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사에 대해서
정일남 시인
인간의 자살은 오랫동안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생활여건이 어려운 자들이 자실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 밝혀졌다. 달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자살하기 보다는 부자마을인 강남구에서 고독사하는 게 1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자살자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알기로는 기초생활 수급으로 생활하는 빈곤층 노인들이 자살할 것으로 알지만 이런 통념을 깨는 결과가 나타났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한 해 서울에서 발생한 자살자는 2천 340 여건이라 한다. 의식주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 부유하고 여유가 있는 자의 자살이 많다는 것이다.
서울역 대합실의 노숙자들은 자살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런 사람이 어쩌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다. 법적 형을 받은 게 아니라 삶 자체가 죽음과 자웅동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다만 삶이란 죽음의 집행유예일 뿐. 삶 속에 죽음이 자라다가 어느 시기에 가서 죽음이란 놈이 성장이 정지된 삶을 앞지르게 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뒤처져 버린 목숨은 죽음을 만만하게 볼 동반자가 아니란 것을 깨치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손쓸 사이도 없다. 이미 때가 늦었기 때문이다.
죽음은 미리 누려볼 수 없는 것이고 연습의 기회도 주지 않는 놈이다. 인정사정없는 놈이다. 시인들은 스스로 고독을 선택하고 고독에서 영감을 얻어 창작물을 뽑아낸다. 이런 기능이 시인에겐 있다. 하지만 고독사에 사로잡힌 자들은 대화가 닫힌 공간에서 집행유예의 죽음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출구가 없는 사각의 방에서 이미 앞지른 죽음을 삶이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 생과 사의 갈림길이 순간에 다가온다.
죽음만큼 낯선 괴물도 없을 것이다. 이미 코앞에 당도한 죽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아예 무시해버린다. 고독사에 앞서서 인간은 자신의 병이 가족들에게 부담을 안길 것을 생각해 유예된 죽음을 앞당겨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다. 죽음과의 친애란 인간의 마지막 정감일 것이다. 죽음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고독을 앉혀놓을 것인가. 하지만 이제 고독은 죽음보다 내성이 더 강해졌다. 죽음이여. 언젠가는 찾아올 시기를 맞아들일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리라. 참매미가 죽음을 앞에 두고도 자기의 임무를 다 하고 가려고 더위를 참아내듯이 인간도 끝마무리가 아름다운 노래로 장식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