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영 개인전
네잎 클로버의 노래
글 : 서성록(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
[2011. 12. 28 - 2012. 1. 3 갤러리그림손]
[그림손 갤러리]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 64-17 T.02-733-1045~6
홈페이지로 가기 http://www.grimson.co.kr/
김동영이 작품의 모티브로 삼는 것은 네잎 클로버이다. 이곳저곳에 둥지를 튼 크고 작은 클로버들은 질화로같이 따듯한 온기가 남아있는 추억의 이름으로 다가온다. 누구나 경험했을, 어릴 적 산과 들을 헤집고 다녔던 기억들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황창순 시인의 ‘네잎클로버’란 시에는 “어릴 적 잔디밭에 꿈을 찾아 노닐다가 풀꽃반지 한두 번 손가락에 끼워보지 않은 사람 있을까?/ 행운을 상징하는 의미있는 그대는 네 잎의 날개를 달고 기쁨을 선사했네”란 구절이 나온다. 분명 김동영의 회화작품을 볼 때도 시인이 말한 것과 같은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동영의 회화는 자연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연의 재현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같지는 않다. 자연의 재현 자체를 겨냥했다면 사실성에 주의를 기울이고 디테일에 신경을 기울였겠지만 그의 작품은 오히려 네잎 클로버를 암시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이미지는 상징성을 띠면서 여러 색채와 질료와의 어울림속에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작품을 볼때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이미지라기보다는 조형적인 부분, 즉 산뜻하거나 그윽한 색감과 확산적인 공간감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두 요인의 발란스를 맞추어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소재의 감각적인 부분과 그것을 떠받쳐주는 형식이 숙성되어 있고 잘 영글어져 있는 셈이다. 전체가 물흐르듯 자연스럽다. 특히 조형적 내재성을 잘 엿볼 수 있는 부분은 ‘경쾌한 필선’과 ‘담백한 질료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점을 검토해보면, 첫째 그의 화면에서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경쾌한 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운필의 표정을 감지할 수 있는데 순식간에 어떤 형태를 만들어놓은 것에서 액센트를 가한 것, 묵직한 힘이 실려있는 것, 날쌘 제비가 물을 차고 올라가듯 날렵한 것, 낙서하듯 자유롭게 그은 것까지 여러 표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필선은 화면에 운동감을 주면서 그림을 흥겹고 경쾌하게 만든다. 춤추듯 그림에 활력을 넣는 것은 그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구김살없는 필선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 둘째는 여러 재료에 의해 구축되는 ‘담백한 질료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화면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밑칠과 지우기, 그리고 다시 채색과 같은 요인의 반복에 의해 이루어진다. 특히 화면의 정황을 살펴보면 마치 도장처리한 듯 매끈한 면이 있는가 하면 뚝배기처럼 우둘투둘한 면, 솜이불처럼 포근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의 면이 있다. 같은 화면에서 여러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작가는 입자가 굵은 돌가루를 섞고 캔버스를 오려붙이는 등 무엇보다 바탕처리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특히 근래에는 돌가루와 콜라주를 사용하여 잔잔한 조형의 울림을 지닌 깊이감있는 공간을 구축해내고 있다. 왜 그는 화면의 질료감에 주의를 기울일까. 바탕의 질료감이란 논밭과 같아서 비옥한 농지가 되어야만 풍족한 소출(所出)을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논밭이 거칠고 메말라 있다면 만족할만한 소출을 기대할 수 없듯이 그림에 있어서도 비옥한 바탕이 전제될 때에 비로소 소정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찌게의 맛을 내려면 잘 우려낸 육수를 써야하듯이 말이다. 김동영이 질료감은 이런 기본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근작에선 단순화가 눈에 띄는데 공간을 몇 개의 포름으로 나누거나 차분한 색조가 자주 목격된다. 몇몇 작품에선 신라 토기를 연상시키는 기와색조가 그림의 격조를 높여준다.
물감으로 얻은 색조가 아니라 자연이 조성한 것같은 무채색은 세월의 나이테가 켜켜이 새겨있는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산전수전을 다 겪은 뒤에 찾은 어떤 안도감과 평화로움을 연상시킨다. 그 색은 인공의 색이 아니라 신비를 머금고 있는 색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작품의 내적인 부분을 살펴보았으므로 작품의 중핵이 무엇인지 점검해야 차례가 온 것같다. 그의 작품은 네잎 클로버로 가득차 있다. 네잎 클로버가 그토록 많다는 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차원을 넘어 뭔가 뚜렷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과연 작가가 ‘행운’을 상징하는 네잎 클로버에 애착을 기울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네잎 클로버의 꽃말인 행운이란 우리가 예상치 않게 횡재를 하거나 수지를 맡았을 때 찾아온 복을 일컫는다. 가령 전혀 기대하지 않은 기회을 맞았을 때 우리는 행운을 잡았다고 말한다. 작가가 행운을 상징하는 네잎 클로버를 고수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삶을 축복의 연속이라고 여기며, 행운은 바로 자기 자신이며 자신안에 있고, 자신의 삶속에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삶의 통찰은 크리스천으로서의 인생관과 무관하지 않은 것같다. 즉 삶 자체를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예정하신 일이요 선물로 여겨 하나님의 자녀됨과 자신의 존재를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영국의 시인인 토마스 트래험(Thomas Traheme)이 그랬듯이 그도 세상을 “무한한 아름다움을 비추는 거울” “장엄한 사원” “빛과 평화의 영역”으로 받아들이는 것같다. 어찌 인생에 황홀한 무지개빛만 있으랴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세상을 경이로운 눈으로 지켜보며 어떻게 ‘나날의 기적’이 펼쳐지고 있는지에 주목한다. 자신의 일상을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성소요 계시의 장소로 여긴다. ‘네잎 클로버’는 일상속에 편재하고 있으므로 매순간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그의 작품을 보면 영혼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환희에 몸을 내맡긴 것같은 느낌을 받는다. 환희가 작품의 일상음료와 양식이 되게 만들고 있는 것같다. 예술가가 이런 환희를 작품안에 저장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만약 젊음의 활기를 잃고 휘청거리거나 비틀거리는 사람이라면 피클을 만들고 보존하듯이 기쁨의 가락이 자신을 절이고 보존하게 만드는 것이 요구된다. 그 기쁨이 나를 움직이는 연료가 되게 하려면 항구적인 영원의 샘물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지구가 낮에 밝은 것은 태양이 비추고 있음 때문이요 밤에 환한 것은 달이 비추고 있기 때문이듯이 자아가 환희에 휩싸이는 것은 진리의 접목 또는 조명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 필자는 실재와의 만남과 진리의 구속이 이전에 깊고 심오한 세계를 경험했던 신앙인들처럼 김동영의 회화를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다고 믿는다.
