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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위에 사진은 제가 완성해서 어제 준회원 제작기 게시판에 올렸던 타이거 1 초기 버젼(아래 사진)의 실물입니다. 흑백 사진으로 보면 제 완성작과 비교해서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아래 제 작품에서는 타미야 키트에서 제공하는 데칼 그대로 사용하여 "332" 일련 번호가 흰색 테두리에 붉은 색 솟자이지만 일부 기록에 따르면 흰색 테두리에 "검은 색" 솟자였다고 합니다. 좀 더 욕심을 내고 싶었지만 취미는 어디까지나 취미라서 어느 선에서는 멈춰야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쨌든 제가 우리 카페에서 제작기와 완성작을 올리면서 최소한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제가 완성한 탱크에 대해서 고증을 하고 넘어가자는 의미로 타이거 1 제작기와 완성작 게재 후에 이곳 게시판에서 "고증 리포트"를 올리려고 합니다.
사실 인터넷이라는 현대 문명의 선물 덕분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해서 의외로 매우 세세한 부분까지 고증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프라 모델러들에게 최고의 사랑을 받는 모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타이거 1 탱크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수준이지요.
1939년 나치 독일이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전술로 폴란드를 침공한 이후 러시아의 모스크바 코 앞으로 진격할 때까지 전세계는 독일 기갑부대의 신출귀몰한 기동력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던 그 탱크들은 지금 차분히 바라보면 4호전차가 등장하게 될 때까지 그리 공포를 느낄만한 성능과 화력이 아니었습니다.
(1호 전차 A형)
(3호전차 J형)
이미 그런 사실들은 앞에 제글들에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보고, 하지만1943년 북아프리카 전선과 러시아 전선에서 연이어 투입된 타이거 1 탱크가 등장하면서 이런 평가는 사라지게 됩니다. 연합군이 보유한 미육군 셔먼 탱크나 소련의 T-34 탱크가 뛰어난 성능으로 연합군을 대표하는 우수한 성능의 탱크가 되었지만 타이거 1에 비교한다면 매우 치욕적인 기록을 보여주게 됩니다.
보통 1대의 타이거 1을 무력화 시키기 위해서 3대의 미 셔먼 탱크를 희생해야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만 제가 이번에 만든 503 중전차대대의 기록은 연합군 탱크를 상대로 보통 15:1의 우세를 보이고 있다는 기록을 보면, 즉 1대의 타이거 1이 무려 15대의 연합군 탱크들을 파괴히였다는 가공할 위력을 보여줍니다.
(미육군 M4 셔먼 탱크는 당시에 이미 세계에서 최고의 자동차 메이커로 앞서 나가던 제너럴 모터스社의
야심작이었습니다. 실제 북아프리카에 처음 투입되어 그 뛰어난 성능은 나치 독일에게 매우 위협적이었고
당시 주축군의 주력 전차들이었던 3호전차, 4호전차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타이거 1의
등장 후에 셔먼 탱크는 숫적인 우세를 앞세우지 않는 한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타이거 1의 기록 뿐만 아니라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의 에이스들의 기록을 보더라도 연합군의 탱크 에이스들이나 격추왕들에 비교하면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기록들을 갖고 있는데 솔직히 독일의 타이거 1이나 판더 탱크, 그리고 독일 공군의 메서슈미트와 같은 전투기의 성능이 객관적으로 연합군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입니다.
(대전 초기에 전투기로써 속력과 화력 모두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걸작 메서슈미트는. 연합군
조종사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엄청난 격추 기록을 보유한 에이스들을 다수 쏟아낸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미 공군 P-51 무스탕 전투기의 등장은 그 이전 영국 대항공전에서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에게 패배한
메서슈미트 전투기의 몰락을 가속화한 강력한 상대였습니다. 2차대전 기간 동안 최고의 활약을 한 전투기는
메서슈미트였지만 최고의 성능을 가진 정상은 무스탕의 차지였습니다.)
