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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문학제](2011)<고 박재삼시인 회상>서지월-'박재삼선생님과 나'
박재삼선생님과 나
서 지 월(제자시인)
먼저 내가 자부하는 것은 박재삼선생님과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제자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스승과 제자라는 개념이 다양하겠지만 존경의 대상으로 스승이 될 수 있으며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도 스승이 될 것이며 문단의 경우 자신의 작품을 뽑아준 분 역시 스승으로 지칭해도 마땅하리라.
나는 8년이나 늦게 들어간 대학시절을 교수연구실 조교로 지냈는데 내가 모시고 있는 교수가 시인이라 어느 날 박재삼시집『추억에서』가 우편으로 배달되었다. 안그래도 박재삼 시에 심취해 있었는데 바로 그 시인의 시집이 연구실 교수의 이름으로 온 것이다. 나는 박재삼선생님 주소를 얼른 베껴 처음으로 편지를 써 보냈는데 꼭 선생님의 싸인된 시집을 받아보고 싶다고 했던 것 같다. 좀 지난 후 내 이름으로 박재삼선생님께서 직접 싸인한 시집『추억에서』가 배달 되었다.
대학시절 문학써클인 대구대맥향문학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어느 후배가 '박재삼 시를 읽지 않고 시를 쓴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라고 했는데 굉장한 쇼크를 받은 기억도 난다. 나는 박재삼 시집『추억에서 』를 독파하고 삼천포를 수 차례 찾아가 시집 속의 시의 현장을 누비기도 했으며 졸업논문도 박재삼론이었다.
대학졸업 후 경북 의성 산골 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 받아 갔는데 그때「전국교원학예술상」공모가 교육신보라는 신문에 공고 되었는데 그간 써놓은 수백 편의 시를 여러 날 밤 세워 뽑아서 투고했다. 『심상 』이라는 시전문지 신인작품 모집에도 투고했으며,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모집에도 투고했다. 왜냐하면 내 동료들은 스물 한두 살에서 스물 서너 살에 신춘문예 등 이미 시가 당선 되는 등 시인으로 등단하여 폼을 재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는데 나는 30세가 돠도록 시인이 못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다 싶어 그간 5,6년 줄기차게 시를 투고해도 뽑히질 않았으니까 말인데 동시 두 군데 시 세 군데를 투고했던 것이다. 나중에 연락이 왔지만 동시는 한 군데 시는 세 군데 모두 당선이 되었다.
그 첫번째가 1985년 10월 28일에 시상식을 가진「전국교원학예술상」문예부문 대상에 당선 되어 문교부장관상을 받은 것이다. 시골학교에서 하루 연가를 내고 상경했는데 박재삼선생님이 심사위원이었던 것이다. 그날 그 감격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는데 신문에서나 잡지에서 대하던 모습이었는데 좀 야윈 듯한 선생님의 모습을 처음 뵈었으니까 말이다. 어느 작품이 어떻게 당선되었는지도 궁금한 터였는데 <꽃잎이여>라는 시가 정갈하며 순수서정시의 모범이어서 그걸 뽑으셨다고 하셨다.
정식 시인으로 등단된 것은 아니었지만 선생님은 내게 이번에 당선된 시와 같은 작품 계속 5년 정도 생산해 내야 우리나라 시인중 50명인가 20명 안에 들 것이라고 귀뜸해 주셨다. 무슴 말인가 싶었으나 시인이 되어서도 그냥 시인이 아닌 시인이 되어라는 말씀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1987년인가 그때 『문학정신 』에서 한국 신진시인 21인 특집인가 있었는데 내가 뽑혔었다. 책을 받아보니 박재삼선생님께서는 나를 선정한 것이었다. 첫 대면 첫 만남을 뒤로 하며 길거리에서 선생님과 헤어질 땐 가로수의 플라타너스 넓은 잎이 아프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해 11월에는『심상 』신인상에 당선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는데 심사위원은 박재삼, 황금찬선생님이었다.『심상』신인상에 당선된 시는 도시의 서정을 읊은 <겨울 信號燈>외 3편이었는데 뒤에 선생님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작품을 두 번이나 보냈더군요. 작품이 많았어요' 라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 다음 해 8월에는『한국문학 』신인작품상에 당선되었다는 전화가 내가 근무하는 경북 춘양고등학교 교무실로 왔었다.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 서울로 한국문학사로 전화를 했는데 '김초혜입니다. 서지월선생님이시죠, 축하 드립니다' 하는 거였다. 나는 또 당선이 되었으니 궁금한 게 당선작과 심사위원을 물어봤다. 김초혜시인은 당선작은 <조선의 눈발>이며 심사위원은 박재삼-전봉건선생님이라고 알려주었다. 뒤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나의 시 <朝鮮의 눈발>을 뽑아놓고 투고작품마다 종이를 풀로 붙여 가려놓은 이름을 뜯어보니 지난해『심상』에 당선된 바 있는 신인 서지월이라는 것이 박재삼선생님 말씀이었고, 김초혜시인은 작품이 좋으면 또 당선시켜도 무방하다는 원칙을 세워 통과 되었다며 권위를 높이기 위해 1편만을 당선작으로 뽑았다고 전화통화 속에서 알려주었다.
