의는 사랑의 원리 또는 결합의 원리에서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읽은 본문 가운데 야곱과 라헬-레아 자매의 관계에서 파악할 수 있을 듯하다.
6.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고, 레아는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은 싫어하는 것이고, 그것은 나아가 미워하는 것이다. 야곱이 레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둘 사이에 ‘서로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서로 통한다는 것은 그 속에서 일치되는 것이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따라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내적인 일치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7. 믿음과 행함의 일치는 사람이 중생의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일어나야 할 일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진리는 인애의 선과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둘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결합이다. 믿음 또는 믿음의 진리는 외적인 것이고,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인애의 선은 내적인 것이다. 그것이 말씀에서 레아와 라헬로 표상된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 활기있게 되기 위해서는, 바꾸어 말하면 믿음의 진리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의지를 품어야 하는 것이다. 의지를 품을 때 믿음이 살아서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믿음과 행함이 하나가 되는 일인 것이다(참조. AC 3870). 믿음과 행함은 어느 하나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그 둘은 하나가 되어야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행함으로 믿음이 완성된다는 야고보의 훈계는 이러한 깨달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8. 기도에 대한 기준도 분명하다. 야고보는 기도하여 얻지 못하는 것은 잘못 구하는 것이 아닌지 검토하라고 훈계한다(약 4.2). 특히 그 간구가 욕심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살펴보라고 거듭 당부한다(약 4.3). 우리가 기도하면서, 또 일상 가운데서도 항상 성찰해보아야 할 내용이다. 그릇된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욕망에서 우러난 것은 아닌가? 이는 앞서 언급된 탐욕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헤아려진다.
9.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저항하고, 자기 것에서 도망하라!’(약 4.7, 개인역). 이는 우리가 받아들여 늘 마음에 새기며 성찰해야 할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할 내용이다. 특히 그는 ‘자기의 것’에서 도망하라고 했다. 바꾸어 말한다면, 이는 ‘나’한테서 떠나라는 말로 들린다. 너무 ‘내 것, 내 것’ 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아에서 떠남’ -이것이 야고보한테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신앙적 기준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