공군의 경우 영국의 스핏파이어나 미국의 무스탕 전투기의 등장으로 성능적인 열세는 그 격차가 줄어들고 전쟁 말기에 가서는 열세의 위치까지 떨어지게 되지만 기갑 전력에 있어서는 전쟁 말기까지 타이거 1에 대적할 수 있는 연합군의 탱크들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평가일 것입니다.
당장 주포의 사거리와 파괴력만 보더라도 타이거 1은 당대의 탱크들 중에서 "무적"이었습니다.
아래 표를 보시면 우선 전쟁 기간 내내 영국의 주력 전차였던 크롬웰 탱크와 비교하면 무려 2.5km 거리에서 타이거가 발사한 포탄이 크롬웰의 철갑을 관통하는데 반해서 크롬웰은 타이거 코 앞에서 발사해도 철갑을 뚫을 수 없다는 공식적인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M4A2 셔먼 탱크의 경우 1.8km 거리에서 타이거의 포격에 관통되므로 크롬웰보다 조금 나은 편이지만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크롬웰과 마찬가지로 타이거 코 앞에서 발사해도 철갑을 뚫지 못하였습니다.
영국제 17-pdr 대전차 대포로 화력을 보강한 셔먼 파이어플라이 탱크의 경우, 1.8km 거리에서 타이거의 주포 공격에 관통되는 것은 다른 셔먼 탱크와 같지만 공격시 1.75km 거리에서 타이거의 철갑을 관통할 수 있는 화력을 갖게 되면서 비로서 뭔가 전투가 되는 상대가 됩니다만 실전에서는 파이어플라이 역시 타이거에게 대등한 상대가 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특기할 만한 기록은 소련 T-34의 경우 화력은 M4A4의 76mm 주포의 화력에도 떨어지는 수준이었지만 장갑 능력만은 다른 연합군 탱크들에 비해서 그나마 가장 뛰어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타이거 1의 뛰어난 성능을 궂이 기술적인 복잡한 설명으로 나열하지 않더라도 위에 그림 한장 만으로 얼마나 말이 안되는 위력이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타이거 1과 같은 불사신과 같은 명작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다른 연합국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일단 타이거 1 탱크를 개발하기 전까지 나치 독일의 탱크에 대한 기대는 화력보다 기동력이었고, 그것은 영국이나 소련과 같이 대전 초기 독일을 상대했던 초기 탱크들 역시 이런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개발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41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독일의 소련 침공 초기에 만난 장난감 같은 소련 탱크들을 쉽사리 파괴하며 진격해들어가던 독일의 2호,3호,4호 전차들은 그들 앞에 나타난 두가지 적의 탱크들을 보고 최초로 끔찍한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그 장본인들은 바로 2차대전 최고의 탱크로 타이거 1의 뒤를 바짝 쫓았던 걸작 T-34 탱크와 비록 기동력은 보잘 것 없는 거북이였지만 거대한 체구와 장갑 능력으로 위압적이었던 KV-1 탱크였습니다.
(KV-1,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독일의 수뇌부들은 이 탱크가 실제로 지나치게 높은 포탑과 단순한 평면 표면이
실제 적의 공격에서 얼마나 취약한가를 깨닳기 전에 그 엄청난 거구에 위압되었고, 자신들이 보유한 소형 탱크들
이 무력하게 보이게 되면서 중전차 규모의 신형 탱크 개발을 서두르게 됩니다. 이렇게 타이거 1의 개발은 그 이전
독일 탱크들의 개발 사상과 전혀 다른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하지만 당시의 기술력으로 두마리 토끼, 즉, T-34의 기동력과 KV-1의 장갑 능력 두가지를 다 만족시킨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요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유능한 개발팀은 어느 정도 두마리 토끼를 잡는 쾌거를 올렸고, 그 덕분에 타이거 1은 2차대전 기간 중에 무적의 위력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만 반대 급부로 타이거 1은 지나치게 무거운 체중과 높은 생산 비용, 결국 현저하게 낮은 생산성으로 그 이전의 독일 탱크들처럼 신속하게 충분한 숫자가 전선으로 투입될 수 없었습니다.