이렇게 박재삼선생님 심사로 세 번에 걸쳐 줄줄이 시가 당선되었으니 인연도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나는 이런 일이 있기 전 즉, 독자시절 꿈속에 수년간에 걸쳐 박재삼선생님을 50여회 걸쳐 뵈었으며 미당 서정주선생님의 경우 10여회 뵈었다. 다 신이 예시해 준 은혜로 받아들여졌었다.
어느 해 겨울 나는 홍시를 따들고 서울 박재삼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박재삼선생님에 의해 시가 당선 되어 등단이란 걸 하게 되었으니까 먼 거리라도 찾아뵈어야 도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요즘같이 교통이 좋았으면 당일에 가능했겠지만 그때 하루 전날 가서 그림 그리는 친구화실에서 하룻밤 묶고 이튿날 뵈러 갔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은 앉아계시는 뒤편 장롱의 아래서랍을 여시더니 내게 화선지에 쓴 육필시 <아득하면 되리라>를 내미셨는데 아마 내 시인등단 기념으로 주신 것 같았다.
나는 그걸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선생님도 세상 뜨시고 난 오랜 세월 후 삼천포에 박재삼문학관이 건립되어 거기 기증했지만 내겐 두고두고 감동의 산물로 자리했었다. 아이러니칼한 것은 홍시이야기인데 내가 홍시를 처음 가지고 간 것도 박재삼선생님 댁이었으며 그 당시 미당 서정주선생님은 한번도 뵈온 적이 없는 관계였다. 나중의 일이었지만 미당 서정주선생님은 나태주 송수권 이성선 시집합동출판기념회 초청 받아가서 처음 뵙게 되었는데 그 후 미당 선생님께도 홍시를 가져갔던 것이다. 요행히 미당선생님은 내가 가지고 간 홍시 중에 까막까치가 파먹은 것이 있어 두 달 후인가 시를 써서 한국일보 시단에 발표하셨는데 그게 세상에 알려지면서 박재삼선생님께 갖다드린 건 파묻혀버린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박재삼선생님은 세상 뜨실 때까지 내게 말을 놓은 적이 없었는데 이 역시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말을 놓아주셨으면 했으나 선생님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 때는 내가 하도 연락이 없으니까 편지도 보내주셨지만 인편으로 '어디 벌러 가셨나?' 하고 내 생계를 걱정해 주시기도 했었다. 경북 의성과 춘양 산골에서의 2년에 걸친 교직을 끝으로 지금까지 전업으로만 살아왔으니까 그 후의 시기였던 것이다.
대구에도 많이 내려오셨는데 늘 신문을 보고 행사에 참여해 뵙게 되었다. 함께 한 방에 투숙하기도 했으며 문인들과 팔공산 케이블카도 탔는데 대구의 어느 원로시인이 박재삼선생님의 것은 매표하고 내 표는 예매하지 않아 오히려 선생님의 입장이 곤란해 선생님이 말을 해 매표하여 케이블카를 함께 탄 적도 있었는데 설움이라기 보다 초대하지 않은 무명신진시인의 대우가 그런 것이라는 걸 그때 배웠던 것이다. 대구 어느 식당의 술집에서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는데 박재삼선생님은 노래를 잘 못하시지만 딱 한 곡만 알고 계셨던 것 같은데 바로 <홍도야 우지 마라>였다.
겉으로 보기엔 해맑고 순한 인상을 지닌 박재삼선생님이었으나 나하고 개인적으로 대화할 때 보면 아주 엄격하시고 직관력도 뛰어나고 아주 날카로운 데가 있으신 분이었다. 보통 시인들은 잘 모르고 있는 부분이 그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울대학교 황동규선생님도 대구에 자주 내려오셨는데 한번은 식당으로 향하는 길거리를 걸으며 인사를 드렸더니 어디로 등단했느냐고 물어시면서 바로 심사위원이 누구셨냐고 하시길래 박재삼선생님이라 했더니 바로 ‘연락처를 적어달라’ 해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박재삼선생님께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추억은 다름 아닌『 한국문학』신인작품상 시상식 자리였다. 그때 나는 지각은 안했지만 너무 딱 맞는 시각에 도착하여 바로 앞으로 가서 앉게 된 바람에 사전에 윗분들게 두루 인사를 못 드린게 실례가 됐는데 내가 오히려 먼저 인사를 해야 하는데 박재삼선생님께서 오히려 앞으로 오셔서 '축하합니다'하셨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송구하여 어안이벙벙했었다.