김동영 작가노트
1. 이미지 생성-연의 이미지에서 네잎클로버 이미지로
네잎클로버는 돌연변이라고 생물학자는 말한다. 그것은 정상적인 종자가 아니라서 한정된 곳에만 서식하기 때문에 아무 곳에서나 쉽게 발견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네잎클로버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찾고자하는 행운은 삶에서 돌연변이와 같은 것으로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행운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돌연변이 네잎클로버가 행운이든지, 불행이든지를 막론하고 인류가 존재하는 한 찾을 것이다. 그리하여 네잎클로버의 이미지는 인간의 욕망을 대변하는 알레고리로서 기호화된다. 기호화된 이미지는 인간이 찾고자하는 욕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2. 기호로서 탄생 - 천과 종이 사이에서 이미지의 유희
작품의 선과 면의 관계는 서로 공유하는 관계이다. 물론 작품에 표현된 선은 선이고 면은 면으로,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선은 실로써 표현되어 자체의 표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면을 불러들이고, 면은 선으로 하여 서로 연결되어지는 관계에 있다. 가장 기본적인 작업 매체인 캔바스 천은 완벽함, 견고함 그리고 차가움을 내포하고 있다. 그 위에 부드럽고 가변적인 색채, 종이, 실 등을 올려놓는 꼴라주 기법을 적용한다. 종이의 부드러움으로 구겨지기 쉬운 성질은 색채를 스며들게 하고 이미지를 싸안는 느낌으로 편안함을 가져온다. 작품 제작과정에서 캔바스 위에 붓질을 하기도하고, 닥지, 장지나 또는 실을 올려놓고서 붙이고, 두드리고, 문지르기도 한다. 화면이 구축되는 과정 속에서 예측불허의 우연으로 이미지는 구성되고 해체되어 다시 해체되고 구성되는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서 작업과정은 계속 이루어진다. 따라서 작업과정은 그 자체로 형태의 상호작용과 일상적이며, 유희적인 행위의 흔적으로 화면위에 남아있다. 이리하여 네잎클로버 이미지는 작업과정 안에서 인간의 웃고, 울고, 일하고, 놀고, 먹고, 잠자고, 걷고, 앉고 등의 인간의 일상적인 삶을 그리면서 하나의 이미지로서 유희하는 것이다.
3. 이미지의 시각언어 표출 - 자연과의 대화로 생명력의 인식
살아가면서 행운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일반적이고 평범한 인간들이다. 사람들이 찾고자하는 행운은 손에 다을 듯 말 듯 하다가도 닺지 않으니까 닺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찾고 또 찾는 것이다. 인간이 행운을 찾으려는 욕망은 네잎클로버의 이미지로 기호화 되어 알레고리와 상징사이에서 시각언어로 표출된다. 인간이 찾고자 하는 행운은 큰일이나 대단한 일에 있지 않고 아주 작은 일, 사소한 일 속에서 있음을 나타내고자 의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행운은 항상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이 행운은 더 높고 더 고차원적인 곳에 또는 더 고상한곳에 있다는 생각 때문에 찾을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는 것이다. 예술이란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한시대의 삶의 현장 속에서 산출되는 긴장된 자신의 표명이기를 바라며 이러한 작업 속에서 의식의 표정이 무엇인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네잎클로버의노래(A song of Four leaves Clover)-140x140cm-Mixed Media-2011
네잎클로버의노래(A song of Four leaves Clover)-140x140cm-Mixed Media-2011
네잎클로버의노래(A song of Four leaves Clover)-140x140cm-Mixed Media-2011
네잎클로버의노래(A song of Four leaves Clover)-140x140cm-Mixed Media-2011
네잎클로버의노래(A song of Four leaves Clover)-91x91cm-Mixed Media-2011
네잎클로버의노래(A song of Four leaves Clover)-91x91cm-Mixed Media-2011
네잎클로버의노래(A song of Four leaves Clover)-91x91cm-Mixed Media-2011
네잎클로버의노래(A song of Four leaves Clover)-41x63.5cm-Mixed Media-2010
네잎클로버의노래(A song of Four leaves Clover)-41x63.5cm-Mixed Media-20101
네잎클로버의노래(A song of Four leaves Clover)-41x63.5cm-Mixed Media-20102
a song of four leaf clover, mixed media, 72.7x72.7cm,2011
네잎클로버의노래(A song of Four leaves Clover)-24.5x37.5cm-Mixed Media-2009
네잎클로버의노래(A song of Four leaves Clover)-35x54.5cm-Mixed Media-2006
네잎클로버의노래(A song of Four leaves Clover)-35x54.5cm-Mixed Media-20061
네잎클로버의노래(A song of Four leaves Clover)-35x54.5cm-Mixed Media-20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