중전차대대의 조직
충분한 숫자가 생산될 수 없는 탓에 대부분의 지역들은 3호,4호 전차 및 소위 돌격 탱크라고 불리는 소형 보병 지원용 탱크들 중심으로 공격이 이루어지되 화끈하게 한번 뚫어줘야 할 포인트에 타이거 1으로만 조직된 소위 "중전차대대"(Heavy Panzer Battalion)이 조직되게 됩니다. (제가 제작기에서 "503 중전차중대"라고 표기하였는데 타미야 키트 사용설명서에 표기된 대로 그냥 옮기다보니 발생한 제 실수였습니다. "Battalion"이 "대대"라는 의미이므로 "중전차대대"로 부름이 맞습니다.)
막상 타이거 1 탱크라는 무적의 강력한 탱크를 보유하게 된 나치 독일은 애초에는 군단급 이상의 부대에 직속된 예비부대로 방어선에 구멍이 생기면 투입되어 그 구멍을 메꾸는 역활을 하기 위해 중전차중대를 조직하였습니다. 초기에 대대 전체 탱크를 타이거 1으로만 조직하는 것이 낮은 생산성으로 어려웠던 탓에 3호 전차와 혼합하여 편성했습니다. 하지만 후에 타이거 1의 생산량이 늘어나고 전선에 투입되는 수량도 늘게 되자 3호 전차들은 모두 빼고 순수하게 타이거 1으로만 편성하게 됩니다.
나치 독일 육군이라 할 수 있는 국방군 소속으로 13개 대대가 조직되었고, 무장친위대(SS) 소속으로 2개 대대가 조직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조직된 독일 육군 소속 501 중전차대대는 북아프리카 튀니지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제가 완성한 타이거 1의 소속 부대인 503 중전차중대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나치 독일 중전차대대 파크. 상단 좌측에서 세번째 호랑이 얼굴의 마크가 503 중전차대대 마크입니다.)
(1944년 전쟁 말기 503 중전차중대의 조직. 무려 11대의 킹 타이거와 24대의 타이거 1 탱크들로 구성되었고
맨 밑에 332호 전차도 보입니다. 표준 편제는 14대씩 1개 중대를 편성하여, 모두 3개중대와 나머지
3대는 대대 지휘부 전차로 총 45대로 구성되었습니다만 실제로 잦은 고장으로 전투 가능 전차는 편제
보다 항상 적었습니다.)
동부 전선에서 스탈린 그라드 전투가 독일의 처참한 패배로 끝나가던 1943년 1월에 투입된 503 중전차대대는 첫 전투에서 소련 탱크를 18대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이어서 독일측 작전명 "성채작전"(쿠르스크 전투)에서 비록 독일은 패배를 했지만 503 대대는 혁혁한 전과를 기록하게 되는데 총 45대의 타이거 중에서 42대가 전투 가능하여 7월 초에 투입된 결과 첫 3일간 3대의 타이거를 잃고, 그후 성채 작전이 취소될 때까지 한달 동안 총누계 8대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소련군 탱크를 무려 385대 파괴하고, 265대의 대전차 자주포를 파괴하였습니다. (믿을 수 없는 기록이지만 그만큼 타이거 1의 성능이 압도적인 우세였고, 기갑병들이 뛰어났다는 반증일 수 있습니다.)