『 한국문학』신인작품상 시상식이 당선발표가 되고 수 개월 늦게 치뤄졌었는데 그 사이 박재삼선생님 따님 결혼식이 있어 상경했더니만, 거기서 이형기 김종해선생님도 뵈었지만 김초혜시인도 만나게 되었는데 내가 인사를 해도 인사를 받지 않는 걸 김종해선생님이 곁에서 보고 '인사하는데 왜 인사를 안 받아?'라고 하신 것 같았는데 나중 알고 보니 당선이 되고나서 한국문학사에는 안 오고 박재삼선생님 따님 결혼식에는 왔다고 굉장히 섭섭했다는 것을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송수권선생님으로부터 들어 알았는데 김초혜시인이『 한국문학』을 그만둘 때까지 찬밥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문단활동을 하며 스승이신 박재삼선생님에 대한 찬사는 늘 전국방방곡곡에서 들려왔는데 그게 '한국시단에서 가장 때묻지 않는 시인'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른다. 물론 작품경향도 스승이나 나나 순수서정을 지향하는 시를 쓰는데 맥이 닿아있지만 감개무량했던 것이다. 그런 스승이 여러 합병증으로 자리에 누우시고 결국 눈을 감게 되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미당 서정주선생님께 전화로 알려드렸는데 미당선생님이 가장 아끼는 수제자가 박재삼선생님이라는 것도 세상이 다 아는 일이라 내가 전화로 알려드리자마자 미당선생님께서는 '그 착하고 때묻지 않은 사내가 갔구먼. 나보다 먼저 갔어!' 하시는 것이었다. 전화기 속 미당선생님 말씀의 그 어감이 나를 목 메이게 했었다.
박재삼선생님께서 세상 뜨시기 전 댁으로 가서 찾아뵌 적이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사무쳐오는데 '인생이 이렇게 허무할 줄 몰랐다'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가슴속에 박혀들었다. 선생님께서 드러누우시기 전 평소 자주 찾아뵈었는데 거실에는 미당 서정주선생님 육필시 <斷想>이 표구되어 걸려있었으며 건강상 술을 먹으면 안되는 금지령이 내려져 있는 때였다. 박재삼선생님은 내가 찾아온게 다행이란 듯한 표정으로 사모님이 잠깐 시장 간 사이 내게 '저기 냉장고에 가면 맥주가 있으니 좀 갖다 주세요'하는 것이었다. 스승의 말씀은 부모님 말씀 이상이라 아니 들을 수 없어 맥주를 가져와 따루어 드렸더니 그새 사모님께서 들어오셔서 들키고 말았는데 그때 나는 '술이 이렇게 좋은 것이로구나'하는 것도 알았다.
평소 박재삼선생님의 말씀 중에 고은선생님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고은선생님의 흠담은 전혀 없으셨고 단지 1980년대 민주화투쟁에 혼신의 힘을 다하며 감옥을 오가기도 하며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면서도 시간만 나면 박재삼선생님 사무실 앞에 찾아와 함께 차 한 잔 하고 간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시계계는 전연 달라도 두 분의 우의는 아주 돈독했었던 것 같아 한편으로 이해가 안 가서 내겐 크나큰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바둑하는 사람들 사무실에 책상 하나 놓고 박재삼선생님은 사무실로 써고 있었는데 심심하면 찾아오는 시인이 고은선생님이라는 것과 고은선생님과 출생연도가 같다고 신기한 듯 말씀하셨다.
당시 1980년대 시인들은 민주화투쟁하며 민중시를 쓰고 있었는데 서정시 쓰는 시인들을 비아냥거리며 같이 놀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서정시인들을 회색분자로 몰았는가 하면 매국노로 취급되는 시대였으니까.
