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지역은 철원제일교회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1919년 3월 10일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또 철원제일교회를 중심으로 '철원애국단'을 조직해 국내 독립운동 상황을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고하였고, 임시정부에서는 그 문서를 반포하는 활동을 비밀리에 전개하였죠. 1920년대 철원 지역에서는 기독교 선교활동뿐만 아니라 애국애족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교회는 더욱 부흥 성장하여 1933년도에는 새신자가 50명이나 늘었고, 주일학교 학생이 300여 명 모였으며 한때 교인 수가 500여 명에 달했습니다. 철원 지역 내 대표적인 교회였으면서도 교회 건물이 작아 예배당 세우는 일을 서두릅니다. 1920년 붉은 벽돌로 세운 건물을 헐고 현무암과 화강암으로 서양식 건물로 신축하였으며 건축설계와 시공은 이화여대 본관 건물을 건축한 미국인 건축가 보리스(W. M. Voris)가 맡았습니다. 연건평 1200평 규모로 웅장한 석조 건물(지하 1층, 지상 3층)로 지은 예배당은 착공 1년여 만인 1937년 9월 30일에 완성됩니다. 1층에는 소예배실과 성경공부방 열 개가 있고 2층은 대예배실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한강 이북, 영서 북부지방에서 건축미를 자랑하는 교회로 손꼽혔다고 합니다.
1939년 강종근 목사가 철원제일교회를 섬겼는데, 강 목사는 주일 설교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출해 냈듯이 한국도 일본의 속박에서 구해낼 모세와 같은 청년이 필요하다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설교를 자주 하였다고 합니다. 강 목사는 설교에서 일본이 벌인 침략 행위를 강하게 비판하며, 민족정신의 혼을 교인과 지역주민에게 불러일으키며 독립정신을 일깨웠습니다. 강종근 목사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고 단정하고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강 목사가 신사참배를 노골적으로 거부하자 일본 조선총독부는 '사상범 예비검속령'으로 강 목사를 잡아다가 고문했습니다. 후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거기서 숨을 거둡니다.
광복 이후 한국전쟁 시에는 기독교 반공청년의 활동장소이면서 인민군의 병영으로도 쓰였다고 합니다.
첫댓글 철원제일감리교회, 6.25전쟁 폭격 전 사진 첫 공개 http://durl.me/b9zyq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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