제 작품은 타미야 키트 설명서에 따르면 1943년 1월 최초로 동부 전선에 투입되어 그해 여름 엄청난 전과를 올린 후에 그해 10월의 모습이라고 써있습니다. 332호 전차는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증거는 인터넷에 전쟁 관련 사이트를 참고하면 바로 10월 당시에 진흙탕에 빠진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가상 훈련을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 흑백 사진이라서 기록에서 주장하는 "332" 일련 번호 도색이 위에서 언급했듯이 실제 타미야 키트에서 제공하는 데칼과 다른지 확인은 어렵지만 포탑 후면에 일련 번호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 배치된 십자 마크들과 측면에 마크 위치등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고증 포인트)
결론적으로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 탱크들과 무지막지한 혈전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투 후에 보수를 했는지 몰라도 양쪽 스커트 자락(이렇게 밖에 표현을 못하겠네요.)이 말짱하게 남아있고, 표면 색깔이 저먼 그레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명도가 좀 밝아 보입니다만 일단 타미야 측 도색 기준에 근거하여 작품 완성했습니다. 실제 공장에서 출고된지 1년이 갓넘었을 타이거 1이 아무리 러시아 기후가 가혹하다고 해도 제가 완성한 상태만큼 녹이 심하게 슬었을까? 하지만 어차피 무대 위에 배우는 약간 과하게 화장을 한다는 의미로 좀 과한 녹 표현을 써봤습니다.
(제가 만든 작품의 실물이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 프라모델러의 흥미로운 경험 아닐까요?)
글을 마치기 전에 503 중전차대대에서 2차대전 최고의 연합군 전차 파괴 기록을 가진 에이스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될 것 같네요.
(나치 독일 최고의 탱크 에이스 쿠르트 크니스펠 상사, 그는
규정보다 긴 머리,복장에 신경 쓰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격,
소련군 포로들을 부당하게 대우하고, 학대하던 그의 상관에 대한
반감으로 뛰어난 전공에도 불구하고 다른 탱크 에이스들보다
진급이나 훈장 수여에 있어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그는 전쟁 기간 중에 무려 168대의 적 전차를 파괴한 독일 최고의 탱크 에이스 쿠르트 크니스펠 상사입니다. 실제 그는 미확인된 파괴 댓수까지 합치면 195대까지 솟자가 올라갈 수 있다고 하는데 어쨌든 공식 기록 168대만으로도 엄청난 기록입니다. 1942년 바바로사 작전에서 최초로 3호전차를 타고 참전한 이래 타이거 1 으로 옮겨 타고 503 중전차대대에서 주로 활약하였으나 1944년 4월 패색이 짙어가던 전쟁 말기에 오스트리아 지역에서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사망하였습니다.
전설과 같이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그가 탄 타이거 1 탱크가 무려 3km 떨어진 소련 T-34를 포격하여 파괴했다고 합니다. 위에 유효 사거리 비교표를 보면 말이 안되는 이야기지만 어쨌든 2차대전 기간 중에 연합군과 주축군 통 털어 가장 뛰어난 탱크 에이스였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참고로 첨단 M1 에이브럼스 탱크의 주포 유효 사거리가 최대 3.5km입니다. 그것만 봐도 3km 거리에서 T-34를 파괴한 기록은 대단한 결과입니다.)
첫댓글 1943년부터 저먼그레이가 다크옐로우로 전환되는 시기인지라 이넘도 위 사진만으로는 저먼그레이이 인지 다크옐로우인지 햇갈리네요.일단 332숫자 안은 철십자 마크의 흑색의 톤과 비교했을때 상대적으로 많이 밝아서 붉은색은 맞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 332호의 고증에 시달렸던것이.. 저 332호가 저먼그레이인 상태로 동계위장이 된 적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 해 보려고 시간낭비 좀 했었네요. 결론은 못 찾겠다였습니다.가끔은 대전물을 만드는지 sf물을 만드는지 아리송할 때가 많습니다 ...
해외 프라 모델러들은 이런 고증에 더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만드는 작품의 배경과 도색/마크 등에 대해서 철저하게 확인하고, 심지어 forum 사이트에서 서로 정보를 교환해가면서 고증의 정확도를 높히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어느 국내 모델러 작품에서 독일 육군 소속 타이거 1 위에 검은 무장친위대 복장을 폼나게 입은 기갑 장교가 턱하니 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리 작품이 뛰어나도 기본적인 고증이 틀리다면 그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100% 일치하긴 힘들어도 최소한 내가 만드는 모델이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알려는 노력이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항상 꼼꼼히 읽어보게 되네요. 앞으로도 잘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