박재삼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재미있는 것이 '냉쥬스맛'이라는 단어였다. 원고료에 의지해 살아가기 때문에 산문을 쓰는 때가 많아서 소재를 생각해 보니 '냉쥬스맛'인데 한자, 영어, 한글이 복합적으로 들어간 재미있는 단어라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그러했다. 남달리 시의 소재를 찾는 것도 쉽지 않는 일이지만 에세이 소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박재삼선생님 방에는 크다란 달력이 걸려 있었는데 한 달 속에 매일마다 메모가 되어있지 않은 날 없이 빽빽했으며 메모가 되어 있었다. 중복메모된 날도 여러 날 있었다. 선생님은 아주 힘겨워하시는 거였다. 청탁원고 마감날짜들이 대부분인데 산문을 싸야 돈이 되니 거의 산문청탁이라는 것이었다. 하나 쓰고 자고 나면 또 싸야하고 하시며 시달리시는 듯 지치시는 듯했다. 반대로 나는 언제 이런 날이 오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박재삼! 하면 좋아하지 않은 시인 없을 정도였는데 내가 갓 등단한 무렵부터 광주의 송수권선생님과 가깝게 지냈는데 나하고 박재삼선생님과의 스승과 제자 인연을 아주 부러워해 주신 분이 송수권선생님이셨다. 송수권선생님 역시 박재삼선생님께 매료되어 서울로 올라가 박재삼선생님 모시고 사진관부터 먼저 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광주 토요문학회 주관으로 쌍계사에서 여름시인학교가 열렸는데 송수권선생님 부름 받고 산 넘고 물 건너 갔더나만 박재삼선생님과 사모님께서 와 계셨는데 그때의 추억이 삼천포 박재삼시비 ‘천년의 바람’ 시비제막식과 함께 가장 기억에서 잊혀지질 않는 페이지로 남아있는데 쌍계사 대청마루에서 박재삼, 송수권선생님 그리고 나 세 사람이 찍은 사진이 기념비처럼 남아있으니 말이다.
스승께서 돌아가시고 1주기인가 되어 중앙일보에서 묘소참배 날짜를 잡아 광주에서는 송수권, 공주에서는 나태주, 속초에서는 이성선, 대구에서는 나 이렇게 구성되어 조촐한 묘지참배식을 거행했는데 이 자리는 다같이 전통서정시 내지는 순수시를 지향하며 쓰며 평소 박재삼선생님을 가장 흠모하는 한국시단의 후배시인들 또는 제자시인이이 모인 자리였다. 그때 내 수제자들인 정이랑 이은림 이채운시인도 참가했었다.
1987년 삼천포 박재삼시비 ‘천년의 바람’ 시비제막식은 대구 매일신문 문화단신에 난 기사를 보고 전날 밤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무작정 달려갔었는데 내가 갓 등단해 2년째 되던 해로 뭐가 뭔지 몰랐으나 스승의 시비 제막식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전날 밤 여관은 이미 구해놓고 잠은 오지 않고 해서 혼자 시가지로 어슬렁거리다가 어느 다방으로 갔더니 거기서 선생님과 삼천포 여러 문인들을 뵈온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선생님을 따라 선생님 형님댁에도 갔었는데 형님댁은 작은 골목 옆에 있었는데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가난이 형제의 가난으로 중첩되어있음을 그때 알았다.
ㅡ「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그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우주의 무한궤도 불변의 진리를 읊은 시를 갓 등단한 내게 육필로 써서 주셨던 박재삼선생님이셨다.
(2011년 5월 20일 집필)
- 약력
(출생 년도, 등단 년도, 등단지, 저서 등)
[서지월시인]
▲1955년, 대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과 연개소문과 같은 생일인 음력 5월 5일 단오날 대구 달성 출생.
▲1985년『 심상』신인상 시 당선.
▲1986년『 한국문학』신인작품상 시 당선.
▲1986년『 아동문예』신인문학상 수상.
▲2002년, 중국「장백산문학상」수상.
▲1999년,「전업작가 대한민국 정부특별문예창작지원금 1천만원 수혜시인」으로 선정됨.
▲시집으로 『 강물과 빨랫줄』,『소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 』,『백도라지꽃의 노래(白桔梗花之歌) 』,『지금은 눈물의 시간이 아니다 』등 있음.
▲현재,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 대구문인협회 외국문학분과위원장.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 공동의장.
▲한중공동 시전문지『북두성』한국측 편집주간. 한중문예창작대학, 대구시인학교 지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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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 78,「시산방」내, 徐芝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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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재삼선생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자세히 알게되었습니다
문인들과 제자들과의 아름다운 관계까지도...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누구나 등단시켜주신 스승은 못 잊는 법입니다.
각별한 사연이 있는 선생님의 추억담, 가슴 뭉클하게 잘 보았습니다.
잔디밭에 앉아 박재삼선생님의 담소를 듣던 시간이 생각납니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살아생전의 박재삼선생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늘 그런 면에서는 저희 서지월선생님께서 앞장서 제자들을 이끌어주셨지요..
지나고 나면 그 일만큼 감사한 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